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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일간의 세계 일주 ㅣ 인디고 아름다운 고전 시리즈 20
쥘 베른 지음, 정지현 옮김, 천은실 그림 / 인디고(글담) / 2014년 8월
평점 :
어렸을
때엔 세계일주라고 하면 굉장한 일인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며 세계가 함께 빠르게 회전하다 보니,
생각보다
세계일주는 간단한 일이 됐습니다.
시간도,
돈도,
예전보다
훨씬 덜 들이고 빠르게 움직일 수 있게 됐죠.
실제로
얼마 전 읽었던 소설은 70대
노부부가 세계여행(굉장히
독특한 방식의)을
하는 내용이었고,
20대
때 읽은 여행기 중에는 자전거를 타고 세계(정확히
말하자면 대륙마다)를
횡단하는 내용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오랜만에 다시 이 책을 봤습니다.
이
소설을 제외하고는 결코 세계여행을 말할 수 없다고도 감히 이야기할 수 있는 책,
쥘
베른의 『80일간의
세계일주』를요.
당신이
아는 『80일간의
세계일주』는
진짜가 아니다?!
『80일간의
세계일주』는
제목 자체가 모든 내용을 설명합니다.
말
그대로,
한
부자이자 영국신사인 남자가 80일간
세계를 횡단한다는 내용이죠.
어렸을
때 저는 동화책으로,
만화로,
또
만화영화로 이 소설을 몇 번이나 접했었습니다.
때문에
저는 “아,
난
이 소설 읽었지!”
했더랬습니다.
그런데,
오랜만에
읽은 『80일간의
세계일주』는
묘하게 새로웠습니다.
예전에
보았을 때 “어라,
정말
이런 내용이었어?”라고
의아할 정도였습니다.
예를
들어 이런 부분이 그렇습니다.
그날
밤 9시에
런던 경찰청장은 다음과 같은 내용의 전보를 받았다.
런던
경찰청
로완
경찰청장 귀하
은행
강도 필리어스 포그를 쫓고 있음.
즉시
봄베이로 체포 영장을 보내 주기 바람
수에즈에서
픽스 형사
이
전보는 즉각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명망
있는 신사’가
이제 ‘은행
강도’
신세로
전락했던 것이다.
경찰은
다른 회원들과 함께 개혁 클럽에 보관되어 있던 필리어스 포그의 사진을 철저하게 살폈다.
그것은
경찰 수사 결과에서 밝혀진 은행 강도의 인상착의와 하나에서 열까지 똑같았다.
사람들은
필리어스 포그가 혼자 은밀하게 생활했고 갑작스럽게 떠났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가
난데없이 세계 일주를 운운하며 터무니없는 내기를 밀어붙인 이유가 영국 경찰의 추격을 피하기 우해서였다는 사실이 명백해
보였다.
(pp.51~2)
은행강도라니!
저는
이 부분을 보자마자 깜짝 놀랐습니다.
당시
저는 지하철에 타고 있었는데요,
어어?
하고
큰 소리로 입을 벌려 소리칠 정도였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제가 기억하는 만화영화며 동화 속에는 이런 내용이 없었던 것 같았거든요.
막연히
생각나는 건 ‘기구를
타고 가는 주인공’정도였는데……저는
한 장 한 장 넘기면 넘길수록 내가 알던 『80일간의
세계일주』는
대체 누가 쓴 건가 이해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실제로,
제가
만화영화에서 보았던 문제의 열기구 장면은 이 책에서 부정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배로 대서양을 건널 방법을 반드시 찾아야만 했다.
열기구라도
타고 가야 할 판이었지만,
그것은
무척 위험한 데다 실용적이지도 못했다.
(p.350)
이때의
충격이란,
말
그대로 머리를 띵하고 얻어맞는 것 같았습니다.
또
이 책의 중간중간 나오는 이야기나,
그
전개방식은 어떤지요.
말
그대로 박진감이 넘칩니다!
“왜
이래,
난
모험소설이야!”라고
소리치는 듯하달까요?
때문에
문뜩 저는 지난 6월
열렸던 여행소설 공모전을 떠올리고 말았습니다.
지난
6월에
인터파크에서 여행소설 공모전을 열었었습니다.
그걸
보고 “으응?
그런
걸 어떻게 써?
사람도
안 죽는데?”라고
생각했었는데요,
아
이걸 보고 나니……여행소설에도
사람이 죽을 수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죽을
뻔하는’
위기도
생기고,
또
그 사이에서 ‘사랑’도
싹틀 수 있다는 사실을요.
하아,
여행소설이
이토록 박진감 넘치는 거였구나!
저는
감탄을 금치 못하며 요 작은 책을 들고 7월의 마지막날 이태원, 찜통 속을 걸어다녔습니다.
지독한
더위였습니다.
숨도
못 쉴 만큼 힘들었죠.
하지만
그 길에 서서 횡단보도의 신호를 기다리며 책을 보는 순간만큼은 현실을 잊을 수 있었습니다.
책
속의 주인공들이 세계 여행을 떠났듯이,
저는
그 순간만큼은 책 속으로,
세계일주를
하는 기분이 들었달까요.
으음,
하지만
현실에서 이런 식으로 위험찬란한 일을 연속 겪고,
은행강도로까지
쫓기는 건 사양할래요!
이
책의 또다른 매력은 다양한 삽화입니다.
알록달록한
색감의 그림과,
각
캐릭터가 누구인지를 설명하는 안내를 보고 책을 보면 흥미롭습니다.
쥘베른이
묘사한 책 안의 인물들과
캐릭터로
구현된 느낌이 상당히 다르기 때문입니다.
일러스트레이터의
주관이 확연히 드러났달까요.
때문에
제가 글자만 봤을 때와
그림을
봤을 때엔 사실 전혀 다른 느낌이라 당황스러웠습니다.
뭐랄까……이
책에는 보다 소년만화 같은 그림이 어울릴 것 같은데.
중얼거렸달까요.
하지만
흐음,
다
읽고 나서 처음부터 찬찬히 삽화를 넘기다 보니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아아,
이건
그림만으로 또 하나의 책이 되는구나라고.
고전이란
그렇습니다.
하나의
원문,
즉
bible을
두고 두고두고 재창조되기에 고전이라 불립니다.
그리고
이 책에는 그런 식의 재창조가 숨어 있었습니다.
바로
이,
작품을
전혀 다르게 해석한 파스텔톤의 아기자기한 그림 속에.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세계 일주에서 얻을 수 있는 충분한
보상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p.3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