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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책 읽는 시간 - 무엇으로도 위로받지 못할 때
니나 상코비치 지음, 김병화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2년 3월
평점 :
절판

# 책에도 인연이 있을까.
나는 이미 알고있었다. 구입할 목록에 없던 이 책을 집어든 순간, 다른 우선순위의 책들을 제쳐두고 이것을 가장 먼저 읽게 되리라는 것을. 실제로 이번주 내내 독감으로 아팠을때 이 책을 다 읽었다(물론 열이 많이 내려서 책을 읽을수 있게 되었을 즈음에). 한눈에 알아본게 신기했다. 첫 장을 보고는 이건 나를 위한 책이다, 당장사야한다며 두번째로 계산대로 가는 내 모습이 조금은 낯설게 느껴지기도 했다.
# 매 해 연말에 읽고 싶은 그런 책.
연말에 보길 잘했다 싶은 그런 책. 매 해 12월 말에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이불 속에 푹 파묻혀 귤 한 봉지와 함께 읽고 싶은 그런 책. 읽으면 읽을수록 머릿속에 무언가를 집어넣기 보다 내 마음에 있는 것들을 내려놓을 수 있게 하는 그런 책.
무수한 자기계발서를 읽고 또 읽었다. 그런 나날이 계속되던 시간 속에서 알게 모르게 갈증이 생겼나보다. 자기계발서가 아닌 영혼에 위안을 주는 책을 읽고 싶었다. 실용서 말고 감정의 문을 두드리는, 그런 책을 읽고 싶었다. 이론에 대한 신기함과 이성적인 내용 말고, 그런 걸 생각할 겨를도 없이 책장을 자연스레 넘기는 그런 이야기들을 읽고 싶었다. 그래서 이 책을 골랐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이 책을 다 읽고 난 뒤에야 했다. 딱 나에게 적합한 때에 나에게 온 책. 이 책은 나에게 그런 책이다.
# 이 책은.
사랑하는 이를 먼저 보내고난 뒤 남겨진 이의 몫, 책임, 어떠한 의무... 그것이 무엇이든 슬픔보다 큰 것이 있을까. 천천히 책을 읽으면서 한 장 한 장 곱씹으며 작가의 마음을 서서히 느꼈다. 사랑하는 언니를 먼저 보낼수 밖에 없었던 상황속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세월들을 지나 이제는 정면으로 그것들과 마주했다. 실제로 작가는 그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하루 책 한권을 읽고 서평을 하는 작업을 하루도 거르지 않는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네 아이를 챙겨야하는 엄마로써, 아니 평범한 사람이라해도 도전하기조차 쉽지 않았을 일을 그녀는 시작했고, 마침내 성공했다. 한 권 한 권 읽을 때마다 그 책을 읽을때 생긴 일이나 감정들을 기록했고, 특히 죽음에 관한, 떠나감, 이별, 남겨짐, 부재에 관한 이야기들이 불쑥불쑥 나타는것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이 책 덕분에 오랜만에 작가에게 몰입해서 푹 빠져서 읽은 시간을 보냈다.
# 가끔은 정지의 시간도 필요하겠지.
우리 모두에게는 정지의 시간이 필요하다. 나의 과거의 삶을 정리하고 새로운 시간을 맞이할 준비의 기간이 필요하다. 저자의 아버지에겐 요양원에서의 2년 2개월이 폐를 치료하면서 동시에 앞으로의 살날을 강하게 만들어준 시간이었고, 저자에겐 독서의 한 해가 그것이었으리라. 문득 나에게도 그러한 시간을 허락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것을 흡수하고, 집어넣고, 포화된 상태가 아니라 내려놓고, 비우고, 소화시키고, 정지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만 같았다. 그래야 내 남은 인생을 차곡차곡 올바르게 쌓아 올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아마 2017년이 그런 해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더 많은 이야기는 블로그에 있어요^-^
http://niceloveje77.blog.me/220899767414
나는 살아갈 가치가 없는 삶을 살아갈까 봐 무서웠다. 언니는 죽어야 했는데 어찌하여 나는 살아갈 자격이 있는 걸까? 이제 난 두 삶을 다 책임져야 했다. 언니의 삶과 내 삶. 그러니 정말로 잘 살아야 할 거다. 열심히 살고 충만하게 살아야 했다. p.33 나는 왜 살아갈 자격을 가졌는가? 언니가 죽었고 나는 살아 있다. 삶의 카드는 왜 내게 주어졌으며, 난 이걸로 뭘 해야 하는가? 달아나기를 멈추어야 했다. p.35
적어도 주 중에는 매일 여섯 시간 정도는 책을 읽고 서평을 쓰는 나만의 시간을 가졌다. 주말에는 예상하기 힘들지만, 매일 오전 네 시간은 확보할 수 있었다. 특히 일찍 일어나면 그럴 수 있었다. p.67
언니가 죽은 뒤 슬픔은 내 삶의 일부가 되었다. 그것이 사라지지 않을 것임을 나는 서서히 이해하게 되었다. 이성은 슬픔을 압도할 힘을 갖고 있지 않으므로 슬픔은 이성에 대한 거센 폭력이다. 다들 고식적인 위로를 보낸다. "당신이 이렇게 슬퍼하는 걸 그녀도 원하지 않을 거야" 아니면 "그녀는 좋은 인생을 살았어"라는 식으로, 내가 그만 슬퍼하도록 건전한 이유를 댄다. 그런데도 난 그럴 수가 없다. 죽음이 쾅 내리치는데 어떻게 소리 지르고 발광하지 않을 수 있는가? 하지만 지금, 도피를 위한 책들을 읽으면서 나는 그와 다른 대답 방식을 찾아냈다. 그것은 슬픔을 내게서 떼어내는 것이 아니라 흡수하는 방식이다. 우리는 기억을 통해 슬픔을 흡수한다. 기억이 슬픔을 몰아내거나 죽은 사람을 도로 데려오지는 못하지만, 과거가 우리와 항상 함께 있도록 보장해준다. p.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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