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랜 토리노 - Gran Torino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사나운 독수리같은 눈을 한 채 아내의 관 앞에 저승사자처럼 서 있는 월터. 그는 자식들에게도 정이 없고 손주들에게도 애정이 없는 고집불통인 노인네다. 죽은 아내의 부탁으로 고해성사를 하고 교회에도 나오라며 신부가 매일 찾아오지만 그에게조차 '공부만 많이 한 27세짜리 숫총각 주제에 누가 누굴 구원하냐'며 쫓아내는 영감탱이다. 그의 이웃들은 '몽'족이 대부분인데 이 늙은이는 아내와의 추억이 담겨 있는 집에서 악착같이 버티고 이사도 안가고 있다. 한국전에 참전했던 이 꼬장꼬장한 노인네는 장총을 지갑처럼 휴대하고 있다.

그랜토리노는 이 노인네의 얼마 없는 재산 중 하나. 72년산 잘빠진 이 자동차를 눈독 들인 '몽'족 갱들이 신고식을 한답시고 옆집의 숫기 없는 소년 하나를 협박, 차를 훔쳐 내라며 종용한다. 소년은 결국 무서운 노인네에게 들키고 이것을 계기로 인종차별주의자에 보수의 극치를 달리는 노인네와 공통점이 전~혀 없는 '몽'족과의 교류가 시작된다.

이 영화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집행자를 옹호하는 성격의 작품에서 좀 더 나아가 화해와 참회를 말하는 작품이다. 솔직히 이스트우드는 보수파에 가까운 인물이며 그의 작품들을 눈여겨 보면 용서의 메시지보다는 응징의 메시지를 더 많이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체인질링>에서도 그랬다. 마지막에 악착같이 사형당하는 살인범의 모습을 보여주는 냉정함에서 이 할부지는 법으로 심판을 하든 총으로 심판을 하든 나쁜 놈은 죽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랜 토리노>의 마지막 부분에서도 역시 이 사람은 또 이런 응징하는 작품을 만들었네, 생각했는데 어머나. 오해였던 거다. 할부지한테 미안해서 울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작품은 타인과의 소통 방법을 모르는 한 노인이 공통점이라곤 하나도 없는 이웃에게서 정을 느끼고 변화하는 모습을 담은 영화이기도 하지만 속죄에 대한 영화이기도 하다. 한국전에서 소년병을 죽이고 훈장을 탔다는 것에 대해 항상 괴로워하던 노인은 아내의 유언에도 불구, 신부에게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것을 끝까지 거부한다. 그런 그가 속내를 털어놓는 유일한 인물은 자기 차를 훔치려 했던 동양인 소년이다. 노인은 어떤 권위에게 자기 죄를 고백하는 것은 거부했으나 자신이 진정 마음을 열었던 소년에게는 진실하게 고백한다. 노인의 고해성사는 결국 마지막의 반전까지 이어지고 그는 진실로 속죄한, 죄 사함을 받은 인간이 된 것이다.

한편으로는 이 작품을 동양적 가치에 대해 마음을 여는 백인의 이야기로 읽기도 했다. '몽'족들은 안 좋은 일이 있으면 침묵하며 누군가에게 고마운 일이 있으면 음식과 꽃을 그의 집 앞에 놓는 것으로 고마움을 표시한다. 그들의 문화를 혐오하며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는 망말을 서슴치 않던 노인이 나중에는 '내 자식들보다 이 동양인들과 더 잘 통하다니' 하면서 한탄하는 장면은 동양인의 '정' 문화에 서서히 물들어가는 백인의 모습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피를 나눈 가족이지만 타인보다 더 그를 외롭게 하는 그의 자식들은 그만의 방식으로 '응징' 당한다. 어쨌든 클린트 할부지는 끝까지 굽히지 않는 것이다. 총질을 하지는 않지만 말이다.

노인이 아버지가 없는 소년에게 가르치려는 '남자들의 세계'는 험한 욕설을 하면서 애정을 표현하고 연장 쓰는 법을 알려주는 식의 보수적이나 따스하고 바람직하게 마초적인 세계다. 그러나 한편으로 소년은 계속 범죄의 세계로 그를 끌어들이려는 현대적이고 냉정하며 그를 타락하게 하려는 마초적인 세계에 둘러싸여 있다. 한국전으로 표현되는 남성 세계의 부정적인 면인 '전쟁'을 거친 노인은 이 소년이 어떻게든 긍정적인 남성 세계를 경험했으면 좋겠다는, 일종의 사명감을 갖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노인은 계속 소년에게 '남자다워야 한다'고 말하지만 실상 소년이 누나의 복수를 하겠다며 싸우러 가자고 말했을 때는 그가 지금껏 고수해왔던 '남자다운' 행동을 거부한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남성은 남성다워야 하며 그들의 세계는 온건히 지켜져야 한다는 보수적 세계관을 변함없이 고수하고 있지만 선함이 공격받을 때 똑같이 공격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생각으로 우회한 듯하다.

결국 속죄는 속죄대로 이루어지고 숭고한 희생으로 인해 응징은 응징대로 이루어진다. 그랬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악에는 악으로 갚아줬던 방식들은 끊임없이 희생자들만 재생산하는 백인들의 방식이었던 것이다. 이제는 그러지 맙시다, 다른 방식으로 갚아줄 수 있으니 - 라고 클린트 할부지는 말하는 듯 하다. 총을 들어도 멋있는 할부지지만 다른 걸 드는 것이 더 멋있다는 것을 이제는 확실히 아신 것 같다. 이렇게 길게 구구절절 말하지 않아도 그냥 이 영화의 모든 것이 좋다. 영혼이 있는 영화라는 건 바로 이런 거다. 클린트 할부지가 오래 오래 사셔서 계속 나를 울려주셨으면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