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녀 이야기 (리커버 일반판, 무선) 시녀 이야기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김선형 옮김 / 황금가지 / 2018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40년전의 이런 절망과 풍자가
아직도 유효하다는 것이 슬픈...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곳의 인도는 시멘트다. 나는 어린애처럼 갈라진 틈을 밟지 않으려고 조심한다. 나는 구시대에 이 길을 밟고 다니던 내 발과 그 당시에 신고 다니던 신발을 기억하고 있다. 밑창에 쿠션과 공기 구멍이 있으며, 캄캄해지면 빛을 반사하는 형광 천으로 만든 별 모양 장식이 달린 러닝 슈즈를 가끔 신곤 했다. 절대로 밤에는 조깅하지 않았고 낮에 달릴 때에도 자주 가는 길만 따라 달리곤 했지만 말이다.
그 당시 여자들은 보호받지 못했다.

나는 당시의 규칙들을 기억한다. 여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었지만아무도 입 밖에 내어 말하지 않던 그 규칙들 말이다. 설사 상대가 경찰이라 하더라도, 절대로 낯선 사람에게 문을 열어 주지 마라. 문아래로 신분증을 밀어 넣으라고 해라. 곤경에 처한 척하는 오토바이운전자를 도와준답시고 길가에 정차하지 마라. 자동차 문을 잠그고 계속 가라. 누군가 휘파람을 불어도 절대로 고개를 돌려 쳐다보지마라. 밤에 혼자 빨래방에 가지 마라.
나는 빨래방을 생각한다. 빨래방에 갈 때 입었던 옷들, 반바지, 청바지, 운동복, 세탁기 안에 집어넣었던 것들. 내 옷들, 내 비누, 내 돈,
내가 번 돈. 그런 통제력을 가진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본다.

지금 우리는 빨간 옷을 입고 짝을 지어 같은 거리를 걷고 있지만 아무도 우리를 보고 음담패설을 퍼붓지 않고, 아무도 말을 걸지 않고, 아무도 만지지 않는다. 아무도 휘파람을 불지 않는다.

하지만 한 번에 조금씩, 머리를 재빠르게 위아래로, 좌우로 움직이면 볼 수는 있다. 우리는 헉헉거리며 세상을 보는법을 배웠다.
오른편으로 길을 따라 걸어가면, 강가로 내려가는 길이 나온다.
그곳에는 옛날에 조정 경기용 노를 보관하던 보트하우스 한 채와 다리 몇 개가 있다. 나무들, 푸르른 강둑, 그곳에서는 앉아서 강물을 바라볼 수 있었고, 팔뚝을 드러낸 젊은 남자들과, 그들이 승리를 위해햇살 속으로 한껏 치켜들던 노들을 구경할 수 있었다. 강물로 가는길에는 지금은 다른 용도로 쓰이는 낡은 기숙사가 있는데, 동화책에나오는 듯한 뾰족탑들이 하얀색과 금색과 파란색으로 칠해져 있다.
과거를 생각하면 우리는 아름다운 것들만 떠올리기 마련이다. 전부좋기만 했다고 믿고 싶어한다.

축구장도 그쪽에 있는데, 그곳에서는 요즘 ‘남성 구제 행사‘가 열린다. 물론 축구 경기도 열린다. 아직까지 스포츠 경기는 남아 있다.
나는 이제 강가에 발길을 끊었고, 다리를 건너지도 않는다. 지하철역이 지척에 있는데도 지하철을 타지 않는다. 우리는 승차가 허락되지 않는다. 지금은 수호자들이 지키고 있고, 우리에겐 그 계단을내려가 강 밑의 지하철을 타고 시내 중심가로 갈 공적인 동기도 없다. 우리가 거기 가고 싶어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가 봤자 좋을 일이 없으니 그들은 이유를 캐려 할 것이다.
교회는 조그맣다. 수백 년 전 이곳에 처음 세워진 건물들 중 하나지만 요즘은 박물관으로만 쓰고 있다. 


모이라가 저 바깥 어딘가에 있다. 마음대로 활보하고 있거나 아니면 죽었으리라. 모이라는 도대체 무슨 짓을 할까? 그녀가 벌일 거라떠오르는 일들이 점점 부풀어서 방 전체를 가득 채웠다. 언제 건물을 산산조각 내는 폭발이 일어날지 모른다. 창문 유리가 부서져 방안으로 쏟아져 내리고 문이 활짝 열어젖혀질지 모른다.... 모이라에게는 이제 힘이 있었다. 그녀는 해방되었다. 스스로를 해방했다.
이제 그녀는 풀려난 여성이었다.
우리는 그 사실이 공포스럽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모이라는 마치 양쪽이 툭 터진 엘리베이터 같았다. 우리는 현기증이 났다. 우리는 이미 자유에 대한 미각을 잃어버리고 있었다. 벌써부터 이 벽들이 안전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대기권 상층부로 올라가면 사람은 산산조각으로 분해되고 휘발해 버리지 않는가. 형체를한데 묶어 붙들어줄 기압이 전혀 없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이라는 우리의 판타지였다. 우리는 그녀를온몸으로 껴안았으며, 그녀는 우리 곁에 비밀스럽게 언제나 낄낄거•리는 웃음소리로 존재했다. 모이라는 일상의 딱딱한 암반 아래로 이글이글 흐르는 용암이었다. 모이라에 비하면 아주머니들은 별로 무섭지 않았고, 오히려 훨씬 더 우스꽝스런 존재로 여겨졌다. 아주머니들의 권위는 흠집이 났으니까. 그들은 변기에 처박혀 달갑지 않은일을 억지로 해야 하는 사람들이었다. 우리는 그런 뻔뻔스런 대담함이 좋았다.

기록해 놓으면, 그때는 또다시 머릿속에서 재구성한 이야기가 되어버릴 터이다. 그래서 또 한발 진실에서 물러서게 될 것이다. 무언가를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말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말이란 결코 정확할 수 없으며 언제나 뭔가 빠뜨리기 때문이다. 현실에는 너무 많은 단편들이 있고, 관점들이 있고, 반목들이 있으며, 뉘앙스가 있다.
이런 의미도 저런 의미도 될 수 있는 몸짓들이 너무 많고, 말로는 절대로 완벽하게 표현할 길 없는 형상들도 너무 많으며, 허공에 떠다니거나 혀끝에 감도는 향(香)도 수없이 많고, 어중간한 색채들도 한•없이 많다. 

하지만 이 글을 읽는 당신이 혹시 남자라면, 그리고 여기까지 포기하지 않고 읽어 왔다면, 제발 명심해 달라. 
당신은 여자로서, 남자를 용서해야만 한다는 유혹이나 기분에 절대 시달리지 않을것이란 사실을 잊지 마라. 
정말이지 그런 충동은 참으로 거역하기가 힘들다. 하지만 용서 역시 일종의 권력이다. 용서를 구하는 일 역시 권력이며, 용서를 유보하거나 베푸는 일 또한 일종의 권력이다. 아마 그만큼 커다란 권력은 없을 것이다.

어쩌면 이 모든 일은 통제의 문제가 아닐지 모른다. 누가 누구를 소유하고, 누가 누구한테 어떤 짓을 해도, 심지어 살인을 해도 벌을 받지 않아도 된다든가 하는 그런 문제가 아닐지 모른다. 누구는 앉을 수 있고 누구는 꿇어앉거나 일어서거나 다리를 활짝 벌리고 드러누워야 한다는 문제가 아닐지 모른다. 

진짜 문제는 누가 누구한테 어떤 짓을 저질러도 용서받을 수 있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결국 다 마찬가지라는 말만큼은 절대 내 앞에서 하지 마라.

우리 후손들에게는 지금보다 훨씬 더 좋은 세상이 올 거야. 리디아 아주머니는 말했다. 
여자들은 모두 한 가족이 되어 조화롭게 살게 될 거야. 여러분들은 그 집의 딸 같은 존재가 될 테고. 출생률이 다시 일정 수준을 회복하면 이 집 저 집으로 옮겨다니지 않아도 될테지. 인력이 많아질 테니까. 이런 상황에서 진정한 애정의 유대가 생겨날 거야. 그녀는 애교를 떨며 우리에게 눈을 찡긋해 보였다. 
공통의 목표를 위해 연대한 여인들! 각자 맡은 일을 수행하면서, 자질구레한  집안일들을 서로 도와 기나긴 인생 길을 함께 걸어가는 여인들. 

어째서 한 집안의 살림을 꾸려나가는 고귀한 일을 한 여자가 도맡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느냐 말이야? 그건 합리적이지도, 인도적이지도 않아. 
여러분의 딸들은 훨씬 더 큰 자유를 누릴 거야. 우린 지금한 사람이 작은 정원을 하나씩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어. 여러분 모두에게 정원이 하나씩. 

나는 그 이야기도 털어놓았다.
그들이 동결시킨 거야. 그녀가 말했다. 
내 것도 마찬가지야. 여성단체의 카드도 마찬가지야. 
M*이 아니라 F라는 글자가 박힌 계좌는 전부 그래. 몇 번 단추만 누르면 되는 일이야. 우리는 철저히 차단당한 거야.

하지만 은행에 2000달러나 입금해 두었는데, 나는 말했다. 세상에 중요한 게 내 계좌밖에 없다는 듯이.

여자들은 더 이상 재산을 가질 수 없게 됐어. 새로 입법된 법이야.
오늘 TV 켜 봤어?
아니.
TV에 나와. 하루 종일 나오고 있어. 

이상하지만 어떤 면에선 들떠 있었다. 자기는 오래전부터이런 일을 예상하고 있었는데 보란 듯이 들어맞았다는 것처럼. 
오히려 이전보다 훨씬 더 생동감 넘치고 결연해 보였다. 
루크가 너 대신
‘컴퓨카운트‘를 사용할 수 있어. 네 계좌 잔고를 그의 명의로 이체할거래 적어도 그들 말로는 그래, 남편이나 가장 가까운 친척이.

하지만 너는 어떻게 하니? 그녀에게는 남편도 친척도 없었다.
지하로 들어갈 거야. 그녀는 말했다. 동성애자들 몇 명이 우리 계좌번호를 위임 받아서 필요한 물건을 사줄거야.
하지만 왜? 왜 이런 짓을 한 거지?

왜 그랬는지 따지는 건 우리 몫이 아니야. 
모이라가 말했다. 
그들입장에서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거야. ‘컴퓨카운트‘와 직장을 한꺼번에 빼앗아야 했던 거지. 안 그랬으면 지금쯤 공항이 어떻게됐겠어? 우리가 어디로든 가 버리는 건 그들이 원하는 바가 아니야.
내기를 걸어도 좋다고.

나는 딸아이를 데리러 학교로 갔다. 나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조심스럽게 운전을 했다.

 루크가 퇴근했을 무렵 나는 부엌 식탁에 앉아 있었다. 딸아이는 한쪽 구석에 있는 자기 책상에서 펠트 펜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거기 있는 냉장고 옆에 딸애가 그린 그림들을 테이프로 붙여두고 있었다.
루크는 내 곁에 무릎을 꿇고 앉아 나를 안아 주었다.
소식 들었어. 집에 오는 길에 자동차 라디오에서 걱정 마. 임시조치일 거야.

어쩌면 은밀한 비밀을 자기만 알고 있다는 데서 만족감을 느끼는사람인지도 모른다. 옛날 표현을 빌자면, 내 꼬투리를 잡고 있다는 사실을 즐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 종류의 권력은 딱 한 번밖에쓸 수 없기 때문에 아껴두어야 한다.
하지만 그럴 사람은 아니라고, 더 좋게 생각하고 싶다.

내가 직장을 잃은 그날 밤, 루크는 사랑을 나누고 싶어했다. 나는왜 기분이 내키지 않았을까? 절망감에라도 루크에게 달라붙었어야하는데, 하지만 여전히 온몸이 무감각했다. 내 몸을 만지는 그의 손길조차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왜 그래? 그가 물었다.
나도 몰라. 내가 대답했다.
우리에겐 아직도...……. 하지만 그는 우리에게 아직 뭐가 남았는지 말을 끌지는 못했다. 

갑자기 나는 루크가 ‘우리‘라는 말을 쓸 자격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아는 한, 루크는 아무것도 빼앗긴 게없었다.

우리에겐 아직도 서로가 있잖아. 내가 말했다. 그건 사실이었다.
그런데 왜 그때 내 말투는, 내 귀에조차 그렇게 냉담하게 들렸을까?
그때 루크는 내게 키스했다. 내 입에서 그 말이 나온 이상, 이제판사가 괜찮아질 거라는 것처럼. 

하지만 뭔가가 달라졌다. 어떤 균형이 무너졌다. 나는 쪼그라든 기분이 들었고, 그가 팔을 내게 두르고 안아 올렸을 때는 인형처럼 작아진 듯이 느껴졌다. 사랑이 나만버려두고 저만치 앞으로 달려나가 버린 느낌이었다.
그이는 마음에 걸리지 않는 거야. 그이는 전혀 마음 쓰지 않아. 

쩌면 오히려 잘됐다고 여길지도 몰라. 우리는 더 이상 서로의 것이아니야. 이젠 내가 그의 것이 되어 버린 거야.
무가치하고 부당하고 비현실적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일어나 버린 일이다.
그래서 루크 지금 당신한테 묻고 싶은 건, 내가 정말 알고 싶은건. 이런 거야. 내가 정말 옳았던 거야? 우리는 한 번도 그 일을 서로털어놓고 이야기하지 않았잖아. 그 말을 꺼낼 수도 있었을 즈음나는 겁이 났어. 당신까지 잃어버릴 수는 없었으니까.

오늘 밤에는 철저히 격의 없는 모습이다. 상의는 벗어던지고 팔꿈치는 책상 위에 놓았다. 한쪽 입에 이쑤시개만 하나 물고 있으면 판화로 찍은 농촌 지방 선거 홍보 포스터의 모델 같다. 얼룩얼룩한 배경에, 타 버린 낡은 책들 몇 권 내 앞 게임판 위에 놓인 사각형은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나는 오늘 밤 아껴두었던 회심의 일격을 가한다.
Zilch‘ 라는 단어를 만든다. 값비싼 Z가 들어간 아주 유용한 모음 한개짜리 단어다.
"그게 단어 맞소?" 사령관이 묻는다.
"사전에서 찾아보면 되잖아요. 고어예요."
"그건 당신한테 내주지." 그가 말한다. 그리고 미소를 짓는다. 사령관은 내가 귀를 쫑긋 세우고 재롱을 부리려 안달하는 착한 애완동물인 양, 탁월한 수를 두고 나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면서 아주 좋아한다. 
그의 평가는 따뜻한 목욕물처럼 나를 감싼다. 
남자들에게서 느끼는, 심지어 가끔은 루크한테서도 느낄 수 있던 적대감이 그에게선 전혀 감지되지 않는다. 그는 머릿속으로 ‘나쁜 년‘이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는 정말 아빠 같은 느낌이다. 내가 즐거워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그는 기뻐한다. 그리고 나는 정말 즐겁다. 정말, 정말로. 그는 능숙하게 우리의 최종 점수를 포켓 컴퓨터로 정산한다.
"이번 판은 당신이 쓸었군."
나는 그가 내 비위를 맞추기 위해, 내 기분을 좋게 만들어주기 위

스마일 배지 그림이 장마다 맨 위에 인쇄되어 있는 메모지 공책이었다. 아직도 이런 걸 만들고 있구나.
나는 문구를 머릿속에서, 내 옷장 속에서 복사해 꼼꼼하게 한 자한자 적는다. 

Nolite te bastardes carborundorum, 여기 이곳에서이런 맥락에서 보면 이 글은 기도도 아니고 지령도 아니고 그저 휘갈겨 끼적거린 후 버려둔 서글픈 낙서일 뿐이다. 

내 손가락 사이에 쥐어진 펜은 육감적이고 생명체처럼 살아 움직인다. 펜의 권력이 편이 내포하고 있는 글의 권력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펜은 질투를 불러 일으켜, 리디아 아주머니는 또 다른 센터의 구호를 인용하며 그런 물건을 가까이하지 못하도록 우리에게 경고했다. 

그들의 말은 옳다. 편은 질시의 마음이다. 펜을 들고만 있어도 시기심이 샘솟는다.
나는 펜을 가지고 있는 사령관을 실시한다. 펜 또한 내가 훔치고 싶은 물건이다.

사령관은 스마일 배지가 그려진 종이를 받아들고 그걸 바라본다.

그러더니 큰 소리로 웃기 시작하는데, 지금 얼굴이 붉어진 건가?

"그건 진짜 라틴어가 아니오. 그냥 농담이지."
"농담이라고요?"
나는 어리둥절해진 채 묻는다. 단순한 농담일 리가 없다. 이런 위힘을 무릅쓰고 알려고 손을 뻗었는데, 기껏해야 농담이라고?

"어떤 농담이죠?"
"남학생들이란 족속들이 원래 그렇잖소."
그의 폭소는 향수에 젖어 있다. 
이제야 알겠다. 그 웃음은 옛날의 자신을 너그럽게 돌아보는 폭소였다. 

시작해야 한다‘는 게 그들의 모토였다. ‘한시라도 낭비해선 안 되니까. 하지만 그래도 그 애들은 기억하리라. 그리고 앞으로 3년, 4년,
5년 동안은 그다음에 결혼할 처녀들도 기억하리라. 
하지만 그다음 처녀들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겠지. 
그들은 평생 흰옷을 입고 여자아이들끼리 살아왔을 테니까. 언제나 침묵을 지켰을 테니까.

우리는 빼앗은 것보다 더 많이 주었소. 
사령관이 말했다. 전에 일마나 골치가 아팠는지 생각해 보시오. 
독신 전용 술집이니, 품위 없는 고등학교 미팅 같은 것들을. 그런 것들을 육체 시장이라고 했지.
쉽게 남자를 얻는 여자들과 그렇지 못한 여자들 사이의 괴리감 같은게 기억나지 않나? 
어떤 여자들은 절망해서, 죽도록 굶어 말라깽이가 되거나 가슴에 실리콘을 넣어서 풍만하게 만들기도 하고 코를 깎아내기도 했소. 그 비참함을 생각해 보라고.

그는 낡은 잡지들이 쌓여 있는 쪽을 손짓했다. 그들은 불만투성이지. 이게 문제고, 저게 문제고, 개인 광고란의 광고 기억하오? ‘총명하고 매력적인 여인, 서른다섯・・・・・・ 그들은 모두 이런 식으로 남자들을 얻었소.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말이오. 그리고 결혼을 한 뒤에는 자식을 하나둘 낳고, 남편은 신물이 나서 그냥 사라져 버리면,
여자들은 복지 기관에 신세를 져야 했소. 
안 그러면 남편이 식구들을 두들겨패기도 했지. 여자가 직장을 가지고 있으면, 아이들은 탁아소나 야만적이고 무식한 여편네한테 맡겨야 했지. 그리고 그 한심한 봉급에서 가정부 월급을 직접 줘야 했단 말이오. 
누구를 막론하고 돈이 인간의 값어치를 매기는 유일한 기준이었고, 엄마로서 응당

받아야 할 존경 받지 못했소. 아예 엄마 노릇을 안 하겠다고 두 손두발 든 것도 무리가 아니요. 
지금 같은 방식이라면 그들은 보호받을 수 있고, 평화롭게 생물학적으로 주어진 운명을 성취할 수 있소.
전폭적인 지원과 격려를 받으면서 말이오. 자, 이제 말해 보시오. 당신은 지적인 사람이니 의견을 듣고 싶소. 우리가 간과한 게 뭐라고생각되시오?

사랑이요 내가 말했다.
사랑? 사령관이 말했다. 어떤 종류의 사랑 말이오?
사랑에 빠지는 것. 내가 말했다. 사령관은 그 천진한 소년 같은 눈길로 나를 바라보았다.
오 그렇소. 그가 말했다. 나도 그 잡지들을 읽었소. 그 잡지들에서 추구하던 게 그런 것이지? 안 그렇소? 하지만 통계를 보시오, 아가씨. 정말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소? 사랑에 빠질 만한 가치가? 중매결혼도 언제나 연애 결혼만큼이나 성과가 있었소. 적어도 나으면 나았지 못할 건 없소.

사랑이라. 리디아 아주머니는 혐오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그런 짓하다 걸리면 큰일 날 줄 알아. 여기서 쓸데없이 엉덩이 까고 나쁜 짓하면 큰일 나, 그녀는 우리를 향해 손가락을 까딱거리면서 말했다.
사랑은 중요치 않아.
역사적으로 말하면, 그 시절은 그저 돌연변이에 불과하오. 사령관은 말했다. 어쩌다 보니 잠깐 그렇게 됐을 뿐이지. 우리가 한 일은

다시 주위를 돌아본다. 처음 생각과 달리 남자들은 같은 무리가 아니다. 분수 너머 저쪽으로는 일본인들 무리가 연한 회색 정장을입고 있고, 저 멀리 구석에는 하얀 옷을 입은 중동인 한 무리가 있다. 그들은 그네들 고유의 기다란 목욕 가운 같은 옷을 입고 터번을 두른 데다 줄무늬의 머리띠를 하고 있다.
"여기가 클럽인가요?"
‘뭐, 우리끼리는 그렇게 부르지. 클럽이라고."
‘이런 일은 엄격히 금지되어 있는 줄 알았는데요."
"글쎄, 공식적으로는 그렇지만, 결국은 다들 사람이니까."
나는 그가 이 말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길 바라지만, 그는입을 꾹 다물어 버린다. 그래서 내가 먼저 말을 꺼낸다.
"무슨 말씀이세요?"

‘자연은 속일 수가 없다는 말이오. 자연의 섭리에 따르면 남자들에겐 다양한 여성이 필요하오. 그건 이치에도 부합하고, 번식 전략의 일환이기도 하지. 자연의 계획이란 말이오."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말을 계속한다.
"여자들도 그걸 본능적으로 알고 있소. 그게 아니면 왜 옛날에 그렇게 각양각색의 옷들을 많이 사 댔겠어? 남자들로 하여금 자기가 서로 다른 여자들이라고 생각하게 하기 위한 일종의 속임수였지. 매일매일 새로운 여자라고 느껴지도록 말이야."
그는 진심으로 믿는 듯이 말한다. 사실 그는 이런 식으로 하는 말들이 많다. 어쩌면 그런 말들을 정말 믿는지도 모른다. 아니, 사실은믿지 않는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믿는 동시에 믿지 않는지도 모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가족은 서로를 위한 대리로 살아가는 존재일 것이다
그러고보면 인생의 어느 중요한 결정을 두고, 나는 아내의 동의를 구한 일이 별로 없다. 오늘 저녁엔 뭘 먹을까 하는 사소한 말은 주고받으면서도 정작 더 중요한 일들을 제대로 상의하지 않았다. 홀로 고민하고 결정하고, 통보하는 식이었다. 
대학을 그만둘 때도 "나 대학에서 나와도 될까?"가 아니라 "나 대학에서 나오려고 해"라고 말했다. 아내는 나의 결정을 존중해 주었지만, 만약 그러지 않았다고 해도 어쩔수 없었던 것이다.
나는 아내에게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믿어달라고 자주 말했다. 가족이 가진 삶의 무게를 온전히 내가 감당하고 끌어올려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잘되지 않았고 그것이 오히려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 
함께 있으면서도 외롭고, 서로를 바라보며 지쳐갔다. 
나는 아내와 아이를 위한 대리인생을 살아가는 동시에, 또 그들의 삶을 대리로 격하해 버렸는지도 모른다. 
가족 중 그 누구도 주체로서 살아갈 수 없게 만들었다. 그렇게 ‘가족‘에 대한 고민이 시작되었다.

어느 날 새벽에 아내는 어디냐고 묻고는 나를 픽업하러 왔다. 아이는 잠들었고 내가 늦게까지 오지 않아 걱정되었다고 했다. 
그때 나는 1시간은 걸어갈 각오를 하고 있었기에 정말 고마웠다. 그래도 두 돌이 된 아이를 두고 밖에 있는 것이 걱정되어 서둘러 차를 몰았다. 가는 동안 아내는 일을 그만두면 안 될지를 물었다. 그래서 나는 어디에서나 내가 대리로 살아가고 있음을 알게 되었고 그것을 글로 쓰겠다


사회는 우리를 ‘대리인간‘으로 만든다. 나아가 소중한 사람들에게 희생을 강요하게 한다. 

그러한 대리사회의 욕망은 결국 모두를 집어삼키고, 주체로서의 자리 역시 빼앗는다.
 하지만 그러한 고난의 시간을 추억으로 남겨서는 안 된다.
 대학에서 10년 가까이 연구자로 있는 동안, 외로운 한 존재를 바라보는 이들은 그보다 더 외롭다는 것을 알았다. 조금 더 일찍 알았더라면 그들이 상처받기 이전에 ‘고맙다‘거나
‘사랑한다‘고 말해 주었을 것이다. 그 시간이 지나가면 모두 추억이될 것이라 믿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원주와는 달리 나의 발이 되어주는 수단 무엇보다 광역버스‘는 정말 감사한 존재였다. 김포 남분당 어디 할 것 없이 서울 광역버스가 반드시  있었다.
그래서 12시 이전에만 운행을 마치면 강남, 사당, 서울으로 돌아가는 광역버스를 탈 수 있었다. 김포에서 합정까지 버스가 15분만에 도착하는 것이 마냥 신기했다. 여러모로 지하보다 나았다.

막차가 끊긴 시간부터 첫차가 출발할 때까지 1시간에 한 번씩 다니는
‘버스‘도 있었다. 처음 탔을 때는 버스를 꽉 채운 사람들이 거의 취객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대부분이 대리운전 기사들이었다. 
다들 한 손에 핸드폰을 들고 먼저 콜을 잡으려고 간절히 화면을 바라보았다. 콜이 들어올 때마다 여기저기서 뻐꾸기 알림음이 났다. 정류장마다 한두명씩은 ‘네. 곧 갑니다‘ 하는 전화를 하면서 내렸고 새로운 사람들이 그만큼 버스에 올랐다.

지하철은 생각보다 늦게까지 다녔다. 판교에서 신분당선 막차가12시 53분까지 있고, 그걸 타면 15분 만에 강남역까지 도착한다. 광교 테크노벨리, 정자역에서 각각 서울로 올라가는 골을 기다리던 대리운전 기사들이 하나둘 막차에 올라탔다. 
강남행 막차에 오르면 승객의20퍼센트는 나와 닮은 아들이었다. 대개는 핸드폰을 손에 꼭 붙잡고

조교 아르바이트에게 명절 선물을 받는 교직원

나는 그동안 명절 선물을 받아본 적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일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2008년 봄부터 2015년 겨울까지 8년 동안 나는 대학에서 언제나 노동자였다. 

학과사무실이나 연구소에서는 행정 노동을 했고 강단에서는 강의 노동을 했다. 학생과 노동자의 경계를 계속 넘나들었다. 하지만 교직원도 교수도 나를 노동자로 인식하지 않았다. 근로기준법에 명시된 최저 수준의 사회보장이 대개 간단히 무시되었지만 학생/연구자니까 당연한 것이 아니냐는 태도였다.

명절이면 교수와 교직원, 그러니까 정규직들에게는 학교마크가 선명한 명절 선물이 나왔다. 그들은 그것을 들고 고향으로 갔다. 그들이게 상여금이나 교통비 명목의 명절 보너스가 따로 지급되었는지는 잘모르겠다. 다만 대학원생 조교들은 마지막까지 학과사무실에 남아 있다가 문을 잠그고 퇴근했다. 
나는/우리는 명절에도, 그리고 명절이 아닌 일상에서도 언제나 대학의 숨은 노동자였다.

작년 명절에도 대학으로부터 아무것도 받지 못했다. 휴강하지 말라는 권고가 선물이라면 선물이었다. 
그런데 추석을 일주일 정도 앞두고 면담을 신청한 학생이 있었다. 대학 부처에서 근로조교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는 그는 고민이 있다면서 나에게 카카오톡 대화창을 보여주었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었다.
*1인당 3만 원씩 걷어서 교직원 선생님들 추석 선물을 사드립시다.
우리에게 아버지 같은 분들인데 이 정도는 당연히 해야겠죠?"


나는 기독교 문학을 주제로 학위 논문을 썼다. 딱히 종교가 없으면서도 기독교와는 그렇게 인연을 맺었다. 논문을 쓰면서 성경을 종종읽었는데, ‘신명기‘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그 품삯을 당일에 주고 해 진 후까지 미루지 말라. 이는 그가 가난하므로 그 품삯을 간절히 바람이라."

품삯을 당일에 주고 해 진 후까지 미루지 말라는 것은 성경에 명시된 ‘율법‘이다. 
나는 이 대목을 읽었을 때 정말이지 기뻤고, 많은 위로를 받았다. 그 시기에도 노동의 대가를 제때 지불하는 것의 중요성을 모두 알았고, 그것이 노동자를 주체로 대하는 방식임을 알았던 것이다. 
하지만 오히려 지금, 합리와 상식으로 가려진 구조 안에서 개인/노동자는 더욱 주체성을 잃고 소외된다. 
말하자면 주체가 아닌 대리가 되어간다. 이것은 우리 시스템의 문제인 동시에, 창작자/연구자의 수고로움을 노동으로 여기지 않는 개개인의 문제이기도 하다.

나는 두 달 전에 쓴 글의 원고료와 어제 한 대리운전의 품삯을 같은날 지급받는다. 어느 편이 더 상식과 합리인지는 명확하다. 타인의 운전석이, 우리가 믿는 그 어느 합리적인 공간보다도 오히려 더 인간을 주체로서 대우한다.


타인의 즐거움을 보며 대리로서 즐거워야 한다핀, 역설적으로 나는/우리는 지금 그만큼 즐겁지 않다는 것이다. 

현실이 만족스럽다면 남들이 먹고 노래 부르는 것에 지금처럼 필요 이상으로 열광할 이유는 없다. 결국 많은 이들이 새벽에 연구실에 앉아서 기약 없는 논문을 씨 내려가는 것만큼이나 외롭거나, 아니면 절박한 심정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이전에는 출연자들이 외국을 배경으로 평생 먹을 일이 없을 것만 같은 미국적인 음식을 먹고 즐겼다. 하지만 지금은 우리 주변의 맛집이나 거리로 간다. 평범한 냉장고에서 누구나의 집에 있을 법한 재료를 꺼내 몇 분 만에 요리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일상의 공간에까지 이제 그들은 침투했다. 그리고 익숙함을 무기 삼아 우리에게 다가와서는 묻는다. 

"우리는 이렇게 즐겁고 행복한데, 너도 그렇지?"
그들은 가장 익숙한 공간에서 즐거워하고, 우리는 그들을 지켜본다. 그러면서 삶의 고단함과 절박함을 잠시 잊는다. 
익숙한 공간이 재현되며 이전보다 더욱 주체가 되어 함께 그 즐거움에 동참하는 듯하다. 하지만 그러한 대리만족은 오래가지 않는다. 곧 누구에게도 대리시킬 수 없는 허탈함이 찾아온다. 특히 자신을 둘러싼 사회구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고, 남들처럼 즐거울 수 없는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
고 여기게 된다. 
일상을 특별하게 재현한 지금의 먹방은 보는 이들 더욱 외롭게 만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러고 보면 누구에게나 언제 어느 상황에서든 주체로서 존재해야 할 소중한 공간이 있다. 

나의 어머니는 내가 어린 시절에 친구의 집에놀러 갈 때면 
냉장고 문을 함부로 열지 말 것을, 
그리고 그 부모님이주무시는 안방의 침대에는 절대 올라가지 말 것을, 
몇 번이고 주차시키곤 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재봉틀과 아버지의 서재 주변에는 원만해서는 어린 나와 동생이 오지 못하게 했다. 어머니 역시 자신의 공간에서 주인이 되고 싶어 했고, 그에 따라 타인의 공간을 존중해 주었던것이다.

운전석에 앉은 대리기사는, 그래서 외롭다. 조수석에 앉은 차의 주인도 함께 외롭고 민망할 것이다. 주인은 손님이 되고 손님은 주인의역할을 대리하며, 그렇게 서로의 가면을 바꿔 쓰고 목적지까지 간다.

이러한 관계의 역전은 모두 겪어본 바가 없고 그래서 어떻게 상대방을 확대해야 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카카오드라이버의 홍보 영상에 등장하는 기사와 손님의 표정은 그러한 위화감을 잘 드러내고 있다.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어색한 공간에서 마주한 이들이 지을 수있는 복잡한 표정일 것이다.
그래도 ‘환대‘는 가능하다. 언젠가 자신을 관악구의 경찰공무원이라고 소개한 이는 나에게 선생님의 차라고 생각하고 편안히 운전해주십시오. 잘 부탁드립니다"라고 했다. 그것은 그 공간에서 일어날 수있는 가장 역설적인 발화이자, 그 뒤틀린 공간의 주체가 베풀 수 있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때늦게의 서문 중에서***

시는 나무나 강이 무엇인지를 말하려고 시도할 수있는 인간 언어다. 즉, 인간의 능력으로 그 대상에
‘대해서‘ 말하는 동시에 그 대상을 위해서 말한다는뜻이다. 시는 개별 인간의 관계를 어떤 대상(돌멩이든 강이든 나무든)과 관련지음으로써 그렇게 할 수도있고, 아니면 그저 대상을 최대한 진실하게 묘사함으로써 그렇게 할 수도 있다.
과학은 외부에서 정확하게 묘사하고, 시는 내부에서 정확하게 묘사한다. 과학은 밖으로 풀어내어 해설하고, 시는 안으로 풀어내어 함축한다. 둘 다 묘사 대상을 기린다. 

우리의 무지나 무책임을 알려주지 못하는 ‘정보‘만 끝없이 쌓지 않으려면 우리에게는 과학의 언어와 시의 언어 둘 다 필요하다.


「어둠의 왼손에서 어슐러는 "어떤 질문이 대답할 수 없는 것인지 배우고, 그런 질문에 대답하지 않는 것. 이것이야말로 압박과 어둠의 사절에 꼭 필요한 기술이다"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세이. 문학비평 강연에서-과학과 환경에 대해서든, 구글과 아마존에 대해서든. 페미니즘과 문학의 정전에 대해서든 자신의 관점을 전달하는 이 영역에서 어슐러는 목소리가 없는 이들을 변호하고, 모든 예술가, 아니모든 사람의 내면에 있는 답 없는 존재를 대변해 말하는 것 같다.

논픽션에 대한 이 대화를 끝내면서 나는 소설, 시, 논픽션이라는 세 장르 모두에 이렇게 깊은 역사를 지닌 사람과 대화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드문 일인지 말했다. 

지금까지의 여정이 얼마나 특별했는지도. 사실은 달리 누구와 이런 일을 또 할 수 있을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이 대화를 책으로 만들어야겠는데요!" 어슐러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리하여 이 책이 나왔다. 

어슐러 K. 르 귄의 사색이 우리의 현실이 되고, 세상에 나온 오브제가 되어 우리 손안에 펼쳐졌다.

맥코이 크리크에서의 사색

단어 안의 의미를 찾다가, 나는 추측했다:그곳 그 성스러운 장소 안에신전이 있음을 온전히 목격하고,
따라서 목격된 바의 제단이 된 신전,
개울 옆 그늘 속에서 나는 사색한다이번 초여름 높은 곳에서 흘러온 큰물이어떻게 물길을 바꿨는지에 대해.
개울 속 커다란 바위 네 개는 제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버드나무들은 무성하기도 하고 죽기도 하고,
범람한 물속에 뿌리를 내리기도 하고 뿌리 뽑히기도 했다.
계곡 위 환한 빛 속에서는까마귀 한 마리가 동쪽에서 서쪽으로 향한다그림자 날개가 까마귀처럼 고요히벼랑 끝 바위를 가로지른다. 사색은나에게 불연속이라곤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는다.
책안을 보았을 때 나는 발견했다.

시간이란 관측되고 구별된 신전시간 자체와 공간이라는 것을—네 개로 나뉜 하늘, 벽에 둘러싸인 땅에성스러운 장소를 만들기 위한 신전연속성에 합류하기 위해, 마음은물을 따라가고, 새들을 좇고,
움직이지 않은 바위를, 절묘한 비행을 관찰한다.
느리게, 침묵 속에서, 말없이,
장소와 시간의 제단이 올라간다.
자아는 사라져, 찬미를 위한 제물이 되고,
찬미 자체도 적막 속에 빠져든다.

게다가 우리 모두가 아마 선거 이후에는 당연히더 강해졌을 텐데, 시대가 굉장히 빠르게 변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고 있죠. 그 변화는 아주 예측하기 어렵고, 상당히 무섭기도 해요. 나쁜 시절에 예술에 일어나는 일은, 특히 언어에술에 일어나는 일은 무엇이든 무척 중요해질 수 있어요. 나쁜시절에는 무슨 말을 하는지가 정말 중요하니까요. 전 그동안제게 아주 중요했던 책, 노자의 도덕경』을 떠올려봐요. 그책은 중국에서 아주 힘든 시절에 나온 산물이에요. 아마 ‘춘추전국시대‘라고 할 텐데요. 내전과 침략이 계속되던 시절이었죠. 그리고 노자는 사실 고국에서 추방된 신세였어요. 노자에 관한 신화에서는 그래서 그 책을 썼다고 해요. ‘바깥 세계‘
로 넘어가기 전에, 국경선에 있는 어느 여관에서 하루인가 이틀 밤을 들여 이 책을 썼다는 거예요. 그래서 전 생각했죠. 그래, 모든 게 나빠지고 있을 때는 그에 대한 증언을 하는 거야.
그리고 그렇게 하고 싶었어요. 제가 정말, 정말 말하고 싶은게 뭔지 알아내야 했죠.

네이먼
그리고 아직 모르는 분이 있으시다면 말이지만, 그 연설은 입소문을 타고 전 세계에서 큰 뉴스거리가 됐습니다.

르 귄
그래요. 그게 제가 잠시 누린 명성이죠. 정말이지 깜짝 놀랐어요. 그 방에 있던 사람들 말고는 아무도 듣지 않을 줄 알았거든요. 그 방에 있던 사람들 중 많은 수가 언론인이고, 이야깃거리를 들으면 알아본다는 사실을 잊었던 거죠.

「사용 설명서」 중에서

시인이 대사로 지명됩니다. 극작가가 대통령으로선출됩니다. 새로 나온 소설을 사려고 건설노동자들이 사무장들과 같이 줄을 섭니다. 어른들이 전사원숭이들, 애꾸눈 거인들, 그리고 풍차와 싸우는 미친 기사들의 이야기 속에서 길잡이와 지적인 도전을 찾습니다. 문해력은 끝이 아니라 시작으로 여겨집니다.
글쎄요. 어디 다른 나라라면 그럴지도 모르지요.
이 나라에서는 아닙니다. 미국에서 상상력이란 보통 TV가 고장 났을 때나 쓸모 있을지 모르는 뭔가로 간주되거든요. 시와 희곡은 실제 정치와 아무 관계도 없습니다. 소설은 학생과 주부, 그리고 일하지 않는 사람들이나 읽는 겁니다. 판타지는 어린아이와 모자란 사람들이나 보는 것이고요. 문해력이란 사용 설명서를 읽을 수 있다는 거랍니다! 저는상상력이 인류가 가진 가장 유용한 도구라고 생각합니다. 마주 보는 엄지의 유용성을 넘어설 정도죠.
저는 엄지손가락 없는 삶을 상상할 수 있지만, 상상력이 없는 삶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책 속의 짐승」 중에서

왜 대부분의 아이와 많은 어른은 진짜 동물과 동물에 대한 이야기 양쪽에 반응하고, 우리의 지배 종교와 윤리들은 인간이 이용할 대상이라고만 보는 존재들에게 매혹되고 또 그들과 스스로를 동일시할까요. 산업사회에서는 예전처럼 우리와 일하지도 않고, 그저 우리 식량의 원재료나 우리에게 이득이 될과학 실험 대상, 동물원과 TV 속 자연 프로그램에서 우리를 즐겁게 해주는 진기한 존재들, 우리의 심리 건강을 개선하기 위해 두는 애완물일 뿐인데?
어쩌면 우리가 아이들에게 동물 이야기를 주고 동물에 대한 관심을 북돋아주는 건, 우리가 아이들을온전한 인간이 아니라 열등한 존재로, 정신적인 ‘원시‘인으로 보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우린 애완동물과 동물원과 동물 이야기들을 어린이가어른으로, 배타적인 인류로 발전하는 길의 ‘자연‘스러운 단계로 보는 거죠. 지성도 없고 무력한 아기에서 시작해서 지적인 성숙과 지배의 영광을 획득하기까지 거쳐야 할 사다리쯤으로요. 존재의 대 사슬만물이 가장 낮은 무생물부터 가장 높은 신까지 계층적으로 연결되어질서를 이룬다는 개념이라는 계통 발생의 단계를 반복하

는 개체 발생이랄까요.
하지만 그 아이가 찾는 건 뭘까요. 아기 고양이를보고 흥분하는 아기, 피터 래빗」을 또박또박 읽는여섯 살짜리, 『블랙 뷰티』를 읽으면서 우는 열두 살짜리라면? 문화 전체가 부정하는데 그 아이는 알아차리는 게 무엇일까요?

「사라지는 할머니들 중에서

예외남자의 소설을 논하면서 저자의 성별을 언급하는경우는 몹시 드물다. 여자의 소설은 저자의 성별과 함께 논의되는 경우가 아주 잦다. 표준은 남성이다.
여성은 표준의 예외, 표준에서 배제된 존재다.
비평에서나 서평에서나 이 예외와 배제를 실천한다. 예를 들어 버지니아 울프가 위대한 영국 소설가라는 점을 인정해야 하는 비평가는 애써 그녀가 예외임을 보여줄 수 있다. 멋진 요행이라고 말이다.
예외와 배제의 수법은 다양하다. 여자 작가는 소설의 ‘주류‘에 속하지 않음이 드러난다. 그 작가의 글은 ‘독특하며 후대 작가들에게 아무 영향을 미치지않는다. 어떠한 ‘컬트‘의 대상이다. 그녀는 (매력적이고, 우아하며, 마음을 저미고, 감성적인) 연약한 온실의 꽃이며 그러니 남성 소설가의 강력하고, 선이 굵고, 대가다운) 활력과 경쟁한다고 보아서는 안 된다.
제임스 조이스는 거의 나오자마자 정전에 올랐다.
버지니아 울프는 정전에서 배제되거나 마지못해 받아들여졌으며 그러고도 수십 년간 의구심을 샀다.
정교하고 효과적인 서술 기법과 장치를 갖춘 『등대

로」가 기념비적으로 막다른 길인 『율리시스』보다후대의 소설 쓰기에 미친 영향이 훨씬 크다는 주장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침묵, 유배, 교묘함‘을 선택하고 은둔 생활을 한 제임스 조이스는 스스로의 글과 경력 외에는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는다. 버지니아 울프는 자기 나라에서 지적, 성적, 정치적으로활발한 사람들이 이루는 비범한 집단으로 꽉 찬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어른이 된 후 내내 다른 작가들을 읽고, 서평을 쓰고, 출간했다. 제임스 조이스가 연약한 쪽이고, 버지니아 울프가 굳센 쪽이다.
조이스가 컬트의 대상이고 우연이며, 울프는 20세기 소설의 중심에서 지속적으로 풍부한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정전주의자들은 결코 여자에게 중심을 부여하지 않는다. 여자들은 반드시 주변에 남겨져야한다.
어떤 여자 소설가가 1급 예술가라는 사실이 인정되더라도, 배제 수법은 여전히 작동한다. 제인 오스틴은 존경을 많이 받지만, 그래도 어떤 본보기로 여겨지기보다는 독특하고 흉내 낼 수 없는 놀라운 우연으로 여겨질 때가 많다. 실종될 순 없어도, 완전히포함되지도 않는다.
작가의 생존기에 일어나는 폄하, 누락, 예외는 작가의 죽음 이후 일어나는 실종의 준비 작업이다.

진지한 문학에 대하여

밤중에 뭔가가 그녀를 깨웠다. 계단을 올라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젖은 운동화를 신고 아주 천천히 게단을 오르는...... 그런데 누구지? 왜 신발이 젖었지? 비는 오지 않았는데, 저기, 다시 그 무겁고 젖은 발소리다. 하지만 몇 주 동안이나 비가 오지 않았는데, 폭염만 계속됐는데, 갑갑한 공기와 곰팡이 냄새, 아니 썩은 내인가, 아주 오래된 살라미 아니면 초록색이 되어버린 간 소시지에서 나는 것 같은 달콤한 썩은 내. 아, 또다. 빽빽 소리가 나는 느린 발걸음, 그리고 썩은 냄새가 더 강해졌다. 뭔가가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문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썩어가는 살을 뚫고 나온 발꿈치뼈가 부딪치는소리를 들으며 그녀는 그게 뭔지 알아차렸다. 하지만 그건 죽었는데, 죽었단 말이야! 저주받을 셰이본. 다른 진지한 작가들과 힘을 합쳐 그것의 오염된 손길에서 진지한 문학을 구하기 위해 묻어놓았더니 그걸 무덤에서 끌고 나왔어. 그텅빈 데다 뾰루지투성이인 얼굴, 썩어가는 눈동자의 무감각하고무의미한 눈길이 얼마나 무서운지! 셰이본 그 바보는 뭘 한다고 생각한 거야? 진지한 작가들과 진지

한 비평의 끝없는 의식들에 관심도 안 둔 거야? 공식적인 추방 의식들에 반복된 저주, 심장을 관통하고 또 관통한 말뚝들, 신랄한 비웃음, 무덤 위에서끝도 없이 춘 엄숙한 춤들에 하나도 관심을 안됬어? 그 작자는 야도Yinddo, 뉴욕의 예술가 커뮤니티의 순결을 보존하고 싶지 않았던 거야? 사이파이와 반리얼리즘 소설을 구별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이해도못 한 거야? 코맥 매카시는 비록 터무니없이 애매한 어휘를 훌륭하게 사용해대는 걸 빼면, 그의 책에있는 모든 것이 홀로코스트 이후에 나라를 가로지르는 사람들을 다룬 많고 많은 초기 SF 작품들과 놀랍도록 흡사하긴 하지만, 그렇다 해도 결코 어떤 상황에서도 사이파이 작가라곤 할 수 없다는 걸, 코맥매카시는 진지한 작가고 그러니까 정의상 장르를 쓴다는 품위 떨어지는 일을 할 수가 없다는 걸 이해하지 못한단 말이야? 셰이본은 어떤 미친 멍청이들이 퓰리처상을 줬다는 이유만으로 ‘주류‘라는 말의성스러운 가치를 잊어버렸단 말이야? 아니다, 그녀는 빽빽 젖은 발소리를 내며 침실까지 들어와서 이제는 그녀를 굽어보는 그 물건을 쳐다보지 않을 것이다. 로켓 연료와 크립토나이트슈퍼맨의 고향 크립톤에서 온 물질로, 슈퍼맨의 힘을 약화한다의 악취가 풍기고, 세찬바람 속 황야의 낡은 저택처럼 삐걱거리며, 뇌는 과일처럼 속에서부터 썩어가고, 두 귀에서 작은 회색

세포들을 뚝뚝 흘리는 그 물건을. 하지만 그녀의 주목을 요구하는 그 물건의 힘은 강력하고, 그 물건이손을 뻗자 그녀는 반쯤 썩은 손가락 하나에 낀 타는 듯한 금반지를 보았다. 그녀는 신음했다. 어떻게그 물건을 그렇게 얕은 무덤에 묻고는, 버려두고 그냥 걸어올 수가 있었을까? "더 깊이 파요, 더 깊이파!" 그렇게 외쳤건만, 그자들은 그녀의 말을 듣지않았다. 그래서 이제 그자들은 어디 있단 말인가?
그녀에게 꼭 필요한 다른 진지한 작가와 평론가들은 지금 어디 있나? 그녀의 『율리시스』 책은 어디있을까? 침대 옆 협탁 위에는 독서등을 받치는 데쓴 필립 로스 소설책 한 권밖에 없었다. 그녀는 그얇은 책을 들어 끔찍한 골렘히브리 신화에서 사람의 형상을하고 움직이는 존재. 현대 판타지에서는 종종 마법의 힘으로 움직이는흙 인형이나 괴물을 가리킨다 앞으로 들어 올렸다. 그러나그걸로는 부족했다. 필립 로스도 그녀를 구할 순 없었다. 괴물이 비늘 덮힌 손을 그녀에게 얹자 반지가타는 석탄처럼 그녀를 지켰다. 장르가 그녀의 얼굴에 시체의 입김을 불어넣자 그녀는 지고 말았다. 그녀는 더럽혀졌다. 죽는 편이 나을지 몰랐다. 그녀는이제 결코 문예지 집필 의뢰를 받지 못할 것이다.

환상 속 세계의 리듬부터 현실의 깊은 울림까지그만의 상상력으로 우리 행성을 기렸던어슐러 K. 르 귄의 마지막 목소리

지구에서 소멸하고 있는 ‘인간‘ ‘상상력‘ ‘여성의 글쓰기‘를 바라보는 어슐러 K.
르 권의 시각은 그 자체만으로도 다분히 SF적이다. 세상의 불균형을 해결하기 위해 모두가 SF를 읽어야만 할 것 같은 이 담대하고 유쾌한 인터뷰가 SF에 대한 겁근으로 그리고 세상을 바라보는 다른 시각의 접근으로 모두에게 읽히기를 소망한다.
-천선란 소설가

작가 인생의 마지막에 데이비드 네이먼과 주고받은 이 대화를 번역하다 보니 오래전에 부친 편지의 답장이 아주 늦게 도착한 것 같은 기분을 맛볼 수 있었다. 인터뷰 전체가 글쓰기에 집중하고는 있지만, 짧은 답변에서도 켜켜이 묵은 고목 같은 작가의 삶 전체가 배어나기 때문이었다.
「옮긴이의 말」에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