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령 3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86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지음, 김연경 옮김 / 민음사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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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로만 따라가도 무척이나 흥미진진하고 재밌었고. 예술성만으로도 도스토옙스키 작품 중 가장 좋았다. 

루가 복음서 8장에서 악령이 돼지떼에게 들어가 호수로 뛰어드는 것을 인용, 이 소설에서 말하는<악령>의 실체는,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 무정부주의와 무신론이다.

"무엇에 홀린 듯 미쳐 날뛰는 우리는 절벽에서 바다로 돌진하여 모두 빠져 죽을테죠. 그곳이 우리의 길이거든요"


도스토옙스키가 당시 러시아의 급진사상인 무정부주의(무신론에 비유) 를 비판하는 소설로 해석이 되어있던데 나는 좀 다르게 생각한다.


<악령>에서 핫한 인물ㅋ은 키릴로프와 스타브로긴, 두 자살자이다. 

키릴로프는 허무주의(니힐리즘), 무신론자이며 , 시종일관 논리적 자살의 신봉자다. 

{"신은 죽음의 공포라는 고통입니다. 고통과 공포를 극복할 사람, 그 사람이 (인)신이 될 겁니다."

"사느냐 죽느냐가 아무래도 좋게 되면 그때는 완전한 자유가 있을 겁니다. 그것이 모든 것의 목표지요" 

"난 자살할 의무가 있어. 내 자유의지의 가장 완전한 지점이 바로 내 손으로 자살하는 것이기 때문이지" 

"나에게는 신이 없다는 것보다 더 높은 관념은 없다. 나를 위해서 인류의 역사가 존재한다. 인간은 자살하지 않은 채 살기 위해 신을 고안해 내는 일을 했을 뿐이다. .." }  -키릴로프


 하지만 그는 <네가 이것을 느낄 수 있다면 너는 황제이다. 너는 자살은 커녕 최고의 영광 속에서 살아가게 될것이다> 라며 구지 인간이 인신임을 깨우쳐주기위해 자살까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가장 힘든 길을 택하며 인류에 대한 사랑으로, 교육적 의미로, 자살을 했다. 그리고 그는 그냥 허무하게 시체가 됬다. 여기서 도스토옙스키는 단지 인신을 비판하고 신(=정부)가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걸까? 

<카라마조프씨네 형제들>에서 알료샤는 <다시 만나게 될거야>라며 인간의 영원한 삶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악령>의 질문에 화답하는 것이다. 도스토옙스키가 키릴로프를 통해 제시한 해답은 실제로는 이러하다. <존재는 거짓이다. 그리고 그것은 영원하다>     


무슨말일까. <티혼의 암자>에서 <스타브로긴의 고해성사>가 이 소설에서 도스토옙스키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결론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스타브로긴은 그리스 어원으로 십자가를 뜻한다. 다중인격적이고 가면을 쓴 인격으로 묘사되는데, 그의 악마적 행위는 고해성사 후 자살을 함으로써 인간의 악마적 자아를 죽인다. 십자가는 인신으로 내려선 예수 또는 인간의 가면을 쓴 신이므로, 스타브로긴이 <스스로> 자유의지의 선택으로 악마적 자아를 용서하고 죽임으로서 자신이 신(정부)의 상태임을 보여준다. 


"만약 직접 자신을 용서하고, 이 세계에서 그 용서를 성취할 수 있다고 믿으신다면, 모든 것을 믿고 계시는 겁니다. 그런데도 어떻게 하느님을 믿지 않노라고 말씀하셨던 겁니까? 

"완벽한 무신론자는 완벽한 믿음에 이르는 계단 중 마지막 계단 바로 아래 서 있는 거지만, 세속적인 무관심은 공포 그 자체를 못 벗어나고 어떤 믿음도 없는 상태다"  - 즉 무관심보다 무신론자가 오히려 완벽한 믿음에 다가설 수 있는 자유의지의 상태인 것이다. 묵시록에서도 "미지근한 것은 뱉어버리라" 고 했다. 

이 소설은 단순히 무신론이나 무정부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무신론자는 자살을 선택할 수 있을 정도로 자유의지를 가지는 상태이므로, 악마적 하위자아를 깨부수고 <능동적으로 올바른 신(정부)를 만들 수 있는> 인신에 이르기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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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메스 가르침 - 키발리온
세 명의 입문자 지음, 김태항 옮김 / 하모니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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끌어당김의 법칙으로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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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 국내 출간 30주년 기념 특별판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 민음사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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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존재와 망각사이 키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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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열린책들 세계문학 172
알베르 카뮈 지음, 김예령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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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 때문에 벌어진 뫼르소의 살인, 그것은 부조리의 수많은 현상들 중 하나일 뿐이다.

뫼르소는 완전히 도덕적이지도 , 부도덕하지도 않다. 그는 '부조리를 의식하는 인간'일 뿐이다.

깨어있기에, 이방인임을 알기에,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초연한 것이다. 


"그처럼 죽음에 가까이 이르러서 엄마는 자신이 자유롭게 해방되어 있으며 따라서 다시 모든 것을 살 준비가 되어있다고 느꼈음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아무에게도 진정 아무에게도 엄마에 관해 울 권리가 없다"


"나에게는 확신이 있어. 나 자신에 대한, 모든 것에 대한 확신. 그보다 더한 확신이 있어. 나의 인생과 닥쳐올 이 죽음에 대한 확신이 있어. 그렇다. 나한테는 이것밖에 없다. 그러나 적어도 나는 이 진리를 그것이 나를 붙들고 놓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굳게 붙들고 있다."


" 나는 처음으로 세계의 정다운 무관심에 마음을 열고 있었던 것이다. 세계가 그토록 나와 닮아서 마침내 그토록 형제 같아는 것을 깨닫자, 나는 전에도 행복했고, 지금도 여전히 행복하다고 느꼈다."


"나는 잠시 생각해 보고나서 진짜로 후회하고 있다기 보다는 차라리 일종의 지긋지긋함을 느낀다고 대답했다. 그가 내 말을 이해한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그에게 나도 모든 사람과 같다고 모든 사람과 절대적으로 똑같다고 분명히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결국 이 모든 것은 그다지 쓸모없는 짓이고 그래서 그만 게을러진 나는 그렇게 하기를 포기했다."


"삶이 그다지 살만한 가치가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 아닌가. 근본적으로 따지고 보면 서른에 죽으나 일흔에 죽으나 별 중요한 차이가 없다는 것을 나는 모르지 않았다. 당연한 얘기지만 그 중 어느 경우가 됐든 다른 남자들과 다른 여자들은 여전히 살아갈 것이며 이것은 수천년동안 지속되어 온 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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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프 신화 열린책들 세계문학 255
알베르 카뮈 지음, 박언주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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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꿈에서 읽어보라고 나와 부랴부랴 검색하여 읽게 된 신비한 책ㅎ(진짜다!) .. .어려워 보였지만 열린책들 이번 번역 매끄럽고 술술 읽혔다. 시지프 신화가 뭐야? 찾아보니 시시포스가 굴러떨어지기를 반복하는 돌땡이를 계속계속 산으로 밀어올리고 있다,,, 이거이거 다람쥐 쳇바퀴 돌리는 삶에 지친 나의 모습이잖아? 내가 왜 여기 지구에서 이러고 살고 있는 건지도 잘 모르겠구...  그래서 내 잠재의식이 니 얘기니까 읽어보라고 꿈에서 추천한건가 ??


1. 부조리의 추론 


우리가 삶이 요구하는 행위들을 반복하는 데는 수많은 이유가 있지만 첫번째 이유가 습관이다. 자발적으로 자살을 선택한다는 것은 습관의 하찮음, 잃어버린 고향의 기억이나 약속의 땅에 대한 희망이 박탈 된 상태로 연극배우와 그 무대의 단절, 낯섦 속에 생기는 부조리의 감정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는 것을 전제한다. "부조리한 인간"이란 '부조리를 의식하며 살아가는 인간', 즉 '깨어있는 의식을 가진 인간'이다. 이런 점에서 나는 나 자신에게 영원한 이방인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부조리를 <의식> 하는 인간이 "희망"-일정한 <자격을 갖추어야>얻을 수 있다는 내세에 대한 희망이나 "자살"을 선택하는 것은 어떠한가.

카뮈는 '부조리'는 본질적으로 어떤 "분리"로서, 인간속에 있는 것도 아니고, 세계속에도 없는 그 둘의 대면에서 사이에 태어난 것이라고 했다 .  그러므로 스스로를 부정하는 도피는 강요된 희망, 곧 신을 말하며, 이는 인간의 이성을 부정할 때 존재하는 신이다 . 카뮈가 생각하는 '부조리'란 자신의 한계를 확인하는 명철한 이성이기에  ,

하이데거, 야스퍼스, 키에르케고르 같은 실존주의자나 , 후설 같은 현상학자가 공통적으로 인식한 이러한 '희망'은 철학적 자살일 뿐이라고 비판한다. 

이것은 삶에 대한 회피일 뿐, 카뮈의 관심사는 철학적 자살이 아니라 그냥 자살이다. 자살의 논리와 그 정직함을 알아보는 것 뿐이다.


나는 부조리로부터 나의 반항, 나의 자유, 나의 열정이라는 세가지 결론을 이끌어낸다. 의식의 유일한 게임을 통해 나는 죽음으로의 초대를 삶의 원칙으로 바꾸어 놓는다. 그리고 나는 자살을 거부한다. 


2. 부조리한 인간


카뮈는 부조리한 인간이 인정할 수 있는 도덕은, 신과 자신이 분리되지 않는 도덕, 즉 스스로 부과하는 도덕이라고 했다. 그것은 인간이 무죄라는 원칙에서 출발한다.  개인을 만신창이로 만드는 것은 세계이고 해방시키는 것은 나다. 인간은 자신의 목적이다. 그것도 유일한 목적이다. 그가 무엇인가 되고자 한다면, 그것은 이 삶 속에서의 염원이다 .

카뮈가 말하는 정복은, 한계를 정하지 않고 분리를 해소하고 내면의 향수에 합의를 추구하며,<자신을 극복하는 것>이다.

 부조리를 의식하는 인간이 취할 수 있는 가능한 태도들 중 하나는 바로 창조이다. 우리는 자신의 무상성을 지속적으로 의식하며 자신을 극복하는 창조적 태도를 <선택> 할 수있다. 가장 열정적인 부조리 인간은 예술가이다. 니체는 말한다 <예술, 오로지, 예술, 우리는 결코 진리 때문에 죽지 않으려고 예술을 보유하고 있다 >


 정복자, 배우, 돈후안은  자신의 운명에 동의하는 깨어있는 의식, 반항을 통해 위대한 가치를 얻게되는 그 삶에 만족하게 될 것이다 . 여기서 반항은 창조를 말하는 것 같다. 시간에 묶인 채 유배되어있지만 찰나의 행복한 순간이 있고, 고통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죽음에 도전하고 죽음을 경멸할 자유 , 의식을 통해 삶을 포기하지 않고 이어갈 자유가 시지프(우리 인간)에게 있는 것이다.


3. 부조리한 창조


도스토옙스키 소설에서 제기되는 문제들,  "삶은 거짓이거나, 아니면 영원하다". 

그가 이러한 성찰에만 그쳤다면 철학자였을테지만 ,이러한 정신의 유희가 인간의 삶 속에서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결과들을 구체적으로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그는 예술가다 . 


<악령>의 키릴로프는 논리적 자살의 신봉자다. 하지만 그는 <네가 이것을 느낄 수 있다면 너는 황제이다. 너는 자살은 커녕 최고의 영광 속에서 살아가게 될것이다> 라며 구지 인간이 인신임을 깨우쳐주기위해 자살까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가장 힘든 길을 택하며 인류에 대한 사랑으로, 교육적 의미로, 자살을 해야하는 것이다. 

<카라마조프씨네 형제들>에서 알료샤는 <다시 만나게 될거야>라며 영원한 삶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악령>의 질문에 화답하는 것이다. 이렇듯 도스토옙스키가 키릴로프를 통해 제시한 해답은 실제로는 이러하다.  <존재는 거짓이다. 그리고 그것은 영원하다>


카뮈가 <시지프 신화>를 통해 말하려는 결론 : 행복과 부조리는 같은 땅의 두 아들이다.

그림자 없는 태양은 없는 법이기에 어둠이 무엇인지도 알아야 하는 것이다.

부조리한 인간은 자신이 자기 삶의 주인이라는 것을 알고 , 인간이 자기 삶을 향해 되돌아가는 미묘한 순간, 그 연결되지 않는 일련의 행위들을 조용히 바라본다. 그 행위들은 그의 운명이 된다. 인생은 시지프 자신이 만들어 냈고 자기 기억의 시선 아래 통합되어 곧 그의 죽음에 의해 봉인될 운명이다. 시지프는 신을 부정하고 바위를 들어올리는 우월한 성실함을 가르쳐 준다. 그는 모든게 다 잘됐다고 생각한다. 이 말은 신성하다.  이제부터 행복한 시지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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