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 The Curious Case of Benjamin Butt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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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보구서 깜짝 놀랐다. 허리를 다쳤지만 꾸역꾸역 극장가서 2시간 30분을 앉아 있는데 다른 건 몰라도 오스카에서 각색상은 꼭 받아야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헐리웃의 각본가들은 밥 대신 이슬을 먹고 사나? 어쩜 이렇게 제대로 각색을 할 수가 있는 건지... 헐리웃 각본가들은 수영장 딸린 집에 산다더니만 그럴 만하다. 이 이상 잘 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잘썼더라. 다만 2시간 30분은 좀 과했다는 생각이 든다.

데이빗 핀처는 <조디악> 때부터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세밀하게 연출하고 서서히 끌어 나가는 연출과 긴 러닝타임에 호기심을 느낀 건지도 모르겠다. <벤자민 버튼의 시계는 거꾸로 간다>는 병실에 누워 있는 임종 직전의 데이지가 딸에게 벤자민 버튼이라는 남자가 쓴 일기장을 읽어달라고 부탁하는 것부터 시작하는데 허리케인이 왔다 갔다 하는 그곳의 날씨부터 시작해서 거꾸로 가는 시계의 탄생 신화(?)까지 모두 소설에는 없는 설정들이었다. 죽음 목전의 여인이 한 남자의 삶의 궤적을 들여다보는 식으로 전개되는 것 자체가 의미심장하지 않은가. 더군다나 충격적일 정도로 놀랐던 것은 원작에서는 벤자민이 부모와 함께 사는데 이 영화에서는 아버지가 그를 복지시설에 버리는 것으로 나온다는 거다. 복지시설이라니!! 정말 놀랍지 않은가. 벤자민은 노인의 모습을 하고 태어나 버려지고 그 시설에서 더욱 더 가깝게 죽음을 목도하게 된다. 그것이 그의 삶에 분명한 영향을 준다. 삶은 유한하다는 것을 너무나 분명하게 알게 되는 것이다.

이 작품이 실려 있는 피츠제럴드의 단편집은 모두 젊음의 무지함과 사랑의 유한함, 노인의 지혜 등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 삶이 유한하다는 것을 너무나 늦게 깨달은 나머지 중년이 지나고 노인이 되면서 그들은 자신의 삶을 바꿀 수 있는 열정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리고 죽음을 맞는다. 영화에서도 마찬가지로 노인들은 젊은 시절의 자신에 대한 미련을 지우지 못한다. 그러나 그들은 흔들 의자에 앉아서 추억하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 이미 늙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벤자민 버튼은 모든 것을 역으로 경험한다. 삶의 유한성, 젊은 시절의 허무함... 이 모든 것을 알기에 그의 삶은 다른 이들과 다르다. 그러나 영원하지 않다는 것은 다른 삶과 똑같다.  

 소설은 영화보다 좀 더 비정(?)하고 허무하다. 벤자민은 점점 젊어지면서 아내에 대한 애정도 잊는다. 젊은이들은 대게 그렇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는 다르다. 어떻게 보면 미국적이고 헐리웃스러운 교훈들을 늘어놓는 면이 많다. 우선 벤자민이 머물던 복지시설의 모든 노인들은 물론이며 가슴에 벌새 문신을 새긴 '아티스트'이자 배 선장과 선원들의 이야기도 원작에는 없는 것이다. 꽤 의미있는 소재로 나오는 벌새의 상징도 분명하다. 벌새의 엄청난 날갯짓이 인간의 삶과 연결되는 것이 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그 벌새를 새기고 있던 배 선장의 삶이 주는 의미도 있고. 어쨌든 이 영화는 모든 인물, 모든 소재들을 통해 삶에 있어서 빠른 것도 늦은 것도 없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 한다. 매 챕터마다 반복되는 긍정적인 메시지들은 지루함을 유발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원작 소설에서 볼 수 없었던 따스함에 어느 정도는 세뇌당하는 느낌이었다.

이 영화가 따스할 수밖에 없는 것은 바로 사랑의 영원성을 긍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벤자민은 사고를 당한 데이지가 젊은 여자의 신선한 육체를 보고 부러움에 눈물을 흘리자 선장의 말을 인용해 '욕을 하고 부정해도 끝이 오면 결국 그냥 보내야 한다 '고 말한다. 데이지는 벤자민에게 '영원한 것도 있다'고 말한다. 피츠제럴드는 '영원한 것은 없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에 열심이었다. 젊음은 유한하고 그래서 허무했다. 사랑도 사라지고 그로 인해 인간은 패배감에 젖었다. 하지만 이 영화는 다르다. 데이지는 영원히 벤자민을 사랑한다. 그녀가 어린 벤자민을 안고 있는 모습은 팽팽한 얼굴의 두 사람이 사랑을 나누는 모습보다 감동적이다. 피츠제럴드의 은은한 시니컬함에도 감탄했지만 이 영화가 말하는 것에 더 마음이 가서 지속적으로 반복 주입되는 교훈에 신물을 내면서도 한편으로는 감동을 받아 눈물을 흘렸다.
 
'누군가는 강가에 앉아 있는 것을 위해 태어난다. 누군가는 번개에 맞고 누군가는 음악의 조예가 깊고 누군가는 예술가이고 누군가는 수영하고 누군가는 단추를 잘 알고 누군가는 셰익스피어를 알고... 누군가는 어머니다. 그리고 누군가는 춤을 춘다'
나는 뭘 하도록 만들어진 인간일까. 나도 너무 늦지 않은 걸까... 묻고 싶어진다. 

한편으로는 이 작품이 너무 잘 만들어놔서 먹기 부담스런 음식같이 부담스럽다고 느꼈다. 약간의 여백이 있었어도 좋았을텐데 굳이 하나하나 다 짚고 넘어가고 모든 인물들이 뭔가 한 마디씩 하고... 꼭 그러지 않아도 됐을텐데. 다만 이 영화가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는 의견에는 반대한다. 친구는 이 영화 예고편에 낚여서 케이트 블랑셋과 브래드 피트의 사랑 이야기가 주가 되는 줄 알았는데 지루한 인생 얘기였다고 분개했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이 영화, 사랑의 영원성을 긍정하는 얘기니까 그게 메인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영원히 젊을 순 없다. 하지만 영원히 사랑할 수는 있다... 이 이상 아름다운 사랑 얘기가 어딨다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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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 - He's Just Not That Into You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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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보는 도중 간간히 웃음이 터졌다. 대부분 '맞아! 정말 저랬어'같은 공감의 '쓴'웃음이었다. 몇 년 전 나처럼 지나치게 상상력 풍부해서 삽질하는 여자들에게는 꽤 도움이 됐던 동명의 연애 지침서를 읽은 적이 있었는데 필기(-_-)까지 하면서 읽었던 터라 중간중간 글귀들이 생각이 났다. 책에는 반했지만 영화에는 반할 수가 없었다. 그다지 괜찮은 영화화라고 볼 수는 없었던 것이 그래서 어쩌란 말이야, 하는 생각만 하게 됐기 때문이다. 배우들의 면면은 화려했지만 이야기의 매력은 없더군. 연애 지침서를 영화화했기 때문에 겪을 수밖에 없는 한계였던 건지도 모르겠다.

책을 요약하면 이렇다. 남자가 전화를 하겠다고 하고 하지 않거나, 일 핑계를 대면서 바쁘다고 한다거나, 좋은 친구라는 말로 관계를 한정시키거나, 오래 사겼음에도 결혼 얘기를 꺼내지 않는다면 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는 거다. <섹스 앤 더 시티>의 작가가 쓴 작품으로 읽다보면 진정 여자들이 자신을 좋아하지도 않는 남자에게 반해서 어쩔 줄 몰라하는 것을 측은해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아는 언니도 이 책을 읽었는데 책을 읽고 나서 생각해 보니 '사겼던 모든 남자들이 자신에게 반하지 않았'음을 알게 돼서 혼란에 빠졌다고 했다. 나는 그간 내가 어떤 남자의 전화를 기다리면서 느꼈던 모든 감정과 자기 합리화가 이렇게 명료하게 문자로 표기될 수 있음에 놀랐다. 그리고 열심히 필기했고 나한테 반하지 않았을 법한 놈들을 가지쳐낼 수 있는 눈이 생겼다. 그러나 후일 깨닫게 된 것은 정말 내가 그에게 빠져 버리면 그가 나에게 반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알았다 해도 다 소용이 없다는 거였다. 그러니까 그가 나에게 반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서도 괜찮을 수 있다는 건 나 역시 그에게 반하지 않았다는 증거이며 내가 그에게 반해 버렸다면 그가 나에게 반하지 않았어도 감정을 조절할 수 없다는 아주 극명한 진리였다.

영화는 책의 몇몇 부분들 중 많은 여성들이 궁금해하는 질문들을 늘어놓는 식이다. 소개팅 후 전화를 하지 않는 남자의 심리, 좋은 친구라고 말하면서 가끔 찾아와 속 뒤집고 가는 여자의 심리, 결혼을 하려고 하지 않는 남자의 심리, 이메일이나 음성메시지만 남기고 사라지는 유령같은 관계 등이다. 결론을 말하자면 결혼을 하지 않으려는 남자 중 몇몇은 진짜 결혼 자체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있는 것일 뿐 여자를 정말 사랑할 수'도' 있다는 것, 감정 절제보다는 착각일지라도 그를 좋아하고 기다리고 설레는 감정이 남아있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것, 진실한 믿음이 없는 결혼은 하지 않는 게 낫다는 것, 어떤 여자들은 결혼보다는 자기 일에 더 집중하려고 하고 그게 좋을 수도 있다는 것 등이다. 아. 정말 진부한 결론이지 않은가. 진부한 결론을 진부한 방식으로 보여주면서 2시간이나 넘게 동어 반복하고 있다. 
 

이 영화가 2시간 넘게 하는 얘기는 이거였다. 법칙과 예외. 중간중간 <섹스 앤 더 시티>의 초기 에피소드처럼 사람들의 속마음을 인터뷰하는 부분도 있었고 엔딩 크레딧 올라가면서 등장 인물들의 현 상태를 인터뷰해서 보여주는 부분도 있었다. 하지만 후반부의 인터뷰는 별로 의미가 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냥 깔끔하게 끝냈어도 좋았을 것이다. 영화를 보면서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합리화하고 결국 그 환상이 착각임을 알게 돼서 깨진다 해도 그게 감정 조절의 천재가 되는 것보다 더 인간적이라는 결론이 제일 맘에 와닿았다. 상처받으면 뭐 어떤가. 긍정의 미덕을 발휘해서 '때론 이효리같이 멋진 여자를 싫어하는 남자도 있지. 난 바로 그런 남자를 만났던 거야'라고 생각해 버리자. 그 전에는 많이 착각하고 많이 삽질하자. 나이 들면 힘들어서 삽질도 못하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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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볼루셔너리 로드 - Revolutionary Road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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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의 미국을 배경으로 한 작품으로 <아메리칸 뷰티>로 중산층 가정의 위선을 까발리고 가정의 붕괴를 말하는 것에는 선수급으로 올라선 샘 멘데스 감독의 영화다. 원작 소설은 타임지가 뽑은 100대 영문소설에 뽑혔다네. 영화 보기 전에 읽어보고 싶었지만 너무 두껍길래-_-ㅋ 어쨌든 보긴 봐야겠더라. 영화 보고 나니까 소설에는 얼마나 상세하게 심리 묘사가 되어 있을까 궁금해졌다. 

뉴욕의 교외 지역인 레볼루셔너리 로드에 살게 된 부부는 주변 사람들의 부러움을 살 정도로 단란하다. 그러나 두 사람은 반복되는 일상과 자신들을 짓누르는 위선적인 분위기에 질식할 것만 같다. 매일 매일  권태로움과 답답함을 느낄 뿐이다. 현실은 '레볼루셔너리' 하지 않았고 지루하다. 어느 날 아내는 처음 만났을 때에 남편이 파리야말로 다시 가고 싶은 유일한 곳이라고 말했던 것을 기억해낸다. 파리에 가서 평범한 회사원이 아닌, 당신이 정말 하고 싶은 일을 찾으라는 아내의 말에 남편 역시 설득당한다. 두 사람의 가장 행복한 시절이 시작된다. 그러나 이내 남편은 더 좋은 자리를 제안하는 사장의 말에 흔들리기 시작한다. 두 사람의 마음이 맞아 뜨겁게 사랑하게 되어 잉태된 셋째 아이 역시 이들 부부에게는 걸림돌이 된다. 파리에 가는 것이 좌절되자 두 사람의 관계는 다시 삐걱거리기 시작한다...

이야기는 간단하고 그렇게 극적인 것도 없다. 그저 다른 방식으로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두 사람의 심리가 아주 잔잔하게 묘사될 뿐이다. 그러나 힘있고 섬세한 연출과 배우들의 호연 덕분에 이야기는 설득력을 얻었고 2시간 동안 지루하다는 생각 없이 집중해서 볼 수 있었다. 사랑의 종말과 가정의 붕괴를 이런 식으로도 표현할 수 있음이 놀랍고 이래서 헐리웃을 무시할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쓰레기같은 블록버스터도 만들지만 우리 삶을 돌아보게 하고 깊은 질문을 던지는 작품들도 만들어지니 말이다. 5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이지만 놀랍도록 현대적이고 아직까지 이들 부부가 고민했던, 그들을 고통에 빠뜨렸던 문제들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결혼한 부부의 속사정은 정말 그들 외에는 아무도 모른다고 한다. 멀쩡하게 잘 살다가 소리 소문 없이 이혼하는 사람들도 있고 서로를 죽일 듯이 증오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찌어찌 잘 지내는 사람들도 있다. 어찌됐건 사람들은 대체로 행복을 과장하는 편인데 그것은 타인들에게 보이기 위한 일종의 연극이다. 현실에서도 그렇지만 영화 속에서도 부부는 조금씩 서로를 속이고 있고 다른 이들을 상대로 삶을 공연한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그런 연극을 삶의 한 방식으로 받아들이고 거기에 익숙해지지만 아직 뜨거운 마음을 지닌 아내는 그것을 견디지 못한다. 남편은 절대 아버지처럼 녹스사의 사원으로 살다 죽고 싶지는 않다고 말하지만 현실의 문제 때문에 이상을 추구하는 것을 포기한다. 그러나 연극배우를 꿈꿨던 예민한 감수성을 지닌 아내는 현실적인 남편과 같은 것을 지향할 수가 없다. 그것은 그녀의 인생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사랑은 종말을 맞는다.

어떻게 보면 아내는 재능 없는 연극 배우로서의 삶에 대해 절망을 느꼈기 때문에 뜨거운 삶에 대한 갈증이 있었을 것 같다. 하지만 남편은 가정 때문에 회사원으로서의 삶을 선택한 이후 자신이 무엇을 추구하려 했는지 자체를 잊어버렸기 때문에 다시 모험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두 사람은 뜨거운 사랑을 했고, 아내는 남편이 가진 것 이상으로 그를 평가하고 이상화했다. 하지만 남편은 평범하디 평범한 사람일 뿐이었다. 아내가 파리를 고집한 것은 실은 자신이 선택한 사람이 자신이 생각했던 그대로의 사람인지에 대한 기대감을 포함하고 있었던 것 같다. 파리가 아니었어도 상관없었을 것이다. 그저 그녀는 어떻게든 허망한 결혼 생활을, 그리고 지지부진한 삶을 바꿔보고 싶었고 그래서 파리를 선택했던 것이다. 하지만 남편은 그녀의 몸부림을 외면하고 만다. 사랑으로 잉태된 아기가 두 사람의 사랑을 깨게 되는 매개체가 된다는 것은 정말 아이러니한 일이다.

사랑할 때는 상대방을 이상화하고 높게 평가하지만 결혼 생활은 높게 끌어올렸던 상대방을 원래 자리로 돌려놓는 잔인한 여정이다. 사랑했던 사람이 내가 생각했던 이 세상에서 가장 대단하고 멋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때, 그것이 그의 잘못이 아님에도 불구하고(그런 기대를 했던 내 잘못인 거니까) 절망하고 결국 상대방을 미워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사랑은 본래의 형태대로 남아 있지를 못한다. 결혼은 서로의 차이를 확인하고 그것을 극복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되는 괴상한 제도인 것이다. 희망없는 삶을 살아가려면 눈을 감고 귀를 닫고 살 수밖에 없다. 그렇게 연극할 수 없다면 떠나든가. 우리에게 그런 용기가 있을까? 당신은 이 희망없는 삶을 박차고 떠날 수 있는지를 물어보는, 너무나 공포스러운 작품이었다.

중반에 등장하는 꽤 중요한 인물 중 한 명이 박사 학위까지 있지만 정신병동에 입원한 경력이 있는 부동산 업자의 아들 존 기빙스다.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선택을 비현실적이라고 말했을 때도 존은 그들의 선택에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그들이 현실적인 선택을 했을 때는 존 만이 그들을 위선적이라고 비난했다. 정신병자만이 그들의 삶을 꿰뚫어 보는 능력을 지녔다는 것, 정말 무섭지 않나. 연극하며 사는 사람들은 미치지 않는다. 그들은 그 삶이 연극임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 그러나 삶의 연극적 요소를 깨닫고 그것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미치거나 죽는다. 어떤 것이 더 고통스러울까 고민하게 했다.   

내 결론은 이랬다. 다 내던지고 떠나기도 어려울 것 같고 연극도 괴로울 것 같으므로 아무 것도 시작하지 않겠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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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드폰 - 핸드폰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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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태웅은 요즘 인기를 끌게 된 신인 여배우 하나를 목숨 걸고 키우고 있는 엔터테인먼트 회사 사장이다. 뭐 그래봤자 작은 사무실이고 키우는 애도 달랑 하나지만. 그런데 이게 웬일. 청순한 이미지로 잘나가기 시작한 여배우가 섹스 비디오를 찍었고 그 영상이 그의 폰으로 전송되어 온 것이 아닌가. 설상가상으로 그는 폰을 분실하게 된다. 그 때부터 목숨보다 소중한 핸드폰을 주웠다는 남자에게서 이상한 전화가 걸려오기 시작한다. '당신 와이프, 예쁜데?'

현대인에게 핸드폰은 프라이버시를 상징하는 거나 다름없다. 수많은 전화번호며 영상이며 사진이며... 단축번호나 컬러링, 액정 화면을 통해 알 수 있는 이 사람의 기호, 관심사 등등. 특히나 엔터테인먼트 사업을 하는 사람은 더하다. 천정명이 예전에 드라마 촬영장에서 폰 잃어버린 것 때문에 날뛰었던 걸 보면 대강 짐작이 간다. 핸드폰에 자신의 앞날을 좌지우지할 만큼 엄청난 것이 들었다면 더 그랬겠지. 핸드폰을 찾으려는 남자는 무슨 일이든 할 수밖에 없을 테고, 핸드폰을 습득한 남자는 어떤 식으로든 자기 손에 쥔 파워를 즐기려고 할 것이다. 은근히 조여오는 스릴러 작품의 소재로 꽤 괜찮네, 싶었다. 초반엔 그랬다.

그런데 이야기는 점점 치정극으로 흘러간다. 휴대폰 습득자 박용우가 억눌려 있는 폭력 욕구를 핸드폰을 이용해서 채운다는 설정은 꽤 그럴듯하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야기가 어느새 산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무릎팍 도사도 아닌데!! 박솔미와 그녀의 변호사 애인 얘기는 왜 자꾸 나오나 싶더니만 후반에는 엄태웅이 휴대폰에 목숨을 건 건 다른 이유도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런데 그 이유가 좀 황당하다. 아내에 대한 집착 때문이라니... 엄태웅같은 인물은 대놓고 찾아가서 까면 깠지 그렇게 처리할 인물이 아니다. 성질 보면 모르나. 그런데 일이 그런 식으로 됐다는 것도 웃기고 억지스럽다. 또 모든 일이 처리된 줄 알았는데 계속 이어지는 건 뭔가. 모르긴 몰라도 뭐가 부족하다는 생각에 작가나 감독이 계속 사족을 붙인 걸텐데 네버엔딩 스토리같은 느낌에 아주 짜증났다.

적어도 이 영화는 30분을 덜어냈어야 한다. 스릴러의 공식을 비껴가면서 지루함을 유발하려는 거면 성공했다. 그게 아니라면 정말 하고 싶은 얘기를 차례대로 정렬시키고 그 얘기와 특별하게 관계가 없다면 잘라내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 영화는 깔끔함의 미덕조차 없었다. 뻔하고 깔끔한 이야기보다 더 나쁜 건 황당하고 지저분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후자였다. 더군다나 뭘 말하려고 하는 작품인지에 대한 생각도 별로 없는 듯 했다. 계속 되지도 않는 반전을 주려고 노력하기만 했지 이야기의 짜임새는 허술했다. 대체 이 영화가 말하려고 하는 게 뭐냐는 내 질문에 지인은 '핸드폰 때문에 이런 일도 있을 수 있다는 거 아냐?' 한다. 아니, 그건 주제 차원이 아니고 소재 차원이지 않을까? 

두 남자의 연기는 나쁘지 않은 수준. 그러나 아사직전의 영화를 살리기엔 부족했다.  

* 또 하나 최악이었던 것은 음악. 엄태웅은 트로트를 즐겨 듣는 캐릭터로 나오는데 그래서 그런지 모든 BGM이 뽕삘이다. 일부러 그런 것일까? 일부러 그랬다면 판단 미스고 심사숙고해서 만든 곡이 그렇다면 음악 감독은.......
되게 진지한 장면에서 무슨 가라오케 반주 음악으로 나올 법한 음악이 흘러나와 깜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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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우트 - Doubt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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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정말 간단하다. 심.플. 그 자체다. 1960년대의 카톨릭계 학교를 배경으로 진보적 성향의 신부, 보수적이며 엄격함 그 자체인 교장 수녀, 교육에 대한 이상을 품고 있는 순진한 제임스 수녀 이렇게 세 명이 서로 충돌하게 된다는 얘기다. 제임스 수녀는 유일한 흑인 학생인 도널드 밀러에게 지나치게 친절하게 대하는 플린 신부를 의심하게 된다. 아이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얘기다. 그러나 플린 신부는 제임스 수녀와 교장 수녀 앞에서 단호하게 부인한다. 제임스 수녀는 의심을 풀고 그를 신뢰하게 되나 교장 수녀는 끝까지 그에 대한 의심의 끈을 놓지 않는다. 과연 진실은 무엇인가.

한정된 장소, 한정된 인물들이 등장하는 데다가 사건 전개가 빠르고 긴장감 있는 작품은 아니다. 그러나 이 영화가 제기하는 문제들은 웬만한 서사극들을 초월할 정도로 깊고 복잡하다. 영화는 예배 장면부터 시작되는데 플린 신부는 '의심은 믿음만큼이나 확신을 품고 있다'고 말한다. 인물들은 정말 유려하게 소개된다. 글씨체가 나빠진다는 이유로 볼펜을 싫어하는 교장 수녀는 학생들의 작은 잘못에도 지나치지 못하고 자기 안에 갇혀 있는 인물로 묘사된다. 그런 그녀는 '손톱이 긴' 진보주의적 성향의 신부와 충돌할 수밖에 없다. 신부는 자신을 싫어하는 수녀에 대한 소심한 보복(?)으로 설교 시간의 주제를 '편협함'으로 잡는다.

이 영화는 끝까지 결론을 내리는 것을 거부한다. 신부는 어떤 잘못을 했던 것일까? 그가 부장신부에게 고백했다는 죄는 무엇일까? 그는 소년과 부적절한 관계였을까 아닐까. 교장 수녀는 자신의 의심에 대해 확신이 있었을까? 그래서 그를 쫓아내려 한 것일까? 그렇다면 마지막의 눈물과 오열은 무엇일까? 손쉽게 답을 제시해주지 않고 관객으로 하여금 끝까지 '의심'하게 하는 재주야말로 이 영화가 지닌 주제면의 다층성이다. 그래서 복잡하다.

신부가 설교 시간에 말했다시피 세상에 흩날리는 베개의 깃털같은 것이 바로 의심이다. 주워담을 수 없는 뒷담화들, 증폭되어 이 세상에 널리 퍼지게 되는 부정적인 이야기들... 그것은 과연 어디에서 오는가. 타인에게서가 아닌 바로 나 자신의 우스운 확신에서 오는 것이다. 이 영화는 종교적인 믿음과 확신, 그리고 의심의 문제부터 시작해서 어떤 진실에 대한 의심의 문제로까지 확산되고 있다. 그 중심에는 신부가 과연 그 아이와 부적절한 관계였느냐 아니냐 하는 (제기하는 문제에 비해서는) 작은 문제가 놓여 있다.

신의 존재를 의심하는 것은 신에 대한 믿음 만큼이나 확신에 차 있는 것이며 사람에 대한 의심은 사람에 대한 믿음 만큼이나 확신에 차 있는 것이다. 번쩍거리는 안경 뒤에서 차갑게 빛나는 뱀의 눈을 지닌 교장 수녀처럼 우리는 '나는 사람을 잘 본다'고 생각하는 게 아닐까? 자신의 육감과 보는 눈에 대한 확신으로 타인을 질식하게 한 적은 없었던가. 오랜만에 신부님께 고해성사하는 느낌으로 영화를 볼 수밖에 없었다. 확신에 차 신부를 의심했던 교장 수녀는 자신의 결정에 의심을 품고 오열한다. 결국 우리는 의심과 확신을 오가는 복잡한 인간 존재로, 미완성된 존재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완벽하게 확신할 수 있다면 의심할 수 없겠지만 완벽하게 확신할 수 없기에 의심은 자라난다.

배우들의 호연을 빼놓고 영화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모든 이들의 연기가 후덜덜이다. 휴 잭맨의 말처럼 '운동선수였다면 스테로이드 검사를 받았을 법한' 능력의 소유자 메릴 스트립은 엄격한 질서를 상징하는, 자기 확신에 차 있는 교장 수녀를 연기한다. 그녀에게 대적하는 플린 신부로 필립 세이무어 호프먼이 나온다. 그가 주연한 <카포티>를 아직 안봤는데 그가 메릴 스트립과 대립할 때 보이는 카리스마는 외모가 주는 '귀여움'을 무색하게 만들더군. 에이미 아담스 역시 대배우들 사이에서 기죽지 않고 순진하며 이상주의적인 수녀를 연기했다. 무엇보다 나를 깜짝 놀라게 한 인물은 문제의 흑인 소년의 어머니로 등장하는 여배우인데 이름을 잘 모르겠다. 어쨌든 그녀가 진짜 놀라웠다. 

교장 수녀에게 아들의 비밀을 눈물로 고백하는 그녀의 얼굴에는 백인 학교의 단 한 명의 흑인 아들을 지닌 어머니로서의 고요한 투쟁과 모성, 두려움과 강인함이 교차한다. 단 한 장면만으로도 이렇게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구나, 이게 바로 위대한 연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비중 적다고 궁시렁 거리는 배우들은 그녀를 보고 배울 지어다.

김혜자 주연의 연극으로도 나온 적이 있는데 그 때 보지 못한 것이 아쉽다. 감독은 존 패트릭 쉐인리로 <문스트럭>의 각본가이자 연극 <다우트>의 원작자이기도 하다. 그는 자기 작품을 영화화하는 과정에서 직접 각본을 썼고 연출도 맡았다. 재주도 많군하. <문스트럭>은 내가 정말 좋아하는 작품인데... 연극과 어떤 면이 비슷하고 어떤 면이 다른지 비교해 보고 싶다. 연극에도 설탕 많이 넣은 차와 밋밋한 차가 등장하는지, 손톱 문제와 볼펜이 등장하는지 아닌지... 어쨌든 이 영화는 겉으로는 심플하지만 내면으로는 컴플렉스한, 겉과 속이 다른 수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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