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가지 흑역사로 읽는 세계사 : 현대 편 - 대공황의 판자촌에서IS의 출현까지 101가지 흑역사로 읽는 세계사
빌 포셋 외 지음, 김정혜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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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E.H 카아가 "역사란 현대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유명한 말했다. 이에 전적으로 동의하기에 최근 역사를 중요하게 여기는 풍조가 굉장히 반갑다.

그러나 중요하다고 해서 재미있으라는 법은 없다. 사실 중요하면 중요할수록 어렵고 지루한 경우가 많다. 역사도 그렇다고 생각한다. 과거와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미래에 대한 답을 찾아나가기 위해서 역사를 배워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다.

그러던 중 다산초당에서 흥미로운 책이 출간되었다. 바로 《101가지 흑역사로 읽는 세계사 : 현대 편》라는 책이다. 세계사에 대한 101가지 이야기가 담겨 있는 건 알겠는데 무려 '흑역사'라고 한다. 강 건너 불구경이 제일 재미있다고 나 자신의 흑역사가 아니면 즐겁게 구경할 수 있지 않은가. 세계사를 흑역사로 풀어내다니 책을 읽기도 전에 기대가 됐다.

《101가지 흑역사로 읽는 세계사》는 고대~근대 편과 현대 편으로 나뉜다. 한 권당 101가지의 흑역사가 수록된 게 아니고 고대~근대 편에 50개, 현대 편에 51개의 이야기가 들어 있다. 특히 시간 순서대로, 그중에서도 같이 엮일 수 있는 이야기를 배치해놔서 흐름에 맞춰서 읽을 수 있었다.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은 머리말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기는 편이라 꼼꼼하게 읽는데 현대 편에는 머리말이 없고 꼬리말만 있었다. 대신 고대~근대 편에는 꼬리말이 생략되어 있다. 아마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생각되는데 한 권만 소유하고 있는 나로서는 상당히 아쉬웠다.


흑역사, 검을 흑(黑)을 써서 부끄러운 과거를 이야기할 때 쓰이던 유행어가 이제는 일상 속에 완전히 자리 잡혀 쓰이고 있다. 흑역사라고 하는 건 부끄럽고, 후회되고, 되돌리고 싶은 실수를 말한다. 그렇다면 역사에서 흑역사는 어떤 것일까. 단순히 부끄러운 과거만 말하는 게 아니다. 수천수만 명의 목숨을 구할 수 있었고, 희생을 최소화할 수 있고, 2021년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을 완전히 바꿔놓을 수 있었던 흑역사다.

흑역사에는 '만약에'라는 가정이 자주 따라온다. 이 책도 그렇다. 만약에 그때 다른 선택을 했다면, 조금 더 현명한 선택을 했다면 더 나아지지 않았을까. 단적으로 얘기해서 미국이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하고 일본이 급하게 항복을 말하지 않았다면 우리나라는 스스로의 힘으로 주권을 되찾을 수 있었지 않았을까. 그래서인지 내내 안타까운 마음으로 책을 읽게 되었다.

역사를 배우는 가장 큰 이유는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라고 생각한다. 인류의 흑역사를 읽을수록 경각심은 더욱 커졌다. 그런 점을 생각했을 때 가장 효과적으로 목표를 이룬 책이라고 생각한다.

과거 한국사를 공부할 때 선생님께서 이런 말씀을 한 적이 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보기엔 몇 세기 전을 살아갔던 사람들의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고 답답하거나 우습거나 멍청해 보일 수 있다고. 그러나 그 사람들의 입장에선 그게 당연해 보였을 거고 그런 역사가 있었기에 지금 이 자리에 우리가 있을 수 있었을 거라고.

과거 사람들의 실수에 화가 날 수 있겠지만 이는 우리가 그 행위에 대한 결과를 이미 모두 알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에서는 역지사지(易地思之)로 생각해 보자. 행동에 대한 결과를 예상치 못했을 때 본인은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을 것인가.

아직 역사를 쓰고 있는 우리도 여러 흑역사를 남기고 있을 것이다. 후대의 사람들이 보기에는 단순히 웃기고 멍청해 보이는 흑역사가 아니라, 원망하고 화가 나는 선택을 거듭할 수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과거를 비웃지 말고 타산지석(他山之石), 반면교사(反面敎師)의 마음으로 역사를 배우고 같은 '흑역사'를 반복하지 않는 것이다.

지금도 인류 문명의 행진은 계속되고 있다.

이것을 알기에 나는 오늘 밤도 편히 잠을 청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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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 흡혈마전
김나경 지음 / 창비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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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줄거리

1931년, 일본이 조선을 지배하고 있을 당시. 열네 살의 희덕이라는 소녀는 진화여자고등보통학교에 1학년으로 재학 중이다. 어느 날, 기숙사에 계월이라는 새로운 사감 선생님이 부임하면서 일이 시작된다. 계월은 무뚝뚝하고 상냥하지도 않지만, 모던 걸처럼 세련된 모습과 구속하지 않는 성격이기에 학생들에게 인기가 많다. 그러나 자꾸 계월 주위에서 수상한 일들을 목격하는 희덕은 마냥 그를 좋아할 수는 없다. 창백한 피부, 뾰족한 귀, 가끔씩 드러나는 붉은 눈동자. 과연 그의 정체는 무엇일까?

의구심을 가지고 계월을 쫓아다니던 희덕은 그가 생물 선생인 이와모토의 목을 무는 장면을 목격하고 큰 충격에 빠진다. 기억을 지우려던 계월은 희덕에게 자신의 능력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곤 어쩔 수 없이 흡혈마라는 정체를 밝힌다. 희덕의 친구 경애는 계월이 일본 총독부의 스파이라고 확신하지만 희덕은 사실을 밝힐 수 없다. 희덕은 경애의 오빠이자 경성제국대학의 학생인 일균과도 가까워진다.

계월과 묘한 줄다리기를 하던 희덕은 그가 뒤에서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있다는 사실도, 일균 역시 독립운동을 지원하지만 계월을 못 믿고 있다는 것도, 계월을 흡혈마로 만든 백작과 얽힌 과거 이야기도, 백작이 다시 접근한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조선이 위험해진 계월은 사감 일을 관두고 만주로 떠나려고 하지만, 백작은 경애에게 접근해 경애를 흡혈마로 만들려고 한다. 이에 계월과 희덕이 힘을 합쳐 백작을 무찌르고 친구를 구해낸다.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가려던 그때, 희덕은 공부를 관두고 고향에 내려와 시집갈 준비를 하라는 편지를 받게 된다. 고민하던 그는 자신이 선택한 삶을 살고 싶다는 다짐과 함께 계월과 함께 만주로 떠나는 기차에 올라탄다.


감상

1930년대는 구태여 설명을 덧붙이지 않아도 어떤 시대였는지 다들 알 것이다. 일본의 지배를 받으며 핍박받던 식민지 조선. 그런 상황에서 어렵사리 학교를 다니는 희덕. 그리고 흡혈마로 살아가는 계월. <1931 흡혈마전>은 이런 흥미로운 배경을 바탕으로 쓰였다.

가뜩이나 일제 강점기로 혼란한 상황 속에서 두 주인공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더 큰 핍박을 받는다. 특히 희덕은 여자는 집에서 살림이나 하면 된다는 편견 속에서, 계월은 독립운동을 지원한다는 점에서 더 어려운 상황이다. 그런 시대적 위기 속에서 그들은 나이차를 뛰어넘는 우정을 보여준다.

아쉬운 점도 분명히 있던 소설이다. 뱀파이어라는 소재는 오랜 시간 너무나 많이 다뤄진 소재이기에 1930년대라는 특별한 시대적 상황을 제외하면 소설 속 에피소드는 어디서 본 것 같은 클리셰가 많았다. 또한 계월과 희덕의 아슬아슬한 우정도 납득이 잘 되진 않는다. 계월은 어떤 계기로 희덕에게 마음을 연 것이고, 왜 희덕에겐 계월의 능력이 통하지 않는 것인가. 그리고 가장 큰 흑막으로 여겨지는 백작은 왜 갑자기 경애를 흡혈마로 만들려는 것이며, 그렇게 허무하게 죽는 것인가.


그럼에도 잘 시도되지 않았던 소재를 차용해 주제의식을 이끌어낸 점은 인상 깊었다.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다룬 문학 작품이나 영화, 다큐멘터리는 많지만 그 속에서 여성이 부각된 작품은 여전히 적다. 책에서 언급되는 일제강점기 여성 작가이자 화가, 페미니스트인 나혜석도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 것도 그리 오래되지 않은 일이다. 작가가 계월과 희덕을 여성으로 설정하고, 나이 차에도 불구하고 둘의 우정을 그려냈다는 것은 한국 문학에서도 주목할 만한 일이다. 또한 작가는 이에 그치지 않고 당대 여성이 받아야 했던 억압과 차별을 효과적으로, 공감하며 분노할 수 있도록 잘 그려냈다.


"곱게 보이는 것도 아니고, 공부를 잘하거나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듣는 모습도 아니지. 그보다 더 중요한 검, 자기 스스로의 의지대로 삶을 살아가는 자세야. 당연해 보이지만 연습이 필요한 일이기도 하고 말이야." - P133

‘나는 다른 사람의 말이 허황되어 보여도, 절대 그 사람의 자세한 의견을 듣기 전에 환상이라 미리 결정 내리진 않을 거야.’ - P125

희덕은 그 자리에 있었다. 아무것도 속이지 않고, 숨기지 않은 채로. 그래서 계월 또한 자신의 상황을 정직하게 받아들이고 맞설 수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희덕과 함께 있으면 계월이 도망쳐 온 과거 또한 맞설 수 있는 현실이 되었던 것이다. - P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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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감 일기 - 공포와 쾌감을 오가는 단짠단짠 마감 분투기
김민철 외 지음 / 놀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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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감. 이 단어를 보면 어떤 이미지가 연상되는가. 나는 차일피일 미루다가 마감일이 닥쳐 미친 듯이 일을 해내고 숨을 헐떡이며 간신히 뛰어가 아슬아슬하게 제출하는, 그런 모습이 떠오른다. 적어도 좋은 이미지가 연상되진 않는다는 거다. 마감일기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이 책의 표지에 영혼이 탈출하고 있는 것 같은 일러스트가 그려져 있는 것을 보니 다른 사람들의 생각도 나와 별반 다르지 않는 것 같다.

이 책을 처음 봤을 때 흥미가 생기는 동시에 의문이 들었다. 각기 다른 직업을 가진 8명이 ‘마감’에 대해서 자유로운 글을 쓴다는 점이 그랬고, 도저히 좋은 얘기가 나올 것 같지 않은 ‘마감’을 어떻게 풀어낼 것인가가 그것이었다.


이 책은 소설가, 번역가, 편집자, 방송작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에세이스트, 방송작가, 일러스트레이터까지 다양한 직군이 모여서 쓴 에세이다. 마감이 없는 직업이 어디 있겠냐마는 특히 마감이 필수인 직업들이 모인 것이다.

마감이라는 주제 아래에서 같은 내용이 반복되어 지루하지는 않을까 걱정하면서 책을 펼쳤다. 그러나 몇 장 넘기지 않았을 때 쓸데없는 걱정이라는 걸 깨달았다. 협소한 주제로도 이렇게까지 다양한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는 게 놀라웠다.

또한 이 책의 저자들은 한 번씩 책을 출간한 경험이 있다. ‘글을 좀 쓰는’ 사람들이 모인 것이다.


김민철 : 마감근육


광고 회사. 다녀보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다. 광고회사가 얼마나 끔찍하고 소름 돋게 바쁜 곳인지. 그런 곳에서 팀장을 맡고 있는 이 작가에게 마감은 일상이자 생활이자 그 자신이다.

마감이 굉장히 중요한 업계에서 일하는 사람은 누구나 알 것이다. 앞에서 스케줄이 밀리게 되면 도미노가 쓰러지듯이 줄줄이 일정이 꼬이게 된다는 것을. 광고 업계에서 일하는 작가는 일하면서 이런 약속을 가볍게 여기면서 지키지 않는 사람을 수없이 봤다고 한다. 그래서 그랬을 것이다. 마감을 잘 지키는 것이 타인의 일상을 존중하는 것이고, 스스로 마감을 잘 지키는 사람이 된 것은 말이다.

그는 마감을 잘 지키는 노하우를 두 가지 전수해 주기도 한다. 메모하는 습관을 들이는 것과 리스트를 만들어 순서대로 일을 처리하는 것. “내일의 내가 할 줄 알았지......”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나에게 큰 도움이 되는 부분이었기에 포스트잇으로 표시까지 해두었다.

결국 마감은 타인과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이다. 나의 마감이 늦어지면 다음 사람이 마감을 맞추느라 자신의 시간을 갈아 넣어야 된다는 당연한 사실을 나는 것. 나의 일상이 중요한 것처럼 그들의 일상을 존중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매 순간 자각하는 것. (19쪽)

중요한 지점은 ‘지금까지의 최선의 공’이다. ‘지금까지 누구도 못 던진 대단한 공’이 아니라. (19쪽)


이숙명 : 숨바에서 온 편지


편집자가 일부러 해놓은 설정이겠지만 마감을 잘 지키는 김민철 작가 바로 다음에 이숙명 작가가 등장한다. 본인의 글에 적은 내용이 맞는다면 무려 3주가 넘게 ‘마감일기’의 마감을 늦은 작가이다.

언뜻 보면 두서없이 마감을 넘기게 된 이유를 변명과 함께 줄줄이 늘어놓다가 의식의 흐름대로 이 이야기, 저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처럼 보이지만, 마법같이 작가에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옹호하게 된다. 그래서 책에 수록된 작가들 틈에서 유달리 달라 보였고 가장 재미있었던 부분이라고 꼽았다.

특히 책 중간중간에 날카로운 통찰이 보이는 부분이 있다. 정치 이슈를 쓰는데 정치색은 드러나지 않게, 여성 이슈에 대해 쓰는데 ‘너무 페미’처럼 보이지 않게 써달라는 요청을 ‘새우 없는 새우볶음밥’을 만들어 달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비유한 것이다. 유쾌한 마음으로 공감하면서 지나간 대목이지만 후에 두고두고 깊게 생각해 볼 정도로 참신하고 탁월한 비유였다.

글 하나로 사람을 판단하는 건 위험하다고 생각하지만 정말 솔직하고 진지하고, 그럼에도 그 진지한 얘기를 유쾌하게 전달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이숙명 작가의 다른 책들도 읽어보고 싶어지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흔히 피처 기자가 실패한 소설가 지망생인 줄 압니다. 제 평생 “그래서 소설은 언제 쓸 거니?”라는 말을 몇 번이나 들은 줄 아십니까? 저는 단 한 번도 제 입으로 소설을 쓰고 싶다고 말한 적이 없는데요. 어떤 직업인에게 이렇게 대놓고 “너 사실은 다른 일을 하고 싶지만 능력이 안 돼서 흉내나 내면서 사는 거잖아”라고 넘겨짚어 말하는 건 너무 무례하지 않습니까? (42쪽)

아주 원초적인 질문을 해봅시다. 사람은 왜 글을 쓸까요? (…중략…) 자신을 표현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표현은 모든 치유의 시작이자 핵심이기도 합니다. (55쪽)


권여선 : 스물에도, 마흔에도 마감


여덟 명의 작가들 중에서 유일하게 전부터 알고 있던 사람은 바로 권여선이다. 창비에서 출간한 ‘안녕 주정뱅이’라는 단편 소설집을 전에 접한 적이 있다. 그래서 조금은 반가운 마음으로 글을 읽어 나갔다.

작가는 마감을 인생과 연결해서 글을 썼다. 권여선이라는 소설가를 만들어낼 수 있었던 인생의 중요한 마감에 대해서 적었다. 여덟 작가들 중 가장 마음이 쓰이는 에세이가 아니었나 싶다.

그는 한 편의 단편 소설로 등단한 이후 7년간 소설을 내지 못한 소설가였다. 학원 강사로 방향을 틀까 고민하던 중 우연찮게 단편 소설을 쓸 기회를 얻었고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던 게 지금의 권여선을 만들어놓은 것이다. 그래서 작가에게 마감의 의미는 남다르다.

내가 대단하다고 믿으면서 살다 현실을 깨닫는 순간이 누구나에게 한 번쯤은 오게 된다. 그때의 어마어마한 좌절감과 걷잡을 수 없는 상실감은(실제로는 잃은 건 없으면서도 말이다) 생각만 해도 괴롭다. 그러나 그 이후의 행보가 인생을 판가름하지 않나 싶다. 좌절하고 포기하고 용기를 내지 않으면 평생을 그렇게 살아가는 거다.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야”라는 틀에 스스로를 가두지 않았으면 좋겠다. 용기를 내 많은 사람들이 알아주는 작가가 된 권여선처럼 말이다.

그때 생애에서 가장 중대한 첫 마감을 앞두고 있었던 나는 무의식적으로 알았던 것 같다. 무엇을 마감하기 위해서는 그 마감 앞에서 혼자여야 한다는 걸. 절대적인 고독이 필요하다는걸. 그것은 누구와 나눌 수도 없고 나누어서도 안되며 심지어 누구에게 엿보이거나 들켜서도 안 되는 나만의 내밀한 직면이어야 한다는 걸. (79쪽)


권남희 : 마감, 유감, 쾌감


번역가라는 직업에 대해서 관심이 있어 더욱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본인은 겸손하게 얘기하지만 그쪽 업계에서 높은 위치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살짝 거리감이 느껴질 수 있었지만 솔직한 그의 얘기를 읽으니 결국 마감 앞에서 다들 똑같은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번역가가 하는 일에 비해서 그렇게 대우받는 직업은 아니다. 나 역시 일하면서 느꼈지만 외주자, 프리랜서를 대하는 기업의 횡포는 경악스럽기 그지없다. 특히나 프리랜서들은 출퇴근하는 직장인들과 다르게 당장 일이 없으면 생계에 지장이 있으니 얼마나 힘들까. (이 대목이 감히 동정하는 어투로 읽히진 않았으면 좋겠다. 그만큼 사회 전반에서 변해야 되는 부분이 있다는 말이다.) 짧게 지나가긴 했지만 번역 업계에서 이름있는 위치를 가진 권남희 작가의 고민을 읽을 수 있었다.

“마감이 어디 있어. 내가 원고 주는 날이 마감인 거지.” (108쪽)


강이슬 : 알콩달콩하고픈 마감에 나는 항상 앓고 닳고


여덟 명의 저자 중 어린 편에 속하고 나와 비슷한 미혼 직장인 여성이기에 공감 가는 부분이 굉장히 많았다. 글로써 먹고 살아가는 방송 작가니 당연히 글쓰기에 대한 마음가짐이 나와는 무게가 다르겠지만, 그럼에도 글을 대하는 그의 이야기가 다르게 다가왔다고 해야 할까.

작가는 방송일이 그렇다고 말했지만 실상 많은 일들이 ‘고오오오오오오오오지이이이인감래’가 아닐까. 내가 일하고 있는 이 업계는 심지어 사양산업이고 높은 스펙에 명문대 출신은 많지만 연봉은 쥐꼬리만하고 고인물들 파티라 개혁될 일도 없다. 그럼에도 발을 들인지 6개월 차, 결과물을 보고 뿌듯한 감정에 아직은 더 해보기로 결심했다. 정말 힘든 방송일이지만 결과물을 TV에서 볼 때 그 뿌듯함 때문에 더 해보겠다고 말하는 강이슬 작가. 그의 마음을 조금을 알 것도 같았다.

우리 엄마는 걱정과 불안이 비단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했다. (…중략…) 인생을 윤택하게 하는 수고와 부지런함은 실은 실패에 대한 걱정과 불안으로부터 오는 거라고 했다. (123쪽)

비워야지만 오히려 부족함이 없어 보이는 것이 있다. 패션이나 글이 그렇다고 생각한다. (127쪽)


임진아 : 마감이라는 캐릭터


얼마 전에 일러스트레이터와 같이 작업을 한 적이 있다. 그때 그분이 생각나면서 나도 모르게 감정이입을 하면서 읽게 되었다.

임진아 작가가 마감을 대하는 자세는 다른 사람들과는 사뭇 다르다. 묘하게 긍정적이고 낙관적이다. 처음엔 “마감이 뭐가 즐겁다고 이렇게 긍정적으로 얘기할까”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그런 태도를 가지게 될 때까지 수없이 많은 넘어짐이 있었다.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고, 또 넘어지고 굳은살이 배기면서 단단해진 것이다. 그렇기에 마냥 가볍게만 읽을 순 없는 부분이었다.

마감을 하면서는 ‘마감’이라는 단어를 잘 떠올리지 않는다. 사는 내내 ‘삶’을 떠올리지 않는 것처럼. (150쪽)

“‘찬물’은 붙여 쓰는데, ‘뜨거운 물’은 띄어 쓴다는 사실이 재미있지 않나요? 사전을 찾아보다 어쩐지 귀여운 기분이 들어 잠시 빙긋 웃었답니다.” 이렇게 따뜻한 찬물이 또 있을까? (157쪽)


이영미 : 어느 5년 차 출판편집자의 ‘마감 증후군’


이 책을 기획하고 편집한 ‘마감일기’의 편집자들이 이 부분을 어떻게 읽었을까 궁금하다. 굉장히 공감하면서 읽지 않았을까 싶다. 물론 나도 굉장히 감정이입해서 읽은 부분이다. 출판 편집자의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여기에 나온 직업군 중에서 다른 사무직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가장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위에서 쪼이고 아래서 터진 일 수습하고, 마감이 다가오면 악몽을 꾸고, 어렵사리 생각해낸 카피는 까이고, 알지도 못하는 상사는 손쉽게 다 갈아엎으라고 하지 않나. 그렇다면 왜 그런 일을 하냐고? 일단 마감이 끝나면 언제 그랬냐듯이 다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꼬박꼬박 제때 나오는 월급도 한몫하는 부분이고.

고래 싸움에서 등터지는 새우 같은 우리들의 이야기다.


김세희 :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요 근래 소설을 읽는 걸 게을리했지만 가만한 나날이나 항구의 사랑은 알고 있다. 마지막 챕터는 두 책의 작가 김세희였다.

아이를 낳고 정신없는 시기에 장편 소설의 플랫폼 연재를 겪게 된 김세희 작가. 그때의 힘들었던 감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오롯이 혼자 이겨내야 할 일들이지만 그래서 생각한 대로 스스로 해내지 못할 때 자괴감은 더욱 커진다. 그런 마음을 이해하기에 작가에게 동질감을 느꼈다.

그렇게 힘들지만 그럼에도 하루하루 일을 해내가는 우리들. 제목에 그 이유가 담겨 있다. 그럼에도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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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감에 대해서 이렇게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흥미로운 기획이었다. 물론 후반부로 갈수록 비슷한 얘기가 나올 때마다 지루해지는 느낌은 있었으나, 수박 겉핥기처럼 가벼운 주제로 비슷한 얘기만 반복하는 다른 에세이집보다는 훨씬 좋았다. 무엇보다도 각양각색의 직업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였기에 그만큼 견문도 넓어지는 느낌이었다.

또한 책을 읽기 전까지는 몰랐는데 8명 모두가 여성이라는 점이 재미있었다. 여담이지만 최근 문학계에서 여성들의 성취가 두드러진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었는데 그 기사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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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식하는 마음 - 주식투자의 운과 실력, 결국은 마음이다!
홍진채 지음 / 다산북스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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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의 장기화로 지난 3월, 개인 투자자들이 주식 등장에 대거 등장한 '동학 개미 운동'. 이러한 사태는 주식의 'ㅈ'자도 몰랐던 일반인들이 주식 시장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동력이 되었고 이에 따라 주식과 관련된 책들이 보기 드물게 많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특히 부동산 시장이 얼어붙어 관련 출판 시장에 저조한 판매와는 대조적인 모습을 보인다.

특히 가까운 지인들이 주식을 시작하였고, 나 역시 그들 사이에서 듣는 말이 많아지면서 점차 주식에 관심이 생겼다.

주식에 입문하는데 책만큼 좋은 매체는 아직까지 없는 듯하다. 강세를 보이는 유튜브는 아직까지는 완전히 믿기는 어려운 정보들이 종종 올라오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조회 수가 수입에 직결되는 유튜브 운영 구조상 자극적인 소재로 거짓된 정보를 전달하는 유튜버들도 있다고 한다. 물론 책이라고 해서 100% 믿을 수 있는 정보는 결코 아니지만, 적어도 유튜브보단 필터링 작용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주식하는 마음>의 저자는 홍진채라는 사람이다. 펀드매니저로 일을 한 경험이 있고, 현재는 라쿤자산운용의 대표를 맡고 있다고 한다. 이런 저자의 경력에서 신뢰가 가지만, 여러 대표와 애널리스트, 프로의 추천사도 신뢰를 굳건히 하는데 큰 역할을 한다.


비문학 책을 읽을 때마다 매번 밝히는 말이지만 나는 목차를 꼼꼼하게 확인하는 책이다. 특히 주식과 같이 어렵고 낯선 분야만 더더욱 그렇다. 좋은 책이라면 목차만으로도 대략적인 내용이 파악되어야 하며, 핵심 내용을 간추려서 적어놔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책은 총 4개의 파트로, 12개의 챕터로 구성되어 있다.

part 1. 우리의 마음은 투자에 실패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part 2. 질문만 바꿔도 길이 보인다

part 3. 이기는 질문, 지지 않는 투자

part 4. 지속 가능한 성장을 위하여

큰 장이 네 개, 거기에 딸린 작은 장이 세 개, 그 아래의 하위 제목이 여러 개. 직관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타이틀에 파악이 용이해 목차가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1장에서는 주식의 전반적인 관념들과 어쩔 수 없이 빠지는 사고의 함정에 대해서 다룬다. 내가 매수한 종목이 끝없이 하락하거나 매도한 종목이 천정부지로 오른다면 자책은 굉장히 커질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자책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주식은 당연히 힘들고 어려운 싸움이며, 인간은 그런 감정을 느낄 수밖에 없도록 진화했다는 것이다.

특히 매매가 잦을수록 수수료로 지불되는 돈이 상당히 많다는 것을 깨닫고 충격을 받았다. 물론 아직까지 주식 거래를 해본 적도 없지만, 미처 고려할 생각조차 못 한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특히 흥미로웠던 부분은 2장이었다. 이 부분은 우리가 흔히 던지는 무의미한 질문들과 무의미한 격언들에 대해서 다룬다. 펀드 투자자로서 감추고 싶은 진실도 분명히 있었을 텐데 저자는 솔직하게 거침없이 답변들을 써 내려간다. 나 역시도 깨닫는 부분이 굉장히 많았다. 속된 말로 '뼈 맞았다'라고 표현할 수 있겠다.


그제(2020년 11월 16일) 친구와 주식 얘기를 하다가 삼성전자가 주가가 또 상승했다는 얘기를 듣고 "아, 진작에 미리 사 놨어야 하는데!"라며 농담을 했었다. 삼성전자는 장기투자의 성공 사례로 항상 등장하는 단골 기업이다. 그러나 1990년 당시 삼성전자는 시가 총액 9위에 머무른 기업이었다.

과연 30년 전으로 돌아간다면 삼성 전자가 20배 넘게 상승할 거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이 많은 기업 중에서 삼전을 찾아내는 혜안을 가질 수 있을 것인가?

이처럼 저자는 알기 쉬운 예시를 들어가면서 잘못된 관념을 바로잡는다.


장이 거듭될수록 주식투자와 관련된 깊은 이야기가 나온다. 3장은 투자에 대한 중요한 질문들이 나온다. 2장도 역시 질문에 대한 내용이었지만 잘못된 관념을 바로잡는 내용이 주였다면, 3장은 주식을 할 때 알아야 할 이야기들을 배우는 과정이었다.

1,2,3장에서 주식에 대한 오해를 풀고 기본을 배웠다면, 4장에서는 앞으로 투자를 할 때 어떤 자세로 어떻게 배울 것인가에 대한 내용이다. 확률론적 사고, 바벨 전략 등에 대해서 다룬다.


주식 관련 책을 읽고 있지만 나는 아직 투자자가 아니다. 자본금도 없고 배경지식도 전무하며, 무엇보다도 용기가 가장 부족하다. 주식이 어떤 건지 알기도 전에 "주식을 잘못하면 3대가 망한다."라는 말을 들었고 주식 투자가 아닌 투기의 단점들만 봤다.

그러나 직장인이 되고 시야를 넓히니 내가 얼마나 편협한 시선으로 주식을 바라봤는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

예적금으로 자산을 불리는 건 20대인 나의 부모님 세대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굉장히 낮은 이율로 인해 예적금으로 자산을 보유하고 있는 건 '보존'이 아니라 '쇠퇴'가 되었다. 또한 각종 매체의 발달로 주식에 대해 깊이 배울 수 있는 세상이 되었기에 '카더라'라는 말만 믿고 도전하는 미련한 투자자들도 줄었다.

단언하자면 나는 언젠가는 주식을 시작할 생각이다. 그러나 주식투자에서 성공하려면 그만큼 내 견문이 넓어야 된다는 생각에 공부부터 하는 중이다. 물론 주린이를 넘어 주식 문외한 수준인 내가 읽기에 어려운 단어와 정의가 종종 등장하긴 하였으나 <주식하는 마음>은 주식 투자를 시작하기에 앞서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할지 배우기에 굉장히 좋은 책이었다. 특히 주식 이외에도 세상을 살아가는데 어떻게 오해를 풀고 내실을 다져가야 하는가에 대해서 좋은 길잡이가 되어 줄 수 있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주린이의 입장에서 쓴 서평이지만 주식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자신의 투자 습관을 되짚어 볼 수 있는 좋은 책이었다. 주식이 대세가 된 요즘, 남들이 얻는다고 내가 잃는 제로섬 게임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모두가 윈윈할 수 있는 시대가 오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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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노볼 (양장)
박소영 지음 / 창비 / 2020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청소년 문학에서 독보적인 행보를 보이는 출판사가 있다. 다들 알다시피 창비가 그렇다. 단순히 기사나 반응을 보고 하는 말이 아니다. 우아한 거짓말, 완득이, 위저드 베이커리…. 아슬아슬한 10대 시절, 내 가치관 확립에 큰 영향을 준 소설들이다. 또한 아몬드, 유원, 해방자들 등 계속해서 출간되는 청소년 소설들은 성인인 내가 읽기에도 너무나 좋은 소설들이었다.


이런 창비에서 흥미로운 소설을 출간했다. 바로 제1회 창비X카카오페이지 영어덜트 장르문학상 대상에 빛나는 박소영 작가의 장편소설 <스노볼>이다.

이 소설의 배경은 말만 들어도 뼛 속까지 추운 영하 41도의 혹한기가 도래한 미래 사회다. 극한의 추위에 노출된 '바깥세상'과 따뜻하고 쾌적한, 선택받은 자만이 살아갈 수 있는 '스노볼'. 스노볼이란 주로 겨울철에 많이 등장하는 동그란 구 안에 아기자기하게 꾸며놓은 장식품이다. 이런 스노볼의 이미지를 떠올렸을 때, 책의 제목이 왜 이것인지 쉽게 유추할 수 있다.

특권층의 지역인 스노볼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것은 당연한 일. 스노볼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선 '액터'가 되어 매일같이 일상을 중계해야 한다. 바깥세상에서 사는 평범한 전초밤은, 스노볼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액터 고해리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몰래 그녀의 역할을 대신해내라는 요청을 받게 된다.


일상을 생중계한다는 생각은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1998년에 개봉한 명작 <트루먼 쇼>가 이미 우리에게 던진 질문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 소설은 단순히 소재를 차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런 '액터'를 대신할 새로운 인물을 만들어 한번 더 비꼰다.

또한 바깥세상과 스노볼처럼 다압과 렌막이라는 지역이 구분되어 있고, 그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하는 계급사회의 분류를 구분했다는 점에서 김남중의 <해방자들>이라는 소설이 연상되기도 했다.


한때 청소년 소설과 성인 소설을 구분해 놓고, 둘의 차이점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했던 적이 있다. 그때 내린 결론은 둘의 큰 차이는 없다는 것이었다. 둘의 구분이 무의미하다는 것보다는 청소년 소설이라고 이름 붙은 소설들을 성인들이 읽어도 큰 무리는 없다는 얘기다.

그런데 이런 내 고민을 확실하게 정리해주는 단어가 나왔다. 바로 영어덜트라는 단어다. 특히 기존 창비의 소설 중에서 영어덜트 소설로 <아몬드>의 성공은 눈여겨볼 만하다. 이어서 출간된 <스노볼>은 성인과 청소년을 아우르는 영어덜트 소설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한편의 영화를 보는듯한 기분을 느꼈다. 손원평의 <아몬드>와 문목하의 <돌이킬 수 있는> 이후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자신이 간절히 열망하고 원해왔던 성공이, 진정한 성공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보통 사람들은 절망하곤 하지만 전초밤은 그러지 않았다. 특히 기존 체제에 대해서 반기를 드는 전초밤의 행보에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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