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내셔널 - The Internation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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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수> <롤라 런>의 감독 톰 튀크베어와 짐승과 수컷형 배우에 속하는 클라이브 오웬. 그리고 뒷받침해주는 여자 역할로는 꽤 적역인 나오미 와츠. 뭐가 더 필요한가? 재밌을 줄 알았지, 난. 세계적인 불황에도 엄청난 이윤을 남기는 은행이 있고 그 은행이 분쟁 지역에 무기를 팔고 테러를 조장하고 범죄 조직의 돈 세탁을 해 주고 있었다는 얘기도 흥미진진했으니까. 은행이 나쁜 놈이라니, 꽤 괜찮은 설정 아닌가. 어쨌든 돈이 들어가고 나오는 곳이니까 범죄 조직의 돈도 들어갈 것이고 액수만 크면야 은행에선 좋아라 할 것이니. 나름 괜찮은 설정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피곤한 탓도 있었지만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졸음 유발 스릴러일 줄은 꿈에도 생각을 못했다. 또 보다 보니까 제이슨 본 시리즈랑 느낌이 비스무리한 부분도 있더라구. 뭐라고 딱 집어서 말은 못하겠지만 그냥 그렇다. 카메라의 흔들림도 그렇고 액션 장면의 차가운 느낌도 그렇고. 근데 재미는 진짜 없는 제이슨 본삘이라고 생각하면 된다ㅋㅋ

재미가 왜 없는지를 생각해 봤다. 은행과 범죄 조직의 결탁이라는 걸 너무너무 심하게 설명을 해대는 통에 지루했다는 게 1번 이유. 무슨 박물관인지 미술관인지에서 벌어지는 아름다운 액션씬을 제외하고는 처음부터 끝까지 설명, 또 설명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은행이 어떻게 해서 조직과 결탁했는지, 어떤 식으로 돈을 버는지를 내가 왜 알아야 하는데? 그냥 그렇다는 것만 간단하게 알려주고 드라마를 보여주란 말이야!! 드라마에 목말라 아무리 쳐다봐도 이 사람들은 계속 설명문을 쓰고 있으니. 중간에 10분 졸았다.

2번 이유는 캐릭터의 부재. 나오미 와츠는 뉴욕 검사인데 유부녀다. 그리고 그녀와 함께 은행을 조사하는 클라이브 오웬은 인터폴 형사다. 오웬은 누가 뭐라 해도 포기하지 않고 은행 조사에 집착한다. 영화 시작 초반 10분에 그의 동료가 죽어버리는 이유도 있지만 그는 은행을 조사하다가 인상 망칠 뻔한 안좋은 추억 때문에 더 포기할 수가 없다. 근데 오웬은 그냥 '은행 조사에 미친 사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게 졸음을 유발한다. 드라마의 부재와 캐릭터의 부재가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나오미 와츠와 클라이브 오웬 사이에 '짐승스러운 그 무엇'이 아니라면 '인간적인 그 무엇'이라도 오간다면 좋을텐데 톰 튀크베어 감독은 사람 약올리는 데에 재미 들렸는지 두 사람 사이에 아무런 떡밥도 던져주지 않고 쫑을 내버린다. 그것도 중간에 뚝 잘라 버리고 허무하게. 이게 뭐냐구. 두 사람이 끝까지 함께 뭐라도 했다면 모를까, 그것도 아니고 '당신 힘들까봐 걱정된다'면서 여자를 확 보내버린다. 뭐라도 쌓아놓고 보내든지 말든지 하지. 안타깝다. 두 사람 사이에 로맨스도 없어서 그것도 졸음 유발.

이 영화를 편집해서 간직할 수 있다면 딱 세 부분 갖고 싶다. 처음 10분의 긴박한 '접선'씬. 그리고 박물관인지 미술관인지에서 벌어지는 정말 아름다운 액션씬. 와장창 유리들이 깨어지고 총알이 비처럼 쏟아지는 그 장면이 진짜 아름다웠다. 물론 별 의미는 없었고 관객의 졸음을 깨게 해주기 위한 배려같이 느껴졌지만-_-ㅋ 마지막으로 클라이브 오웬이 양미간 찌푸리는 씬. 요렇게 세 부분 편집본 없나요?ㅋㅋㅋ 지적이면서도 강인한 수컷 느낌의 배우 오웬의 양미간에 내천자를 보는 순간 순간이 정말 황홀했다. 클로즈업 될 때마다 감탄. 그러나 후반 20분은 지나친 사족으로 잘라냈어야 한다고 생각함. 클라이막스가 이렇게도 지루할 줄이야.

영화를 보고 난 후 감상문을 쓰긴 써야 하는데 지루했다는 얘기만 쓰게 될까봐 망설여졌다. 혹시 나만 이렇게 본 걸까 궁금해서 네이년을 검색했더니 평점도 낮고 그렇더군. 난 넘 괜찮게 봤던 <작전>이 지루하기 짝이 없었던 <핸드폰>이랑 별볼일 없던 <마린 보이>랑 비슷한 평점이라서 네이년 관객 평점이 그럼 그렇지, 이랬는데 이건 또 내 생각이랑 비슷하게 나왔더라구. 그치만 5점 짜리 영화는 아닌데-_-ㅋ <핸드폰>보다 평점이 낮다는 건 말이 안 돼. 백상시상식보다 재미없었던 영화인데 말이다ㅎㅎ

결론은 그렇다. 튀크베어의 영상미조차도 지루한 네러티브를 이겨낼 수 없었다는 것. 유머를 첨가하기 싫었다면 설명이라도 잘라내지. 이게 뭡니까. 나오미 와츠와 클라이브 오웬을 놓고 눈으로 오가는 정사씬이라도 넣었어야 되는 거 아냐?ㅋㅋㅋ 짐승 배우를 활용하지도 못하는 감독 바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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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레슬러 - The Wrestler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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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리에서 생긴 일>의 조인성처럼 입에 주먹 넣고 어깨춤을 들썩들썩 추면서 펑펑 울었다. 간만에 눈물을 흘려봤네. 이 영화가 걸작인가요? - 누가 이렇게 묻는다면 아니라고 말하겠다. 걸작은 아니고 꽤 신파적이고 감상적이고 또 어떤 부분은 유치하기까지 한데 미키 루크의 등판만 보면, 미키 루크의 거친 숨소리만 들으면 그냥 눈물이 줄줄 나는 거였다. 마지막에 '슈웅'하는 그의 비상을 지켜보는데 이거 원 울지 않을 재간이 없는 거였다. 마지막에 브루스 스프링스틴의 주제가까지 나오는데 이건 눈물 흘리라는 말이 아니고 뭐냐구ㅋㅋ '마음껏 울어요'라는 서비스?? 

영화 시작한 후 5분 정도는 그의 얼굴을 볼 수가 없다. 그의 앞얼굴이 나오는 건 좀 지나서다. 체격은 지나칠 정도로 건장한 남자의 등. 그러나 노쇠한 그의 육체가 내는 경고의 신음소리가 화면을 가득 채운다. 그의 보청기, 그의 안경, 그의 온 몸을 감아 놓은 밴드와 여기저기서 짤랑이는 소리를 내는 진통제 병들. 육체가 병들기 시작하면서, 나이가 들어가면서 이 사람은 화려했던 지난 시간을 되새김질하는 '추억이 버릇이 되는' 노인이 된다. 그러나 약물 중독처럼 레슬링에 중독된 이 할부지는 레슬링을 계속 하게 되면 죽는다는 의사의 경고에도 그만둘 수가 없다.

예전에 <꼬마 아니발의 일곱가지 소원>이라는 청소년들을 위한 동화책 비슷한 걸 읽은 적이 있는데 거기에서 아니발이 말하기를 '사람들은 다 자기가 잘나갔을 때만을 추억하며 산다'고 한다. 배구 선수였던 사람은 자기가 한참 배구 선수로 얼마나 잘나갔는지를 말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어렸을 땐 나도 노인들의 추억담을 참아낼 수가 없었다. 왕년에 자기 잘나갔던 것만을 주절거리며 자기 잘나갔던 때를 추억하며 소일거리하는 노인들. Loser 느낌 팍팍 나지 않은가. 그러나 이젠 어렴풋이나마 알 것 같다. 인간은 원래 그런 거다. 어린 것들은 모르는 유한한 삶에의 회한, 병들어가는 육체에 대한 야속함, 그러나 늙지 않는 마음... 과거를 추억하는 일을 습관처럼 되풀이하는 것은 그러지 않고는 배겨낼 수 없는 삶의 고독감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모두가 나를 기억할 만했던, 떠들썩하고 외롭지 않았던 그 때를 잊을 수 없는 거다.

다른 사람이 심장수술을 받은 레슬러 역할을 했다면 또 다른 느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미키 루크의 사연 많은 얼굴, 한 때 <나인 하프 위크>같은 영화에서 사람들을 후끈 달아오르게 했던 섹스 어필했던 남자가 성형 수술로 망가지고 퉁퉁 부어 화면에 클로즈업 될 때면 이렇게 배우와 배역의 싱크로율이 높을 수 있나 하는 생각이 팍팍 드는 거지. 레슬러 '더 램'이 '나 아직 죽지 않았어' 하면서 날아오를 때 미키 루크 역시 '나 아직 연기할 수 있어'라며 날아오르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거였다. 잘나갈 때 괜히 복싱은 한다고 난리쳐서 얼굴은 얼굴대로 망가지고, 수술 몇 번에 또 망가지고, 애완견을 촬영 안해준다며 촬영장에서 뛰쳐나간 악동 할부지가 외로운 티 팍팍 내며 딸 찾아가고 스트립쇼 하는 아줌마 찾아가고 그럴 때 이건 뭐 사는 게 뭔가 싶고 그랬다. 인생 평탄했던 몇몇 배우들이 이런 역할 했으면 이 정도로 울리진 않았을 거다.

난 남동생 덕분에 헐크 호건이 나오는 레슬링 비디오 테이프는 거의 다 섭렵해야 했는데 알고 보니 레슬링이란 게 의외의 매력이 있었다. 어린 마음에도 저게 '짜고 치는 고스톱' 느낌이 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드라마틱했던 거였다. 꼭 한 쪽이 예쁨받으면 다른 쪽은 미움을 받으며 등장을 했다. 한참 예쁨받는 쪽이 이기다가 미움 받는 쪽이 반칙을 하면서 반전된다. 그러나 피를 흘리며 아픔을 호소하던 예쁨받는 쪽이 나중에는 미움 받는 쪽을 힘겹게 이긴다. 로프를 튕기며 달려가거나 링 위에 올라가 뛰어내리면 게임 끝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응원하는 선수가 이겼다는 행복감을 느낀다. 이 모든 것에도 줄거리가 있다는 것이 매력적이었고 반칙을 해서 이긴다 해도 그걸 사람들이 내버려 둔다는 것도 의외로 큰 재미를 줬다. 반칙을 대놓고 허용하는 스포츠 엔터테인먼트였기에.

헐크 호건 세대(ㅋㅋ)로서 이 작품을 보는 즐거움(아니면 고통?)도 있었다. 레슬러들의 세계를 충분히 조사하고 시작했을 법한 섬세한 시나리오 덕에 내가 봤던 장면들이 이렇게 만들어졌구나 싶었고 헐크 호건은 지금 뭐하고 있나 궁금해지기도 했다. 지금 K1이다 뭐다 나오긴 했지만 나는 아직도 레슬링에 대한 향수를 갖고 있다. 짜고 치지만 그 안에 치열함이 있고 감동적인 스포츠들이 보여주는 드라마틱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치열한 스포츠로서의 모습과 끊임없이 자신을 고문해서 즐거움을 주는 사디스트들이 제공하는 엔터테인먼트. 그것은 한 때 복싱이 표현했던 인간 삶의 모습과 닮아 있다.

램과 비슷한 위치의 퇴물 스트리퍼인 캐시디가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의 한 부분을 인용한 것도 의미심장하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그 영화를 못 봤냐며 램에게 '몇 시간을 채찍질당하면서도 예수는 모든 것을 참아낸다'고 말한다. 램은 '대단한 사람이네'라고 말한다. 그가 스템플러로 찍어대며, 깨진 유리에 상처가 나며, 밖으로 내동댕이쳐지며 치렀던 경기가 끝난 후 그녀를 찾아갔을 때의 대사다. 인간은 어찌보면 신에게 채찍질당하면서도 모든 것을 참아내며 살아야 하는 존재인지도 모르겠다. 신의 고문이 죽는 순간에야 끝나는 고통스러운 것이라 해도 우린 그걸 감내해야 하는 것이다. 예수가 그러했듯이 크고 작은 고문을 참아내며 끝까지 날아오르는 레슬러 '램'은 작은 예수가 아닐까. 이렇게 살아야만 우리는 신의 품에 안겼을 때 스스로 당당할 수 있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넓고 탄탄하지만 참으로 쓸쓸한 그의 등이, 그리고 그런 탄탄한 등과 어울리지 않게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고통스런 신음소리들이 참으로 애처롭고도 익숙했던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나 역시 쓸쓸한 등을 가진 노인이 되겠지 싶어서. 허나 신이시여. 저를 채찍질하세요. 끝까지 참아내겠습니다 - 레슬러 '더 램'도, 미키 루크도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아 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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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속스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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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기자였나 기억은 안 나는데 이 작품이 지나치게 공식에 딱 맞게 연출한 영화라는 생각에 정이 안간다고 했던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참 주관적인 평가일세, 생각했는데 어느 정도는 공감이 간다. 이 영화 진짜 군더더기가 없더라구. 신인 감독들이 응당 자기 작품에 폭 빠져서 하기 쉬운 오류들을 푱푱 건너 뛰고 이렇게 할 말만 딱딱 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니까 뭐랄까, 이건 가슴으로 만드는 첫 작품이라기 보단 머리로 깎아낸 첫 작품이다 싶은 것이 정말 좀 얄밉다 싶더라ㅋㅋ


그러나 이 정도로 만드는 건 정말 쉬운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초반 20분 정도 지나니까 딸과 손자가 찾아오고 이 남자는 당연하게 이들을 싫어한다. 중반쯤 되니까 이들에게 가족의 정 같은 것이 살아나면서 동시에 그들의 평화를 방해하려는 세력이 있어 갈등이 증폭된다. 또 좀 지나가면 최고로 위험한 순간이 오고 그러면서 극이 진지해진다. 마지막 부분에 유쾌하게 해결되면서 끝. 그러니까 초반엔 캐릭터를 분명하게 보여주면서 웃음을 주고 막판에는 확실한 갈등으로 인해 감동과 함께 진지함을 선물하면서 결말 부분에는 '열린 결말' 따위 절대 없이 방점 유쾌하게 딱 찍으면서 엔딩. 군더더기 없이 웃음과 메시지를 주는 데다가 배우들의 매력까지 더해져서 흥행하기에 적절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차태현의 인터뷰를 본 적이 있는데 사람들은 자꾸 변신하라고 하지만 자긴 하기 싫다며 변신해봤자 실패하는데 왜 자꾸 하라는지 모르겠다고, 자긴 자기가 잘하는 것만 하고 싶다던 뭐 그런 인터뷰였다. <과속 스캔들>로 그는 정말 자신이 잘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확실히 보여줬다. 그렇다. 자기가 잘하는 것만 해도 되는 배우다, 그는. 괜한 변신 안해도 이렇게 사람들 즐겁게 해주고 본인도 흥행으로 인한 인센티브 받고 그러면 되는 거지. 박보영과 왕석현은 정말 너무너무 귀여워서 진짜ㅎㅎ 박보영이 립싱크한 노래들은 솔직히 내 귀에는 별로였지만 그냥 뭐 영화에 큰 해를 끼치는 정도는 아니었다. 글구 박보영이랑 이민호랑 리얼 밀고 싶다ㅎㅎㅎ 왕석현은 귀여운데 영악해 보이지 않아서 그게 좋더라. 그가 엉망인 발음으로 '사람(할아버지) 참 좋더만' 이럴 때 스크린 뚫고 들어가고 싶었지 말입니다ㅋㅋ

사람들도 많이 웃고 나도 많이 웃었다. 마지막 되어 갈 때엔 눈물도 약간 날랑말랑했고. 얄미울 정도로 잘 빠진, 딱 상업영화 자체인 작품이다. 헐리웃에서 리메이크도 한다는데 '쳐부럽'.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는 진리를 재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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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 토리노 - Gran Tori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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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나운 독수리같은 눈을 한 채 아내의 관 앞에 저승사자처럼 서 있는 월터. 그는 자식들에게도 정이 없고 손주들에게도 애정이 없는 고집불통인 노인네다. 죽은 아내의 부탁으로 고해성사를 하고 교회에도 나오라며 신부가 매일 찾아오지만 그에게조차 '공부만 많이 한 27세짜리 숫총각 주제에 누가 누굴 구원하냐'며 쫓아내는 영감탱이다. 그의 이웃들은 '몽'족이 대부분인데 이 늙은이는 아내와의 추억이 담겨 있는 집에서 악착같이 버티고 이사도 안가고 있다. 한국전에 참전했던 이 꼬장꼬장한 노인네는 장총을 지갑처럼 휴대하고 있다.

그랜토리노는 이 노인네의 얼마 없는 재산 중 하나. 72년산 잘빠진 이 자동차를 눈독 들인 '몽'족 갱들이 신고식을 한답시고 옆집의 숫기 없는 소년 하나를 협박, 차를 훔쳐 내라며 종용한다. 소년은 결국 무서운 노인네에게 들키고 이것을 계기로 인종차별주의자에 보수의 극치를 달리는 노인네와 공통점이 전~혀 없는 '몽'족과의 교류가 시작된다.

이 영화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집행자를 옹호하는 성격의 작품에서 좀 더 나아가 화해와 참회를 말하는 작품이다. 솔직히 이스트우드는 보수파에 가까운 인물이며 그의 작품들을 눈여겨 보면 용서의 메시지보다는 응징의 메시지를 더 많이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체인질링>에서도 그랬다. 마지막에 악착같이 사형당하는 살인범의 모습을 보여주는 냉정함에서 이 할부지는 법으로 심판을 하든 총으로 심판을 하든 나쁜 놈은 죽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랜 토리노>의 마지막 부분에서도 역시 이 사람은 또 이런 응징하는 작품을 만들었네, 생각했는데 어머나. 오해였던 거다. 할부지한테 미안해서 울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작품은 타인과의 소통 방법을 모르는 한 노인이 공통점이라곤 하나도 없는 이웃에게서 정을 느끼고 변화하는 모습을 담은 영화이기도 하지만 속죄에 대한 영화이기도 하다. 한국전에서 소년병을 죽이고 훈장을 탔다는 것에 대해 항상 괴로워하던 노인은 아내의 유언에도 불구, 신부에게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것을 끝까지 거부한다. 그런 그가 속내를 털어놓는 유일한 인물은 자기 차를 훔치려 했던 동양인 소년이다. 노인은 어떤 권위에게 자기 죄를 고백하는 것은 거부했으나 자신이 진정 마음을 열었던 소년에게는 진실하게 고백한다. 노인의 고해성사는 결국 마지막의 반전까지 이어지고 그는 진실로 속죄한, 죄 사함을 받은 인간이 된 것이다.

한편으로는 이 작품을 동양적 가치에 대해 마음을 여는 백인의 이야기로 읽기도 했다. '몽'족들은 안 좋은 일이 있으면 침묵하며 누군가에게 고마운 일이 있으면 음식과 꽃을 그의 집 앞에 놓는 것으로 고마움을 표시한다. 그들의 문화를 혐오하며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는 망말을 서슴치 않던 노인이 나중에는 '내 자식들보다 이 동양인들과 더 잘 통하다니' 하면서 한탄하는 장면은 동양인의 '정' 문화에 서서히 물들어가는 백인의 모습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피를 나눈 가족이지만 타인보다 더 그를 외롭게 하는 그의 자식들은 그만의 방식으로 '응징' 당한다. 어쨌든 클린트 할부지는 끝까지 굽히지 않는 것이다. 총질을 하지는 않지만 말이다.

노인이 아버지가 없는 소년에게 가르치려는 '남자들의 세계'는 험한 욕설을 하면서 애정을 표현하고 연장 쓰는 법을 알려주는 식의 보수적이나 따스하고 바람직하게 마초적인 세계다. 그러나 한편으로 소년은 계속 범죄의 세계로 그를 끌어들이려는 현대적이고 냉정하며 그를 타락하게 하려는 마초적인 세계에 둘러싸여 있다. 한국전으로 표현되는 남성 세계의 부정적인 면인 '전쟁'을 거친 노인은 이 소년이 어떻게든 긍정적인 남성 세계를 경험했으면 좋겠다는, 일종의 사명감을 갖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노인은 계속 소년에게 '남자다워야 한다'고 말하지만 실상 소년이 누나의 복수를 하겠다며 싸우러 가자고 말했을 때는 그가 지금껏 고수해왔던 '남자다운' 행동을 거부한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남성은 남성다워야 하며 그들의 세계는 온건히 지켜져야 한다는 보수적 세계관을 변함없이 고수하고 있지만 선함이 공격받을 때 똑같이 공격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생각으로 우회한 듯하다.

결국 속죄는 속죄대로 이루어지고 숭고한 희생으로 인해 응징은 응징대로 이루어진다. 그랬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악에는 악으로 갚아줬던 방식들은 끊임없이 희생자들만 재생산하는 백인들의 방식이었던 것이다. 이제는 그러지 맙시다, 다른 방식으로 갚아줄 수 있으니 - 라고 클린트 할부지는 말하는 듯 하다. 총을 들어도 멋있는 할부지지만 다른 걸 드는 것이 더 멋있다는 것을 이제는 확실히 아신 것 같다. 이렇게 길게 구구절절 말하지 않아도 그냥 이 영화의 모든 것이 좋다. 영혼이 있는 영화라는 건 바로 이런 거다. 클린트 할부지가 오래 오래 사셔서 계속 나를 울려주셨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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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멘트 가든
이언 매큐언 지음, 손홍기 옮김 / 열음사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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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언 매큐언의 <속죄>를 읽고 정신적인 충격을 받아 그의 작품을 사재기했는데 단편집은 좀 지루해서 읽다가 말았고 <암스테르담>은 꽤 흥미로워서 읽고 있는 중이다. 이 책은 <속죄> 전만 해도 구하기가 어려웠는데 이언 매큐언의 인기 때문에 재발행되었다. 엊그제 친구에게 바람맞아 기분도 우울하고 월급도 좀 남았고 해서 서점에서 책을 세 권 샀다. 사면서도 <시멘트 가든>이 소장할 만한 책은 아닌 것 같은데 싶었다. 읽고 알라딘 중고서점에 팔아버리면 되니까, 하면서 사버렸다. 어쨌든 도서관에는 없는 책이니 사서 읽는 수밖에.

78년도 작품이라 이언 매큐언의 작품 세계가 완성됐다기보다는 자신의 문학적 토대를 쌓고 모색하고 스타일을 확립하는 정도가 아닌가 싶음. 한국 독자들의 평은 그리 좋지 않은데 아이들이 죄의식없이 근친상간을 범하는 장면같은 것이 우리나라 독자들의 근엄함과 윤리적 잣대로 비추어 봤을 때 너무도 불편하기 때문인가보다. 이 작품에서 그런 불편함을 빼면 시체인데ㅋㅋ 어렸을 때 희미하게 죄의식을 느끼긴 했지만 금기를 어긴다는 쾌락을 더 강하게 느꼈던 몇몇 '나쁜 짓거리들'을 생각하면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수긍은 할 수 있는데 말이다. 또 근친상간은 지금도 어디에선가 일어날 법한 일들이고. 무엇보다 나는 이 작품이 성장 소설이 아니어서 좋았다.
흔히 사람들은 아이들은 어떤 사건을 계기로 성장한다고 생각하지만 정신적으로 성숙하게 된다는 것을 어른이 되는 것과 동일시한다는 것 자체가 지나치게 어른 중심적인 사고가 아닐까? 어른들의 내면에는 죽을 때까지 아이가 존재하지만 나이가 들면 철이 들어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숨기는 방법만 배우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이가 들면 성장한다는 것은 일종의 판타지다.

잡설은 고만하고 작품 얘기로 들어가보자. 어른들이 질병으로 죽어 버리고 황량한 2층집에는 아이들 네 명만이 남아 있게 된다. 18세의 장녀, 16세의 차남, 그리고 정확히 나이를 알 수는 없는 차녀와 유아기적 상태에 머물러 있는 막내... 아이들은 어머니의 시체를 시멘트를 넣은 상자에 묻은 채 지낸다. 아이들이 부모가 없는 상황에서도 지낼 수 있었던 것은 금기가 없는 자유에의 쾌락 때문이다. 나도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부모님이 함께 외출을 하고 나와 동생만이 집에 남아 있었을 때는 언제 부모님이 다시 돌아올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불안하면서도 그간 하지 말라는 일들을 즐겁게 할 수 있어 더없이 좋았다는 사실을. 부모님을 사랑하지만 부모님이 함께 없으면 더 재미있고 신나는 것 같다고 생각했던 것은 왜일까. 어른이 없다는 것은 검열 체제가 없다는 것이고 좀 더 아이스럽게 살 수 있다는 것이니까. 어른들은 아이들은 아이다워야 한다고 하면서도 아이들에게 어른스러움을 강요할 때가 많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아이들은 순진하며 무지하기 때문에 악마적이다. 이 작품의 아이들은 성정체성을 드러내고 몽상에 빠지며 끝없이 자위를 하고 악몽을 꾼다. 성장은, 악몽이니까. 더이상 죄의식없이 즐거울 수는 없는 거다.

이들의 모호한 질서는 그들의 연대에 '질투'를 느끼는 장녀 줄리의 남자친구가 등장하면서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그 때에 맞춰 지하실에 있었던 시멘트 무덤에 금이 가기 시작하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프로이트가 살아있었더라면 이 작품을 꽤 흥미로워했을 것이다. 장녀 줄리와 잭이 가족 통제권을 갖기 위해 경쟁하는 부분이라든가 퇴행적인 행동을 보이는 막내 톰의 여장이라든가 하는 것들. 묘사된 것을 보면 꽤 프로이트스러운 설정들이었다. 둘째 잭은 병약해서 관심의 대상이 되는 막내를 질투하고 줄리의 남자친구는 잭을 질투한다. 줄리의 남자친구가 비밀을 발설하게 되는 것은 아버지가 되려고 했던 그의 의도가 좌절되고 만 분노에서 기인한 것이다. 아이들은 또 한 명의 아버지가 생겨서 자신들을 통제하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이다. 다소 아쉬웠던 것은 사춘기 소년 잭에 대한 성격 묘사는 독특했지만 수나 줄리에 대해서는 별로 특별하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이언 매큐언도 사춘기 여자아이들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것 같다. 그 복잡한 내면을. 아니면 화자가 남자아이인 잭이기 때문에 줄리의 튼튼하고 긴 다리 외에는 별 관심이 없었을 수도 있고.

소설의 마지막 부분은 정말이지 충격적이다. 죄의식이 없는 근친상간의 장면은 이들이 했던 의미없는 놀이처럼 표현된다. 사춘기라는 시기에 묘한 매력을 느꼈다는 이언 매큐언. 어쩌면 어른이 된다는 것은 금지된 것들에 대한 욕망을 무의식의 세계로 쫓아내는 작업인지도 모르겠다. 2층에서는 누나와 동생의 섹스가 벌어진다. 그것도 남자친구가 자신을 소유하려는 것을 막기 위한 작업이기도 하며 놀이이기도 한 섹스다. 지하실에서는 열 받은 남자친구가 망치로 시멘트 무덤을 깨고 있다. 깊은 곳에 숨겨 놓았던 무의식이 의식 밖으로 튀어나오는 순간이다. 그러나 이들 모두 아무런 죄의식을 느끼지 않고 있다는 것이 정말 흥미로웠다. 아이들은 그래서 아이들인 것이다. 완벽하게 악마적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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