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감 일기 - 공포와 쾌감을 오가는 단짠단짠 마감 분투기
김민철 외 지음 / 놀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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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마감. 이 단어를 보면 어떤 이미지가 연상되는가. 나는 차일피일 미루다가 마감일이 닥쳐 미친 듯이 일을 해내고 숨을 헐떡이며 간신히 뛰어가 아슬아슬하게 제출하는, 그런 모습이 떠오른다. 적어도 좋은 이미지가 연상되진 않는다는 거다. 마감일기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이 책의 표지에 영혼이 탈출하고 있는 것 같은 일러스트가 그려져 있는 것을 보니 다른 사람들의 생각도 나와 별반 다르지 않는 것 같다.

이 책을 처음 봤을 때 흥미가 생기는 동시에 의문이 들었다. 각기 다른 직업을 가진 8명이 ‘마감’에 대해서 자유로운 글을 쓴다는 점이 그랬고, 도저히 좋은 얘기가 나올 것 같지 않은 ‘마감’을 어떻게 풀어낼 것인가가 그것이었다.


이 책은 소설가, 번역가, 편집자, 방송작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에세이스트, 방송작가, 일러스트레이터까지 다양한 직군이 모여서 쓴 에세이다. 마감이 없는 직업이 어디 있겠냐마는 특히 마감이 필수인 직업들이 모인 것이다.

마감이라는 주제 아래에서 같은 내용이 반복되어 지루하지는 않을까 걱정하면서 책을 펼쳤다. 그러나 몇 장 넘기지 않았을 때 쓸데없는 걱정이라는 걸 깨달았다. 협소한 주제로도 이렇게까지 다양한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는 게 놀라웠다.

또한 이 책의 저자들은 한 번씩 책을 출간한 경험이 있다. ‘글을 좀 쓰는’ 사람들이 모인 것이다.


김민철 : 마감근육


광고 회사. 다녀보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다. 광고회사가 얼마나 끔찍하고 소름 돋게 바쁜 곳인지. 그런 곳에서 팀장을 맡고 있는 이 작가에게 마감은 일상이자 생활이자 그 자신이다.

마감이 굉장히 중요한 업계에서 일하는 사람은 누구나 알 것이다. 앞에서 스케줄이 밀리게 되면 도미노가 쓰러지듯이 줄줄이 일정이 꼬이게 된다는 것을. 광고 업계에서 일하는 작가는 일하면서 이런 약속을 가볍게 여기면서 지키지 않는 사람을 수없이 봤다고 한다. 그래서 그랬을 것이다. 마감을 잘 지키는 것이 타인의 일상을 존중하는 것이고, 스스로 마감을 잘 지키는 사람이 된 것은 말이다.

그는 마감을 잘 지키는 노하우를 두 가지 전수해 주기도 한다. 메모하는 습관을 들이는 것과 리스트를 만들어 순서대로 일을 처리하는 것. “내일의 내가 할 줄 알았지......”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나에게 큰 도움이 되는 부분이었기에 포스트잇으로 표시까지 해두었다.

결국 마감은 타인과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이다. 나의 마감이 늦어지면 다음 사람이 마감을 맞추느라 자신의 시간을 갈아 넣어야 된다는 당연한 사실을 나는 것. 나의 일상이 중요한 것처럼 그들의 일상을 존중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매 순간 자각하는 것. (19쪽)

중요한 지점은 ‘지금까지의 최선의 공’이다. ‘지금까지 누구도 못 던진 대단한 공’이 아니라. (19쪽)


이숙명 : 숨바에서 온 편지


편집자가 일부러 해놓은 설정이겠지만 마감을 잘 지키는 김민철 작가 바로 다음에 이숙명 작가가 등장한다. 본인의 글에 적은 내용이 맞는다면 무려 3주가 넘게 ‘마감일기’의 마감을 늦은 작가이다.

언뜻 보면 두서없이 마감을 넘기게 된 이유를 변명과 함께 줄줄이 늘어놓다가 의식의 흐름대로 이 이야기, 저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처럼 보이지만, 마법같이 작가에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옹호하게 된다. 그래서 책에 수록된 작가들 틈에서 유달리 달라 보였고 가장 재미있었던 부분이라고 꼽았다.

특히 책 중간중간에 날카로운 통찰이 보이는 부분이 있다. 정치 이슈를 쓰는데 정치색은 드러나지 않게, 여성 이슈에 대해 쓰는데 ‘너무 페미’처럼 보이지 않게 써달라는 요청을 ‘새우 없는 새우볶음밥’을 만들어 달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비유한 것이다. 유쾌한 마음으로 공감하면서 지나간 대목이지만 후에 두고두고 깊게 생각해 볼 정도로 참신하고 탁월한 비유였다.

글 하나로 사람을 판단하는 건 위험하다고 생각하지만 정말 솔직하고 진지하고, 그럼에도 그 진지한 얘기를 유쾌하게 전달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이숙명 작가의 다른 책들도 읽어보고 싶어지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흔히 피처 기자가 실패한 소설가 지망생인 줄 압니다. 제 평생 “그래서 소설은 언제 쓸 거니?”라는 말을 몇 번이나 들은 줄 아십니까? 저는 단 한 번도 제 입으로 소설을 쓰고 싶다고 말한 적이 없는데요. 어떤 직업인에게 이렇게 대놓고 “너 사실은 다른 일을 하고 싶지만 능력이 안 돼서 흉내나 내면서 사는 거잖아”라고 넘겨짚어 말하는 건 너무 무례하지 않습니까? (42쪽)

아주 원초적인 질문을 해봅시다. 사람은 왜 글을 쓸까요? (…중략…) 자신을 표현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표현은 모든 치유의 시작이자 핵심이기도 합니다. (55쪽)


권여선 : 스물에도, 마흔에도 마감


여덟 명의 작가들 중에서 유일하게 전부터 알고 있던 사람은 바로 권여선이다. 창비에서 출간한 ‘안녕 주정뱅이’라는 단편 소설집을 전에 접한 적이 있다. 그래서 조금은 반가운 마음으로 글을 읽어 나갔다.

작가는 마감을 인생과 연결해서 글을 썼다. 권여선이라는 소설가를 만들어낼 수 있었던 인생의 중요한 마감에 대해서 적었다. 여덟 작가들 중 가장 마음이 쓰이는 에세이가 아니었나 싶다.

그는 한 편의 단편 소설로 등단한 이후 7년간 소설을 내지 못한 소설가였다. 학원 강사로 방향을 틀까 고민하던 중 우연찮게 단편 소설을 쓸 기회를 얻었고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던 게 지금의 권여선을 만들어놓은 것이다. 그래서 작가에게 마감의 의미는 남다르다.

내가 대단하다고 믿으면서 살다 현실을 깨닫는 순간이 누구나에게 한 번쯤은 오게 된다. 그때의 어마어마한 좌절감과 걷잡을 수 없는 상실감은(실제로는 잃은 건 없으면서도 말이다) 생각만 해도 괴롭다. 그러나 그 이후의 행보가 인생을 판가름하지 않나 싶다. 좌절하고 포기하고 용기를 내지 않으면 평생을 그렇게 살아가는 거다.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야”라는 틀에 스스로를 가두지 않았으면 좋겠다. 용기를 내 많은 사람들이 알아주는 작가가 된 권여선처럼 말이다.

그때 생애에서 가장 중대한 첫 마감을 앞두고 있었던 나는 무의식적으로 알았던 것 같다. 무엇을 마감하기 위해서는 그 마감 앞에서 혼자여야 한다는 걸. 절대적인 고독이 필요하다는걸. 그것은 누구와 나눌 수도 없고 나누어서도 안되며 심지어 누구에게 엿보이거나 들켜서도 안 되는 나만의 내밀한 직면이어야 한다는 걸. (79쪽)


권남희 : 마감, 유감, 쾌감


번역가라는 직업에 대해서 관심이 있어 더욱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본인은 겸손하게 얘기하지만 그쪽 업계에서 높은 위치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살짝 거리감이 느껴질 수 있었지만 솔직한 그의 얘기를 읽으니 결국 마감 앞에서 다들 똑같은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번역가가 하는 일에 비해서 그렇게 대우받는 직업은 아니다. 나 역시 일하면서 느꼈지만 외주자, 프리랜서를 대하는 기업의 횡포는 경악스럽기 그지없다. 특히나 프리랜서들은 출퇴근하는 직장인들과 다르게 당장 일이 없으면 생계에 지장이 있으니 얼마나 힘들까. (이 대목이 감히 동정하는 어투로 읽히진 않았으면 좋겠다. 그만큼 사회 전반에서 변해야 되는 부분이 있다는 말이다.) 짧게 지나가긴 했지만 번역 업계에서 이름있는 위치를 가진 권남희 작가의 고민을 읽을 수 있었다.

“마감이 어디 있어. 내가 원고 주는 날이 마감인 거지.” (108쪽)


강이슬 : 알콩달콩하고픈 마감에 나는 항상 앓고 닳고


여덟 명의 저자 중 어린 편에 속하고 나와 비슷한 미혼 직장인 여성이기에 공감 가는 부분이 굉장히 많았다. 글로써 먹고 살아가는 방송 작가니 당연히 글쓰기에 대한 마음가짐이 나와는 무게가 다르겠지만, 그럼에도 글을 대하는 그의 이야기가 다르게 다가왔다고 해야 할까.

작가는 방송일이 그렇다고 말했지만 실상 많은 일들이 ‘고오오오오오오오오지이이이인감래’가 아닐까. 내가 일하고 있는 이 업계는 심지어 사양산업이고 높은 스펙에 명문대 출신은 많지만 연봉은 쥐꼬리만하고 고인물들 파티라 개혁될 일도 없다. 그럼에도 발을 들인지 6개월 차, 결과물을 보고 뿌듯한 감정에 아직은 더 해보기로 결심했다. 정말 힘든 방송일이지만 결과물을 TV에서 볼 때 그 뿌듯함 때문에 더 해보겠다고 말하는 강이슬 작가. 그의 마음을 조금을 알 것도 같았다.

우리 엄마는 걱정과 불안이 비단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했다. (…중략…) 인생을 윤택하게 하는 수고와 부지런함은 실은 실패에 대한 걱정과 불안으로부터 오는 거라고 했다. (123쪽)

비워야지만 오히려 부족함이 없어 보이는 것이 있다. 패션이나 글이 그렇다고 생각한다. (127쪽)


임진아 : 마감이라는 캐릭터


얼마 전에 일러스트레이터와 같이 작업을 한 적이 있다. 그때 그분이 생각나면서 나도 모르게 감정이입을 하면서 읽게 되었다.

임진아 작가가 마감을 대하는 자세는 다른 사람들과는 사뭇 다르다. 묘하게 긍정적이고 낙관적이다. 처음엔 “마감이 뭐가 즐겁다고 이렇게 긍정적으로 얘기할까”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그런 태도를 가지게 될 때까지 수없이 많은 넘어짐이 있었다.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고, 또 넘어지고 굳은살이 배기면서 단단해진 것이다. 그렇기에 마냥 가볍게만 읽을 순 없는 부분이었다.

마감을 하면서는 ‘마감’이라는 단어를 잘 떠올리지 않는다. 사는 내내 ‘삶’을 떠올리지 않는 것처럼. (150쪽)

“‘찬물’은 붙여 쓰는데, ‘뜨거운 물’은 띄어 쓴다는 사실이 재미있지 않나요? 사전을 찾아보다 어쩐지 귀여운 기분이 들어 잠시 빙긋 웃었답니다.” 이렇게 따뜻한 찬물이 또 있을까? (157쪽)


이영미 : 어느 5년 차 출판편집자의 ‘마감 증후군’


이 책을 기획하고 편집한 ‘마감일기’의 편집자들이 이 부분을 어떻게 읽었을까 궁금하다. 굉장히 공감하면서 읽지 않았을까 싶다. 물론 나도 굉장히 감정이입해서 읽은 부분이다. 출판 편집자의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여기에 나온 직업군 중에서 다른 사무직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가장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위에서 쪼이고 아래서 터진 일 수습하고, 마감이 다가오면 악몽을 꾸고, 어렵사리 생각해낸 카피는 까이고, 알지도 못하는 상사는 손쉽게 다 갈아엎으라고 하지 않나. 그렇다면 왜 그런 일을 하냐고? 일단 마감이 끝나면 언제 그랬냐듯이 다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꼬박꼬박 제때 나오는 월급도 한몫하는 부분이고.

고래 싸움에서 등터지는 새우 같은 우리들의 이야기다.


김세희 :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요 근래 소설을 읽는 걸 게을리했지만 가만한 나날이나 항구의 사랑은 알고 있다. 마지막 챕터는 두 책의 작가 김세희였다.

아이를 낳고 정신없는 시기에 장편 소설의 플랫폼 연재를 겪게 된 김세희 작가. 그때의 힘들었던 감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오롯이 혼자 이겨내야 할 일들이지만 그래서 생각한 대로 스스로 해내지 못할 때 자괴감은 더욱 커진다. 그런 마음을 이해하기에 작가에게 동질감을 느꼈다.

그렇게 힘들지만 그럼에도 하루하루 일을 해내가는 우리들. 제목에 그 이유가 담겨 있다. 그럼에도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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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감에 대해서 이렇게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흥미로운 기획이었다. 물론 후반부로 갈수록 비슷한 얘기가 나올 때마다 지루해지는 느낌은 있었으나, 수박 겉핥기처럼 가벼운 주제로 비슷한 얘기만 반복하는 다른 에세이집보다는 훨씬 좋았다. 무엇보다도 각양각색의 직업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였기에 그만큼 견문도 넓어지는 느낌이었다.

또한 책을 읽기 전까지는 몰랐는데 8명 모두가 여성이라는 점이 재미있었다. 여담이지만 최근 문학계에서 여성들의 성취가 두드러진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었는데 그 기사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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