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조사업의 목적, 의의를 명확히 한다공명정대하고 대의명분이 있는 높은 목적을 세운다
제2조구체적인 목표를 세운다-세운 목표는 항상 사원들과 공유한다
제3조강렬한 열망을 가슴에 품는다--잠재의식에 투영될 정도로 강하고 지속적인 열망을 갖는다
제4조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노력을 한다-사소한 일도 한 걸음 한 걸음 충실하게 끊임없이 노력한다
제5조매출을 최대한 늘리고 비용은 최소한으로 억제한다들어오는 것을 늘리고, 나가는 것을 억제한다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익이 자연스럽게 따라오게 한다
제6조가격 결정이 곧 경영이다--가격 결정은 경영자의 일,
고객도 기쁘고 자신도 수익을 내는 포인트를 찾으라

제7조 경영은 강한 의지에 좌우된다-경영에는 바위조차도 뚫을 강한 의지가 필요하다

제8조 불타는 투혼으로 승부한다-경영에는 어떤 격투기에도 뒤지지 않는 격렬한 투쟁심이 필요하다.

제9조 용기를 가지고 일에 임한다•비겁한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

제10조 항상 창조적으로 일한다
-오늘보다는 내일, 내일보다는 모레를 위해,
끊임없이 개선하고 개량한다 
창의성을 발휘한다.

제11조 배려의 마음으로 성실하게 모두를 대한다
-장사에는 상대가 있다.
상대방을 포함해 모두를 행복하고 기쁘게 한다.

제12조 항상 밝고 긍정적인 생각과 자세를 갖는다-꿈과 희망을 갖고 솔직한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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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가에는 1년 내내 사과가 떨어지는 법이 없다. 본가의 냉장고에 언제나 사과가 존재하는 이유는 아버지 때문이다. 아버지는 사과를 정말 유난할 정도로 사랑하시는데, 아버지의 사과 사랑은 아버지가 지닌 성실함을 잘 보여주는 증거다. 매사에 쉽게 싫증내고 게으름을 피우는 나와 달리, 아버지는 무엇이든 시작하면 중간에 그만두는 법이 별로 없고, 정해진 일들을매일같이 규칙적으로 하는 습관이 몸에 밴 분이다. 매일사과 한 알을 먹으면 의사가 망한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아버지가 들으신 것이 언제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아버지는 내 기억의 시작점에서부터 지금까지 단하루도 빠짐없이 아침에 사과 한 알을 드시고 하루를 시작하셨는데, 그 때문이겠지만 나와 여동생에게 사과란지긋지긋한 과일이 되어버렸다. 언제나 손만 뻗으면 닿는 가까운 곳에 있어 특별하지도, 간절하지도 않은 과일.
가장 가까이 있지만 또 그래서 멀어지게 되는 가족처럼말이다.
가족이란 대체 뭘까? 잘 아는 것 같지만 사실은 영영이해할 수 없고, 서로를 가장 견딜 수 없게 만들면서도 동시에 가장 친밀한 공동체인 가족 가족이 무엇인지에 대

내가 어렴풋이나마 알게 된 것은 줌파 라히리의 소설들 덕분이다. 그중에서도 하나를 꼽자면 그녀의 두 번째소설집인 『그저 좋은 사람』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줌파라히리의 소설들은 대부분 그녀처럼 미국으로 이민 온인도인의 삶을 다룬다. 그저 좋은 사람』에 실린 소설 속주인공들도 모두 인도계 미국인이다. 그리고 이 인물들은 종종 가족들 간의 문제를 안고 있다. 표제작인 「그저좋은 사람」의 주인공 수드하는 동생에 대해 잘 알고 있고그에게 일어나는 문제들을 해결해줄 수 있을 거라고 믿지만, 사실은 동생이 어째서 알코올중독자가 되어버렸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소설집 맨 앞에 실린 「길들지 않은땅」의 주인공인 루마는 어머니가 죽은 이후 홀로 남은 아버지가 자신과 같이 살기를 원할 거라고 생각하지만, 결국 아버지는 새로운 사랑과 삶을 꿈꾸고 있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줌파 라히리 소설의 경우 주인공들이 모두 이민자이기 때문에 1세대와 2세대 간의 갈등이 더욱 두드러지긴 하지만, 그들이 겪는 문제들은 사실 모든 가족이 겪는일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 인물들이 느끼는 고독에 공감하며 소설을 읽어나가다 보면 우리가 겪는 일상 속의

가장 가까워 보이는 관계 속에서조차 존재하는사람과 사람 사이의 몰이해 때문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결국 가족이란 이 같은 진실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인간관계의 축소판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소설 속의 인물들이 상처를 주고받고 후회를 거듭하는데도 책을 덮고 나면 마음이 마냥 어둡지만은 않다. 
그것은 가족이기 때문에 무조건 이해하고 있고, 이해할 수 있다는 환상에서 벗어날 때 비로소 사랑에 한 걸음 더 다가갈수 있음을, 주인공들의 실패를 통해서 배울 수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엄마가 또 다른 딸인 린다를 더 편애하며 진정한 딸로 여기고 셜리를 골칫덩어리로만 생각하는 걸 엿볼 수 있는 대목들. 하지만 이제 내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이런 대목들이다. 어쩌면 셜리가 우연히라도만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자신이 자주 찾는 공원에 왔을지도 모른다며 엄마가 조심스럽게 추측하는 대목같은 것 말이다. 그러니까, 엄마와 딸이 주저하면서도 서로 이해하려고 애쓰는 마음을 보여주는 문장들.
어렸을 때는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이 당연한일이라 생각한 적도 있다. 하지만 이제는 세상에 당연한것은 없다는 걸 안다. 어떤 관계가 잘 유지된다면 그것은각자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어느 주말, 직장에 다니느라 피곤했을 엄마가 믹스를 사다가 만들어주던 도넛처럼 달콤하고 아련한 기억들이 떠올랐다. 어떤 기억들은 겨우내 잠들었다 계절이 돌아오면 움트는 장미 꽃봉오리를 닮아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피었다 지기를 되풀이한다. 그때로부터 나는 얼마나 멀리 와 있는 걸까?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청신한 바람을 타고 자꾸만 날아오는 꽃향기 속을 걸으며아득한 거리를 가늠했다.

하지만 오랜 시간이 흘러 『좁은 문을 다시 읽었을때 내게 인상적이었던 것은 알리사의 신앙심보다는 소설도처에서 언급되는 불안이었다. 두 주인공이 불안에 떠는 이유는 사랑하는 상대의 마음을 읽을 수 없기 때문이다. 자신의 사랑을 받아달라고 상대에게 강요하는 제롬이나 문제를 회피하기만 하는 알리사는 서로 다른 사람들처럼 보이지만, 그들은 상대의 의중을 알 수 없다는 공포를 견디지 못하고 자신들이 옳다고 믿는 방식으로만사랑을 완성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같은 인물들이다. 그리고 그들의 사랑은 결국 비극적인 방식으로 끝난다.
사랑에 대해서 말할 때 우리는 열정이나 도취를 쉽게 떠올리지만 진정한 사랑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청춘이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가능한 게 아닐까 가만히생각해본다. 넘치는 건 젊음뿐, 상대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헤아릴 여유는 조금도 갖지 못해 서로를 오독하는시기를 지나야 우리는 사랑에 대해 제대로 이야기해볼수 있는지도 모른다고도. 공고한 ‘나‘의 성을 허물고 타인에게 자리를 내어줄 때, 마침내 사랑은 그 눈부신 폐허에서 시작할 테니까.

사랑이란 뜻의 한자[]를 중국인 관광객에게 배운다. 그러고 난 후 어머니의 편지 위에 사랑이란 한자를 무수히 덧쓰는 잭.

흔히들 사랑은 표현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종이 동물원」을 읽으며 어쩌면 켄 리우는 표현하는 행위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니까, 우리가 사랑에 가닿을수 있다면 그것은 알맞은 때에, 상대방이 알아들을 수있는 방식의 표현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임을 보여주고있는 거라고. 이토록이나 슬프고도 아름다운 방식으로말이다.

그렇게 생존을 위해 분투하는 일상으로부터 멀어지고 싶어질 때, 갓 구운 호밀빵 샌드위치를 싸들고 숲으로 소풍을 가는 기분을 내기 위해 꺼내보는 책이 있다. 나무수업이 바로 그것이다.
『나무수업』을 지은 사람은 독일인 산림 전문가 페터볼레벤이다. 평생 숲속에서 나무들과 함께 살아온 저자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생명이 얼마나 신비로운지 번번이 놀라곤 한다. 너도밤나무들이 서로 우정을 나눌 줄 알뿐만 아니라 심지어 허약한 구성원에게는 영양분도 분배해주는 존재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얼마나 있을까? 같은 숲에 심어진 너도밤나무라도 뿌리를 내린 곳의 일조량이나 토양의 비옥한 정도는 저마다 다를 것이다. 환경이 다르다면 그에 따라 성장 속도나 목질, 그리고 나무가만들어내는 당분의 양이 달라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일 같다.
하지만 『나무수업에 따르면 너도밤나무들의 경우,

그들이 생산하는 당의 양은 거의 비슷하다. 같은 숲의 너도밤나무들끼리 뿌리를 통해 영양소를 공유하기 때문이다. 나무들은 서로가 비슷하게 성장할 수 있도록, 많이 가진 나무가 허약한 나무에 양분을 공급해준다. 

허약한 구성원을 내버려두지 않는 것이 결국 모두에게 이롭다는삶의 지혜를 너도밤나무는 알고 있는 것이다. 만일 경쟁에 뒤처진 너도밤나무가 죽어버린다면 숲에는 빈자리가 생겨버릴 것이고, 숲의 기후나 일조량, 습도는 엉망이 되어버릴 거라는 진실 말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더 크고 우람한 너도밤나무를 키우기 위해 볼품없는 나무들을 베어버리고 간격을 벌려준다고 한다. 그렇게 인간이 ‘경쟁자‘
를 제거해준 숲에 홀로 남은 너도밤나무가 다른 나무들보다 건강하고 더욱 잘 자라는 듯 보이지만 결국 오래 살아남지 못하는 줄도 모르고 말이다.
좋은 책의 기준은 저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읽고 난후 세상을 보는 시선을 바꿔주는 책들을 좋아하는 편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무수업』은 나에게 좋은 책이다. 이책을 읽은 이후 두 번 다시 나무를 그 전과 같은 눈으로볼 수 없게 되었으니까 말이다. 길을 걷다가 만나는 가로수, 창밖에서 바람에 흔들리는 뒷산의 나무를 보면 그들

내가 좋아하는 그림책 중에는 ‘난민이 뭐예요?』라는작품이 있다. 이 책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후안, 로사, 페드로 등 서로 사촌인 아이들은 어느 날 할머니의 집에 모여 즐겁게 대화를 나눈다. 그러던 중 길에서 본 난민들이자연스럽게 화제에 오르고 아이들은 ‘난민‘이 누구인지,
그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스스로 깨우쳐간다. 비교적 간결한 이 이야기에는 작은 반전이 숨어 있다. 아이들은 몰랐지만 할머니 역시 난민 출신이었던 것이다. 아이들은 할머니가 준비해준 스페인식 바게트 샌드위치를나눠 먹으며 할머니가 살아온 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사람은 누구나 난민이 될 수 있음을 알게 된다. 할머니와 아이들이 밤에 찾아올지 모르는 누군가를 위해 이불을 준비하는 마지막 장면이 아름다운 것은 그 때문이다. 그것이 인간에 대한 존중과 배려의 행동임을 느낄 수있기 때문에.
난민들을 둘러싸고 현재 빚는 갈등은 우리 사회가얼마나 이런 문제에 준비되어 있지 않은지를 보여준다.
하지만 동시에 지금의 갈등은 우리가 난민 문제를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는 시대를 살아가게 되리라는 것을 분명히 예고하고도 있다. 나는 ‘난민이 뭐예요?』를 쓰고 그린

이들이 각기 다른 국가 출신의 유럽인들인 것이 우연일리만은 없다고 생각한다. 글을 쓴 호세 캄파나리는 이민자의 자식으로 난민 문제에 관심을 가져온 스페인 사람이고, 그림을 그린 에블린 다비디는 아프리카 난민들이 유럽에 들어가는 관문인 이탈리아 출신이다. 이 두 사람이 함께 만든 그림책이, 국가나 인종 혹은 종교처럼 서로를 배척하게 만드는 견고한 장벽을 넘어설 때 우리가 아름다운 무언가를 창조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가 될수는 없을까?
일상을 살아가는 연약한 개인들은 불안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나는 우리의 마음속에 타인을 위해 이불 한채를 더 마련할 만큼의 온기가 존재한다고 믿고 싶다. 당장은 두렵더라도, 배척하는 것만이 이 두려움을 해소해줄 유일한 방법은 아닐 거라고 믿는 나와 당신이 있다고.
비틀거리더라도, 뒷걸음질을 치더라도, 우리는 결국 연대의 가치를 실현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다. 밤이 온다. 길고 긴 겨울밤의 시작이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작은희망을 촛불처럼, 위안처럼 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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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집 거위가 야생 거위를 만나 도망갔다가 새끼를데리고 돌아오는 모습을 본 적도 있고, 야생 거위의 행동에 대해 철새 전문가의 조언을 구하기도 했다. 그녀는 언어를 사용해서 자연에 대한 지식에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작가 미셸 투르니에 Michel Tournier는 후에 닐스의 모험을 장 드 라퐁텐 Jean de La Fontaine의 우화나 앙투안 드생텍쥐페리 Antoine de Saint-Exupéry의 『어린 왕자 The LittlePrince』와 동급의 고전이라고 평가했다.
내 눈에 닐스의 날개 달린 친구들은 그 이야기에 등장하는 어느 누구보다도 빛을 발한다. 새는 현실 속에서도동화 같은 존재이다. 종이에 적힌 글자만큼 가벼운 데다놀라운 감각을 가진 덕분에 폭풍우가 치는 바다와 광대한 대륙을 건너 원하는 장소에 정확하게 도달할 수 있지않은가.
새의 비행을 가까이에서 관찰하고 싶은 욕심을 품은적이 있었다. 그래서 꽤 더웠던 어느 9월 저녁에 나는 베멘회이로 향하는 마지막 버스에 올랐다. 닐스가 모험을시작한 바로 그곳이었다. 텐트, 그리고 새처럼 방향을 잡는 데 도움을 줄 별자리 지도가 그려진 우산도 챙겼다. 최종 목적지는 철새가 지나가는 길에 위치한 팔스터보 해안이었다. 버스가 종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져서어두웠지만, 등대에서 비치는 불빛 덕분에 풀이 짧으면서도 수평선이 가까운 장소를 찾을 수 있었다. 그곳에 텐트를 치고 자리를 잡았다. 이내 텐트 위에서 부드럽게 웅

모든 것을 감안하면 벌의 춤은 향기로우면서 수학적인 언어이고, 시와 토지 측량술을 결합한 언어라고 할 수 있겠다. 

수학에서는 모든 것이 명료하고 정확하며 꼭 필요한 것만 남긴 채 압축되는 반면 시에서는 감각적 연상과 암시적 표현을 통해 많은 것을 담아낸다. 

말하지 않은 말은 말 사이의 긴장감을 자아내서 꽃과 벌의 관계에서처럼 떨림이 만들어진다. 벌의 춤은 꽃에서부터 시작해 바람과 주변 환경의 중요한 정보를 모두 아우르는 완벽하고도 자연스러운 소통 방식이다. 이 모든 것이 시적이지만 그와 동시에 정확하게 전달이 된다.

무엇보다도 그들의 춤은 함께 사는 세상에 관한 이야기다. 한 마리의 벌이라도 도움이나 격려를 원하면 특정냄새나 페로몬을 사용해서 언제라도 자신의 요구를 전할수 있다. 이런 식의 즉각적 호소에서 언어가 시작된 것이아닐까? 
그렇다면 다음에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언어는성원이 일정 수를 이루거나 그들이 함께 생활할 때 발달하는 것일까, 아니면 무엇인가를 이루기 위해 더불어 일할 때 만들어지는 것일까? 그 모두가 사실일 수도 있다.

어찌 되었든 벌은 장엄하고 독특한 언어가 만들어질 수있는 과정 중 하나를 잘 보여 주고 있다.
벌의 언어를 발견한 것은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고 폰프리슈는 1973년에 노벨상을 수상했다. 동물 행동학을연구한 로렌츠와 틴베르헌과 공동 수상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물고기가 대화를 나눌 것이라고 추축했고 그 추측은 맞은 듯하다. 현대의 과학자는 짜증이나 경고, 전투 신호를 전달하는 물고기 소리를 해석할 줄알게 되었다. 게다가 물고기는 지느러미를 다른 위치에놓거나 몸의 색깔 혹은 무늬를 변화시키는 등의 보디랭귀지로도 다양한 뉘앙스를 전달한다. 어떤 물고기는 심지어 자신의 종, 나이, 성적 성숙도, 성격 등을 잠재적 짝짓기 상대에게 알리는 전기장을 가지고 있다.

결론적으로 인류는 지구상에 사는 생물의 98퍼센트가 사용하는 의사소통의 방법을 간과해 왔다고 할 수 있다.
그 세상과 우리를 분리하는 유일한 것은 얇은 물 한 겹에 불과한데도 말이다. 물 표면 아래에는 광범위한 음파 네트워크가 존재한다. 

솔로, 듀엣, 합창 등의 멜로디가 이음파에 실려 전해진다. 새와 마찬가지로 수컷 물고기도새벽 여명과 저녁 황혼 무렵에 암컷을 위한 노래를 부른다. 어린 대구가 먹고 자라는 망둑어류는 암컷이 수컷의노래를 듣기 전까지 짝짓기를 하지 못한다. 불행하게도 요즘은 인간이 오락의 목적으로 이용하는 모터보트와 수상 스포츠 기구들이 내는 큰 소리 때문에 망둑어의 노랫

마치 일어날 일을 예상할수 있기라도 한 듯,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녀석의 자신감이 엿보였다. 길을 가다가 이와 비슷한 느낌을 받은 적이있다. 예전에 나는 노루가 두 개의 철사 선 사이로 몸을정확히 날려 울타리를 빠져나가는 광경을 목격했다. 녀석은 자기 몸이 빠져나갈 수 있는지를 순식간에 계산했을 것이다. 야생에서는 찰나의 순간에 온 세상이 담긴다.
그렇다, 새끼 여우는 배워야 할 것이 엄청나게 많고 아마 나름의 방식으로 그 배움은 이미 시작되었을 것이다.

언젠가 스크류드라이버를 가지러 목공용 헛간에 슬쩍 들어갔다. 그때 마루 밑 공간에서 서로 다투면서 무엇인가를 끌고 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잘 정돈된 연장들 사이에서 있었지만 내 발 바로 아래에서는 완전히 다른 형태의 삶이 벌어지고 있었다. 세상의 잠재력을 흥미롭게 시험하는 듯했다.

창고는 놀이더 역할도 하는 것 같았다. 로프가 몇 개나와 있었는데, 새끼 여우들이 여러 로프의 길이를 측정해보거나 아니면 줄다리기 시합이 벌어졌다고밖에 볼 수없는 흔적이 남아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새끼 여우들

최초의 원자들이 움직이며 발생한 진동은 우주 전체로 퍼져 나가면서 소위 컴퓨터의 <플리커 잡음>의 원인이 되었다. 이것은 멀리 떨어진 항성계에서만 발견되는 현상이 아니라 지구의 물길과 바람, 자연재해, 심지어 주식 시장의 변동에도 존재한다.
심지어 살아 있는 생물들 사이에서도 서로 연관된 소리 패턴이 존재한다. 

긴팔원숭이의 노래를 2배속으로 들으면 새소리처럼 들리고 더 느린 속도로 들으면 고래 소리처럼 들린다. 음파를 그려 보면 모두 같은 패턴을 보인다. 가지가 나무를 닮은 모양으로 자라는 이유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단지 크기와 속도가 다를 뿐이다.

한편 속도는 생물종 사이의 또 다른 차이도 보완해 준다. 벌은 1초 사이에 내가 볼 수 있는 것보다 1백 배나 빠른 움직임을 이해할 수 있다. 신진대사가 빠른 작은 동물은 큰 동물보다 더 높은 밀도로 세상을 감각한다. 작은 명금류와 쥐의 심장은 1분에 6백 번이나 뛰기 때문에 바람결에 떨리는 이파리처럼 파닥이는 반면 고래의 심장은1백 배나 느리다. 결국 평생 뛰는 심장 박동 수는 작은 동물이나 큰 동물이 모두 비슷해진다.

이 숫자들은 박자표의 기능을 하는 것일까? 곤충이 십육분음표, 포유류가 사분음표로 움직인다면 터벅거리는오소리의 발걸음은 온음표일 것이다. 모든 동물은 무한대의 변주가 가능한 음악 속에서 움직이고 있다. 그들의발밑에는 지구의 중심에서부터 자기장으로 울려 퍼지는로미

그러나 매우 오랫동안 그는 사람들에게서 밀려오는후각 정보에 대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공기 중에 떠다니는 냄새 분자는 가장 오래된 삶과 생명의 표현법일까? 동물 세계의 페로몬처럼 냄새는 희석되지 않은 생명의 정수를 담고 있으며 수백만 년 동안 인간에게 큰 도움이 되어 왔다. 

새로 태어난 아기는 냄새로엄마의 젖을 찾고 나쁜 냄새를 통해 음식이 썩었다는 사실을 파악한다. 멀리 떨어진 경우에도 냄새를 통해 상대방에 대한 여러 가지 정보를 알 수 있다. 나에게 다가오는동물이 잠재적인 포식자일까. 먹이일까, 짝짓기 상대일까? 존재 하나하나를 수십만 개의 분자가 둘러싸서 그 개체만의 독특한 냄새를 형성한다.

냄새가 종의 경계를 넘어서면 그 해석이 더 다양해진다. 침엽수림의 향기로운 냄새는 테르펜을 함유하고 있어서 미생물을 억제한다. 진드기, 나방, 벼룩이 라벤더를 싫어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인간과 벌은 같은 향기를 좋아한다. 바로 그 때문에 우리는 꽃향기를 빌려 향수를 만든다. 나비가 장미 향을 내면서 짝짓기 상대를 유혹하는 일과 비슷하다. 

수천 년 동안 우리는 꽃잎, 과일 껍질, 씨앗, 이파리 등으로 향수를 만들었고 심지어 뿌리와나무껍질도 사용해 왔다. 이 무형의 에센스는 음악의 음조처럼 만들어지는데 베이스 노트, 하트 노트, 톱 노트라는 향수 용어만 보아도 그 유사성을 짐작할 수 있다. 19세기의 한 향수 제조업자는 다장조 음계 전체에 해당하는

향기를 만들었는데, D는 바이올렛, E는 아카시아. F는 월하향, G는 오렌지꽃, A는 막 자른 건초, B는 개사철쑥, C는 녹나무였다. 다른 꽃향기로 또 다른 음계를 만들 수도 있다. 

음악의 세계만큼 향기의 세계에도 다양한 변주곡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톱 노트는 코에 제일 먼저 감지가 되고 가장 먼저 사라지는 향기다. 하트 노트는 재스민과 장미 향부터 말린 정향 향기까지 다양하다. 베이스 노트에는 해변이나 비 온뒤의 숲과 비슷한 향기가 나는 마른 떡갈나무 등이 사용된다. 
가장 대표적인 베이스 노트는 백단유 향기다. 샌들우드라고도 부르는 백단향에서 나오는 오일은 마음을 차분하게 만드는 동시에 관능적으로 흥분시키는 효과를 낸다. 나무 에센스는 따뜻한 기운이 있기 때문이다.
향유고래에서 나오는 용연향 같은 동물적인 베이스노트도 있다. 용연향은 한때 황금이나 노예만큼 진귀한 대우를 받은 신비로운 에센스다. 깊은 바다에서 온 용연향은 몇 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다. 이 물질은 원래 향유고래의 위에서 소화되지 않고 남아 있던 두족류의 뼈가풍부한 지방으로 둘러싸여 있다가 배설된 것으로 보통해변에서 발견된다.
은은하든 화려하든, 차분하는 흥분을 시키든지 간에 향수의 향기는 생명이 용솟음치고 흐르는 다양한 곳에서 채취를 한다. 

삶이 그렇고 음악이 그렇듯, 향기도 서서히변화하고 사라지기는 하지만 조용하면서도 치열한 향기

사람들이 서로다른 생물종 사이에 세운 벽은 애초에 가르지 않아야 할것들을 가르고 있었다. 나는 그 순간 깨달았다. 우리 집벽은 개미와 벌이 단열을 해주고 있었으며, 우리 집 천장은 새집의 바닥이고 우리 집 바닥은 여우 집의 천장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한가지 질문이 여전히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모든 유기체가 어떻게 무너지거나 흩어지지 않고 하나의 전체를이루어 낼 수 있었을까?

 나는 수많은 점을 찍어 형상을 묘사하는 점묘화와 컴퓨터 화면의 화소를 떠올렸다. 점이 많을수록 그림이 더 선명해지는 이유는 각각의 점이 색이나 세부 사항을 명확히 만드는 데 기여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하나의 서사로 잇는 일은 불가능하다. 일반적인 이야기에서는 모든 사건이 하나의 시점을 중심으로 벌어지지만, 지구상에 생명이 충만해지게 된 사건은 그런 식으로 벌어지지 않았다. 

미술 수업 시간에 나는 르네상스 시대에 등장한 황금 비율을 사용해서 원근감을 주는 기법을 배웠다. 놀랍게도 자연에서도 똑같은 비율을찾을 수 있다. 작가 페테르 닐손Peter Nilson은 달팽이, 솔방울, 해바라기에서 황금 비율을 찾아냈다. 자연과 예술이 비슷한 규칙을 따르고 있었던 것이다.
천문학자이기도 했던 닐손은 우주의 형태와 음악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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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이라는 점이다.
"사람들이 우리 얘기를 듣겠어요." 아이린의 말은 다급하고 절박하게 들리기까지 한다. 아무도 듣지 않는다면그녀가 저지른 잘못이 사라질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진실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자 치장하고 감춘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타인의 이목에만 신경 쓰는 아이린의 이런태도를 무턱대고 비난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누군가의 속마음을 알 수 있게 된다면 삶은 행복해질까, 불행해질까? 몸속에 품은 잔가시마지 내비치는 유리메기처럼 우리의 몸도 마음도 투명해져서 깊은 곳에감추어둔 생각들이 타인에게 고스란히 드러난다면?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일부를 가리고 산다.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창피해서, 상처를 줄까 봐, 원망을 들을까 봐 매끄럽고 평온해 보이는가면 뒤에 숨기고 있던 누군가의 또 다른 얼굴을 보게 되더라도 시나치게 상처받거나 배신감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내 안에 숨어 있던 추악함 시기심과 죄의식, 두려움과 조바심 같은 감정들을 맞닥뜨려도 외면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사람의 마음이란 한지를 여러 번 접어 만든 지화처럼, 켜켜이 쌓은 

마틴 슐레스케는 독일의 슈투트가르트에서 태어나일곱 살 때 바이올린을 배운 이래 평생 바이올린 곁에 머물며 살아온 사람이다. 그는 바이올린 장인이 되어 뮌헨의 작업장에서 현악기들을 만들며 살고 있다. 그러던 어느날 그는 오스트리아 화가 프리덴스라이히 훈데르트바서의 어떤 작품에서 다음과 같은 구절을 발견한다.

우리에게는 이제 생명에 관한 비유를 만들어 낼 능력이 없다. 내적 깨달음을 얻기는커녕. 더는 우리 주변이나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해석할 능력이 없다. 이로써 우리는 하느님의 형상이기를 그만두었다.
우리는 그릇되게 살고 있다. 우리는 죽었다. 그저 오래전에 썩어버린 인식을 갉아먹고 있을 따름이다.

『가문비나무의 노래는 이 구절에서 영향을 받은 마틴 슐레스케가 바이올린을 제작하는 동안 그에게 떠오른생각들을 놓치지 않고 나름의 방식으로 해석해 얻게 된내적 깨달음을 기록한 책이다. 

마커스의 비극적인 죽음은 타인의 인생을 통제할 수 있다는 믿음이 얼마나 오만한 착각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자신의 인생을 통제하는 일조차 번번이 실패하는 우리가 말이다.

모교에서 후배들에게 소설과 소설가의 삶에 대해서이야기를 하고 강의실을 빠져나오는데, 몇몇 후배들이따라오더니 예술가로서의 삶을 선택한 용기가 어디에서났느냐고 묻는다. 

하고 싶은 일이 있지만 사회의 시선이나 압력 때문에 용기가 나지 않는다면서, 후배들에게 조언을 해줄 만큼 나 스스로 잘 살고 있는지는 좀처럼 모르겠고, 내가 그들이 상상하고 기대하는 예술가상에 걸맞은 인생을 살고 있는 것 같지도 않지만, 답을 구하는 후배들의 눈빛이 간절해 보여 나는 고민 끝에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보면 어떨까라고 답한다. 다른 이들의 아우성에 가려 자신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채 불안과 두려움의 파도에 쉬게 휩쓸려버리는 시기가 이십 대이기도 하니까.

다른 소설가들은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소설을 쓸때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 구상과 퇴고의 단계이다. 

가장싫어하는 것은 아무래도 초고를 만드는 단계, 초고를 쓸때 나는 바람의 압력을 이겨내고 물살을 거슬러 헤엄치는 사람이다. 가까스로 방향을 잡고 팔을 내저어봤자, 내뜻대로 되는 건 아무것도 없어서 자주 낙담하고 또 낙담하는 비운의 표류자, 인물들은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한번에 가주는 법이 없고, 몇 번이나 상상했던 근사한 장면조차 언어의 옷을 입혀놓으면 내 머릿속의 그것과는 조금도 닮아 있지 않다. 내가 써놓은 것과 쓰고 싶은 것 사이의 간극 때문에 괴로울 때면 나는 파스칼 키냐르의 말을 떠올린다.

언어는 그것을 갖고 있지 않은 자가 뒤늦게 얻는 것입니다. 언어에는 상실의 자리만 있을 뿐 다른 자리는없어요. 언어는 항상 인류를 저버리고 떠나는 중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언어의 결여가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경험입니다. *

설을 나는 어쩌면 끝끝내 쓰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열심히 책을 읽으며 기술을 연마하고 확실성을얻어갔다. 나는 사람들이 물에 빠져 죽지 않기 위해헤엄치는 것처럼 읽었다. 그리고 그렇게 글을 썼다"

소설이 무엇인지는 좀처럼 모르겠지만, 어쩌다 이토록 고통스러운 사랑에 빠져버린 것인지도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건 소설을 계속 쓸 수 있는사람이 되고 싶다는 것이다. 

소설을 쓰고 싶다. 물에 빠져죽지 않기 위해 헤엄치는 사람처럼, 그렇게. 어딘가에 가닿을지는 알지 못하지만, 필사적으로, 한동안은 더 그렇게 소설을 쓸 수 있다면 좋겠다.

허구적 에세이다. 시 같기도, 소설 같기도 한 이 작품의 화자인 아내는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남자와사랑에 빠져 어머니의 반대에도 결혼을 한다. 하지만 남편은 어느 날 정부가 생겼다고 고백한 뒤 그녀를 떠난다.
파국으로 끝나는 사랑을 그린 이 글은 언뜻 보면 아름다움을 맹목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지닌 위험성을 경고하는글처럼 읽히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다면 슬프고 열정적인 탱고의 리듬을 연상시키는, 앤 카슨의 시적인 문장들은 왜 이토록 아름다울까?

오븐 온도나 재료 비율에 조금의 오차가 생기기만해도 제대로 부풀어 오르지 않는 마카롱의 껍질을 굽듯,
작가가 정교하게 세공한 문장들, "상처는 스스로 빛을 낸다고/ 외과의사들은 말한다./ 집에 불이 다 꺼져 있어도/상처에서 나오는 빛으로/ 붕대를 감을 수 있다"거나 
"그는 그녀를 찾아다녔다. 모든 곳에서 그녀를 찾아다녔다./그의 상상력의 빈곤을 통하여, 슬픔 속에서, 참호에서늦겨울 숲 속 멀리서 / 사슴이 어른거리는 것처럼" 같은 문장들은 파멸에 이르더라도 포기할 수 없는 어떤 아름다움에 대해서 생각하게 한다. 어지러움만 남기고 입속에서 녹아 사라지는 지독한 달콤함처럼, 어떤 아름다움

탓에 신도들과 갈등을 빚게 되고 결과적으로 그의 가족들에게 크나큰 고통을 안겨준다.
이 소설에는 극적인 화해나 스펙터클한 모험, 마법처럼 신비로운 환상 같은 것은 전혀 없다. 그 대신, 언젠가 미국에 방문했을 때 먹어본 팬케이크를 연상시키는그런 이야기들이 있다. 

고급스럽거나 세련된 것과는 거리가 멀던 파란 지붕의 프랜차이즈 식당. 그곳에서 팔던투박한 팬케이크처럼 평범하고 일상적이지만 슬픔인 듯,
기쁨인 듯 입안에 오래도록 여운이 남는 담담하고 부드러운 삶의 조각들은 소설의 맛을 더욱 풍성하게 해준다.

소설 속의 인물들이 모두 그러하듯 사람들은 뜻하지않은 상처를 타인에게 입히고 후회할 일을 만들지만, 또그것을 만회하기 위해 노력하며 하루하루 살아간다. 

그끝에는 반드시 죽음이 있겠지만, 어둠을 밝히는 다정한 불빛들이 있는 한 길을 잃었던 어린 소녀가 무탈하게 집을 찾아 돌아오는 기적이 일어나기도 하는 것이 삶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축복』은 우리가 쉽게 흘려보내는 일상이야말로 누구에게나 주어진 공평한 몫의 축복이라는 사실을 환기시켜 준다.

일본 사람들의 추억 속에 존재하는, 일상적이고 흔한 빵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던 까닭은 그런 빵을 나눠 먹고 싶은 일본인 친구가 최근 생겼기 때문이다. 
단편적인것의 사회학』의 저자인 기시 마사히코가 바로 그 친구다.
친구라고 말해봤자 사실 그는 나의 존재를 전혀 모르지만, 우리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고, 말을 섞어본 적도 없다. 하지만 나는 단편적인 것의 사회학』을 몇 장 읽자마자 우리가 비슷한 사람이라는 것을 단번에 깨달았다. 

이를테면 이런 구절 때문에.
우리 사회학자가 할 일은 남의 이야기를 분석하는 일이다. 한마디로 그러한 폭력과 무관할 수 없다는 말이다. 사회학자가 이 문제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는 사회학자 각 개인의 과제일 테지만. *대학에 다닐 때 나는 문학과 사회학 사이에서 서성이는 사람이었다. 사회학을 무척 좋아했으면서도 타인의삶을 분석하고 판단할 자신이 없어 결국엔 문학을 택했

막으로 쓴 동명의 소설집에 실려 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로라와 그녀의 가족은 가든파티 준비로 분주하다. ‘가든파티‘라는 단어를 가만히 발음해보면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수백 송이의 장미가 만발해 있고 푸른 잔디마저 반짝이는 더없이 완벽한 날에 정원 한가운데 차려진 티파티 테이블이다. 
하얀 테이블보가 깔리고 3층으로 이뤄진 은식기 위에 샌드위치와 머랭 쉘 같은 것이 올라가 있는 근사한 티 테이블, 파티를 기다리는 로라의 마음은 파티를 위해 주문한 유명 제과점의 달콤한 슈크림빵처럼 기대로 한껏 부풀어 올랐을 것이다. 하지만 가난한 아랫동네에 사는 짐꾼이 사고로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면서 들뜬 로라의 마음에는 어둠이 드리워진다. 
누군가가 불행을 겪고 있는데 파티를 예정대로 열어서는 안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로라의 마음에 싹터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니와 엄마는 그런 로라의 생각이 어처구니없다며 비웃는다. 그리고 예정대로 열린 가든파티가 성공적으로 끝이 났을 때,
엄마는 마음의 짐을 덜기 위해 딸에게 파티에 쓰고 남은 음식들을 남편을 잃은 "불쌍한" 여자에게 가져다주라고 말한다. 로라는 남은 음식을 가져다주는 행위가 옳지 않

다고 생각하지만 엄마가 시키는 대로 음식을 갖고 가난한 동네에 조문을 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죽은 이의 얼굴을 보게 된다.

「가든파티」는 소녀의 시선을 빌려 짧은 분량 안에 계급의식과 타인에 대한 윤리의 문제를 드러내고 있다는점만으로도 놀라운 작품이지만, 이 소설에서 내 마음을 움켜쥔 장면은 끄트머리에 있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모든 것을 초월한 듯 평화로워 보이지만 동시에 슬픔을 자아내는 망자의 얼굴을 본 로라는 울면서 집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늦게 돌아오는 로라를 마중 나온 오빠는걱정스러운 말투로 "그렇게 끔찍했니?" 하고 동생에게묻는다.
"아니." 로라가 흐느꼈다. "그저 경이로웠어. 그렇지만, 오빠" 그녀는 말을 멈추고 오빠를 쳐다봤다.
"인생이란게." 그녀는 말을 더듬었다. "인생이란 게
"그렇지만 인생이 어떻다는 것인지 설명할 수는없었다. 그러나 상관이 없었다. 그는 무슨 소린지 충분히 알아들었다.

"그러게 말이야. 응?" 로리가 말했다.

이 대목을 읽을 때마다 나는 어떤 단어로도 포착할 수없으나 분명 거기에 존재하는 감정에 대해서 생각하곤 한다. 

때로는 우리를 압도하고, 송두리째 다른 사람으로 변모시키기까지 하는데도 타인에게는 결코 말로 설명할 수는없는 감정에 대해서. 그런 감정은 밤의 들판에 버려진 아이처럼 인간을 서럽게 만들어버린다. 하지만 우리에게 한밤의 고요한 아름다움을 가르쳐주는 소설들이 있는 한, 우리는 밤이 아무리 깊어도 앞으로 걸어갈 수 있다.

제임스 설터가 말년에 대학에서 한 강연과 인터뷰를 묶었다는 『소설을 쓰고 싶다면』이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읽고 싶었던 이유는, 우리가 쉽게 표현할 수 없는 감정들을 어떤 작가보다 더 정확한 언어로 그려내온 설터의 소설 쓰기 비법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당연하게도 이 책에는 누구나 설터처럼 훌륭한 소설을 쓸 수 있게 해주는 마법의 매뉴얼 같은 것은 없다. 

그것은 설터에게 소설이 상상력의 산물만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삶에서 비롯한 글이기 때문이다. 삶이 명료하게 설명할 수 없는 진실들로 이루어진 것임을 기억한다면, 소설을 쓰고 싶다면』에서 작가 스스로 고백하듯이 설터 같은 대가에게도 자신의 글에 확신이 없던 시절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삶이 불가해한 것인 한소설 쓰기 작업 역시 언제나 어려울 수밖에 없을 테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을 쓰고 싶다면 삶을 집요하게 관찰하라고 설터는 조언한다.
온 마음을 다해 쓴 소설을 투고하고 거절당하기를

쓰리는 사람처럼"

작업 전, 차를 우리는 시간은 나에겐 기도의 시간이다. 그저 하얀 사각 종이를 사랑했던 쓰고자 하는 마음만으로 황홀했던 청순한 마음을 다시금 불러오는 시간. 그러므로 나는 오늘도 어김없이 소설을 쓰기 전에 책상을 치우고, 차를 우리고, 마들렌과 어울리는 아름다운 접시를 골라 책상 위에 올려둔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나의 말이 타인을 함부로 왜곡하거나 재단하지 않기를.
내가 타인의 삶에 대해 말하는 무시무시함에 압도되지 않기를.
나의 글에 아름다움이 깃들기를.
나의 글이 조금 더 가볍고 자유로워지기를.
그리하여 내가 마침내 나의 좁은 세계를 벗어나서당신에게 가닿을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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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자락 ‘기간제 교장‘
짱구쌤의 티타임

이장규 용방초등학교 교장


"왜? 오늘 표정이 안 좋네. 숙제 안 했니? 걱정하지마, 담임선생님이 설마 어떻게 하겠냐? 얼굴 펴, 급식이 마라탕이래!"
아침 교문맞이, 기간제 교장이 하루 일을 시작한다. 첫 통학차가 도착하는 시간에 맞춰 클래식 음악이흘러나오는 블루투스 스피커를 켜고 교문에서 아이들을 기다린다. 요즘 같은 추운 날엔 눈만 빼꼼한 중무장에 쉼 없이 제자리 걷기를 반복하며 체온을 유지하는게 상책이다. 70여명 아이가 모두 등교할 때까지 손바닥을 마주치며 매일 아침맞이를 하는 것은, 학교는 세상에서 가장 안전하고 즐거운 곳이어야 한다는 오랜바람의 실천이다.
나는 전남 구례에서 일하는 3년 차 내부형 공모교

장이다. 공모를 통해 교사에서 바로 교장이 된, 이른바
‘무자격 교장‘이다. 

기존 승진 체제(교사 교감 교장)에 변화를 주기 위해 도입된 내부형 공모 교장제는 새로운리더십을 구축해 민주적인 학교문화를 형성했다는 평가와 함께 승진 구조 와해, 특정 교원단체의 전유물 등비판도 받아가며 벌써 10여년째 이어지고 있다. 전남•전체 학교의 2퍼센트 정도가 시행 중이다.
우리 학교 아이들은 나를 ‘짱구쌤‘이라 부른다. 그렇게 부르면 교장의 권위는 사라지고 아이들은 버릇없어지는 것 아니냐고? 그런 기우는 접으시라. 아이들은누구보다 사리분별을 잘한다. 내 이름과 외모에서 나온 ‘짱구쌤‘ 별명은 아이들과 거리를 가깝게 하는 마법의 힘이 있다. 2교시를 마치면 ‘누구나 교장실에서 예약한 아이들과 우아하게 차를 마신다. 남자친구, 케이팝, 수업 이야기 등이 끝없이 이어지는 동안, 난 그냥함께 차를 마시며 웃어주면 된다. "짱구쌤, 오늘은 무슨 차예요. 김칫국물 맛이 나네요." "보이차야." "그럼남자만 마셔요?"
일주일에 네시간 정도 수업을 한다. 30년간 해오던 일이니 교장이 됐다고 관둘 이유는 없었다. 담임들과 교과와 시간을 협의해 체육, 국어, 실과, 창체(창의적체험활동) 등 다양한 수업을 진행한다. 놀이, 실내화 빨

기, 서시천 산책하기, 그림책 읽어주기, 자전거 타기등 재미와 의미를 함께 추구한다. 지난해 가을에는 우리 학교 대표 교육활동 중 하나인 ‘섬진강 자전거 마라톤‘에서 1학년 아이들의 완주를 지도했다. 아이들과 함께 시원한 강바람을 맞으며 달리던 순간이 지금도 선명하다. 수업을 통해 내가 배우며 가르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새삼 확인한다. 또 교실과 학생들을 가장 잘이해할 수 있는 통로이기도 하고, 교사들의 어려움도잊지 않게 된다.
제주도의 그림책 작가 니카는 "해녀는 페미니스트다. 그것을 증명할 필요도 없다. 그들은 누구보다 강인하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짱구쌤은 이렇게 말하고싶다. "교사는 휴머니스트다. 그들은 아이들의 오늘과내일을 믿는다. 그것은 증명할 필요가 없다."사실 평교사 시절, 내가 휴머니스트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데너무 많은 에너지를 썼다. 교장이 교실의 교육력을 믿고 전적으로 지원하면 아이들과 교사는 배움과 열정으로 화답한다.
학교 안에 있는 어른은 모두 선생님이다. 수업하는 교사뿐 아니라 교무실과 행정실, 급식과 안전을 담당하는 모든 교직원은 아이들의 선생님이다. 그래서우리는 성장하는 일을 멈출 수 없다. 모든 교직원과 전

문적 학습공동체를 만들어 학교 건축, 생태교육을 공부하며 함께 성장해나간다. 정기적인 수업 공개(나눔)를 통해 자기 수업과 교실을 열고, 교사의 교수법을 넘어 아이들의 배움을 이야기한다. 교장은 꼼꼼하게 아이들을 관찰해 어려운 부분을 지원해주면 된다. 우리가 세운 목표를 다 이룰 수 없다고 해도 어제보다 더나은 사람은 될 수 있다.
운동장 너머에 노고단이 보이고 울타리를 따라 섬진강 지류인 서시천이 흐르는 아름다운 학교에서 근무하는 것은 행운이다. 2년 뒤에는 그 풍경에 딱 어울리는 세상에 하나뿐인 학교가 다시 지어진다. 긴 복도와 사각형 교실에서 벗어나, 천창과 거실, 툇마루가 있는 목조 지붕의 아늑한 학교가 탄생한다. 지난 30년 교사로 살면서 꿈꿨던 학교 건축에 관해 동료들과 수많은 대화를 나눴다. 2년 동안 모든 용방 가족들이 머리를 맞대고 함께 설계했다. 어떤 뛰어난 개인도 집단지성을 넘어설 수는 없다는 믿음으로. 10년 전, 열일곱명의 폐교 위기에서 지금에 이르렀듯, 우리 학교는 소멸의 위기를 넘어 계속 나아갈 것이다.
훌륭한 교사가 훌륭한 교장이 된다고 믿는다. 여러 평가 속에서도 교사에게 공모 교장의 기회를 주는제도가 존속돼야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자격증에 기

대지 않은 새로운 리더십에 대한 기대이다. 우리는 선의의 경쟁을 해야 한다.

닫는 글을 대신하여

"6411번 버스를 아십니까?"

노회찬

6411번 버스라고 있습니다.
서울 구로구 가로수공원에서 출발해서 강남을 거쳐 개포동 주공 2단지까지 대략 두시간 정도 걸리는 노선버스입니다. 내일 아침에도 이 버스는 새벽 네시 정각에 출발합니다. 새벽 네시에 출발하는 그 버스와 네시 5분경에 출발하는 두번째 버스는 출발한 지 15분 만에 신도림과 구로시장을 거칠 때쯤이면 좌석은 만석이되고 버스 안 복도길까지 사람들이 한명 한명 바닥에다 앉는 진풍경이 매일 벌어집니다.
새로운 사람이 타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매일 같은 사람이 탑니다. 그래서 시내버스인데도 마치 고정석이 있는 것처럼 어느 정류소에서 누가 타고 강남 어느 정류소에서 누가 내리는지 거의 다 알고 있는 매우

특이한 버스입니다. 
이 버스 타시는 분들은 새벽 세시에 일어나서 새벽 다섯시 반이면 직장인 강남의 빌딩에 출근해야 하는 분들입니다. 지하철이 다니지 않는 시각이기 때문에 매일 이 버스를 탑니다. 한명이 어쩌다 결근을 하면 누가 어디서 안 탔는지 모두가 다 알고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좀 흘러서 아침 출근시간이 되고낮에도 이 버스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있고 퇴근길에도이용하는 사람이 있지만, 새벽 네시와 네시 5분에 출발하는 6411번 버스가 출발점부터 거의 만석이 되어강남의 여러 정류장에서 5~60대 아주머니들을 다 내려준 후에 종점으로 향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이분들이 아침에 출근하는 직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들딸과 같은 수많은 직장인들이 그 빌딩을 드나들지만, 그 빌딩에 새벽 다섯시 반에 출근하는 아주머니들에 의해서 청소되고 정비되는 것을 의식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습니다. 이분들은 태어날 때부터 이름이 있었지만 그 이름으로 불리지 않습니다. 그냥 아주머니입니다. 그냥 청소하는 미화원일 뿐입니다. 한달에 85만원 받는 이분들이야말로 투명인간입니다. 존재하되 그 존재를 우리가 느끼지 못하고 함께 살아가는분들입니다. 지금 현대자동차 그 고압선 철탑위에 올

라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스물세명씩 죽어나간 쌍용자동차 노동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저 용산에서 지금은 몇년째 허허벌판으로 방치되고 있는 저 남일당 그 건물에서 사라져간 다섯분도 투명인간입니다.
저는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이들은 아홉시 뉴스도보지 못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 하는 분들입니다.
그래서 이분들이 유시민을 모르고 심상정을 모르고 이노회찬을 모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분들의 삶이 고단하지 않았던 순간이 있었겠습니까. 이분들이 그 어려움 속에서 우리 같은 사람들을 찾을 때 우리는 어디 있었습니까. 그들 눈앞에 있었습니까. 그들의 손이 닿는 곳에 있었습니까. 그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곳에 과연 있었습니까.
그 누구 탓도 하지 않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만들어가는 이 진보정의당, 대한민국을 실제로 움직여온 수많은 투명인간들을 위해 존재할 때 그 일말의 의의를 우리는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상 그동안이런 분들에게 우리는 투명정당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정치한다고 목소리 높여 외치지만 이분들이 필요로 할때 이분들이 손에 닿는 거리에 우리는 없었습니다. 존재했지만 보이지 않는 정당, 투명정당. 그것이 이제까

지 대한민국 진보정당의 모습이었습니다. 

저는 이제 이분들이 냄새 맡을 수 있고 손에 잡을 수 있는 곳으로이 당을 여러분과 함께 가져가고자 합니다. 

여러분 준비되셨습니까.
강물은 아래로 흘러갈수록 그 폭이 넓어진다고 합니다. 우리의 대중정당은 달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더 낮은 곳으로 내려갈 때 실현될 것입니다. 진보정의당의 공동대표로 이 부족한 사람을 선출해주신 데대해서 무거운 마음으로 수락하고자 합니다. 저는 진보정의당이 존재하는 그 시간까지, 그리고 제가 대표를 맡고 있는 동안 저의 모든 것을 바쳐서 심상정 후보를 앞장세운 진보적 정권교체에 성공하고, 그리고 우리가 바라는 모든 투명인간들의 당으로 이 진보정의당을 세우는데 제가 가진 모든 것을 털어 넣겠습니다.

2012년 10월 21일
진보정의당 공동대표 수락연설

사람들은 지금도 말한다. "노회찬이라면 이럴 때 뭐라고 얘기할까?" 그와의 알량한 인연을 앞세워 내가 답할 수 있는 질문이 아니다. 아니, 사실은 굳이 답을 하려 하지 않아도 된다. 여기 글쓴이들은그 삶 속에서 이미 노회찬의 대답을 듣고 있다. 하나하나의 글들 속에서 노회찬을 발견한다. 글쓴이들이 모두 노회찬이다.
손석희 언론인

노회찬의 은유적 언변에 담긴 해학은 누구도 함부로 흉내 낼 수 없는 소중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한평생 민중을 가까이 들여다보고 이해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거침없는 표현을 품위를 담아 우아하게 사용할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정치인 노회찬이 응시해온 ‘존재하되 우리가 그존재를 느끼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직접 쓴 이야기를 통해 정치가 바라봐야 할 곳이 어디인가를 함께 고민하면 좋겠습니다.
정우성 배우

나는 소설을 쓰는 노동자다. 그리고 다른 이들의 노동에 기대어 하루를 살아간다. 농민의 노동으로 밥을 먹고, 유튜브 크리에이터의노동으로 정보를 얻고, 택배노동자의 노동으로 편안하게 집에서 물건을 받는다. 여기, 나를 살게 하는 수많은 노동자가 묻는다. 대체 나의노동은 얼마짜리입니까? 노회찬은 말했다. 같이 살자고, 같이 잘 살자고! 주 52시간 노동이 흔들리고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가 지워지는시대를 살고 있지만 나는 믿고 싶다. 노회찬의 절절한 꿈이 우리 모두의 마음 깊숙한 곳에서 용암처럼 솟구칠 그날을 기다리며 들끓고 있을 거라고. 그렇게 노회찬은 아직도 우리 안에 살아 있는 거라고.
정지아 소설가

명절을 맞아 작은 선물이라도 준비하려고 아파트 현관 청소하시는분께 여쭤봤다. "한 동에 모두 몇분이 일하세요?" 어머니뻘인 그분이답하신다. "나 혼자 네 동 담당하는데요." 아무 말도 못한 채 현관을 나와 길을 걸으며 가슴이 미어졌다. 이 책은 우리 곁에 살아가지만 잘보이지 않는 그런 사람들의 기록이다.
하종강 
성공회대 노동아카데미 주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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