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에서의 젊은 시절을 노래 부르듯 외고 다녔던 노인의 짓무른 눈자위와 냄새나는 목도리가 떠올랐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노인이 쏟아놓은 말들이 일시에 내 기억창고 밖으로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아까는 너무 막막해서 호흡이 답답할 지경이었는데 이제는머릿속을 기어 다니는 노인에 관한 숱한 기억들로 숨쉬기가 불편할정도였다.
나는, 아무리 숨기려 해도, 노인의 엄살 심한 탄식과 현실의 비참함에 늘 진저리를 쳤었다. 털어놓는 사연들도 부질없는 욕망과 작위적인 드라마가 범벅이라고 느꼈을 뿐이었다. 남과 북의 이쪽저쪽 땅에 떨구어 놓은 노인의 삶은 어느 쪽이든 다 갇힌 운명 같아서 내가 도와줄 만한 것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것이 나로 하여금 노인의 비탄에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서게 했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부끄럽다고는 말하지 않겠다. 부끄러움 따위는 문제도 아니다. 정말이다. 아, 진정 난 모르겠다. 나는 어떤 의미에도 접근하지 못했다. 형의 체포, 노인의 죽음을 받아들이며 내가 홀로 탄식한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나는 진심으로 무엇이든 하고자 했으나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난 천둥과 번개 속에 끼어 있던 약간 푸른 하늘인 것으로 끝이었다.
그러나 노인은 갇힌 운명으로만 살지 않았다. 그래서 아주 비싼 대가를 치렀다.
나는 아주 짧게 노인의 죽음을 설명할 것이다. 정말그러고 싶다. 물론 아버지가 갈말읍에 전화로 확인한 사실에만 의존해야 하는 탓도 있지만, 그보다는 내가 노인의 죽음에 대해 너무나 아는 것이 없다는 데 진짜 이유가 있다. - P-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