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 - He's Just Not That Into You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영화 보는 도중 간간히 웃음이 터졌다. 대부분 '맞아! 정말 저랬어'같은 공감의 '쓴'웃음이었다. 몇 년 전 나처럼 지나치게 상상력 풍부해서 삽질하는 여자들에게는 꽤 도움이 됐던 동명의 연애 지침서를 읽은 적이 있었는데 필기(-_-)까지 하면서 읽었던 터라 중간중간 글귀들이 생각이 났다. 책에는 반했지만 영화에는 반할 수가 없었다. 그다지 괜찮은 영화화라고 볼 수는 없었던 것이 그래서 어쩌란 말이야, 하는 생각만 하게 됐기 때문이다. 배우들의 면면은 화려했지만 이야기의 매력은 없더군. 연애 지침서를 영화화했기 때문에 겪을 수밖에 없는 한계였던 건지도 모르겠다.

책을 요약하면 이렇다. 남자가 전화를 하겠다고 하고 하지 않거나, 일 핑계를 대면서 바쁘다고 한다거나, 좋은 친구라는 말로 관계를 한정시키거나, 오래 사겼음에도 결혼 얘기를 꺼내지 않는다면 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는 거다. <섹스 앤 더 시티>의 작가가 쓴 작품으로 읽다보면 진정 여자들이 자신을 좋아하지도 않는 남자에게 반해서 어쩔 줄 몰라하는 것을 측은해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아는 언니도 이 책을 읽었는데 책을 읽고 나서 생각해 보니 '사겼던 모든 남자들이 자신에게 반하지 않았'음을 알게 돼서 혼란에 빠졌다고 했다. 나는 그간 내가 어떤 남자의 전화를 기다리면서 느꼈던 모든 감정과 자기 합리화가 이렇게 명료하게 문자로 표기될 수 있음에 놀랐다. 그리고 열심히 필기했고 나한테 반하지 않았을 법한 놈들을 가지쳐낼 수 있는 눈이 생겼다. 그러나 후일 깨닫게 된 것은 정말 내가 그에게 빠져 버리면 그가 나에게 반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알았다 해도 다 소용이 없다는 거였다. 그러니까 그가 나에게 반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서도 괜찮을 수 있다는 건 나 역시 그에게 반하지 않았다는 증거이며 내가 그에게 반해 버렸다면 그가 나에게 반하지 않았어도 감정을 조절할 수 없다는 아주 극명한 진리였다.

영화는 책의 몇몇 부분들 중 많은 여성들이 궁금해하는 질문들을 늘어놓는 식이다. 소개팅 후 전화를 하지 않는 남자의 심리, 좋은 친구라고 말하면서 가끔 찾아와 속 뒤집고 가는 여자의 심리, 결혼을 하려고 하지 않는 남자의 심리, 이메일이나 음성메시지만 남기고 사라지는 유령같은 관계 등이다. 결론을 말하자면 결혼을 하지 않으려는 남자 중 몇몇은 진짜 결혼 자체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있는 것일 뿐 여자를 정말 사랑할 수'도' 있다는 것, 감정 절제보다는 착각일지라도 그를 좋아하고 기다리고 설레는 감정이 남아있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것, 진실한 믿음이 없는 결혼은 하지 않는 게 낫다는 것, 어떤 여자들은 결혼보다는 자기 일에 더 집중하려고 하고 그게 좋을 수도 있다는 것 등이다. 아. 정말 진부한 결론이지 않은가. 진부한 결론을 진부한 방식으로 보여주면서 2시간이나 넘게 동어 반복하고 있다. 
 

이 영화가 2시간 넘게 하는 얘기는 이거였다. 법칙과 예외. 중간중간 <섹스 앤 더 시티>의 초기 에피소드처럼 사람들의 속마음을 인터뷰하는 부분도 있었고 엔딩 크레딧 올라가면서 등장 인물들의 현 상태를 인터뷰해서 보여주는 부분도 있었다. 하지만 후반부의 인터뷰는 별로 의미가 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냥 깔끔하게 끝냈어도 좋았을 것이다. 영화를 보면서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합리화하고 결국 그 환상이 착각임을 알게 돼서 깨진다 해도 그게 감정 조절의 천재가 되는 것보다 더 인간적이라는 결론이 제일 맘에 와닿았다. 상처받으면 뭐 어떤가. 긍정의 미덕을 발휘해서 '때론 이효리같이 멋진 여자를 싫어하는 남자도 있지. 난 바로 그런 남자를 만났던 거야'라고 생각해 버리자. 그 전에는 많이 착각하고 많이 삽질하자. 나이 들면 힘들어서 삽질도 못하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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