"난 조금도 부끄럽지 않다. 넌 이해할 수 없겠지만, 이렇게 널 만나니까 부끄러운 짓을 하지 않았다는 게 더할 나위 없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구나. 난 내 몫을 했을 뿐이다. 힘들었어도 후회는전혀 없다. 살아 있는 우리는, 너와 나 그리고 모두 다. 서로 부끄럽고 그러면서도 한없이 소중한 존재들이야. 스스로 나서지 않으면 그 누구도 우리를 돌아보지 않아.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을 직시하고 행동하지 않으면 이 삶을 지탱할 수 없어. 알겠니? 형은, 영혼조차도 비명을 지르는 시대에 살았다. 강용우 씨를 생각해봐. 비명이너무 끔찍하지 않니?"
한 마디 한 마디를 힘주어 말하던 형이 문득 말을 그쳤다. 복받치는 감정을 참느라고 형의 얼굴이 조금 일그러졌다. 우리는 묵묵히 각자의 감정을 다스렸다. 하지만 벽시계는 계속 초침을 밀어 올리고 있다. 이제 시간이 없다. 형에게 어떤 말이든 해주고 싶어 난 애가 탔다. 나는 자꾸 입술만 달싹거렸다. 이윽고, 형이 가라앉은 음성으로 다시 말을 이었다.
"난 네가 올 줄 알았어. 아니? 내가 널 참 좋아했다는 것을 내가무엇을 하건, 어떤 일을 하든, 내 속엔 늘 네가 있었지.
나는 마침내 말문이 트일 모양이었다. 내 입술의 긴장이 풀어지고 있었다. 무슨 말이든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나는 떨리는목소리로 ‘나의 말‘을 시작했다. "형. 난......." 그때 자지러지게 벨이 울렸다. 면회 종료를 알리는 벨 소리에 내말은 그대로 묻혀버리고 말았다. 그래도 난 계속해서 말하고자 했다. 이대로 끝낼 수는 없었다. "형이 없어서 얼마나 외로웠는지 알아? 난," - P-1
"난 조금도 부끄럽지 않다. 넌 이해할 수 없겠지만, 이렇게 널 만나니까 부끄러운 짓을 하지 않았다는 게 더할 나위 없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구나. 난 내 몫을 했을 뿐이다. 힘들었어도 후회는전혀 없다. 살아 있는 우리는 너와 나 그리고 모두 다. 서로 부끄럽고 그러면서도 한없이 소중한 존재들이야. 스스로 나서지 않으면그 누구도 우리를 돌아보지 않아.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을 직시하고 행동하지 않으면 이 삶을 지탱할 수 없어. 알겠니? 형은, 영혼조차도 비명을 지르는 시대에 살았다. 강용우 씨를 생각해봐. 비명이 너무 끔찍하지 않니?" 한 마디 한 마디를 힘주어 말하던 형이 문득 말을 그쳤다.
복받치는 감정을 참느라고 형의 얼굴이 조금 일그러졌다. 우리는 묵묵히 각자의 감정을 다스렸다.
하지만 벽시계는 계속 초침을 밀어 올리고 있다. 이제 시간이 없다. 형에게 어떤 말이든 해주고 싶어 난 애가 탔다. 나는 자꾸 입술만 달싹거렸다. 이윽고, 형이 가라앉은 음성으로 다시 말을 이었다. "난 네가 올 줄 알았어. 아니? 내가 널 참 좋아했다는 것을. 내가무엇을 하건, 어떤 일을 하든, 내 속엔 늘 네가 있었지... 나는 마침내 말문이 트일 모양이었다. 내 입술의 긴장이 풀어지고 있었다. 무슨 말이든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나는 떨리는목소리로 ‘나의 말을 시작했다. "형, 난......." 그때 자지러지게 벨이 울렸다. 면회 종료를 알리는 벨 소리에 내말은 그대로 묻혀버리고 말았다. 그래도 난 계속해서 말하고자 했다. 이대로 끝낼 수는 없었다. "형이 없어서 얼마나 외로웠는지 알아? 난," - P-1
이럴 땐 어떤 이야기를 해도 어울리지 않고 어색해지기에 십상이다. 나는 눈을 찡그리며 부신 해를 올려다보았다. 둥근 태양은 붉은 보석 같았다. 삭풍 몰아치는 음산한 겨울에도 하늘엔 보석 같은 해가 있다는 게 새삼 신기했다. 우리는 큰길이 보이는 곳에서 작별의 인사를 나누었다. 그는 끝내 나에 대해서, 아니 내 앞에 가로놓인 미래에 대해서 한 마디도 묻지 않았다. 그렇게 해준 그가 몹시 고마웠다. 헤어지면서 그는 또내 머리통을 주물렀다.
간판들이 숲을 이룬 거리로 사라져가는 아저씨의 넓은 등을 나는 한참 동안 지켜보았다. 그리고 나도 돌아섰다. 생각 없이 골목 안으로 몇 발짝 걸음을 옮기다 말고 나는 우뚝 서버렸다. 방들이 서로의 맨몸을 부비며 칭얼거리고 있을 나성여관은 이제 내가 돌아갈 곳이 아니었다. 나는 망연해져서 낯익은 주변 형상 하나하나에 스며 있는 시간의 부스러기들을 보았다. 그 멈춘 시간 속에서 나는 공기조차 떨지 않는 고요를 보았다. 그러나 그 고요를 이루 말할 수 없이 평온했던 순간의 고요를, 휘몰아쳐 내달려온 바람이 일시에 헝클어버렸다. 다시 되돌아 나오다 나는 바로 옆에서, 제대로 풀칠이 되지 않아 깃발처럼 나부끼는 전봇대의 광고지 한 장을 발견했다. 그것은 누더기같이 덕지덕지 붙은 다른 광고지에 비해 최근의 것인 듯 가장 깨끗하게 보였다. 나는 가까이 다가갔다.
생산직 남녀사원 00명 모집. 초보자 환영. 깃발같이 펄럭였던 그것은 구인광고였고, 내가 읽은 것은 그 두 문장과 전화번호였다. - P-1
는 인간이다. 그것을 비속함 또는 무지스러움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지만, 이 작은 열려짐 속에는 허위나 허세가 개입되어 있지 않다. 우연이는 그 마음속의 단순성과 직접성의 회로를 통해 형이 저지른 파국을 받아낸다. 우연이는 상황을 정리하거나 취사선택하지 않고 해석하지 않는다. 우연이는 그 파국에 자신의 마음을 밀착시키고, 단순하게 그러나 종합적으로 그 파국을 받아낸다. 나는 어쩌면 형을 둘러싸고 있는 장벽 안으로 뛰어든 것인지도 모른다. 모르겠다. 정말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울며 속삭였다. 형을 사랑한다고. (533쪽)
한복을 입고 있어서일까. 형은 마치 아버지의 젊었을 적 모습이 저러했겠다 싶은 분위기였다. 형에게서 아버지를 읽어내는 것은 처음이었다. 나는 형을 좀 더 가깝게 보고 싶어서 자꾸 쇠창살에 얼굴을 박았다. (538쪽)
지금도 그랬다. 넉넉한 회색 한복으로도 감출 수 없는 형의 마른 마른 몸피는 도저히 칼을 든 자의 형상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칼을맛은 자의 초췌함. 그러면서도 너그러운 표정 쪽에 더 가깝게 닿아 있다. (540쪽)
인용된 세 토막의 문단들은 범행을 저지른 형의 존재가 우연이의 마음속에 자리 잡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단순하고 민첩한 마음은 구속된 형의 모습에서 젊었을 적 아버지의 모습을 읽는다. - P-1
아버지! 우연이네 아버지는 얼마나 한심하고 무능력한 쓰레기 같은 인간이었던가. 그 아버지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우연이는 아버지의 아름답고 북받치는 청춘에 가서 닿는다. 그리고 우연이의 마음은 칼을 휘두른 형의 살의(殺意)의 밑바닥에 고인 부드러움과 교감하고, 형의 운명 속에 교직된 사랑과 증오, 가해와 피해. 찌르기와 찔리우기가 결국은 다른 것이 아니며 한 덩어리라는 그 난해한 복합구조물을 아주 선명하게 그리고 삽시간에 파악한다. 우연이의 마음은 그 복합구조물을 분리시키지 않고, 있는 그대로 긍정해버리고, 그것을 마음의 무늬 위에 짜놓는다. 형을 면회하고돌아오는 길에 우연이는 눈 속에서 보라와 입 맞춘다. 여자아이가 달려들어서 입술을 포개는 이 입맞춤은 순결과 평화 속에서 포개지는 고전적인 입맞춤이고 세상의 고통과 세상의 뒤엉킨 복합구조에대한 이해와 긍정 위에서 이루어지는 성년의식과도 같은 입맞춤이다. 이 입맞춤은 지독히도 감각적인 입맞춤이지만, 곧 감각이 얼얼해지는 입맞춤이다. 아이들인지 어른인지 아직은 구별되지 않지만, 아이의 말투와 아이의 민첩함이 아직도 남아 있는 이 어린 인간들이 고전적인 입을 맞출 수 있다. 그 입맞춤은 키를 자라게 하는 입맞춤이라고 할 만하다. 소설 전편에 번져 있는 우연이와 보라 사이의 관계의 경박성(이것이 그들 세대의 한 가엾은 불행일 것이다)은 이입맞춤에 의하여 비로소 극복된다. 그래서 좀 더 키가 커진 우연이는 나성여관이 헐리기 전날, 타락한 누나의 귀가를 기다리며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된다.
누나는 꼭 올 것이다. 나는 그것을 믿었다. 다른 사람은 모른다. 누 - P-1
나와 형, 그리고 내가 나성여관에 품고 있는 사랑을. 그것은 때로 누추했고 더러는 끔찍했으나 그보다 더 많이 오밀조밀했고 아늑했었다. 우리들의 사랑 속에 담긴 분노와 증오와 슬픔 없이 어찌 이처럼 질긴 애정의 끈을 묶어낼 수 있었으리. (571쪽)
소설의 말미에서, 그 우연이가 한 시대의 밤을 송별하고 있다. 밤은 형이나 찌르레기 아저씨의 칼에 맞아 사라지지는 않는다. 밤의 고통과 증오와 시달림을 받아내고 거기에 삼투하고 거기에 대하여 정직한 여러 마음이 모여 만든 삶들에 의하여 우리들의 기나긴 밤은 비로소 송별될 수 있을 것이다. 밤은 맨입으로 사라지지 않는다. 이 소설이 보여주는 것처럼, 밤은 인간의 마음과 삶 속으로만 사라진다. ‘생산직 남녀사원 00명 모집. 초보자 환영‘우연이가 바라보는 찢어진 구인광고 너머로 우리는 찌르레기 아저씨의 무너진 ‘집‘과 우연이네 형의 파괴된 ‘마을‘ 이 다시 돋아나고 아물어가는 희망의 가녀린 그리고 끈질긴 싹들을 본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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