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둘러싼 날들의 풍경

한 권의 책이 어디에서 비롯되고, 어떻게 만들어지며, 이후 어떻게 독자들과 이야기를 만들어가는가에 대한 편집자의 기록


2020년 8월 5일 ‘혜화1117‘의 열 번째 책으로 저자가 쓴 동네책방 생존탐구를 출간하다. 책을 만들기 전부터 인연이 있긴 했으나, 저자의 단독 저서를 만들면서 편집자는 저자와의 인연을 더 다져가고 싶다는 생각을 품게 되다. 이런 생각은 대개 혼자만의 것으로 간직하는 것이일반적이겠으나, 편집자는 시마다 때마다 책 출간 이후 저자를 만날 때마다 이런 마음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다. 출간 이후 수많은 동네책방으로부터 환영의 인사가 이어지다.

2020년 8월 24일. 저자의 전작 ‘동네책방 생존탐구」의 일본어판 번역 출간에 관한 계약이이루어지다. 저자와 무언가를 도모할 때마다 보람찬 결과로 이어진다는 것에 감사한 마음이절로 들다.

2022년 5월 31일, 일본어판 출간을 계기로, 동네책방 생존탐구의 존재 의미에 대해 거듭 생각하게 되다. 편집자는 저절로 저자와 다음에 어떤 책을 어떻게 만들까를 꾸준히 모색하다.

2022년 9월 21일. 매번 무언가를 하기 위해 만났으나, 평일 낮에 아무런 목적 없이 그저 한낮의 가을을 즐기자는 마음으로 저자와의 만남을 청하다. 장소는 서울의 경복궁으로 정하다. 아무런 목적도 계획도 없이 저자와 서울 경복궁 산책을 즐기다. 그러나 아예 목적이 없을 리 없는 편집자는 저자의 다음 계획에 대해 호시탐탐 염탐하듯 묻고 또 묻다. 그리고 마침내 저자가 오래전부터 생각해오던 유럽의 서점을 돌아보기 위한 여행의 계획을 구체적으로 세우고있음을 알게 되다. 드디어 다음에 뭔가를 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는 생각에 편집자는쾌재를 부르다.

2022년 11월. 간혹 안부를 묻기 위한 연락을 주고 받으며, 저자의 유럽행이 실행 단계에 접어들고 있음을 알게 되다. 편집자는 이왕 말이 나왔으니 집필을 위한 본격적인 작업에 착수해야한다고 여기다. 저자들로 하여금 글을 쓰게 하는 가장 전통적이고 일반적이며 효과적인 방법을 떠올리다. 이를 위해 가장 잘 어울릴 만한 연재처를 탐색하다. 저자에게 이 계획을 알리고기초적인 기획서를 작성해보자고 제안하다. 애초의 계획은 저자가 1차 기획서를 보내오면 그것을 바탕으로 의견을 보완하여 완성하는 것이었으나, 저자의 기획서는 오래전부터 책 한권을 염두에 뒀던 것처럼, 하루이틀 만에 작성한 것으로는 도저히 볼 수 없는 완성도를 갖추다.

편집자는 함께 하고 있는 저자가 다름아닌 ‘한미화‘임을 새삼스럽게 실감하다. 그 기획서를 바땅으로 한겨레21 김규원 기자에게 불쑥 메일을 보내, 검토를 요청하다. 회신을 받기까지 시간이 좀 걸리긴 하였으나, 이를 거부할 수 없을 것이라는 매우 근거 충만한 자신감으로 마음편히 기다리다. 그러나 일이란 끝날 때까지 끝나는 게 아님을 알기에 최선을 다해 겸손한 마음으로 연락이 올 때까지 전화기를 손에서 놓지 못하다.

2022년 12월, 드디어 한겨레21, 김규원 기자로부터 오케이 사인을 받다. 2023년 초부터 연재를 시작하기로 하다. 기쁜 마음으로 저자에게 낭보를 전하고, 이로써 저자는 여행을 떠나기도 전에 연재라는 무거운 숙제를 어깨에 이고 지고 가는 상황에 직면하다.

2023년 봄. ‘유럽책방기행‘이라는 제목으로 시작한 연재는 3월 16일에 시작, 3주에 한 편씩꾸준히 이어지다. 4월 9일부터 5월 16일까지 저자는 유럽 여행을 떠났고, 그 여행길에 합류하려 했으나 일에 묶여 못 떠나는 편집자의 아쉬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간혹 SNS를 통해 경치 좋고 분위기 좋은 유럽 곳곳의 책방 정취를 전해오다. 여행길에 저자는 혜화1117의 소중한 저자이자 영국에서 오랜 시간 공부하며 거주해온 「백 년 전 영국, 조선을 만나다의 저자 홍지혜 선생과 몇 차례 만남을 통해 낯선 여행길에 따뜻한 시간을 나누기도 하다. 편집자는 연재가 마무리되는 시점에, 그 연재의 글을 바탕으로 새롭게 집필한 원고로 책을 만들겠다고 생각하며 대략의 출간 일정을 가늠하다. 그렇게 가늠한 일정은 2024년 상반기로 잡혔고,
1994년 출판계에 입문한 저자가 책 생태계에 머문 시간이 꼬박 30년이 되는 시기임을 깨닫게 되다. 또한 같은 해 출판사에서 일하기 시작한 편집자에게도 2024년은 기억할 만한 해라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떠올리게 되다.

2023년 12월. 몇 해 전부터 한 해의 끝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곤 하는 혜화1117의 소중한 저자이자, 저자와도 각별한 사이인 최현미 선생과 해를 마무리하는 시간을 더불어 갖다. 이 자리에서 저자의 30년을 기념하는 의미를 책에 더해야겠다는 마음을 굳히다. 저자의 연재는 순조롭게 이어져 해를 넘겼으며 어느덧 연재의 끝을 목전에 두고 있음을 환기하다. 구체적인 출간의 계획을 나누다.

2024년 2월, 드디어 한겨레21」 연재의 대단원의 막을 내리다. 이는 곧 단행본 출간을 위한작업의 서막이 시작되는 것을 의미하다. 이를 서로 기념하기 위하여 서대문 영천시장 석교식당에서 김규원 기자와 더불어 순댓국과 소주 한 잔을 기울이며 연재의 종료와 새로운 시작을기념하다. 저자는 기다렸다는 듯 단행본을 위한 새롭게 집필한 원고를 보내오다. 원고를 보며편집자는 연재는 거들 뿐, 책을 위한 원고를 새롭게 정리했음을 확인하며, 다시 한 번 함께 일하는 저자가 ‘한미화임을 확인하다. 편집자는 초고를 살피며, 다른 부분은 더할 것도 덜할 것도 없으나, 한국 출판계에 머문 30년의 흔적을 원고 안에 담아내면 좋겠다는 의견을 전하다.

2024년 3월 26일. 저자로부터 수정 원고와 책에 들어갈 사진 및 자료 이미지 파일이 완벽하게 정리된 상태로 들어오다. 어떻게 만들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거의 필요없는, 당장 편집에들어가도 부족함이 없는 원고를 받아들고, 편집자는 ‘이 책에서 과연 나의 할 일은 어디에 있는가‘를 되묻게 되다. 그럼에도 마침표 하나라도 다시 찍어야 성에 차는 편집자 본능에 따라

저자의 전작인 「동네책방 생존탐구와의 일관성을 지키기 위해 본문의 구성 요소를 맞추는일, 텍스트 중심의 흑백이었던 데서 벗어나 올컬러로 제작하기 위한 몇몇 이미지 보완에 신경을 쓰다. 책의 추천사를 받기로 하다. 저자는 첫 손에 ‘사계절‘ 출판사의 강맑실 대표님과 ‘어크로스 김형보 대표님을 꼽았고, 편집자도 여기에 기꺼이 동의하다. 다만 동네책방에 관한 책을 직접 펴내기도 한 강맑실 대표님께는 책에 대한 추천의 글을, 저자와 오래 알고 지낸 김형보대표님께는 출판평론가로서의 한미화에 관한 글을 각각 요청하기로 하다.

2024년 4월. 화면 초교 및 조판용 원고를 정리하다. 본문의 구성 요소를 점검 보완하다. 디자인 의뢰서를 작성하여 혜화1117의 다섯 번째 책부터 서른 번째 책까지 맡아 작업을 해온 디자이너 김명선에게 연락하다. 뜻하지 않게 ‘출판하는 언니들‘이라는 명칭으로 가지(박희선 대표), 메멘토(박숙희 대표), 목수책방(전은정 대표), 에디토리얼(최지영 대표) 등 동료 1인 여성출판사 대표 5명과 함께 2024년 서울국제도서전에 참가하게 되다. 이를 계기로 저자의 이 책을 서울국제도서전에서 최초로 공개해야겠다고 마음을 먹다.

2024년 5월. 디자인 시안을 입수하다. 곧 조판을 시작하다. 초교와 재교 등의 교정 작업이 물흐르듯 순조롭게 진행이 되다.

2024년 6월. ‘사계절 강맑실 대표님과 ‘어크로스‘ 김형보 대표님께 추천사를 의뢰하다. 두 분모두 흔쾌히 수락해주신 것은 물론 지체하지 않고 날짜에 맞춰 보내주시다. 다시 한 번 이 책의 저자가 다름아닌 ‘한미화‘임을 떠올리다. 책의 제목은 애초에 유럽 책방 생존 탐구」로 하였으나, 원고를 읽을수록 이 책이 그보다는 책방 문화 그 자체에 대한 깊은 정보와 시선을 담고있음을 깨닫게 되다. 마감 직전에 유럽 책방 문화 탐구로 제목을 변경하다. 애초 서울국제도서전 이전에 책의 출간을 계획하였으나 1인 출판사를 운영하는 편집자의 사정으로 조금씩 일정이 지체되어, 서울국제도서전 시작 당일, 제본소에서 전시장으로 곧장 책을 받게 될 형편에이르다. 이를 탓하지 않고 오히려 저자와 편집자, 독자가 같은 장소, 같은 시기에 새 책의 탄생을 더불어 축하할 수 있게 되었노라고 편집자는 꿈보다 좋은 해몽을 시전하다.

2024년 6월 19일. 인쇄 및 제작에 들어가다. 표지 및 본문의 디자인은 김명선이, 제작 관리는 제이오에서(인쇄 : 민언프린텍, 제본 : 책공감, 용지 : 표지-스노우화이트 250그램, 본문-클라우드80그램 백색, 면지-화인페이퍼 110그램),기획 및 편집은 이현화가 맡다. 표지에 사용한제목 글씨 및 일러스트는 동네책방 생존탐구를 만들 때 함께 한 김필섭의 것을 변형, 재사용하다. 출간에 앞서 서울국제도서전 시작하는 날 현장에서 저자의 서명 작업이 이루어질 것을미리 예고하다.

2024년 7월 5일. 혜화1117의 서른 번째 책 『유럽 책방 문화 탐구, 초판 1쇄본이 출간되다. 이후기록은 2쇄본 이후 추가하기로 하다. 실제로는 6월 26일이 출간일이나 서울국제도서전 단독 판매를 거쳐 서점 등에 정상 출고를 시작한 때를 기준으로 판권일을 기입하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은 유럽 사회를 떠받친 구술 사회를 무너뜨렸다. 많은 지식을 암기하던 노인을 존경하는 대신 지식이 담긴 책이 추앙 받았다. 
종교혁명을 일으킨 신교도는 노동과 절약을 강조했고 물질적 성공을 장려했다. 푸스트와 쇠퍼 이후 빠르게 등장한 인쇄서적상은 유능한 상인이자 최초의 자본주의식 벤처 사업가였다. ‘인쇄업자는 투자자를 찾고 공급과 노동자를 조직하고 생산계획을 짜고 글을 읽을 수있는 조수를 고용하고 인쇄된 책이 판매될 시장을 분석하는 일련의 경제 활동이 필요했다. 똑같은 일을 하는 경쟁자들이 많았고 비싼 설비구매에 따르는 자본상의 위험을 감수해야 했기 때문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의 ‘고려 2실‘에 가면 13세기 초에 만든 금속활자를 볼 수 있다. 고려 시대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발명했지만 아주 오랫동안 인쇄술은 상업적으로 이용되지 못했다. 

고려와 조선 시대까지만 해도 국가는 인쇄기술을 통제했고 확산을 엄격히 제한했다. 

그나마도 중국 고전을 인쇄하는 데 주로 사용했다. 조선 후기 사가에서 인쇄한방각본이 등장하는데, 이는 목판 인쇄였다.

유럽 사회는 책을 통해 지식과 사실을 공유하며 과학의 시대를 맞는다. 내전 혹은 혁명의 시기, 수많은 팸플릿이 인쇄되었고 이를 통해의회 민주주의와 공화정을 만들어냈다. 
중산층이 등장하며 자발적으로대중 독자가 성장했다. 

우리는 최초의 금속활자를 발명했다는 사실을자랑스럽게 말한다. 
하지만 최초로 금속활자를 발명하고도 이를 대중화하지 못했다는 점은 간과한다.

1450년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은 빠르게 유럽 전역으로 퍼져갔다.
이를 계기로 루터의 종교혁명이 일어났고 영국에서는 청교도혁명과 명예혁명을 거쳐 의회민주주의가 자리잡는다. 
프랑스는 100여 년 동안 지속된 혁명을 통해 공화주의의 전통을 만들어냈다. 
이 모든 혁명에 인쇄술의 보급과 책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유럽의 근대는 인쇄 혁명으로촉발되었다.

우리는 인쇄술을 최초로 발명하고도 
상업적인 출판도, 
서적상의출현도 
근대적 의미의 대중 독자도 태어나지 못했다. 
그 결과가 어떠했는지는 모두 알고 있다. 

자발적 근대화를 이루지 못해서 야기된 숱한병폐는 여전히 유령처럼 우리 사회를 떠돈다.

유럽 책방을 살피겠다는 소박한 계획은 결국 인쇄술의 탄생으로 거슬러 올라가 끝을 맺는다. 
유럽의 책방을 살피는 나의 여정을 단지 아름다운 책방을 만나고 그 공간에 감탄하는 데서 끝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유럽의 책방문화를 제대로 이해하자면 결국 인쇄서적상의 역사를 살피는 수밖에 없었다. 

유럽 사회 곳곳에 배어 있는 책과 책방의 역사는 짧게 잡아도 500여 년. 이 기간 동안 꾸준히 만들어진 책방문화에는 보이지 않는 역사와 맥락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걸 깨닫고 나니 눈에 보이는 책방들이 결코 단순해 보이지 않았다. 
내가 발견한 것은 크거나 작은 모든 책방에는 그 사회가 쌓아온 역사와 문화가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사실, 바로 그 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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