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위 - 고려원소설문고 005
서정인 / 고려원(고려원미디어) / 199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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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수업 시간의 일이 떠올랐다. 나는 선생님들이 나를 기억해 주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래서 이름보다 번호로 불리고 앉히기를 바랐다. 어떤 친구들은 이름을 불러 주길 원했다. 어떤 친구들은 번호로 부르는 선생님들을 흉봤다. 이름과 번호는 무슨 차이가 있을까. 옆짝은 '이름은 내 인격을 존중해 준다는 표시'라고 했다. 동물이나 벌레는 이름이 없다. 우리는 이름도 모르고 우리와 관련도 없는 무수한 벌레들을 예사로 지나치고 예사로 없애기도 한다. 그들의 존재는 우리에게 아무런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이름은 '내'가 존재한다는 표시다. 그러므로 우린 우리의 인격을 위해서, 인간이라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이름으로 불려야 한다고.

죽음을 선택해서라도 존재를 확인 받고 싶어한 트리쾅 앞에서 나는 부끄러워진다. 보잘것없어도 소중한 나를 지켜야 할 의무를 깨닫는다. '가위'는 억압의 상징이었다. 영화 <가위손>은 인간적인 사랑을 모태로 했지만, 이 책은 구속과 속박, 억눌림과 감시를 의미한다. 인간임을 증명하는 개성과 자유는 가위로 잘라져서 모두 똑같은 규격의 물건이 되는 것이다. 가위는 감정을 자르고 인격을 자르고 인간을 허물어뜨린다.

그러나 트리쾅은 가위로 잘라진 혼 대신 육신을 죽이기로 한다. 그 선택은 그의 넋을 구원하고 그를 자유로운 본래의 인간으로 되돌려 놓았다. 이 책에서 가위는 한 가지 의미를 더 갖고 있다. 불필요한 것을 제거하고 인간으로서 갖추어야 할 것들을 갖출 수 있게 하는 미시적 도구이다. 트리쾅은 '군대'라는 조직이 제거한 자신의 넋 위에 스스로 새로운 가위로써 인간임을 증명할 수 있도록 했다. 그가 제거해 낸 것은 그를, 그의 영혼을 억압하였던 차가운 힘이었다.

가위는 쓰기에 따라 달라지는 물건이다. 무엇을 자르느냐에 따라 효용이 달라진다. 트리쾅은 가위를 어떻게 써야 할지를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정신'을 제거 당하고 육신마저 스러져야 할 때에 트리쾅은 스스로 육신을 잘라 버림으로써 영원한 정신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는 살아 남았다. 남들은 그의 버려진 육신을 보고 죽었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생각한다. 그는 죽은 것이 아니라 영원히 살아 숨쉬는 자유롭고 평화로운 세계를 선택했음을, 그래서 영원히 살아 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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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5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박찬기 옮김 / 민음사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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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중에서 베르테르는 자유를 찾아 중앙 관직을 버리고 시골로 내려 왔지만, 그는 모르는 것이 있다. 그건 바로 인간은 절대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나 역시 자유를 무척 사랑한다. 난 모든 것이 절대적으로 자유로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랑 또한 자유이다. 구속하면 안 된다. 어떤 사람은 새장 속의 새를 날려보내는 것이 새에게 자유를 주는 것이 라고 내게 말하지만, 그건 새에게 자유를 주는 것이 아니라 선택하지 않은 죽음을 주는 것 밖에 되진 않는다. 내가 새를 사랑한다면, 다만 새장의 문을 조용히 열어 주겠다. 새가 훨훨 날아가든지, 아니면 이곳에 머물든지 그 선택을 새에게 주겠다. 그리고 나는 가능하면 모든 것에 자신을 가두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하다 못해 꽉 끼는 옷 속에라도 날 가두지 않는다. 이처럼 자유를 사랑하는 내가 인간은 절대 자유로울 수 없다고 단언한다. 물론 조금이라도 자유롭고 싶어하는 베르테르의 몸부림은 이해가 가지만, 난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성숙한 행동이라고 평가하고 싶다.

인간은 안정을 바라면서 변화를 추구한다. 인간의 이러한 모순은 그렇기 때문에 인간을 모든 것에서 완전히 자유롭게 해주진 않는다. 자유롭다고 느끼는 순간 새로운 모순과 갈등에 부딪히게 된다. 때문에 인간의 발달도 일정한 한계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고 인간은 자신의 모든 결정을 이 한계 안에서 맞추어 나가야 한다. 아무리 자연을 비롯한 모든 것의 주인이 되고 싶어하는 인간이지만 인간도 지구상에 존재하는 생물계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베르테르의 7월16일 편지는 로테에 대한 그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짐작 할 수 있게 한다. 비록 길지는 않았지만 사랑이라고 느꼈던 시절에 나 역시 이러한 감정을 가졌었다. 그는 로테와 함께 있는 시간을 천국이라고 표현했다. 왜 천국이라고 표현했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그것은 사랑이 없는, 참 사랑이 없는 이 세상이 그만큼 남루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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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꽃 - 한국문학 3, 김유정 단편집
김유정 글, 박철민 그림 / 글송이 / 200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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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작인의 아들과 마름의 딸은 쉽게 어울릴 수 없다는 소극적인 생각을 가진 '나'는 아직 성적으로 미숙하다. 반면에, 점순이는 남녀의 애정에 일찍 눈을 떠서 '나'에게 관심을 보인다. 이들의 갈등은 닭싸움을 매개로 하여 점진적으로 고조되어 가다가 점순이의 닭이 죽음으로써 절정을 맞게 되고, 이 사건을 계기로 대립적 관계에 있던 두 사람은 화해하게 된다. 이러한 두 사춘기 남녀의 대비적 성격이 맞부딪혀서갈등을 자아내고 희극적 분위기를 연출하게 된다. 이를테면, 닭싸움은 '나'와 '점순이'의 심리적 관계를드러내는 구성적 장치이다.

닭싸움을 통한 두 남녀의 대립은 자못 긴장된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닭의 죽음에서 보여 주는 나의 순박함과 점순이의 영악함의 대비(對比), 그에 이어지는 관능적인 행위들에 의해 긴장감은 해소되고 독자들은 오히려 희극적인 해방감을 맛보게 된다. <동백꽃>은 나에게 시골이라는 곳은 참 정겹구나라는 느낌을 다시금 새기게 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점순이와 나로 인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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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트로피
제레미 리프킨 지음, 이창희 옮김 / 세종연구원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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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엔트로피의 사회가 자원의 낭비와 오염을 줄인다는 말은 옳은 말이다. 현재 세계에서는 화석연료인 석유가 사용연료중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이 석유 연료가 연소될 때 공기중에 생물에게 나쁜 물질들을 배출하게 되어 엔트로피를 크게 증가시킨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결국 인간의 문명을 발달시키는 동시에 이러한 연료를 태양에너지나 풍력, 조력, 지열 발전 등 엔트로피를 적게 증가시키는 물질로 대체한다면 우리는 더욱 큰 효과를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나는 이 책을 읽고 이러한 '엔트로피'에 대한 연구가 가장 현실과 근접되어 있고 가장 우리 사회에서 필요한 연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이 '엔트로피'의 증가에 대한 연구와 '저엔트로피' 사회를 만들기가 곧 과학의 목적이라 생각되었고 이를 위해 평생을 바쳐 연구해볼 가치가 있다고 여길 수가 있었다. 어쩌면 과학자의 길로서 가장 큰 목적인지도 모르는 길..... 바로 내 마음속의 무언가를 이끄는 '엔트로피'의 연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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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조세희 지음 / 이성과힘 / 200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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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에서의 난쟁이의 대사와 같이, 사랑으로 바람을 불러 작은 미나리아재비 꽃줄기에까지 머물게 하는 그런 달나라를 희망하며 이야기는 비극적으로 끝난다. 그때도 행해져 왔고 어쩌면 지금도 일부에서 그렇게 행해지고 있을 그러한 이야기들이 나에게 너무나도 큰 아픔으로 다가왔다. 현실을 알아 간다는 것이 사람들의 생각을 눌러 버리고 작은 난쟁이로 만들어 버리는 것 같다. 그러나 난쟁이들에게는 늘 희망과 사랑이 존재한다. 그런가 하면 난쟁이를 난쟁이이게 하며 난쟁이가 있기에 거인이 거대해 보이는 세상은 여전히 비슷한 모습들이다.

사실, 그런 현실 속에서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질문을 감히 내 자신에게 던질 용기가 없다. 하지만 내 자신이 난쟁이란 사실이 자랑스럽다. 아직 거인들에게 없는 '사랑' 과 '희망'이 내 안에도 숨쉬고 있을 테니 말이다. 거대한 모든 것도 무섭지 않다. 사랑이 있다면 나를 소외시키고, 난쟁이들을 소외시키는 사회 모든 것까지 사랑할 수 있으니 말이다.그리고 아버지가 끝까지 간직하고 싶었던 희망과 사랑을, 쇠공을 내 마음 속에 영원히 간직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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