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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형의 황야 - 상 ㅣ 세이초 월드
마쓰모토 세이초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14년 7월
평점 :
맞바람이 따귀를 때리는 사막에 서 본 적이 있나요.
저는 그런 사막을 본 적이 있습니다. 오래 전 한 소설가의 책에서 말이에요. 그 소설가의 책에 나오는 사막이란 타인에 의해 마음에 조금씩 쌓이는 슬픈 풍화작용이었습니다. 저는 그 소설을 읽으며 한 방울 눈물을 흘렸던 것도 같아요. 그리고 저는 오늘, 또 다른 이름의 사막을 만났습니다. 황야라는 이름, 것도 자기 자신에 의하여 사막을 만들고 그 사막을 타박타박 소리 없이 파묻히는 발걸음 그대로 걸어가는 사람을 통해 말이에요.

마쓰모토 세이초의 『구형의 황야』
저는 마쓰모토 세이초의 『구형의 황야』를 일본 드라마 특집극을 통해 만났습니다. 방영했을 당시 『구형의 황야』는 초호화 캐스팅이었습니다. 특히 그 중에서도 주인공 역할을 맡은 사람은 무려 타무라 마사카즈였죠. 타무라 마사카즈는 전설적인 형사시리즈인 후루하타 닌자부로의 주인공으로, 예전엔 딱 기무라 타쿠야 같은 위치에 있었던 배우예요. 타무라 마사카즈는 나이가 들며 여러 역할을 맡게 됩니다. 그리고 그 역할 중에서는 ‘아, 이건 타무라 마사카즈만이 할 수 있는 역할이야’ 싶은 것들이 참 많았답니다. 특히, 마쓰모토 세이초의 특집극 중에서 말이에요.
마쓰모토 세이초의 작품은 모두 40대 이후 쓰였습니다. 데뷔가 늦었거든요. 덕분일까, 마쓰모토 세이초의 작품 속 주인공들은 삶의 구석구석을 드러냅니다. 특히 어둠, 혹은 깊이에 대한 은근한 강요가 있어요. 이 작품 『구형의 황야』처럼 말이에요.
우리나라 곳곳에 절이 있듯이, 일본 곳곳엔 신사가 있습니다. 그리고 일본에서는 그런 신사 곳곳을 돌며 참배하는 일이 종종 있나 봐요. 이 이야기는 바로 그런, ‘연이은 신사 참배’에서 시작됩니다. 한 여자가 신사 참배를 갑니다. 그리고 방명록에 이름을 적는데, 묘한 기록을 봅니다. 누군가의 이름입니다. 흐음, 타인의 이름입니다. 분명 모르는 이인데 어쩐지 “그 필체”가 낯이 익습니다. 필체는 인간의 또다른 이름입니다. 강하게 눌러 적는가, 빠르게 흘려 적는가, 펜을 좋아하는가 연필, 혹은 샤프를 좋아하는가, 그 모든 것에 따라 인간은 다른 모습을 드러내곤 합니다. 그리고 이 여자는 이 서체 안에서 오랜 시간 잊었던 인물을 떠올립니다. 1944년 죽은 한 사내, 종전과 함께 저 멀리 유럽의 중립국에서 죽어간 그 사내의 필체와 이 필체가 꼭 닮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결코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그 필체를 둘러싸고 추적, 살인, 그리고 은근한 정이 배어나는 사건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마쓰모토 세이초는 이미 다른 작품들을 통해 여러 지역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 바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작품의 경우엔 지나치고, 또 어떤 작품은 가볍기 때문에 “아, 2프로 부족하다”는 마음이 들게 할 때가 많습니다. 실제로 저 역시 일본 드라마를 본 후 마쓰모토 세이초를 접했을 때 첫 느낌은, ‘당혹’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모래그릇’의 경우, 저는 명 드라마 중 하나로 꼽습니다. 특히 주연을 맡은 배우 나카이 마사히로(인상깊은 드라마 아타루의 주연을 맡기도 했죠)의 내면연기는 보는 내내 손에 땀을 쥐게 할 정도였습니다. 때문에 저는 매우 큰 기대를 갖고 원작을 접했었는데요, 뚜껑을 열어보니 “아, 이게 뭐람!” 하고 안타까워 했더랬습니다. 실제로 후에 특집극으로 만들어지기도 했던 ‘모래그릇’은 원작이 아닌 이 10부작 드라마를 기조로 하여 다시 제작했더라고요. 아마 다들 저와 같은 기분이 아니었을까 싶더군요.
때문에 사실, ‘구형의 황야’도 그렇지 않을까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구형의 황야’ 역시 너무나 감동적으로 본 드라마였거든요. 그런데 다행히, 이 책은 드라마와 많이 닮은 꼴이었습니다. 그 색이, 은은함이, 문장의 무게감이 딱 적당하달까요. 그리고 마지막 장면까지도.
저는 그 마지막 장면이 너무 마음에 들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그 마지막 장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참고자 합니다. 그랬다가는 스포일러가 되어버릴테니까요. 그러니 궁금하신 분들은 그저 책을 드셨으면 좋겠습니다.
가능하다면, 드라마를 보고 보신다면 더욱 더 좋을 것도 같네요.
상권
“저는 지금, 인생의 무엇에든 흥미를 갖기로 했습니다.” P.44
“세상에는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이 있소. 남에게 말하지 못한 채 죽어야 하는 일도 있지. ……내게도 그런 일이 없다고는 하지 않겠소. 지금은 아무것도 이야기할 수 없소.”
(중략)
“당분간 나는 죽을 것 같지 않으니 괜찮소. 저기를 보시오.”
다키는 손가락을 들었다.
“나는 지금 이런 아름다운 곳을 걷고 있지. 살아 있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절절하게 느끼고 있소. 소에다 군, 나는 당분간 죽지 않을 생각이오. 모처럼 물어봐 주었는데 미안하지만 그 이야기는 가망이 없다고 생각하고 잊어 주시오.”
지금까지의 다키 료세이가 아니었다. 가을의 기척처럼, 다키의 고요한 애정이 젊은 후배에게 전해졌다. PP.228~9
하권
“그게 살아 있는 인간의 번뇌지. 아직 깨달음을 얻지 못한 거야. 누군가가 나를 알아두기를 바라는 걸세.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는 건 역시 쓸쓸하다. ……이런 번뇌 말일세. 그래서 그럴 만한 사람을 찾아보니 역시 자네밖에 없더군.” P.134
(전략) 지구상 어디에 가더라도 그에게는 황야밖에 없거든. 결국 국적을 잃은 사람이니 말이오. 아니, 국적만이 아니오. 자신의 생명도 십칠 년 전에 잃은 남자요. 그에게는 지구 자체가 황야요. P.2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