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

언니가 있었다면, 생각하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나보다 꼭 한 뼘 키가 큰 언니. 보풀이 약간 일어난 스웨터와 아주 조금 상처가 난 에나멜 단화를 물려주는 언니.
엄마가 아플 때면 코트를 걸치고 약국에 다녀오는 언니.
쉿, 조용조용히 걸어야지. 자신의 입술에 집게 손가락을 대며 나무라는 언니. 이건 아주 간단한 거야. 쉽게 생각해봐. 내 수학문제집 여백에 방정식을 적어가는 언니. 얼른 암산을 하려고 찌푸려진 이마.
발바닥에 가시가 박힌 나에게 앉아보라고 하는 언니. 스탠드를 가져와 내 발 언저리를 밝히고, 가스레인지 불꽃에 그슬려 소독한 바늘로 조심조심 가시를 빼내는 언니.

풀어서 다시 쓰면 이렇다. 
질문은 어떤 대답을 향해 나아간다. 
하지만 대답은 무엇인가를 해명하며 질문을 해소하는 진술 속에 있지 않다. 질문이 충분히 개진되었을 때, 그 질문을 숙고하고 있는 사유 그 자체가 변화하는데, 바로 그 ‘변화‘ 안에 답이 들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질문은 질문 그 자체로,
보다 정확히는 스스로를 밀고 나아가다가 다른 질문이 되고 마는 일련의 이행 자체로 작동해야만 한다. 
해결책으로서의 답은 존재하지 않는다. 
답을 찾아냈다고 생각되는 순간이 오히려 어서 빨리 끝을 보고 싶은 초조함 때문에 질문을 숙고하던 사유가 끝낼 수 없는 사유의 운동으로부터 물러서서 자신의 운동을 중단한 순간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그간의 한강의 소설들을 다시 읽는 이 자리에서, 섬세한 해석을 통해 정확한 ‘답‘을 찾아내기보다, 차라리 질문들 사이의 간격 또는 변화를 더듬으면서 그 사유의 운동을 우리의 읽기 안에서 다시 발생시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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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답을 바라지 않는 작은 호의를 타고
시간과 공간을 넘어
기적처럼 울려퍼지는 삶의 멜로디

여러분이 접어든 이 책은 세상의 이곳저곳에 숨어 있던 빛을 기적처럼 모아놓은 사각형의 종이 뭉치다. 
어쩜 이렇게 쓸 수 있을까. 
조해진 작가는 먼나라의 참혹함과 내가족의 생존이 별개가 아님을, 
살리는 일의 귀함과 소박함을, 이 의심과 냉소로 가득한 세상 속에서도 끝내설득해낸다.
"폭격소리가 가까워져도 응급수술을 중단하지 않는" 의사와 간호사처럼.
소설만이 도달 가능한 힘으로 
기꺼이 서로에게 피난처가 되고자 하는 우리 마음속 빛 조각들을 끌어모은다. 
한 사람에게 수렴되지 않고 한 사람을 통과해 뻗어나가는 사랑을 발견하게 한다. 
이 온기로 나는 다시 한편 지구의 태엽을 감아 빛과 멜로디를 흐르게 할 수 있을 것 같다. 고맙고 또 고맙다. 김하나(작가)

빛과 멜로디는 지금-여기의 이야기다. 언제나 있었고 언제고 있을 이야기다.
조해진은 폭설 속에서도 전쟁중에서도 어떻게든 온기를 찾으려 한다. 엄혹한 상황에서도 생면부지의 누군가에게 손 내미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않으려 한다. 
"빛이 피사체를 감싸는 순간의 온기"가 스민 문장을 읽다가, 그의 소설을 읽는 시공간이야말로 그 온기가 발산되는 현장임을 깨닫는다. 
인간이 사랑과 상처를 주고받듯, 빛과 멜로디는 흐르다 어느 순간 스며든다. 
시리아에서 레바논에서, 남수단에서, 가자지구에서, 우크라이나에서, 그리고 대한민국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삶이 바로 이곳에 있다". 오은(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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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오는 섣달그믐 밤에다카시가 벌거벗은 채로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눈밭에서 뒹군다.
그의 비명은 백 년의 시간 동안인간이 거쳐온 폭력과 고통의 응축된 표현이자<만엔원년의 풋볼> 전체 중에서도가장 아름다운 장면이다.
다카시가 목소리를 죽이며 지르는 비명은,
구덩이 속에 갇혀 십여 년을 보낸백 년 전의 증조부 동생의 비명이자,
스스로 자원해 맞아죽기를 택한 S형의 비명이기도 하다.
미쓰사부로는 동생의 광기 어린 재현으로다카시와 같은 ‘자기처벌‘ 욕구에 이끌리지만최종적으로는 스스로를 구원해낸다.
‘쥐새끼 같은‘ 자신이더라도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음을이해한 것이다. 진실로 이해하고 치유의 실마리를 찾았기에그의 ‘기대‘와 ‘풀의 집‘은 소중하다.
-세종대 일문학과 교수 박유하

현재와 과거 일상과 광기를 넘나드는 두 형제를 통해오에 겐자부로라는 거장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는 1994년 노벨문학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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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극적인 뉴스들이
폭력적인 (전체주의적인!) 한국사회의 단면을 솔직하게 보여준다.

그들은 직시하기 싫은거다.
인정하기도
들여다보기도
지켜보기도 싫은거다.

없었다고 우기면
그렇게 10년, 100년 세월이 흘러서
대중들이 다 잊거나 죽어버리면
정말
없었던 것이 될 거라고 믿는 점에서
한국사회는
일본사회와 비슷하다.

채식주의자 책 속의 몇 장면은
나도 불편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것이 전혀 잘못 표현한 것이 아니었기에
나도 겪거나 보거나 듣거나 하여 아는 일이었기에 직시하며 읽어내려 갔었다.

그러나 몽고반점이란 단편은 정말 불쾌했었다.

그것 말고는 다
잘 표현했고
치열하고 대단한 작가라는 생각을 했었다!!

학교도서관에서 한강의 책을 추방하라거나
유해도서라고 하거나
주문했던 도서를 반품하는 사람
또는 아이들이 읽지 않게 해달라는 학부모도 있다고 하는데

화락 부끄럽고 걱정스럽고 두려울지도 모른다. 그래도 사람을 진공속에서 키울 수는 없다. 사회적인 다양한 인간성과 관계의 질곡을 이해하고 대처하고
지혜롭게 관계 맺기를 하도록 가르치려면

이런 작품을 읽고 올곧게 차분하게 천천히
대화 나눌 수 있어야 한다. 어른답게!!

어쩌면 아직 그 학부모도
아이를 낳아 가정을 이루었지만 끊임없이 불안하고
인간관계에서 폭력적인 상황에 시달리고
지혜롭게 대처할 자신도 없고
아직 어른이 안 되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쓸쓸하다...
속빈강정~~! 한류니 뭐니 하면서도 사실
한국사회는 주류가 아닌 이들에게
매우 불편하고 불안하고
폭력적이기 때문이다.

주류는 그때그때 다르다...
그러니
더 불안은 가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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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비평은 무엇이 좋은 SF인지에 대한 아직 합의되지 않은, 어쩌면 끝까지 합의에 이를 수 없는 유동적 기준을 설명하기 위해 애쓴다. 그것은 독자뿐만 아니라 작가에게도 작품을 바라보는 다양한 기준과 가치판단의 틀을 제공한다.
T창작계에는 한 사람이 창작자이자 평론가로서 양쪽 모두성공할 수는 없다는 암묵적인 규칙이 있는 모양이지만, 그럼에도 어떤 이들은 좋은 작가인 동시에 좋은 평론가다.

 한국SF소설계에서는 듀나와 정소연이 대표적인 예라고 생각한다. 듀나 작가는 흥미로운 비평집을 여러 권 출간했지만 나는연재 칼럼 「듀나의 장르소설 읽는 밤」을 가장 좋아한다. 이연재는 오 년간 이어지다가 작년에 마무리되었고 아직 책으

번역되지 않은 외서를 한 권 소개하고자 한다. 앞서 첫 논피선을 쓰는 과정에서도 언급했던 캐스린 앨런(Kathryn Allam)의「SF에서의 장애가 좋은 본보기다. ‘치료로서의 기술 표현(representations of technology is carre)‘이라는 의미심장한 부제에 맞게 여기 실린 비평들은 대개 SF 작품에 등장하는 발전된 기술이 장애를 오로지 치료의 대상으로 삼는 것에 비판적 관점을 취하며, 

SF 작품에 등장하는 장애 표현이 지니는 한계와 가능성을 두루 비춘다. 

나는 장애와 기술에 관한 논픽션을 쓰면서 이 책을 참조했지만 실은 논픽션으로 정리하지 못한 질문이 더 많다. 소설에서 소수자 정체성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지.SF가 장애 정체성에 급진적인 질문을 던지는 사고실험이될 수 있을지, 불평등을 쉽게 외면하거나 지우지 않고 어떻게더 나아간 이야기를 할 것인지…………… 그렇게 얻은 질문들은 다음 소설을 쓰기 위한 추동력으로 작용했던 것 같다.
설득력 있는 비평은 이미 쓰인 작품에 대한 관점을 바꿀뿐만 아니라 앞으로 쓰여질 작품에 대한 관점 또한 바꾼다.

한 장르가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는 좋은 비평이 필요하다. 
국내의 많은 SF 작가가 한국 SF 비평이 아직 충분하지 않아 아쉽다는 말을 자주 한다. ‘무엇이 가치 있는 소설인가?‘ 
묻는 질문에 단일한 답만 존재하는 문학장은 매우 지루하고 따분

그는 이 소설을 읽으며 자신이 살아오며 만난 싸우는 사람들의 구체적인 얼굴이 떠올랐다고 했다. 나는 내가 쓰고 싶었던 것이 유토피아 자체가 아•니라 유토피아를 만들어가는 사람들에 관한 것임을 알았다.

불가능에 맞서는 태도에 관한 것임을 알았다. 
또 다른 글을읽었다. 그 사람은 이 소설 속 세계에 가본 적 없는데 이상하게 그곳이 그립다고 말했다. 
나는 그 문장을 여러 번 다시 읽었다. 우리는 왜 가보지도 못한 세계를 그리워할까.

사람들은 유토피아를 꿈꾸면서도 사실은 유토피아가 없다는 것을 안다. 차가운 우주는 유토피아를 허용하지 않는다.

냉혹한 물리법칙도 인간의 진부한 규칙들도 이 우주에 유토피아를 위한 자리를 남겨놓지 않는다. 그곳은 존재하지 않기때문에 영원히 그리운 세계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차가운 우주의 유토피아를, 그곳으로 가는 길을 상상한다. 어쩌면 그모순에 맞서며 다른 세계로 가는 길을 상상하는 것이, 소설의일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우리가 가진 최선의 도구

십대 ‘과학소녀‘ 시절 나의 바이블은 칼 세이건의 악령이 출몰하는 세상이었다. 자연과 우주의 경이를 말하는 수많은 책이 있는데 왜 하필 제목도 험상궂은 이 책을 바이블 삼았냐고 물으면 그때의 내가 과학적 방법론이라는 주제에 매달려있었기 때문이다. 아득히 먼 블랙홀의 존재도 주기율표의 규칙도 다 좋았지만 무엇보다 나는 과학이라는 학문의 합리성에 끌렸다. 칼 세이건은 책에서 당대 미국을 휩쓸었던 반과학주의와 반지성주의, 유사 과학의 유행을 날카롭게 비판한다.

우리가 자신에 대해서 관대하고 무비판적일 때, 희망과 사실을 혼동할 때, 우리는 유사 과학과 미신으로 미

끄러져 들어간다. 과학 논문에서는 데이터를 조금이라도 제시하려면 반드시 오차 막대 (error bar)를 함께 표시해야 한다. 이것은 어떠한 지식도 완벽하거나 완성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조용하면서도 강력하게 상기시켜준다.
-칼 세이건, 악령이 출몰하는 세상』 중에서과학은 인간의 불완전성과 오류 가능성을 인정하며 오류를 발전의 동력으로 삼지만, 유사 과학은 반증과 반례를 거부하며 스스로 세운 믿음을 강화할 뿐이라는 것이다. 

칼 세이건은 과학적 방법이야말로 과학적 발견 그 자체보다 훨씬 더 소중한 것이라는 논지를 전개해나간다. 온갖 미신과 루머, 음모론을 과학적으로 파헤치는 한편으로 과학이 아직 이해하지못한 영역이 많고 잘못된 행위의 수단으로 이용되기도 한다는 점도 인정한다. 

책에서 가장 핵심적인 주장을 담고 있는 문장은 이렇다.

 "과학은 지식을 추구하는 완벽한 도구라고할 수는 없다. 과학은 우리가 가진 최선의 도구일 뿐이다."

악령이 출몰하는 세상은 20세기 후반 미국에서 유행하던외계인 납치설이나 심령술사, 악령 등의 미신을 주로 다루기에 한국 현실과 다소 거리가 있었지만 그때 나에게는 이 책이

이제 사람들은 과학으로부터 유래한 풍요와 안전만큼 위협과 불평등이 존재함을, 
과학이 얼마든지 자본 및 권력과 영합할 수 있는 또 다른 ‘사회적‘ 영역임을 굳이 길게 설명하지않아도 안다. 

과학은 세상을 더 낫게 만드는 일에도 기여했지만 더 나쁘게 만드는 일에도 기여해왔다. 때로 과학은 무언가를 연구함으로써가 아니라 연구하지 않음으로써, 
즉 수행하지 않음으로써 대상을 배제한다. 

과학사회학자 데이비드 헤스는 이처럼 연구가 필요하지만 사회적 조건 때문에 외면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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