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멘트 가든
이언 매큐언 지음, 손홍기 옮김 / 열음사 / 2005년 12월
평점 :
절판


이언 매큐언의 <속죄>를 읽고 정신적인 충격을 받아 그의 작품을 사재기했는데 단편집은 좀 지루해서 읽다가 말았고 <암스테르담>은 꽤 흥미로워서 읽고 있는 중이다. 이 책은 <속죄> 전만 해도 구하기가 어려웠는데 이언 매큐언의 인기 때문에 재발행되었다. 엊그제 친구에게 바람맞아 기분도 우울하고 월급도 좀 남았고 해서 서점에서 책을 세 권 샀다. 사면서도 <시멘트 가든>이 소장할 만한 책은 아닌 것 같은데 싶었다. 읽고 알라딘 중고서점에 팔아버리면 되니까, 하면서 사버렸다. 어쨌든 도서관에는 없는 책이니 사서 읽는 수밖에.

78년도 작품이라 이언 매큐언의 작품 세계가 완성됐다기보다는 자신의 문학적 토대를 쌓고 모색하고 스타일을 확립하는 정도가 아닌가 싶음. 한국 독자들의 평은 그리 좋지 않은데 아이들이 죄의식없이 근친상간을 범하는 장면같은 것이 우리나라 독자들의 근엄함과 윤리적 잣대로 비추어 봤을 때 너무도 불편하기 때문인가보다. 이 작품에서 그런 불편함을 빼면 시체인데ㅋㅋ 어렸을 때 희미하게 죄의식을 느끼긴 했지만 금기를 어긴다는 쾌락을 더 강하게 느꼈던 몇몇 '나쁜 짓거리들'을 생각하면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수긍은 할 수 있는데 말이다. 또 근친상간은 지금도 어디에선가 일어날 법한 일들이고. 무엇보다 나는 이 작품이 성장 소설이 아니어서 좋았다.
흔히 사람들은 아이들은 어떤 사건을 계기로 성장한다고 생각하지만 정신적으로 성숙하게 된다는 것을 어른이 되는 것과 동일시한다는 것 자체가 지나치게 어른 중심적인 사고가 아닐까? 어른들의 내면에는 죽을 때까지 아이가 존재하지만 나이가 들면 철이 들어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숨기는 방법만 배우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이가 들면 성장한다는 것은 일종의 판타지다.

잡설은 고만하고 작품 얘기로 들어가보자. 어른들이 질병으로 죽어 버리고 황량한 2층집에는 아이들 네 명만이 남아 있게 된다. 18세의 장녀, 16세의 차남, 그리고 정확히 나이를 알 수는 없는 차녀와 유아기적 상태에 머물러 있는 막내... 아이들은 어머니의 시체를 시멘트를 넣은 상자에 묻은 채 지낸다. 아이들이 부모가 없는 상황에서도 지낼 수 있었던 것은 금기가 없는 자유에의 쾌락 때문이다. 나도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부모님이 함께 외출을 하고 나와 동생만이 집에 남아 있었을 때는 언제 부모님이 다시 돌아올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불안하면서도 그간 하지 말라는 일들을 즐겁게 할 수 있어 더없이 좋았다는 사실을. 부모님을 사랑하지만 부모님이 함께 없으면 더 재미있고 신나는 것 같다고 생각했던 것은 왜일까. 어른이 없다는 것은 검열 체제가 없다는 것이고 좀 더 아이스럽게 살 수 있다는 것이니까. 어른들은 아이들은 아이다워야 한다고 하면서도 아이들에게 어른스러움을 강요할 때가 많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아이들은 순진하며 무지하기 때문에 악마적이다. 이 작품의 아이들은 성정체성을 드러내고 몽상에 빠지며 끝없이 자위를 하고 악몽을 꾼다. 성장은, 악몽이니까. 더이상 죄의식없이 즐거울 수는 없는 거다.

이들의 모호한 질서는 그들의 연대에 '질투'를 느끼는 장녀 줄리의 남자친구가 등장하면서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그 때에 맞춰 지하실에 있었던 시멘트 무덤에 금이 가기 시작하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프로이트가 살아있었더라면 이 작품을 꽤 흥미로워했을 것이다. 장녀 줄리와 잭이 가족 통제권을 갖기 위해 경쟁하는 부분이라든가 퇴행적인 행동을 보이는 막내 톰의 여장이라든가 하는 것들. 묘사된 것을 보면 꽤 프로이트스러운 설정들이었다. 둘째 잭은 병약해서 관심의 대상이 되는 막내를 질투하고 줄리의 남자친구는 잭을 질투한다. 줄리의 남자친구가 비밀을 발설하게 되는 것은 아버지가 되려고 했던 그의 의도가 좌절되고 만 분노에서 기인한 것이다. 아이들은 또 한 명의 아버지가 생겨서 자신들을 통제하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이다. 다소 아쉬웠던 것은 사춘기 소년 잭에 대한 성격 묘사는 독특했지만 수나 줄리에 대해서는 별로 특별하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이언 매큐언도 사춘기 여자아이들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것 같다. 그 복잡한 내면을. 아니면 화자가 남자아이인 잭이기 때문에 줄리의 튼튼하고 긴 다리 외에는 별 관심이 없었을 수도 있고.

소설의 마지막 부분은 정말이지 충격적이다. 죄의식이 없는 근친상간의 장면은 이들이 했던 의미없는 놀이처럼 표현된다. 사춘기라는 시기에 묘한 매력을 느꼈다는 이언 매큐언. 어쩌면 어른이 된다는 것은 금지된 것들에 대한 욕망을 무의식의 세계로 쫓아내는 작업인지도 모르겠다. 2층에서는 누나와 동생의 섹스가 벌어진다. 그것도 남자친구가 자신을 소유하려는 것을 막기 위한 작업이기도 하며 놀이이기도 한 섹스다. 지하실에서는 열 받은 남자친구가 망치로 시멘트 무덤을 깨고 있다. 깊은 곳에 숨겨 놓았던 무의식이 의식 밖으로 튀어나오는 순간이다. 그러나 이들 모두 아무런 죄의식을 느끼지 않고 있다는 것이 정말 흥미로웠다. 아이들은 그래서 아이들인 것이다. 완벽하게 악마적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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