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레슬러 - The Wrestler
영화
평점 :
상영종료


<발리에서 생긴 일>의 조인성처럼 입에 주먹 넣고 어깨춤을 들썩들썩 추면서 펑펑 울었다. 간만에 눈물을 흘려봤네. 이 영화가 걸작인가요? - 누가 이렇게 묻는다면 아니라고 말하겠다. 걸작은 아니고 꽤 신파적이고 감상적이고 또 어떤 부분은 유치하기까지 한데 미키 루크의 등판만 보면, 미키 루크의 거친 숨소리만 들으면 그냥 눈물이 줄줄 나는 거였다. 마지막에 '슈웅'하는 그의 비상을 지켜보는데 이거 원 울지 않을 재간이 없는 거였다. 마지막에 브루스 스프링스틴의 주제가까지 나오는데 이건 눈물 흘리라는 말이 아니고 뭐냐구ㅋㅋ '마음껏 울어요'라는 서비스?? 

영화 시작한 후 5분 정도는 그의 얼굴을 볼 수가 없다. 그의 앞얼굴이 나오는 건 좀 지나서다. 체격은 지나칠 정도로 건장한 남자의 등. 그러나 노쇠한 그의 육체가 내는 경고의 신음소리가 화면을 가득 채운다. 그의 보청기, 그의 안경, 그의 온 몸을 감아 놓은 밴드와 여기저기서 짤랑이는 소리를 내는 진통제 병들. 육체가 병들기 시작하면서, 나이가 들어가면서 이 사람은 화려했던 지난 시간을 되새김질하는 '추억이 버릇이 되는' 노인이 된다. 그러나 약물 중독처럼 레슬링에 중독된 이 할부지는 레슬링을 계속 하게 되면 죽는다는 의사의 경고에도 그만둘 수가 없다.

예전에 <꼬마 아니발의 일곱가지 소원>이라는 청소년들을 위한 동화책 비슷한 걸 읽은 적이 있는데 거기에서 아니발이 말하기를 '사람들은 다 자기가 잘나갔을 때만을 추억하며 산다'고 한다. 배구 선수였던 사람은 자기가 한참 배구 선수로 얼마나 잘나갔는지를 말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어렸을 땐 나도 노인들의 추억담을 참아낼 수가 없었다. 왕년에 자기 잘나갔던 것만을 주절거리며 자기 잘나갔던 때를 추억하며 소일거리하는 노인들. Loser 느낌 팍팍 나지 않은가. 그러나 이젠 어렴풋이나마 알 것 같다. 인간은 원래 그런 거다. 어린 것들은 모르는 유한한 삶에의 회한, 병들어가는 육체에 대한 야속함, 그러나 늙지 않는 마음... 과거를 추억하는 일을 습관처럼 되풀이하는 것은 그러지 않고는 배겨낼 수 없는 삶의 고독감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모두가 나를 기억할 만했던, 떠들썩하고 외롭지 않았던 그 때를 잊을 수 없는 거다.

다른 사람이 심장수술을 받은 레슬러 역할을 했다면 또 다른 느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미키 루크의 사연 많은 얼굴, 한 때 <나인 하프 위크>같은 영화에서 사람들을 후끈 달아오르게 했던 섹스 어필했던 남자가 성형 수술로 망가지고 퉁퉁 부어 화면에 클로즈업 될 때면 이렇게 배우와 배역의 싱크로율이 높을 수 있나 하는 생각이 팍팍 드는 거지. 레슬러 '더 램'이 '나 아직 죽지 않았어' 하면서 날아오를 때 미키 루크 역시 '나 아직 연기할 수 있어'라며 날아오르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거였다. 잘나갈 때 괜히 복싱은 한다고 난리쳐서 얼굴은 얼굴대로 망가지고, 수술 몇 번에 또 망가지고, 애완견을 촬영 안해준다며 촬영장에서 뛰쳐나간 악동 할부지가 외로운 티 팍팍 내며 딸 찾아가고 스트립쇼 하는 아줌마 찾아가고 그럴 때 이건 뭐 사는 게 뭔가 싶고 그랬다. 인생 평탄했던 몇몇 배우들이 이런 역할 했으면 이 정도로 울리진 않았을 거다.

난 남동생 덕분에 헐크 호건이 나오는 레슬링 비디오 테이프는 거의 다 섭렵해야 했는데 알고 보니 레슬링이란 게 의외의 매력이 있었다. 어린 마음에도 저게 '짜고 치는 고스톱' 느낌이 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드라마틱했던 거였다. 꼭 한 쪽이 예쁨받으면 다른 쪽은 미움을 받으며 등장을 했다. 한참 예쁨받는 쪽이 이기다가 미움 받는 쪽이 반칙을 하면서 반전된다. 그러나 피를 흘리며 아픔을 호소하던 예쁨받는 쪽이 나중에는 미움 받는 쪽을 힘겹게 이긴다. 로프를 튕기며 달려가거나 링 위에 올라가 뛰어내리면 게임 끝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응원하는 선수가 이겼다는 행복감을 느낀다. 이 모든 것에도 줄거리가 있다는 것이 매력적이었고 반칙을 해서 이긴다 해도 그걸 사람들이 내버려 둔다는 것도 의외로 큰 재미를 줬다. 반칙을 대놓고 허용하는 스포츠 엔터테인먼트였기에.

헐크 호건 세대(ㅋㅋ)로서 이 작품을 보는 즐거움(아니면 고통?)도 있었다. 레슬러들의 세계를 충분히 조사하고 시작했을 법한 섬세한 시나리오 덕에 내가 봤던 장면들이 이렇게 만들어졌구나 싶었고 헐크 호건은 지금 뭐하고 있나 궁금해지기도 했다. 지금 K1이다 뭐다 나오긴 했지만 나는 아직도 레슬링에 대한 향수를 갖고 있다. 짜고 치지만 그 안에 치열함이 있고 감동적인 스포츠들이 보여주는 드라마틱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치열한 스포츠로서의 모습과 끊임없이 자신을 고문해서 즐거움을 주는 사디스트들이 제공하는 엔터테인먼트. 그것은 한 때 복싱이 표현했던 인간 삶의 모습과 닮아 있다.

램과 비슷한 위치의 퇴물 스트리퍼인 캐시디가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의 한 부분을 인용한 것도 의미심장하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그 영화를 못 봤냐며 램에게 '몇 시간을 채찍질당하면서도 예수는 모든 것을 참아낸다'고 말한다. 램은 '대단한 사람이네'라고 말한다. 그가 스템플러로 찍어대며, 깨진 유리에 상처가 나며, 밖으로 내동댕이쳐지며 치렀던 경기가 끝난 후 그녀를 찾아갔을 때의 대사다. 인간은 어찌보면 신에게 채찍질당하면서도 모든 것을 참아내며 살아야 하는 존재인지도 모르겠다. 신의 고문이 죽는 순간에야 끝나는 고통스러운 것이라 해도 우린 그걸 감내해야 하는 것이다. 예수가 그러했듯이 크고 작은 고문을 참아내며 끝까지 날아오르는 레슬러 '램'은 작은 예수가 아닐까. 이렇게 살아야만 우리는 신의 품에 안겼을 때 스스로 당당할 수 있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넓고 탄탄하지만 참으로 쓸쓸한 그의 등이, 그리고 그런 탄탄한 등과 어울리지 않게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고통스런 신음소리들이 참으로 애처롭고도 익숙했던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나 역시 쓸쓸한 등을 가진 노인이 되겠지 싶어서. 허나 신이시여. 저를 채찍질하세요. 끝까지 참아내겠습니다 - 레슬러 '더 램'도, 미키 루크도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아 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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