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보다 후대에 제작된 소설들이 오히려 무협지처럼 지나치게 과장된 이야기를 들려주는 반면, 이 소설은 임진왜란 이후부터 청나라의 침입 이전까지의 어수선한 세월 속에서 정말 있을 법한 사실을 서술하고 있다. 최척전」은하 수상한 세월의 풍파 속에서 민초들의 삶이 얼마나 서글펐는지를, 그리고 사람의 마음이란 시공간을 초월하여 모두 비슷하다는 점을 다시금 우리에게 일깨워 준다.

작자 조위한趙韓(1567~1649)은 이 이야기를 쓰게 된 경위를 소설의 끝에 기록해 놓았는데, 이는 이야기의 시작을 알리는 대목 같기도하다.

아! 부모 자식, 부부, 시아버지와 장모, 형제 등 온 식구가 네 나라에흩어져 20여 년간 한스럽게 살았고 적의 나라에 살면서 위험한 상황을 몇 차례나 겪었지만, 마침내 다시 모여 화목한 가정을 이루었으니과연 뜻대로 되지 않은 일이 하나도 없도다! 이 어찌 사람의 힘으로될 일이겠는가! (...)내가 남원 주포에 살고 있을 때 최척이 때로 찾아와 자기가 겪었던 일을 말해 주며 그 사연을 기록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내 그가 겪은 기이한 일이 혹시 잊히거나 잘못 전해질까 염려하여 대략 줄거리를 기록하였다. 1621년 2월에 조위한 쓰다.
-「최척전」 중에서

행복을 원하고 살기를 바라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세상사는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기에, 우리는 늘 이상과현실 사이에서 괴리감을 겪는다. 아마도 부조리라는 것은 그러한 상황을 지칭하는 말이리라.
최척은 본래 남원 사람으로,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글을 배우러 간집에서 아름다운 여인(옥영)을 보고 사랑에 빠진다. 둘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후 결혼하게 되고, 이후 행복한 결혼 생활을 보내며 첫 아이 몽석을 얻는다. 그러나 1597년 일본이 다시 조선을 침입하는 정유재란이 일어나고, 최척은 피란길에서 아내와 아들 몽석을 잃어버리

게 된다. 최척은 명나라 여유문에 의해 좋은 평가를 받아 함께 중국으로 건너간다. 이후 중국을 유람하기도 하며 다른 삶을 살아가던 최은 주우리는 친구와 함께 배를 타고 무역 일을 하면서 이곳저곳을 떠돌게 된다.
한편 최척의 아내 옥영은 남장을 한 상태에서 포로로 붙잡혀 살아있었다. 돈우라는 일본군 병사의 포로가 되었는데, 그는 옥영을 죽이지 않고 자신의 집안일과 무역 일을 돕도록 부탁한다. 일반적인 임진왜란이야기에서는 일본군의 잔학한 면모만 부각되는 것에 비해, 『최척전」은 당대에 쓰인 책이면서도 일본인 병사 중에도 인간적이고 착한 사람이 있다는, 상당히 파격적인 설정을 보여 준다. 옥영과 돋우는어느 날 무역을 위해 멀리 안남, 지금의 베트남에 이르게 된다.
이 무렵 최척도 안남에 무역을 하러 들르게 되고 울적한 심정에 평소 자신이 부르던 노래를 피리로 연주하는데, 저 멀리 정박한 배에서그에 맞추어 조선말로 시를 읊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 시는 신혼 시절옥영이 지었던 것으로, 두 사람은 설마 하는 심정에 다음 날 서로를찾아 나서고, 결국 재회하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헤어짐과 만남의 과정은 아직 끝이 아니었다.
두 사람은 이후 중국에 정착하여 다시 아들을 낳았는데 꿈에서 신선을 보았다 하여 몽선이라 이름 지었다. 첫째 아들 몽석은 이미 이세상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으므로, 동선을 아끼는 그들의 마음은더욱 컸다. 시간이 흘러 어느덧 몽선은 성인이 된다. 이때 동네에 살던 홍도라는 중국 아가씨가 몽선과의 혼인을 간곡히 부탁하는데,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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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에 묘지로 들어서면서 나 말고는 아무도 없다

고 생각하는 순간 한 가족이 보였다. 
부부와 딸이었다.
다들 허리를 굽혀 묘석을 닦고 주변 꽃들에 물을 주면서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딸은 열두 살쯤 되어 보였다. 나는 아이가 부모에게 품은 고요한 애정 같은 걸 알아차렸다. 
아이의 태도는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제가 올바른 일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아요. 제가 올바른 일을 하고 있어서 기뻐요‘ 순식간에 간파한 것들이었다.

그들을 보자마자 왠지 시선을 돌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제라드 맨리 홉킨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나는 내눈을 단속해야 할 듯했다. 잠시 앉아서 새소리를 들으려고 눈에 띄지 않게 계곡을 훤히 볼 수 있는 비밀 벤치 쪽으로 향하면서 그 가족이 묘지 없는 애도자인 나를 보지 못했기를 빌었다. 
그제야 나는 시에나에 그림을 보러 온 것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홀로 애도하러, 새로운 지형을 살피며 여기서부터 앞으로 어떻게 살아 나가야 할지 알아내러 온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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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중학생에게

사람이 길을 가다 보면
버스를 놓칠 때가 있단다

잘못한 일도 없이
버스를 놓치듯
힘든 일 당할 때가 있단다

그럴 때마다 아이야
잊지 말아라

다음에도 버스는 오고
그다음에 오는 버스가 때로는
더 좋을 수도 있다는 것을!

어떠한 경우라도 아이야
너 자신을 사랑하고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이
너 자신임을 잊지 말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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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둘러싼 날들의 풍경

한 권의 책이 어디에서 비롯되고, 어떻게 만들어지며, 이후 어떻게 독자들과 이야기를 만들어가는가에 대한 편집자의 기록


2020년 8월 5일 ‘혜화1117‘의 열 번째 책으로 저자가 쓴 동네책방 생존탐구를 출간하다. 책을 만들기 전부터 인연이 있긴 했으나, 저자의 단독 저서를 만들면서 편집자는 저자와의 인연을 더 다져가고 싶다는 생각을 품게 되다. 이런 생각은 대개 혼자만의 것으로 간직하는 것이일반적이겠으나, 편집자는 시마다 때마다 책 출간 이후 저자를 만날 때마다 이런 마음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다. 출간 이후 수많은 동네책방으로부터 환영의 인사가 이어지다.

2020년 8월 24일. 저자의 전작 ‘동네책방 생존탐구」의 일본어판 번역 출간에 관한 계약이이루어지다. 저자와 무언가를 도모할 때마다 보람찬 결과로 이어진다는 것에 감사한 마음이절로 들다.

2022년 5월 31일, 일본어판 출간을 계기로, 동네책방 생존탐구의 존재 의미에 대해 거듭 생각하게 되다. 편집자는 저절로 저자와 다음에 어떤 책을 어떻게 만들까를 꾸준히 모색하다.

2022년 9월 21일. 매번 무언가를 하기 위해 만났으나, 평일 낮에 아무런 목적 없이 그저 한낮의 가을을 즐기자는 마음으로 저자와의 만남을 청하다. 장소는 서울의 경복궁으로 정하다. 아무런 목적도 계획도 없이 저자와 서울 경복궁 산책을 즐기다. 그러나 아예 목적이 없을 리 없는 편집자는 저자의 다음 계획에 대해 호시탐탐 염탐하듯 묻고 또 묻다. 그리고 마침내 저자가 오래전부터 생각해오던 유럽의 서점을 돌아보기 위한 여행의 계획을 구체적으로 세우고있음을 알게 되다. 드디어 다음에 뭔가를 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는 생각에 편집자는쾌재를 부르다.

2022년 11월. 간혹 안부를 묻기 위한 연락을 주고 받으며, 저자의 유럽행이 실행 단계에 접어들고 있음을 알게 되다. 편집자는 이왕 말이 나왔으니 집필을 위한 본격적인 작업에 착수해야한다고 여기다. 저자들로 하여금 글을 쓰게 하는 가장 전통적이고 일반적이며 효과적인 방법을 떠올리다. 이를 위해 가장 잘 어울릴 만한 연재처를 탐색하다. 저자에게 이 계획을 알리고기초적인 기획서를 작성해보자고 제안하다. 애초의 계획은 저자가 1차 기획서를 보내오면 그것을 바탕으로 의견을 보완하여 완성하는 것이었으나, 저자의 기획서는 오래전부터 책 한권을 염두에 뒀던 것처럼, 하루이틀 만에 작성한 것으로는 도저히 볼 수 없는 완성도를 갖추다.

편집자는 함께 하고 있는 저자가 다름아닌 ‘한미화‘임을 새삼스럽게 실감하다. 그 기획서를 바땅으로 한겨레21 김규원 기자에게 불쑥 메일을 보내, 검토를 요청하다. 회신을 받기까지 시간이 좀 걸리긴 하였으나, 이를 거부할 수 없을 것이라는 매우 근거 충만한 자신감으로 마음편히 기다리다. 그러나 일이란 끝날 때까지 끝나는 게 아님을 알기에 최선을 다해 겸손한 마음으로 연락이 올 때까지 전화기를 손에서 놓지 못하다.

2022년 12월, 드디어 한겨레21, 김규원 기자로부터 오케이 사인을 받다. 2023년 초부터 연재를 시작하기로 하다. 기쁜 마음으로 저자에게 낭보를 전하고, 이로써 저자는 여행을 떠나기도 전에 연재라는 무거운 숙제를 어깨에 이고 지고 가는 상황에 직면하다.

2023년 봄. ‘유럽책방기행‘이라는 제목으로 시작한 연재는 3월 16일에 시작, 3주에 한 편씩꾸준히 이어지다. 4월 9일부터 5월 16일까지 저자는 유럽 여행을 떠났고, 그 여행길에 합류하려 했으나 일에 묶여 못 떠나는 편집자의 아쉬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간혹 SNS를 통해 경치 좋고 분위기 좋은 유럽 곳곳의 책방 정취를 전해오다. 여행길에 저자는 혜화1117의 소중한 저자이자 영국에서 오랜 시간 공부하며 거주해온 「백 년 전 영국, 조선을 만나다의 저자 홍지혜 선생과 몇 차례 만남을 통해 낯선 여행길에 따뜻한 시간을 나누기도 하다. 편집자는 연재가 마무리되는 시점에, 그 연재의 글을 바탕으로 새롭게 집필한 원고로 책을 만들겠다고 생각하며 대략의 출간 일정을 가늠하다. 그렇게 가늠한 일정은 2024년 상반기로 잡혔고,
1994년 출판계에 입문한 저자가 책 생태계에 머문 시간이 꼬박 30년이 되는 시기임을 깨닫게 되다. 또한 같은 해 출판사에서 일하기 시작한 편집자에게도 2024년은 기억할 만한 해라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떠올리게 되다.

2023년 12월. 몇 해 전부터 한 해의 끝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곤 하는 혜화1117의 소중한 저자이자, 저자와도 각별한 사이인 최현미 선생과 해를 마무리하는 시간을 더불어 갖다. 이 자리에서 저자의 30년을 기념하는 의미를 책에 더해야겠다는 마음을 굳히다. 저자의 연재는 순조롭게 이어져 해를 넘겼으며 어느덧 연재의 끝을 목전에 두고 있음을 환기하다. 구체적인 출간의 계획을 나누다.

2024년 2월, 드디어 한겨레21」 연재의 대단원의 막을 내리다. 이는 곧 단행본 출간을 위한작업의 서막이 시작되는 것을 의미하다. 이를 서로 기념하기 위하여 서대문 영천시장 석교식당에서 김규원 기자와 더불어 순댓국과 소주 한 잔을 기울이며 연재의 종료와 새로운 시작을기념하다. 저자는 기다렸다는 듯 단행본을 위한 새롭게 집필한 원고를 보내오다. 원고를 보며편집자는 연재는 거들 뿐, 책을 위한 원고를 새롭게 정리했음을 확인하며, 다시 한 번 함께 일하는 저자가 ‘한미화임을 확인하다. 편집자는 초고를 살피며, 다른 부분은 더할 것도 덜할 것도 없으나, 한국 출판계에 머문 30년의 흔적을 원고 안에 담아내면 좋겠다는 의견을 전하다.

2024년 3월 26일. 저자로부터 수정 원고와 책에 들어갈 사진 및 자료 이미지 파일이 완벽하게 정리된 상태로 들어오다. 어떻게 만들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거의 필요없는, 당장 편집에들어가도 부족함이 없는 원고를 받아들고, 편집자는 ‘이 책에서 과연 나의 할 일은 어디에 있는가‘를 되묻게 되다. 그럼에도 마침표 하나라도 다시 찍어야 성에 차는 편집자 본능에 따라

저자의 전작인 「동네책방 생존탐구와의 일관성을 지키기 위해 본문의 구성 요소를 맞추는일, 텍스트 중심의 흑백이었던 데서 벗어나 올컬러로 제작하기 위한 몇몇 이미지 보완에 신경을 쓰다. 책의 추천사를 받기로 하다. 저자는 첫 손에 ‘사계절‘ 출판사의 강맑실 대표님과 ‘어크로스 김형보 대표님을 꼽았고, 편집자도 여기에 기꺼이 동의하다. 다만 동네책방에 관한 책을 직접 펴내기도 한 강맑실 대표님께는 책에 대한 추천의 글을, 저자와 오래 알고 지낸 김형보대표님께는 출판평론가로서의 한미화에 관한 글을 각각 요청하기로 하다.

2024년 4월. 화면 초교 및 조판용 원고를 정리하다. 본문의 구성 요소를 점검 보완하다. 디자인 의뢰서를 작성하여 혜화1117의 다섯 번째 책부터 서른 번째 책까지 맡아 작업을 해온 디자이너 김명선에게 연락하다. 뜻하지 않게 ‘출판하는 언니들‘이라는 명칭으로 가지(박희선 대표), 메멘토(박숙희 대표), 목수책방(전은정 대표), 에디토리얼(최지영 대표) 등 동료 1인 여성출판사 대표 5명과 함께 2024년 서울국제도서전에 참가하게 되다. 이를 계기로 저자의 이 책을 서울국제도서전에서 최초로 공개해야겠다고 마음을 먹다.

2024년 5월. 디자인 시안을 입수하다. 곧 조판을 시작하다. 초교와 재교 등의 교정 작업이 물흐르듯 순조롭게 진행이 되다.

2024년 6월. ‘사계절 강맑실 대표님과 ‘어크로스‘ 김형보 대표님께 추천사를 의뢰하다. 두 분모두 흔쾌히 수락해주신 것은 물론 지체하지 않고 날짜에 맞춰 보내주시다. 다시 한 번 이 책의 저자가 다름아닌 ‘한미화‘임을 떠올리다. 책의 제목은 애초에 유럽 책방 생존 탐구」로 하였으나, 원고를 읽을수록 이 책이 그보다는 책방 문화 그 자체에 대한 깊은 정보와 시선을 담고있음을 깨닫게 되다. 마감 직전에 유럽 책방 문화 탐구로 제목을 변경하다. 애초 서울국제도서전 이전에 책의 출간을 계획하였으나 1인 출판사를 운영하는 편집자의 사정으로 조금씩 일정이 지체되어, 서울국제도서전 시작 당일, 제본소에서 전시장으로 곧장 책을 받게 될 형편에이르다. 이를 탓하지 않고 오히려 저자와 편집자, 독자가 같은 장소, 같은 시기에 새 책의 탄생을 더불어 축하할 수 있게 되었노라고 편집자는 꿈보다 좋은 해몽을 시전하다.

2024년 6월 19일. 인쇄 및 제작에 들어가다. 표지 및 본문의 디자인은 김명선이, 제작 관리는 제이오에서(인쇄 : 민언프린텍, 제본 : 책공감, 용지 : 표지-스노우화이트 250그램, 본문-클라우드80그램 백색, 면지-화인페이퍼 110그램),기획 및 편집은 이현화가 맡다. 표지에 사용한제목 글씨 및 일러스트는 동네책방 생존탐구를 만들 때 함께 한 김필섭의 것을 변형, 재사용하다. 출간에 앞서 서울국제도서전 시작하는 날 현장에서 저자의 서명 작업이 이루어질 것을미리 예고하다.

2024년 7월 5일. 혜화1117의 서른 번째 책 『유럽 책방 문화 탐구, 초판 1쇄본이 출간되다. 이후기록은 2쇄본 이후 추가하기로 하다. 실제로는 6월 26일이 출간일이나 서울국제도서전 단독 판매를 거쳐 서점 등에 정상 출고를 시작한 때를 기준으로 판권일을 기입하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은 유럽 사회를 떠받친 구술 사회를 무너뜨렸다. 많은 지식을 암기하던 노인을 존경하는 대신 지식이 담긴 책이 추앙 받았다. 
종교혁명을 일으킨 신교도는 노동과 절약을 강조했고 물질적 성공을 장려했다. 푸스트와 쇠퍼 이후 빠르게 등장한 인쇄서적상은 유능한 상인이자 최초의 자본주의식 벤처 사업가였다. ‘인쇄업자는 투자자를 찾고 공급과 노동자를 조직하고 생산계획을 짜고 글을 읽을 수있는 조수를 고용하고 인쇄된 책이 판매될 시장을 분석하는 일련의 경제 활동이 필요했다. 똑같은 일을 하는 경쟁자들이 많았고 비싼 설비구매에 따르는 자본상의 위험을 감수해야 했기 때문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의 ‘고려 2실‘에 가면 13세기 초에 만든 금속활자를 볼 수 있다. 고려 시대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발명했지만 아주 오랫동안 인쇄술은 상업적으로 이용되지 못했다. 

고려와 조선 시대까지만 해도 국가는 인쇄기술을 통제했고 확산을 엄격히 제한했다. 

그나마도 중국 고전을 인쇄하는 데 주로 사용했다. 조선 후기 사가에서 인쇄한방각본이 등장하는데, 이는 목판 인쇄였다.

유럽 사회는 책을 통해 지식과 사실을 공유하며 과학의 시대를 맞는다. 내전 혹은 혁명의 시기, 수많은 팸플릿이 인쇄되었고 이를 통해의회 민주주의와 공화정을 만들어냈다. 
중산층이 등장하며 자발적으로대중 독자가 성장했다. 

우리는 최초의 금속활자를 발명했다는 사실을자랑스럽게 말한다. 
하지만 최초로 금속활자를 발명하고도 이를 대중화하지 못했다는 점은 간과한다.

1450년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은 빠르게 유럽 전역으로 퍼져갔다.
이를 계기로 루터의 종교혁명이 일어났고 영국에서는 청교도혁명과 명예혁명을 거쳐 의회민주주의가 자리잡는다. 
프랑스는 100여 년 동안 지속된 혁명을 통해 공화주의의 전통을 만들어냈다. 
이 모든 혁명에 인쇄술의 보급과 책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유럽의 근대는 인쇄 혁명으로촉발되었다.

우리는 인쇄술을 최초로 발명하고도 
상업적인 출판도, 
서적상의출현도 
근대적 의미의 대중 독자도 태어나지 못했다. 
그 결과가 어떠했는지는 모두 알고 있다. 

자발적 근대화를 이루지 못해서 야기된 숱한병폐는 여전히 유령처럼 우리 사회를 떠돈다.

유럽 책방을 살피겠다는 소박한 계획은 결국 인쇄술의 탄생으로 거슬러 올라가 끝을 맺는다. 
유럽의 책방을 살피는 나의 여정을 단지 아름다운 책방을 만나고 그 공간에 감탄하는 데서 끝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유럽의 책방문화를 제대로 이해하자면 결국 인쇄서적상의 역사를 살피는 수밖에 없었다. 

유럽 사회 곳곳에 배어 있는 책과 책방의 역사는 짧게 잡아도 500여 년. 이 기간 동안 꾸준히 만들어진 책방문화에는 보이지 않는 역사와 맥락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걸 깨닫고 나니 눈에 보이는 책방들이 결코 단순해 보이지 않았다. 
내가 발견한 것은 크거나 작은 모든 책방에는 그 사회가 쌓아온 역사와 문화가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사실, 바로 그 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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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친절이 만연해 있다는 선입견의 도시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도시의얼굴은 그게 다가 아니다. 
파리 시청사 앞에 새겨진 ‘자유, 평등, 박애‘라는 문구가 상징하는 바가 있다. 대혁명을 겪은 이 나라는 자유만큼 평등과 박애를 중히 여긴다. 개인도 중요하지만, 공동체를 위해 개인이희생할 수 있다고도 여긴다.

2023년 프랑스는 탄소 배출 감축을 위해 기차로 두 시간 반을 넘지 않는 거리에 있는 지역 간 여객기 운항을 금지시켰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서울과 부산 등에서 제주도를 오가는 노선을 제외한 나머지 국내 운행 여객기의 모든 운행을 중단한 것이다. 
한국에서 불가능한 일들이 프랑스에서는 가능하다.

우리 사회에서 폐점을 선언한 뒤 다시 문을 여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파리에서는 가능했다.
 한 나라가 지속 가능한 미래를 위해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를 알고 싶을 때 그 사회가 작은 책방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살핀다. 동네의 작은 책방이 살아 있다면 다른 것은 더 들여다볼 필요가 없다.

스튜디오를 만들었다. 유튜브 채널 구독자 수는 ‘코로나19 팬데믹 이후4만 5,000명에서 7만 5,000명으로 증가했고 팬데믹 이전 책방 매출의4.5퍼센트를 차지했던 온라인 매출도 15퍼센트까지 상승했다.

토핑‘과 ‘몰라‘처럼 우리 곁에 있는 공간의 아름다움이 남다른 책방, 전통을 이어가되 변화를 선도하는 책방을 마음속으로 꼽아본다. 

구미 ‘삼일문고‘, 부산 ‘책과 아이들‘, 안산 ‘대동서적‘, 진주 ‘진주문고‘ 등이 우선 떠오른다. 또 어디가 있을까. 
도시의 중형 서점은 하나의 브랜드다. 
이는 곧 멋진 책방이 아름다운 도시를 만든다는 뜻이기도 하다.

자가 책을 발견하고 경험하는 곳이다. 

특히 ‘토핑‘은 디지털이 줄 수 없는 뜻밖의 환대를 선사하는 책방이다. ‘토핑‘에서 의자에 앉아 책을 보고 있으면 직원이 다가와 차를 권한다. 처음 들른 에든버러 지점에서는 돈을 내라고 할까봐 필요 없다고 서둘러 거절했다. 알고 보니 독자에게 차와 쿠키를 무료로 제공하는 것은 기본 서비스였다. 
파란 물방울무늬 찻주전자와 찻잔에 담긴 차나 커피를 마시며 책방에 한동안 머물렀던 독자가 이곳을 좋아하지 않을 수는 없다. 

지하층에서 2층 갤러리까지 천천히 둘러보는 데 시간이 필요했다. 어느덧 해는 완전히 떨어지고 책방의 불빛이 요크 스트리트를 밝히고 있었다. 바스의 ‘토핑‘은 책방의 아름다움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잘 보여주었다. 

책방이 사랑하는 도시가 있다. 역사가 깊고 아름다운 옛 건물이 남아 있으며 문학적 전통이살아 있는 곳이다. 책방을 나와 숙소를 향해 걸으며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멋진 책방이 있다면 그 도시는 아름다운 게 맞구나.‘

미스터 비는 세심하게 기획한 프로그램을 갖추고 있다. 책을 주제로
"다양한 경험을 만든다. 책은 탈출구이자 모험이며 즐거운 경험이다.
그러려면 마법이 피어날 듯한 공간이 되어야 한다."
바스에는 개성 있는 책방이 여럿 있는데, 그중 다소 긴 이름을 지닌 

작가가 쓴 책을 소재로 노래를 만들어 이 행사에서 선보인다. 밴드가유명해 순회 공연도 다닌다. 이매지나리움에서는 밴드가 발표한 음반도 만날 수 있다.

미스터 비는 책을 주제로 다양한 경험을 만든다. 북클럽도 일반적이지 않다. 스타워즈 제국의 습격을 패러디한 ‘엠포리움의 반격‘EmporiumSukes Back이나 ‘걷기 북클럽The Paperback Ramblers처럼 특별한 걸 만든다. 다다른 축구팀‘, ‘풋볼 로맨스‘, 등산 독서모임 ‘산타‘ 등 다른 책방에서 볼수 없는 북클럽을 운영하는 대전의 나다르다‘가 떠올랐다. 영국인의 축구사랑이 유별나니 나중에 바스와 대전의 책방이 연합으로 풋볼 북클럽을 한 번 해봐도 좋겠다.

미스터 비‘의 어린이책 코너는 정말 꼭 봐야 한다. 닉은 책을 경험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독자가 어린이라고 생각한다. 책은 지겨운 게아니라 탈출구이자 모험이며 즐거운 경험이다. 그렇다면 어린이 코너는 어때야 할까. 재미있고, 마법이 피어날 듯한 공간이 되어야 한다.
2019년 닉은 일러스트레이터 루카스 앤틱스에게 리딩 트리와 공간 구성을 의뢰한다. 그 결과 지금 어린이 코너에는 목재로 만든 보라색 줄기의 나무가 있다. 나무 위에는 여러 동물이 매달려 있고, 둘레에 어린이가 앉을 자리도 있다. 어린이 매장의 서가 위, 아래 혹은 여기저기에카피바라, 나무늘보, 여우, 다양한 곤충과 벌레 캐릭터가 숨은 듯 아닌듯 보인다. 어린이뿐만 아니라 어른들을 위한 특별한 공간이다. 왜 이책방이 ‘미스터 비스 엠포리엄 오브 리딩 딜라이트‘라는 긴 이름을 갖고있는지 짐작 가능하다. 이 책방은 독자를 위한 기쁨의 궁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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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역 말고 ‘바티북스‘에는 유명한 게 또 있다.
 Keep Calm andCamyon‘이라고 쓴 포스터다. 우리말로는 침착하게 계속 나아가자 정도로 해석할 수 있겠다. 이 문구가 새겨진 머그잔이나 열쇠고리는 우리나라에서도 볼 수 있는데 그 시작이 이곳이다.

영국 정부는 제2차 세계대전을 앞둔 1939년 국민 의식 고취를위해 세 종류의 포스터를 준비했다. 
초록색 바탕에 영국 왕실을 상징하는 왕관 이미지 아래 결연한 고딕체로 쓴 첫 번째 포스터의 문구는Freedom is in peril. Defend it with all your might. "(자유가 위기에처했다. 전력을 다해 방어하자.)였다. 
빨간 바탕에 역시 문구를 담은 두 번째포스터에는 "Your courage, your cheerfullness, your resolutionwill bring us victory. "(너의 용기, 너의 활기, 너의 결심이 우리의 승리를 낳는다.)였다. 

이렇게 두 개의 포스터를 배포하고, 혹시라도 전쟁 중 국민의 의지가 꺾였을 때를 대비해 세 번째 포스터까지 만들었다. 하지만 세번째까지는 배포되지 않았고 기억에서 잊혔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신임 총리로 임기를 시작한 윈스턴 처칠을 다룬 <다키스트 아워 Darkest Hour 같은 영화를 보면 왜 포스터가 필요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만큼 전시 상황이 급박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위급한 상황을 웨일스의 최대 도시 카디프에서도 느낀 적이 있다.
카디프 성을 돌아보다 내부에 방공호가 있다는 걸 알았다. 전쟁 당시의 분위기를 그대로 보존한 방공호에도 여기저기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2000년 바터북스‘의 주인인 스튜어트와 메리 부부는 헌책이 담긴상자를 경매를 통해 사들였다. 거기서 "Keep Calm and Carry on" 포236

을 하다 에버펠디로 자리를 옮긴 책방 주인 부부는 카페와 갤러리까지열었다. 스코틀랜드의 중심 도시인 글래스고나 에든버러에서 이곳까지1시간 30분 정도면 올 수 있다. 나들이 삼아 오기 딱 좋은 거리다.

우리 역시 비슷한 사례가 많다. 강화의 ‘조양방직 공장은 카페가되었고, 서울 경복궁역 근처 체부동 교회는 생활문화지원센터가 되었다. 하지만 책방이 넘볼 수 있는 건물은 한옥을 제외하고는 별로 없다.

투자 대비 이익률을 따진다면 답이 없기 때문일 테다. 책방은 다른 상업 시설보다 공간 안에 과거의 역사를 그대로 살릴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또 책과 독자가 만나 새로운 역사를 써내려갈 수도 있다. 디지털 변혁기에 가장 중요하다는 공간 감수성을 오롯이 간직한 영국의 책방들은 그 자체로도 매력적이다. 안위크의 ‘바터북스‘처럼 잊혀져가는 마을을 살리는 기적을 만들기도 한다.
스코틀랜드 북쪽, 인버네스까지 간 건 스카이 섬을 가기 위해서였다. 스카이 섬에는 기차가 가지 않는다. 차를 빌릴 엄두야 못 냈지만비네스에서 출발하는 버스 투어 프로그램이 있다. 아침 일찍 올라탄 관광버스에서 인솔자는 인버네스와 스카이 섬 자랑을 끝없이 해댔다. 그와중에 인버네스의 ‘리키즈북‘ 이야기도 빼놓지 않았다. ‘리키즈 북숍‘은 이 작은 마을을 빛내는 명소였다. ‘워터밀‘도 마찬가지다. 이책방들이 있기에 독자는 오지와 다름없는 그곳에 갈 이유가 생긴다. 작은마을 공동체도 그 덕에 유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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