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을 다하면 죽는다 총총 시리즈
황선우.김혼비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작가 김민섭의 책 <당신은 쓸만한 사람>을 읽으며, '작가의 작가'라는 말에 꽂혀 김혼비라는 인물이 너무 궁금해 덜컥 그의 책을 주문했다. 세상에 제목도 딱 내 취향이다. <최선을 다하면 죽는다>니. 나는 절대 죽을 일 없겠다,는 생각으로 앞으로도 그다지 매사 최선을 다하지 않을 예정인 마음으로 흐뭇하게 창을 닫았다.


젠장! 조금만 조급하면 그나마 없는 꼼꼼함도 백만스물한배쯤은 더 없어지는 걸까. 책을 받고 보니 작가 황선우와 김혼비의 콜라보다. 그것도 편지를 주고받은 걸 모았다니. 두 작가의 책을 읽어 본 적이 없지만, 우선은 작가 김혼비의 필력이 궁금했으므로 얼마간 김이 샜다.


표지에 주저 앉은 곰이 눈에 띄었다. 제목만큼 최선을 다한 미련한 곰일 테지. 매사 영혼을 갈아 넣는 일이 별로 없는 적당히 게으른 인간이라서 번아웃은 그냥 머리로 이해하고 가슴까지 보내지 않는 기술을 터득한지 오래라서 이 책이 공감될까 싶다.


나는 모든 만남에서 서열을 따지지 않지만(나보다 네 살 어린 국장과 십수 년 어린 팀장도 모시는 처지라 분명 그렇다고 얘기하지만), 호칭은 예외적이게도 예민한 편이라서 '빠른'을 주장하며 맞먹으려 드는 꼴에는 꼴값 떨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을 만큼 숟가락질한 세월을 내세우는 편이다. 그래서 그런지 이 두 사람이 퍼올린 숟가락질이 솔찬한데 '씨'로 갈음하는 게 눈에 거슬리지만, 본인들이 좋다는데야 내가 뭔 상관이랴 싶어 시린 눈을 꼭 감았다.


보통 최선을 다하지만 죽을 만큼 최선을 다하고 싶지는 않아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들도 나눠하는 것을 즐겨 하고 싶다는 김혼비의 말을 쉽게 지나치지 못했다. 나는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서도 아이들에게는 최선을 다하라 요구하는 편이라서.


어쨌든 이렇게 다정한 편지를 보고 있으니 뭔지 모르게 남의 일기나 연애편지 훔쳐보는 것처럼 맥박수도 빨라지고 뭐라도 막 쓰고 싶어진다. 한데 쓰고 싶은데 쓸 상대가 없다는 게 슬픈 일이라는 걸 이제야 알았다. 결국 나는 이렇게 다정한 편지를 쓰려면 답신을 기다리지 않아도 되는 국군장병 위문편지를 써야 하나 싶었는데(그나저나 요즘 아이들도 위문편지를 쓰나?) 답신을 기다리게 될까 봐 그냥 말았다.


책 제목을 책 속에서 읽게 되니 재밌다. 그게 작가 김옥선의 말이었다니 얼마간 실망스럽기도 했는데, 또 가만 생각해 보면 칠십 년쯤 살아내신 연륜이 쌓이셨으니 득도하신 거겠다 싶기도 하다. 우린 아직 최선을 다해야 살 수 있다고 믿고 살아 가니까.


은근 아니 묘하게 눈길을 되돌리는 문장이 많은데, 이를테면 '아주 하는 짓마다 주변에 민폐를 흩뿌려 얄밉기 그지없는 모 계열사 팀장'처럼 말이다. 보통 민폐를 '끼치지'라고 하지 '흩뿌리지'는 않나 싶어 흩뿌린다는 표현이 새삼 맛깔스럽게 변신하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작가와 같이 사는 박태하 씨의 집요에 가까운 정확성에 슬쩍 웃음도 흘리게 된다. 항저우에서 총을 쏘게 했으면 금메달을 가져 왔을까?


여하튼 작가 김민섭이 말한 작가 김혼비의 출중함이 이런 언어의 유희가 부드러운 표면에 돌기처럼 튀어나와 걸리 적 거리는 게 아니라 부드러운 표면이 삽시간에 돌기처럼 도드라져서 어느 문장이 돌기였는지를 잊게 만드는, 애초에 언어유희라는 돌기를 읽던 것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힘, 같은 걸 알려주려 했던 거라면 수긍하고도 남는다.


불경의 리듬을 타던 목탁이 잔망스러운 품바의 리듬에 불경스러워 한대도 둘 중 어느 하나라도 만나 즐거워 하면 좋겠다는 그의 말에 웃지 않을 이가 몇이나 있을까. 그때 그의 가방을 내가 봤다면 그를 도라에몽쯤으로 보지 않았을까? 그의 주머니는 소주와 벽시계와 목탁 등등의 것들이 나오니 말이다. 그나저나 그 '전국축제자랑'이 열리면 초대장이 날아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언뜻 스쳤지만 나는 현악기든 타악기든 다룰 줄 아는 게 없으니 초대는 글렀겠다.


48쪽, 왓츠 인 마이 백


2022년 11월과 12월 사이의 편지를, 그해 10월을 관통하는 그들의 이태원 이야기를 나도 모르게 손까지 모으면서 숙연한 자세로 읽게 되고, 또 세상을 향한 내가 생각하는 것의 백만스물한배쯤은 따뜻하고 섬세한 시선을 가져야 이런 글을 쓰는 거구나, 싶어 더 숙연해져 버리게 만드는 그들의 필력에 기분이 심해를 향해 가라 앉는 바람에 책을 잠시 덮었다.


126쪽, '쟤랑 놀지 마라'의 '쟤'를 맡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친구 '흔'의  상실에 관한 이야기에 나이 오십셋에 갈만한 곳은 없어지고 오라고 부르는 곳이 자주는 아니더라도 상가인 게 비슷해서 그에게 빙의해서 읽으면서 그동안 미처 깨닫지 못했던(쓰레기라고만 여겼던) 화환의 위력이 기억에 가시가 박힌 것처럼(왠지 작가를 따고 하고픈 심정이 됐다) 뜨끔하고 박혔다. 나는 내 이름 석자를 걸고 뭘 하지도 않는 데다 직장에서도 가장 바닥을 기는 형편이라 그럴싸한 작명을 미리 몇 개 해놔야 겠다는 위기감이 생겼다.


공자님 환생이 은근 기대되면서 잠자리에 드신지 꽤 오래됐음에도 귀가 가려우셨을 것도 같은 논어 이야기에 웃다가 용기는 나도 못지않게 없는 처지임에도 불끈 했다가 기가 막힌 사자성어 퍼레이드에 빵 터졌다. '군자비추'에 '임신강추'라니. 크하핰이닷!


시작에 썼던 꼼꼼하지 못한 클릭질로 읽게 됐다고 젠장스러워 했던 기분이 싹 날아 갔다. 되레 그 꼼꼼하지 않은 클릭질로 이렇게 다정하고 재기 넘치는 두 작가의 이야기를, 오백 원에 영화 두 편을(한편은 반드시 야했던) 동시상영으로 보던 고등학생 때처럼 땡잡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다정함으로 무장한 그와 동시에 존칭과 '씨'를 올려 붙일 적당한 거리의 친밀감이 있는 누군가와 서신을 주고 받고 싶은 마음이 강렬해졌다, 지만 생각나는 사람이 없어 갑자기 내 관계망이 심히 허술했음을 자각하며 잠자리가 뒤숭숭해질 것을 예감한다.  이 책 강추하고도 남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부모가 곁에 있어 더 불행하다면 - 끊임없이 부모에게 상처받는 당신을 위한 셀프 심리학
산린 사토시 지음, 황혜숙 옮김 / 센시오 / 2023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부모가 곁에 있어 더 불행하다면>이라니. 좀 무서운 제목이었다. 내가 부모이기도 하지만 부모가 곁에 계시기도 해서 그랬다. 그러다 나는 상처를 받는 존재인지 아니면 주는 쪽인지(어쩌면 둘 다 일지도 모르지만) 생각한다. 뭔지 모를 설움이 순간 확 치밀어 올랐다.


뉴욕주립대학을 졸업하고 라이프 코칭과 부모자녀 관계 심리학을 전문가로 활동하고 있는 저자 산린 사토시는 어릴 적 강압적인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형성된 내면아이를 '디마티니 메소드'라는 행동심리학을 적용해 치유했다. 이런 경험을 토대로 '부모 탈출 워크'라는 프로그램을 개발해 부모와의 관계를 힘들어 하는 이들을 치유하고 있다고 한다.


'뽑기'라니. 나는 우리 애들에게 '당첨'일까 아니면 '꽝'일까. 부모를 선택할 수 없듯, 자식도 선택할 수 없다는 건 매한가진데 왜 부모가 더 위축되는 걸까. 이해할 수 없는데도 '독' 부모만 되지 않기만을 바란다는 게 더 씁쓸하다.


시작부터 바늘로 심장을 찌르는 듯하다. 사소한 말 한마디가 아이들에게는 씻을 수 없는 상처가 된다는, 그래서 아이들의 우주가 흔들린다는 말은 모르는 바 아니지만 그래도 악의 없이, 사실 때때로 그러기도 하지만 아무튼 대체로는 악의 없이 툭툭 던지는 무심한 말에 아이들이 그리 심한 상처를 입는다니 만감이 교차한다.


내면 아이와 관련된 책은 좀 읽었다. 자기 치유나 마음 챙김에 관한 책들. 성장기에 부모로부터 받게 되는 영향은 거대하고 아이들의 인격 형성에 어마 무시하게 중요하다는 설명들은 솔직히 읽을 때만 잠깐 나는 어떤 아빠인가를 고민하면서 스스로 잘못하는 아빠의 위치에 나를 세웠다. 그래서 불편하고 행동에서 부정적인 것들을 찾아 내기 바쁘고 얼마간의 공감 후에는 잊혔다.


저자는 그런 부모와의 관계에서 힘들 게 느껴지는 조건을 제시한다. 대부분 나와 관계없는데, 그렇다면 나는 부모와 잘 지낸 것일까. 아빠와의 갈등이 이렇게 골이 깊은데? 또 내 아이들은 어떨지 궁금하면서 한편 염려된다.


30쪽,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지 못했을 때


부모장벽이라는 말 자체가 장벽이 되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궁금하긴 해서 해보긴 해봤는데 8개로 약함이라니, 안심이 되는 건 무슨 감정인지. 이 항목들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있긴 할까?


47쪽, 부모장벽 체크리스트

68쪽, 아빠와 사이가 나쁠 때 일어나는 일


저자는 '부모장벽' 체크리스트를 비롯해 제시한 여러 질문에 대한 해설과 해결 방안을 조언하면서 부모와의 갈등에서 헤매고 있는 독자들의 마음에 웅크린 내면 아이를 다독여 준다.


3장은, 이렇게 도발적인 문장에 내가 한 짓을 들킨 것처럼 숨이 컥 막혔다. 어떤 이유로든 부모를, 그 반대도 마찬가지지만 미워해도 괜찮은 이유가 있을까,라는 생각이 분명 들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아버지를 여전히 미워하고 있다.


요새 아이들이 자주 한다는 '부모 뽑기'라는 말은, 거기에 내 부모는 '꽝'이야라는 말을 스스럼없이 하는 아이들이 있다는 거에 심장을 발바닥까지 떨어지게 만든다. 이런 사실에 저자는 부모 역시 같은 마음이고, 부모는 인생의 전문가가 아니고, 매일 고민하고 상처받고 방황하는 인간일 뿐이라고 대변한다. 살짝 위로받았다. 내 마음대로 태어나게 했을 수는 있지만 '널' 원한 건 아니었다는 얼마간의 억울함을 이야기하면 너무 지질한가?


저자가 소개하는 '부모 탈출 워크' 프로그램은 부모의 관계에서 부정적인 측면에만 고립되는 일에서 벗어나게 돕는다. 애증의 관계를 더듬어 생생하게 끄집어 내는 과정에서 오랜 갈등의 오해와 착각이 걷어지고 객관적으로 관계를 재정립 하게 돕는다는 것이다. 그럴 만도 하겠다.


120쪽, 상처에 붙들리면 행복은 보이지 않는다

130쪽, 부모 탈출 8단계


이 책으로 말끔하게 치유를 받을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자신이 그동안 알게 모르게 부모와의 풀리지 않은 숙제를 안고 살아내느라 죽을 만큼 힘들어 하고 있다는 걸 이해하는 데는 충분하다. 만약, 내 삶이 뭘 해도 안 되고 무기력한데다 좌절이 익숙하다면 내 잘못이 아니라 부모와의 풀리지 않은 감정이 원인일 수 있다는 것, 그래서 내면 아이를 빨리 성숙시켜야 숨 쉬고 살만한 세상이 될 수 있음을 공감하게 돕는다.


내면아이 치유 안내서 같은 느낌이다. 나의 내면 아이는 몇살 쯤 됐을까.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솔직하게 쓴 글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라지는 것들을 통과하는 여름이 있다
조성희 지음 / 꿈공장 플러스 / 2023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제목도 작가 소개도 내 이름이 적힌 다정한 글에서도 감성이 쏟아졌다. 다정함으로, 잘 있어라고 대답까지 하고 싶어질 정도로. 목차를 따라가다, 여름에서 겨울로 지나는 사이에 있는 그의 계절이 궁금해졌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 중에 '숨기 좋은 곳'이 궁금했다.




요즘은 씹는다기 보다 마시는 쪽에 가까운 죽처럼, 시도 술술 읽히는 에세이나 소설처럼 읽고 있는 나를 종종 발견한다. 예전에는 시를 잘 씹지 않으면 넘기기 어려워 의무감으로 꼭꼭 씹게 되는 현미밥처럼 그렇게 꼭꼭 씹으며 중얼거리고 되뇌고 고개도 젖히고 느릿하게 읽었었는데. 다 옛말처럼 그렇게 오래전 일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시인은 현미밥처럼 만들어, 그가 예상한 게 빗나가서 다행인 그의 시가 이상하게 좋으면 어쩌지, 라는 예상을 하게 되는 마음이 들었다.


​초록 눈물은 왜 초록일까, 생각한다. 그리고 누구의 눈물이 건데 밥에 매달려야 가라 앉을 만큼 무거웠을까, 염려하는 마음도 된다.


20쪽, 초록 눈물을 삼키는 방법


갈비뼈는 존재하는 것에 거의 가까워질 수 있는 슬픔을 담,아서 연인에게 가까이 갈 수록 아프고 상처로 얼룩질까, 하는 발칙한 상상이 들어 웃었다. 그러고 있으니 아내가 이상한 눈으로 쳐다본다. 갈빗대가 가렵다.


위로


네가 한번 해볼래

얼마나 어려운지


달콤한 사탕을 꺼내 보여도 소용없어

혀끝으로 느껴지는 맛은 깊이가 없으니


차라리 그 혀를 먹어버리는 게 낫다니까


하루에도 백만스물한번씩 사람들 사이를 오가는 위로를 어쩜 이리 잘 표현했을까. 매번 매사 영혼 없이 떠도는 고작의 위로만 주고받는 누군가는 부끄러워 질만 하다. 사실 누구랄 것도 없지 않을까? 다 그러고 사는 거지.


시집은 뭔가 사라지는 것들이 있는데 막 슬프진 않고, 그렇게 사라지는 것들 뒤에 뭔가 딸려 오는 게 있어선 가? 여하튼 심장 모니터에 그어진 직선처럼 감정은 리듬은 잃었지만, 다정한 시어들은 요동치지 않고 담담하게 그렇게 스민다.




"버스는 바다를 지나고 언덕을 넘어 겨울과 봄을 통과해 옵니다." 105쪽, 경유하다


도대체 그 버스는 어디를 경유해서 언제쯤 내게 올까요. 기다리는 게 참 많이 고된 일이군요. 버스에 희망은 탔을까요? 어디를 경유하고 있을까요. 그냥 꿈만 꾸긴 싫어서 기다리게 됩니다.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생은 사랑 아니면 사람 - 사랑을 말할 때 하고 싶은 이야기
추세경 지음 / 미다스북스 / 2023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 이렇게 짜릿한 제목이라니. 어차피 인생은 도 아니면 모, 그렇게 사람과 사랑의 차이는 어쩌면 한 끗 일지도. 제목부터 아주 흥미진진 하다.


출퇴근하는 직장인이 위대한가, 갸우뚱한데 작가가 그렇다니 그런 거겠지 했다, 가 그래도 나는 아닌 거 같다고 결론을 내린다. 출근하면서 퇴근을 염원하는 직장인이 위대하면 그것도 곤란하겠다, 싶어서.


신소리는 그만 두고. 출퇴근 하면서 글을 쓴다는, 이기적인 글쓰기로 창의성을 발휘하는 작가라는 소개와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저 홀로 피어난 꽃처럼 나답게, 그렇게>라는 무척 긴 제목의 책을 썼다. 그리고 지금은 소설을 쓰는 중일 지도 모른다. 아, 남자다.


뭐랄까, 조금 독특한 사람이랄까? 스스로를 궁서체(진지한 생각만 하는)라고 말하는 사람은 살면서 별로 못 봤는데, 작가가 그렇다니 그런 거겠지. "살아가는 글이 살아 있는 글이 되기 바란다"라는 그의 글쓰기가 얼마간 편안해진다. ​


58쪽, 여름의 이름으로


읽다가 고통은 개별적이라는 그의 글에서 순간적으로 끌려와 재생되는 장면이 있다. 추억이라 하기엔 아프다 깨달음이 있던 순간이었다. 친구가 운영하던 가게를 고민 끝에 폐업을 결정했을 때 위로차 친구 몇이 모였다.


학교와 맞닿아 있긴 했으나 정문이 아닌 후문, 그것도 굳게 잠겼던. 그곳에서 아이스크림을 팔았다. 굳이 담장을 넘어서 먹어야 직성이 풀리는 맛을 팔지 못하던 가게를 1년을 버티다 문을 닫았다.


위로차 모였으니 술잔을 기울이다 서로 "나도 힘들다"라는 하소연이 눈치도 없이 여기저기 터져 나왔다. 듣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너희들이 나만큼 힘드냐"라고 스스로 불편한 몸을 무기 삼고 말았다. 아니나 다를까 친구 하나가 "너 힘든 건 잘 안다. 하지만 네가 제일 힘들 거라고 말하진 마라. 콩알만 해도 각자 자기가 짊어진 문제가 제일 힘든 법이다."라고 쓴소리를 했다.


그 소리에 처음에는 섭섭했다. '펄펄 날던 친구가 휠체어 의지해 사는데도 어떻게 저런 소리를 하지?' 해서다. 그렇게 마상을 심하게 입은 채 집에 돌아와 곰곰이 생각해 보니 친구 말이 옳았다. 손톱 밑에 가시도 내 손톱 밑이라면 겁나 아프다는 걸 새삼 깨닫던 시간이었다. 그 친구는 여전한 몇 안 되는 절친이다.


또, 이미 성공의 서사로 유명한 사람들을 거론하는 한편, 그만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는 성공한 사람들의 성공이 아닌 아직 성공하기 전의 사람들의 성공 이야기 같아서 마음이 따뜻해진다. 그의 성공도 바라고 내 성공도 바라게 된다.


153쪽, 이어져서 산다는 것은

163쪽, 스쳐가는 월급 속에 한 번뿐인 인연이라도


그가 만났다는, 가난이 부끄럽지 않다는 그를 만난 여행에서 그가 느꼈던 감정들을 나도 모르게 따라 간다. 나는 가난을 이해? 공감? 하고 있을까.


어릴 때는 엄마에게 자주 듣던 말이 '집에 돈이 말랐다'거나 '돈 한 푼 없다'라는 거였다. 월사금이 밀려 담임에게 얻어터지고 맨 뒷자리로 쫓겨 날 때, 나는 가난 했을까?


그러지 않았던 거 같다. 그때 반 아이들 반 이상은 월사금이나 육성회비 때문에 얻어 터지고 맨 뒷자리로 쫒겨 났으니까. 그렇게 쫓겨난 아이들 때문에 되레 나는 또 앞자리로 밀려 들었으니까. 그런 친구들과 가난으로 주눅 들고 아파하지 않았다. 키득거리고 놀기 바빴으니까. 그저 생각이 없었을지도.


사실 그때의 가난은 도시락 반찬으로 프랑크 소시지를 싸와 뚜껑을 반쯤 덮은 채로, 전쟁터에서 적군을 경계하는 눈빛으로 프랑크 소시지를 엄호하면서 날쌔게 하나씩 집어 먹던 부잣집 도련님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가난은 마음에서부터 오는 건지도 모른다.


책은 묵직해서 머리를 누를 만큼 생각거리가 많기보단 소프트 아이스크림처럼 부드럽고 편안하게 읽힌다. 복잡다단한 인간 관계에 자신의 경험을 자연스럽게 덧입혔다. 한참 생각하고 심각하게 고민스럽게 만들지 않고 독자도 일상에서 경험하는 일처럼 아주 친근한 이야기다.


질퍽한 사랑이나 난삽하지 않은 익숙한 글감으로 써낸 그의 이야기는 그냥 술술 읽어도 좋은, 그런 책이다.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낮은 데서 시간이 더 천천히 몰개시선 4
황화섭 지음 / 몰개 / 2023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퇴근하고 집에 들어 서는데 예천에 아는 치과 있어? 라는 아내의 물음이 먼저 반겼다. 아니. 무심결에 대답하고 들어섰다. 탈의하고 식탁에 앉으니 서울대 마크가 선명한 모 치과에서 보낸 황색 우편물이 눈에 띈다. 뭐지? 궁금증에 우편물을 뜯는 순간, 아! 시집이네? 했다. 생각과 다른 책이라니.


제목을 보고 서평단에 신청했었다. 왠지 소외계층의 삶이 두툼하게 담겼겠다, 싶어 요즘의 내 관심사와 맞아떨어진다 했다. 그런데 시집이 왔다. 시집이라 그런가? 시집인 걸 모르고 받은 후 시집인 걸 알았을 때의 제목은 아주 많이 시적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붓으로 그리고, 펜으로 쓰고 가끔 마시는 걸 좋아한다는 치과의사이자 시인은 요즘 판각을 배우고 있고, 하모니카 불기가 취미라고 한다. 근데 이렇게 바쁘신 와중에 치료 하실 시간이 있긴 하나, 싶다.


추천의 글을 쓴 시인 안도현은 <꽃 심기>가 가장 좋다 하였으나 나는 어매가 등장하는 이 모든 시가, 살아 있는 내 어미를 가깝게 끌어 당기는 통에 눈물 범벅이 돼서 좋아라 할 수 밖에 없었다.


제목의 의미를 알고 나니 기분이 묘했다. 사회의 그늘 어딘가로 내몰리는 사람들의 이야기인 줄 알았던 이야기가 밤하늘을 비추다 황홀하게 떨어지는 별똥별의 이야기라니. 그것도 떨어지는 이유가 낮은 데서 시간이 천천히 흐르기 때문이라니 별똥별도 이유도 시적이다.


"(상략) 방학 아르바이트가 끝난 후에도 나는 가끔씩 네가 근무하는 은행을 찾아갔어. 그때 네가 사 주었던 만나던 음식들 지금도 기억해. 너의 눈빛은 별빛처럼 맑았고, 너의 목소리는 개울물 소리처럼 내 귀에 스며들었지. 한번은 증권사 직원하고 상담을 하는데, 세상에나 너하고 목소리와 말투가 똑같은 거야. 그래서 이름하고 나이를 물어봤는데, 그 사람은 네가 아니었어. 그래도 너를 만난 것처럼 좋았어. 지금 여기는 봄비가 내려. 봄비가 나뭇잎을 톡톡 건드리네, 발그스레하게." 67쪽, 정희에게




읽는 동안 얼마나 이 시가 로맨틱하게 다가왔는지 모른다. 누군가를 연모하는, 어쩌면 사랑일지 모르는 감정이 고스란히 전달되는 느낌. 타인과의 통화에서 누군가 그려지고, 이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나서도 실망이 아니라 그리움에 잠겨 좋을 수가 있을까. 종일 달뜨게 만드는 시다.


별똥별이 되고 싶다던, 되겠다던 시인은 왜 몇 발자국, 몇 발자국을 옆으로 가야 했을까, 별빛만큼이나 많이 궁금했지만, 이 시집은 시인 이동순의 해설처럼 난삽하고 시적 상징 혹은 복선을 찾아 헤매야 하지 않아 좋다. 산문처럼 평이하게 술술 읽혀서 좋다. 오랜만에 가슴이 몽글해졌다.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