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이라는 점이다. "사람들이 우리 얘기를 듣겠어요." 아이린의 말은 다급하고 절박하게 들리기까지 한다. 아무도 듣지 않는다면그녀가 저지른 잘못이 사라질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진실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자 치장하고 감춘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타인의 이목에만 신경 쓰는 아이린의 이런태도를 무턱대고 비난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누군가의 속마음을 알 수 있게 된다면 삶은 행복해질까, 불행해질까? 몸속에 품은 잔가시마지 내비치는 유리메기처럼 우리의 몸도 마음도 투명해져서 깊은 곳에감추어둔 생각들이 타인에게 고스란히 드러난다면?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일부를 가리고 산다.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창피해서, 상처를 줄까 봐, 원망을 들을까 봐 매끄럽고 평온해 보이는가면 뒤에 숨기고 있던 누군가의 또 다른 얼굴을 보게 되더라도 시나치게 상처받거나 배신감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내 안에 숨어 있던 추악함 시기심과 죄의식, 두려움과 조바심 같은 감정들을 맞닥뜨려도 외면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사람의 마음이란 한지를 여러 번 접어 만든 지화처럼, 켜켜이 쌓은
마틴 슐레스케는 독일의 슈투트가르트에서 태어나일곱 살 때 바이올린을 배운 이래 평생 바이올린 곁에 머물며 살아온 사람이다. 그는 바이올린 장인이 되어 뮌헨의 작업장에서 현악기들을 만들며 살고 있다. 그러던 어느날 그는 오스트리아 화가 프리덴스라이히 훈데르트바서의 어떤 작품에서 다음과 같은 구절을 발견한다.
우리에게는 이제 생명에 관한 비유를 만들어 낼 능력이 없다. 내적 깨달음을 얻기는커녕. 더는 우리 주변이나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해석할 능력이 없다. 이로써 우리는 하느님의 형상이기를 그만두었다. 우리는 그릇되게 살고 있다. 우리는 죽었다. 그저 오래전에 썩어버린 인식을 갉아먹고 있을 따름이다.
『가문비나무의 노래는 이 구절에서 영향을 받은 마틴 슐레스케가 바이올린을 제작하는 동안 그에게 떠오른생각들을 놓치지 않고 나름의 방식으로 해석해 얻게 된내적 깨달음을 기록한 책이다.
마커스의 비극적인 죽음은 타인의 인생을 통제할 수 있다는 믿음이 얼마나 오만한 착각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자신의 인생을 통제하는 일조차 번번이 실패하는 우리가 말이다.
모교에서 후배들에게 소설과 소설가의 삶에 대해서이야기를 하고 강의실을 빠져나오는데, 몇몇 후배들이따라오더니 예술가로서의 삶을 선택한 용기가 어디에서났느냐고 묻는다.
하고 싶은 일이 있지만 사회의 시선이나 압력 때문에 용기가 나지 않는다면서, 후배들에게 조언을 해줄 만큼 나 스스로 잘 살고 있는지는 좀처럼 모르겠고, 내가 그들이 상상하고 기대하는 예술가상에 걸맞은 인생을 살고 있는 것 같지도 않지만, 답을 구하는 후배들의 눈빛이 간절해 보여 나는 고민 끝에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보면 어떨까라고 답한다. 다른 이들의 아우성에 가려 자신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채 불안과 두려움의 파도에 쉬게 휩쓸려버리는 시기가 이십 대이기도 하니까.
다른 소설가들은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소설을 쓸때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 구상과 퇴고의 단계이다.
가장싫어하는 것은 아무래도 초고를 만드는 단계, 초고를 쓸때 나는 바람의 압력을 이겨내고 물살을 거슬러 헤엄치는 사람이다. 가까스로 방향을 잡고 팔을 내저어봤자, 내뜻대로 되는 건 아무것도 없어서 자주 낙담하고 또 낙담하는 비운의 표류자, 인물들은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한번에 가주는 법이 없고, 몇 번이나 상상했던 근사한 장면조차 언어의 옷을 입혀놓으면 내 머릿속의 그것과는 조금도 닮아 있지 않다. 내가 써놓은 것과 쓰고 싶은 것 사이의 간극 때문에 괴로울 때면 나는 파스칼 키냐르의 말을 떠올린다.
언어는 그것을 갖고 있지 않은 자가 뒤늦게 얻는 것입니다. 언어에는 상실의 자리만 있을 뿐 다른 자리는없어요. 언어는 항상 인류를 저버리고 떠나는 중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언어의 결여가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경험입니다. *
설을 나는 어쩌면 끝끝내 쓰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열심히 책을 읽으며 기술을 연마하고 확실성을얻어갔다. 나는 사람들이 물에 빠져 죽지 않기 위해헤엄치는 것처럼 읽었다. 그리고 그렇게 글을 썼다"
소설이 무엇인지는 좀처럼 모르겠지만, 어쩌다 이토록 고통스러운 사랑에 빠져버린 것인지도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건 소설을 계속 쓸 수 있는사람이 되고 싶다는 것이다.
소설을 쓰고 싶다. 물에 빠져죽지 않기 위해 헤엄치는 사람처럼, 그렇게. 어딘가에 가닿을지는 알지 못하지만, 필사적으로, 한동안은 더 그렇게 소설을 쓸 수 있다면 좋겠다.
허구적 에세이다. 시 같기도, 소설 같기도 한 이 작품의 화자인 아내는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남자와사랑에 빠져 어머니의 반대에도 결혼을 한다. 하지만 남편은 어느 날 정부가 생겼다고 고백한 뒤 그녀를 떠난다. 파국으로 끝나는 사랑을 그린 이 글은 언뜻 보면 아름다움을 맹목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지닌 위험성을 경고하는글처럼 읽히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다면 슬프고 열정적인 탱고의 리듬을 연상시키는, 앤 카슨의 시적인 문장들은 왜 이토록 아름다울까?
오븐 온도나 재료 비율에 조금의 오차가 생기기만해도 제대로 부풀어 오르지 않는 마카롱의 껍질을 굽듯, 작가가 정교하게 세공한 문장들, "상처는 스스로 빛을 낸다고/ 외과의사들은 말한다./ 집에 불이 다 꺼져 있어도/상처에서 나오는 빛으로/ 붕대를 감을 수 있다"거나 "그는 그녀를 찾아다녔다. 모든 곳에서 그녀를 찾아다녔다./그의 상상력의 빈곤을 통하여, 슬픔 속에서, 참호에서늦겨울 숲 속 멀리서 / 사슴이 어른거리는 것처럼" 같은 문장들은 파멸에 이르더라도 포기할 수 없는 어떤 아름다움에 대해서 생각하게 한다. 어지러움만 남기고 입속에서 녹아 사라지는 지독한 달콤함처럼, 어떤 아름다움
탓에 신도들과 갈등을 빚게 되고 결과적으로 그의 가족들에게 크나큰 고통을 안겨준다. 이 소설에는 극적인 화해나 스펙터클한 모험, 마법처럼 신비로운 환상 같은 것은 전혀 없다. 그 대신, 언젠가 미국에 방문했을 때 먹어본 팬케이크를 연상시키는그런 이야기들이 있다.
고급스럽거나 세련된 것과는 거리가 멀던 파란 지붕의 프랜차이즈 식당. 그곳에서 팔던투박한 팬케이크처럼 평범하고 일상적이지만 슬픔인 듯, 기쁨인 듯 입안에 오래도록 여운이 남는 담담하고 부드러운 삶의 조각들은 소설의 맛을 더욱 풍성하게 해준다.
소설 속의 인물들이 모두 그러하듯 사람들은 뜻하지않은 상처를 타인에게 입히고 후회할 일을 만들지만, 또그것을 만회하기 위해 노력하며 하루하루 살아간다.
그끝에는 반드시 죽음이 있겠지만, 어둠을 밝히는 다정한 불빛들이 있는 한 길을 잃었던 어린 소녀가 무탈하게 집을 찾아 돌아오는 기적이 일어나기도 하는 것이 삶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축복』은 우리가 쉽게 흘려보내는 일상이야말로 누구에게나 주어진 공평한 몫의 축복이라는 사실을 환기시켜 준다.
일본 사람들의 추억 속에 존재하는, 일상적이고 흔한 빵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던 까닭은 그런 빵을 나눠 먹고 싶은 일본인 친구가 최근 생겼기 때문이다. 단편적인것의 사회학』의 저자인 기시 마사히코가 바로 그 친구다. 친구라고 말해봤자 사실 그는 나의 존재를 전혀 모르지만, 우리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고, 말을 섞어본 적도 없다. 하지만 나는 단편적인 것의 사회학』을 몇 장 읽자마자 우리가 비슷한 사람이라는 것을 단번에 깨달았다.
이를테면 이런 구절 때문에. 우리 사회학자가 할 일은 남의 이야기를 분석하는 일이다. 한마디로 그러한 폭력과 무관할 수 없다는 말이다. 사회학자가 이 문제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는 사회학자 각 개인의 과제일 테지만. *대학에 다닐 때 나는 문학과 사회학 사이에서 서성이는 사람이었다. 사회학을 무척 좋아했으면서도 타인의삶을 분석하고 판단할 자신이 없어 결국엔 문학을 택했
막으로 쓴 동명의 소설집에 실려 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로라와 그녀의 가족은 가든파티 준비로 분주하다. ‘가든파티‘라는 단어를 가만히 발음해보면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수백 송이의 장미가 만발해 있고 푸른 잔디마저 반짝이는 더없이 완벽한 날에 정원 한가운데 차려진 티파티 테이블이다. 하얀 테이블보가 깔리고 3층으로 이뤄진 은식기 위에 샌드위치와 머랭 쉘 같은 것이 올라가 있는 근사한 티 테이블, 파티를 기다리는 로라의 마음은 파티를 위해 주문한 유명 제과점의 달콤한 슈크림빵처럼 기대로 한껏 부풀어 올랐을 것이다. 하지만 가난한 아랫동네에 사는 짐꾼이 사고로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면서 들뜬 로라의 마음에는 어둠이 드리워진다. 누군가가 불행을 겪고 있는데 파티를 예정대로 열어서는 안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로라의 마음에 싹터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니와 엄마는 그런 로라의 생각이 어처구니없다며 비웃는다. 그리고 예정대로 열린 가든파티가 성공적으로 끝이 났을 때, 엄마는 마음의 짐을 덜기 위해 딸에게 파티에 쓰고 남은 음식들을 남편을 잃은 "불쌍한" 여자에게 가져다주라고 말한다. 로라는 남은 음식을 가져다주는 행위가 옳지 않
다고 생각하지만 엄마가 시키는 대로 음식을 갖고 가난한 동네에 조문을 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죽은 이의 얼굴을 보게 된다.
「가든파티」는 소녀의 시선을 빌려 짧은 분량 안에 계급의식과 타인에 대한 윤리의 문제를 드러내고 있다는점만으로도 놀라운 작품이지만, 이 소설에서 내 마음을 움켜쥔 장면은 끄트머리에 있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모든 것을 초월한 듯 평화로워 보이지만 동시에 슬픔을 자아내는 망자의 얼굴을 본 로라는 울면서 집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늦게 돌아오는 로라를 마중 나온 오빠는걱정스러운 말투로 "그렇게 끔찍했니?" 하고 동생에게묻는다. "아니." 로라가 흐느꼈다. "그저 경이로웠어. 그렇지만, 오빠" 그녀는 말을 멈추고 오빠를 쳐다봤다. "인생이란게." 그녀는 말을 더듬었다. "인생이란 게 "그렇지만 인생이 어떻다는 것인지 설명할 수는없었다. 그러나 상관이 없었다. 그는 무슨 소린지 충분히 알아들었다.
"그러게 말이야. 응?" 로리가 말했다.
이 대목을 읽을 때마다 나는 어떤 단어로도 포착할 수없으나 분명 거기에 존재하는 감정에 대해서 생각하곤 한다.
때로는 우리를 압도하고, 송두리째 다른 사람으로 변모시키기까지 하는데도 타인에게는 결코 말로 설명할 수는없는 감정에 대해서. 그런 감정은 밤의 들판에 버려진 아이처럼 인간을 서럽게 만들어버린다. 하지만 우리에게 한밤의 고요한 아름다움을 가르쳐주는 소설들이 있는 한, 우리는 밤이 아무리 깊어도 앞으로 걸어갈 수 있다.
제임스 설터가 말년에 대학에서 한 강연과 인터뷰를 묶었다는 『소설을 쓰고 싶다면』이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읽고 싶었던 이유는, 우리가 쉽게 표현할 수 없는 감정들을 어떤 작가보다 더 정확한 언어로 그려내온 설터의 소설 쓰기 비법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당연하게도 이 책에는 누구나 설터처럼 훌륭한 소설을 쓸 수 있게 해주는 마법의 매뉴얼 같은 것은 없다.
그것은 설터에게 소설이 상상력의 산물만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삶에서 비롯한 글이기 때문이다. 삶이 명료하게 설명할 수 없는 진실들로 이루어진 것임을 기억한다면, 소설을 쓰고 싶다면』에서 작가 스스로 고백하듯이 설터 같은 대가에게도 자신의 글에 확신이 없던 시절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삶이 불가해한 것인 한소설 쓰기 작업 역시 언제나 어려울 수밖에 없을 테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을 쓰고 싶다면 삶을 집요하게 관찰하라고 설터는 조언한다. 온 마음을 다해 쓴 소설을 투고하고 거절당하기를
쓰리는 사람처럼"
작업 전, 차를 우리는 시간은 나에겐 기도의 시간이다. 그저 하얀 사각 종이를 사랑했던 쓰고자 하는 마음만으로 황홀했던 청순한 마음을 다시금 불러오는 시간. 그러므로 나는 오늘도 어김없이 소설을 쓰기 전에 책상을 치우고, 차를 우리고, 마들렌과 어울리는 아름다운 접시를 골라 책상 위에 올려둔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나의 말이 타인을 함부로 왜곡하거나 재단하지 않기를. 내가 타인의 삶에 대해 말하는 무시무시함에 압도되지 않기를. 나의 글에 아름다움이 깃들기를. 나의 글이 조금 더 가볍고 자유로워지기를. 그리하여 내가 마침내 나의 좁은 세계를 벗어나서당신에게 가닿을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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