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낮은 데서 시간이 더 천천히 ㅣ 몰개시선 4
황화섭 지음 / 몰개 / 2023년 7월
평점 :
퇴근하고 집에 들어 서는데 예천에 아는 치과 있어? 라는 아내의 물음이 먼저 반겼다. 아니. 무심결에 대답하고 들어섰다. 탈의하고 식탁에 앉으니 서울대 마크가 선명한 모 치과에서 보낸 황색 우편물이 눈에 띈다. 뭐지? 궁금증에 우편물을 뜯는 순간, 아! 시집이네? 했다. 생각과 다른 책이라니.
제목을 보고 서평단에 신청했었다. 왠지 소외계층의 삶이 두툼하게 담겼겠다, 싶어 요즘의 내 관심사와 맞아떨어진다 했다. 그런데 시집이 왔다. 시집이라 그런가? 시집인 걸 모르고 받은 후 시집인 걸 알았을 때의 제목은 아주 많이 시적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붓으로 그리고, 펜으로 쓰고 가끔 마시는 걸 좋아한다는 치과의사이자 시인은 요즘 판각을 배우고 있고, 하모니카 불기가 취미라고 한다. 근데 이렇게 바쁘신 와중에 치료 하실 시간이 있긴 하나, 싶다.
추천의 글을 쓴 시인 안도현은 <꽃 심기>가 가장 좋다 하였으나 나는 어매가 등장하는 이 모든 시가, 살아 있는 내 어미를 가깝게 끌어 당기는 통에 눈물 범벅이 돼서 좋아라 할 수 밖에 없었다.
제목의 의미를 알고 나니 기분이 묘했다. 사회의 그늘 어딘가로 내몰리는 사람들의 이야기인 줄 알았던 이야기가 밤하늘을 비추다 황홀하게 떨어지는 별똥별의 이야기라니. 그것도 떨어지는 이유가 낮은 데서 시간이 천천히 흐르기 때문이라니 별똥별도 이유도 시적이다.
"(상략) 방학 아르바이트가 끝난 후에도 나는 가끔씩 네가 근무하는 은행을 찾아갔어. 그때 네가 사 주었던 만나던 음식들 지금도 기억해. 너의 눈빛은 별빛처럼 맑았고, 너의 목소리는 개울물 소리처럼 내 귀에 스며들었지. 한번은 증권사 직원하고 상담을 하는데, 세상에나 너하고 목소리와 말투가 똑같은 거야. 그래서 이름하고 나이를 물어봤는데, 그 사람은 네가 아니었어. 그래도 너를 만난 것처럼 좋았어. 지금 여기는 봄비가 내려. 봄비가 나뭇잎을 톡톡 건드리네, 발그스레하게." 67쪽, 정희에게
읽는 동안 얼마나 이 시가 로맨틱하게 다가왔는지 모른다. 누군가를 연모하는, 어쩌면 사랑일지 모르는 감정이 고스란히 전달되는 느낌. 타인과의 통화에서 누군가 그려지고, 이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나서도 실망이 아니라 그리움에 잠겨 좋을 수가 있을까. 종일 달뜨게 만드는 시다.
별똥별이 되고 싶다던, 되겠다던 시인은 왜 몇 발자국, 몇 발자국을 옆으로 가야 했을까, 별빛만큼이나 많이 궁금했지만, 이 시집은 시인 이동순의 해설처럼 난삽하고 시적 상징 혹은 복선을 찾아 헤매야 하지 않아 좋다. 산문처럼 평이하게 술술 읽혀서 좋다. 오랜만에 가슴이 몽글해졌다.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