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만해 거짓말 ㅣ B사이드 아카이브 4
필리프 베송 지음, 김유빈 옮김 / 니케북스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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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소설을 읽을 때 독자가 가장 먼저 확인하고 싶어지는 것은 사실의 범위다. 이 장면은 실제였는지, 이 인물은 실재하는지, 작가가 자신의 기억을 얼마나 옮겨놓았는지. 그러나 필리프 베송의 『그만해 거짓말』은 그 확인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대신, 사실과 허구를 구분하려는 독법 자체를 다른 방향으로 돌려놓는다. 작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이 작품에서 중요한 것은 사건의 진위보다 기억이 소설의 형식을 거치면서 무엇으로 변하는가에 있다. 어린 시절 타인의 삶을 상상해 이야기를 만들던 필리프에게 어머니가 건넨 “그만해, 거짓말”이라는 말은 훗날 소설가가 된 그의 삶과 묘하게 겹친다. 존재하지 않는 이야기를 만들어내던 아이가 자신의 경험을 소설로 쓰는 사람이 되었을 때, 거짓말과 진실의 관계는 뒤집힌다. 소설은 사실을 그대로 전달하는 형식도, 사실과 무관한 허구도 아니다. 말로 직접 고백하기 어려운 경험을 다른 형태로 변환하면서 오히려 그 안의 진실에 접근하는 형식이다.

열일곱 살의 필리프와 토마에게는 사랑을 감정으로 느끼는 일과 그것을 관계의 이름으로 부르는 일이 서로 다른 문제였다. 두 사람은 서로를 사랑하지만 그 사랑을 공적인 언어로 만들 수 없었다. 여기에서 언어는 감정을 표현하는 수단을 넘어 관계를 사회적 현실로 만드는 힘을 가진다.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 때 두 사람의 관계는 하나의 이름을 얻지만, 그 말을 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사적인 현실로 밀려난다. 말이 없는 사랑. 정확히는 말을 ‘할 수’ 없는 사랑이다. 그래서 두 사람의 사랑에는 유난히 추운 감각이 있다. 한겨울처럼 살을 에는. 차가움이 지나치게 강해지면 오히려 뜨겁게 느껴질 때가 있다. 감정의 강도가 특별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둘러싼 조건이 사랑을 그렇게 감각하게 만든다. 말할 수 없다는 제약은 감정을 약화시키지 않고 시선과 몸짓, 짧은 만남 같은 비언어적 형태에 감정을 집중시킨다. 『그만해 거짓말』은 금지된 사랑을 극적인 사건으로 소비하기보다, 사회적 언어를 얻지 못한 감정이 개인의 삶에서 어떤 방식으로 실재하는지를 보여준다.

달력에서는 한 장씩 지워졌을 시간이 필리프의 내부에서는 그렇게 정직하게 지나가지 않는다. 과거의 사랑은 끝난 날짜에 고정되지 않고 현재의 감각 속으로 되돌아온다. 인간의 과거는 현재와 분리된 저장물이 아니라 현재의 감각과 의식 속에 계속 작용하기 때문이다. 오래전에 지나간 한 사람이 어느 날 다시 현재의 언어를 요구하는 것도 그래서 가능하다. 사랑했던 사람을 잃는다는 것은 그 사람을 기억에서 제거하지 않고, 그 사람이 남긴 시간을 자신의 생애 안에서 계속 운반하는 일이 된다. 함께했던 시간보다 훨씬 긴 시간을 그 사람 없이 살아가면서도, 그 시간의 일부에는 여전히 그 사람이 존재한다.

기억 속에 남은 사람은 사진처럼 원래의 모습으로 보존될 수 있을까. 필리프가 토마를 기억하고 쓰는 순간, 실제로 존재했던 토마와 소설 속 토마 사이에는 필연적으로 간극이 생긴다. 우리는 누구도 기억 속에 원본 그대로 보관할 수 없다. 기억하는 현재의 감정과 언어가 과거의 모습을 다시 배열하기 때문이다. 리쾨르가 기억과 서사의 관계에서 주목했던 것처럼, 인간은 지나간 시간을 단순히 저장하는 대신 이야기의 형태로 이해한다. 베송의 글쓰기도 그렇다. 토마를 다시 쓰는 것은 그를 복원하는 일이면서 동시에 필리프가 기억하는 토마를 구성하는 일이다. 사랑은 기억으로 옮겨가고, 기억은 문장이 된다. 그 문장 속에서 과거의 사람은 현재의 언어를 통해 다시 해석된다.

자신의 삶을 쓴다는 말에는 사실 많은 타인이 숨어 있다. 자전소설은 작가 한 사람의 기억을 펼쳐놓는 형식처럼 보이지만, 그 기억 속에 함께 있었던 사람들까지 작가의 언어 안으로 불러들인다. 특히 그 사람이 더 이상 자신의 이야기를 고쳐 말하거나 반박할 수 없게 된 뒤라면, 남겨진 사람의 기억은 더욱 강한 권한을 갖는다. 내가 기억하는 사람이 그 사람의 전부일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누군가는 그를 말해야 한다. 『그만해 거짓말』은 이 모순을 외면하지 않는다. 베송은 과거를 완벽하게 복원하려 하지 않고, 기억하는 사람이 가진 한계와 욕망까지 문장 안에 함께 배치한다. 그래서 이 소설의 진실은 ‘그때 실제로 무슨 일이 있었는가’에만 있지 않다.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어떻게 기억하고, 왜 다시 써야 했는가에도 진실이 있다. 타인의 삶을 문학으로 옮기는 일은 기억이면서 동시에 해석이며, 사랑의 흔적을 남기는 일인 동시에 그 사람을 자신의 언어로 다시 구성하는 일이기도 하다.

사실을 확인하려는 독자의 시선은 소설이 깊어질수록 조금씩 방향을 잃는다. 이 장면은 실제로 있었을까. 이 감정은 정말 그의 것이었을까. 소설 속 문장 뒤에 아직 쓰이지 않은 기억이 남아 있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사실 여부를 판별하는 데 독서의 목적을 두면 작품의 핵심에서 멀어진다. 이 소설에서 허구는 기억을 말하기 위해 고른 형식이다. 베송은 자신의 삶을 그대로 증명하지 않는다. 삶을 한 번 문학으로 통과시킨 뒤, 그 안에서 자신의 과거를 다시 읽는다. 독자는 그 통로를 따라가며 사실과 허구 사이의 경계를 경험하고, 그 애매함 속에서 한 사람의 감정이 문학으로 변환되는 과정을 보게 된다.

제목 속 한 단어가 소설 전체의 작동 방식을 설명하는 셈이다. 필리프가 어린 시절 지어낸 이야기를 향해 들었던 ‘거짓말’이라는 말은 훗날 그의 문학을 관통하는 언어가 된다. 사랑을 숨기기 위해 필요한 말도 거짓말이고, 지나간 시간을 잊었다고 자신에게 되뇌는 말도 거짓말이며, 자신의 경험을 소설이라는 허구의 형식으로 옮기는 일 역시 넓은 의미에서 거짓말이다. 그러나 그 거짓말이 오히려 진실을 보존한다. 말할 수 없었던 사랑, 지나간 시간을 잊지 못한 사람, 죽음 이후에도 계속되는 기억은 사실이라는 문장만으로는 충분히 담기지 않는다. 허구라는 형식이 개입하면서 사적인 경험은 문학적 진실로 변환된다. ‘거짓말’은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 문학이 선택한 역설적인 언어가 된다.

첫사랑은 이 소설의 소재이지만 작품이 도달하는 곳은 그보다 넓다. 말하지 못한 감정이 침묵 속에 남고, 그것이 기억으로 이어지며, 기억이 문장을 얻어 사라진 사람을 낯선 독자의 세계로 이동시키는 과정이 작품 전체를 관통한다. 한 사람의 경험은 쓰이는 순간 그 사람만의 것이기를 멈춘다. 문학이 되고, 읽히면서 또 다른 사람의 사유 속에서 다시 구성된다. 베송이 자신의 과거를 소설로 만든 것은 그것을 완벽하게 보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불완전한 기억을 통해 한 사람과 그 사랑의 의미를 다시 해석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문학은 사라진 사람을 과거의 모습 그대로 되돌려놓을 수 없다. 대신 그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의 언어 안에 옮겨놓을 수 있다. 『그만해 거짓말』에서 필리프 베송은 어머니에게 거짓말이라 불렸던 언어로 자신의 가장 사적인 경험을 쓴다. 그 과정에서 토마는 한때의 연인에서 기억의 대상이 되고, 기억의 대상에서 문학의 인물이 되며, 마침내 독자가 상상하는 한 사람으로 이동한다. 한 사람을 기억하는 일이 한 사람을 다시 만드는 일이라면, 독서는 그 재구성에 또 한 번 참여하는 행위다. 베송이 기억한 토마를 우리가 읽고, 우리가 읽은 토마를 다시 상상하면서 한 사람의 생은 작가의 기억 바깥으로 확장된다. 사랑했던 사람을 잃는다는 것은 그 사람이 사라지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 사람이 남긴 시간이 이후의 나를 구성하고, 그 시간을 살아가는 일은 때로 그 사람을 다시 말하는 일이 된다. 한때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사랑이 기억을 거쳐 문학이 되고, 문학이 낯선 독자의 독서가 되는 순간, 토마의 시간은 필리프의 과거에만 갇혀 있지 않게 된다. 『그만해 거짓말』은 그렇게 한 사람을 기억하는 일이 한 사람의 죽음 이후에도 계속될 수 있는 가장 문학적인 증언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도서출판 니케북스로부터 가제본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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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해 거짓말 ㅣ B사이드 아카이브 4
필리프 베송 지음, 김유빈 옮김 / 니케북스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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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소설을 읽을 때 독자가 가장 먼저 확인하고 싶어지는 것은 사실의 범위다. 이 장면은 실제였는지, 이 인물은 실재하는지, 작가가 자신의 기억을 얼마나 옮겨놓았는지. 그러나 필리프 베송의 『그만해 거짓말』은 그 확인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대신, 사실과 허구를 구분하려는 독법 자체를 다른 방향으로 돌려놓는다. 작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이 작품에서 중요한 것은 사건의 진위보다 기억이 소설의 형식을 거치면서 무엇으로 변하는가에 있다. 어린 시절 타인의 삶을 상상해 이야기를 만들던 필리프에게 어머니가 건넨 “그만해, 거짓말”이라는 말은 훗날 소설가가 된 그의 삶과 묘하게 겹친다. 존재하지 않는 이야기를 만들어내던 아이가 자신의 경험을 소설로 쓰는 사람이 되었을 때, 거짓말과 진실의 관계는 뒤집힌다. 소설은 사실을 그대로 전달하는 형식도, 사실과 무관한 허구도 아니다. 말로 직접 고백하기 어려운 경험을 다른 형태로 변환하면서 오히려 그 안의 진실에 접근하는 형식이다.

열일곱 살의 필리프와 토마에게는 사랑을 감정으로 느끼는 일과 그것을 관계의 이름으로 부르는 일이 서로 다른 문제였다. 두 사람은 서로를 사랑하지만 그 사랑을 공적인 언어로 만들 수 없었다. 여기에서 언어는 감정을 표현하는 수단을 넘어 관계를 사회적 현실로 만드는 힘을 가진다.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 때 두 사람의 관계는 하나의 이름을 얻지만, 그 말을 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사적인 현실로 밀려난다. 말이 없는 사랑. 정확히는 말을 ‘할 수’ 없는 사랑이다. 그래서 두 사람의 사랑에는 유난히 추운 감각이 있다. 한겨울처럼 살을 에는. 차가움이 지나치게 강해지면 오히려 뜨겁게 느껴질 때가 있다. 감정의 강도가 특별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둘러싼 조건이 사랑을 그렇게 감각하게 만든다. 말할 수 없다는 제약은 감정을 약화시키지 않고 시선과 몸짓, 짧은 만남 같은 비언어적 형태에 감정을 집중시킨다. 『그만해 거짓말』은 금지된 사랑을 극적인 사건으로 소비하기보다, 사회적 언어를 얻지 못한 감정이 개인의 삶에서 어떤 방식으로 실재하는지를 보여준다.

달력에서는 한 장씩 지워졌을 시간이 필리프의 내부에서는 그렇게 정직하게 지나가지 않는다. 과거의 사랑은 끝난 날짜에 고정되지 않고 현재의 감각 속으로 되돌아온다. 인간의 과거는 현재와 분리된 저장물이 아니라 현재의 감각과 의식 속에 계속 작용하기 때문이다. 오래전에 지나간 한 사람이 어느 날 다시 현재의 언어를 요구하는 것도 그래서 가능하다. 사랑했던 사람을 잃는다는 것은 그 사람을 기억에서 제거하지 않고, 그 사람이 남긴 시간을 자신의 생애 안에서 계속 운반하는 일이 된다. 함께했던 시간보다 훨씬 긴 시간을 그 사람 없이 살아가면서도, 그 시간의 일부에는 여전히 그 사람이 존재한다.

기억 속에 남은 사람은 사진처럼 원래의 모습으로 보존될 수 있을까. 필리프가 토마를 기억하고 쓰는 순간, 실제로 존재했던 토마와 소설 속 토마 사이에는 필연적으로 간극이 생긴다. 우리는 누구도 기억 속에 원본 그대로 보관할 수 없다. 기억하는 현재의 감정과 언어가 과거의 모습을 다시 배열하기 때문이다. 리쾨르가 기억과 서사의 관계에서 주목했던 것처럼, 인간은 지나간 시간을 단순히 저장하는 대신 이야기의 형태로 이해한다. 베송의 글쓰기도 그렇다. 토마를 다시 쓰는 것은 그를 복원하는 일이면서 동시에 필리프가 기억하는 토마를 구성하는 일이다. 사랑은 기억으로 옮겨가고, 기억은 문장이 된다. 그 문장 속에서 과거의 사람은 현재의 언어를 통해 다시 해석된다.

자신의 삶을 쓴다는 말에는 사실 많은 타인이 숨어 있다. 자전소설은 작가 한 사람의 기억을 펼쳐놓는 형식처럼 보이지만, 그 기억 속에 함께 있었던 사람들까지 작가의 언어 안으로 불러들인다. 특히 그 사람이 더 이상 자신의 이야기를 고쳐 말하거나 반박할 수 없게 된 뒤라면, 남겨진 사람의 기억은 더욱 강한 권한을 갖는다. 내가 기억하는 사람이 그 사람의 전부일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누군가는 그를 말해야 한다. 『그만해 거짓말』은 이 모순을 외면하지 않는다. 베송은 과거를 완벽하게 복원하려 하지 않고, 기억하는 사람이 가진 한계와 욕망까지 문장 안에 함께 배치한다. 그래서 이 소설의 진실은 ‘그때 실제로 무슨 일이 있었는가’에만 있지 않다.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어떻게 기억하고, 왜 다시 써야 했는가에도 진실이 있다. 타인의 삶을 문학으로 옮기는 일은 기억이면서 동시에 해석이며, 사랑의 흔적을 남기는 일인 동시에 그 사람을 자신의 언어로 다시 구성하는 일이기도 하다.

사실을 확인하려는 독자의 시선은 소설이 깊어질수록 조금씩 방향을 잃는다. 이 장면은 실제로 있었을까. 이 감정은 정말 그의 것이었을까. 소설 속 문장 뒤에 아직 쓰이지 않은 기억이 남아 있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사실 여부를 판별하는 데 독서의 목적을 두면 작품의 핵심에서 멀어진다. 이 소설에서 허구는 기억을 말하기 위해 고른 형식이다. 베송은 자신의 삶을 그대로 증명하지 않는다. 삶을 한 번 문학으로 통과시킨 뒤, 그 안에서 자신의 과거를 다시 읽는다. 독자는 그 통로를 따라가며 사실과 허구 사이의 경계를 경험하고, 그 애매함 속에서 한 사람의 감정이 문학으로 변환되는 과정을 보게 된다.

제목 속 한 단어가 소설 전체의 작동 방식을 설명하는 셈이다. 필리프가 어린 시절 지어낸 이야기를 향해 들었던 ‘거짓말’이라는 말은 훗날 그의 문학을 관통하는 언어가 된다. 사랑을 숨기기 위해 필요한 말도 거짓말이고, 지나간 시간을 잊었다고 자신에게 되뇌는 말도 거짓말이며, 자신의 경험을 소설이라는 허구의 형식으로 옮기는 일 역시 넓은 의미에서 거짓말이다. 그러나 그 거짓말이 오히려 진실을 보존한다. 말할 수 없었던 사랑, 지나간 시간을 잊지 못한 사람, 죽음 이후에도 계속되는 기억은 사실이라는 문장만으로는 충분히 담기지 않는다. 허구라는 형식이 개입하면서 사적인 경험은 문학적 진실로 변환된다. ‘거짓말’은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 문학이 선택한 역설적인 언어가 된다.

첫사랑은 이 소설의 소재이지만 작품이 도달하는 곳은 그보다 넓다. 말하지 못한 감정이 침묵 속에 남고, 그것이 기억으로 이어지며, 기억이 문장을 얻어 사라진 사람을 낯선 독자의 세계로 이동시키는 과정이 작품 전체를 관통한다. 한 사람의 경험은 쓰이는 순간 그 사람만의 것이기를 멈춘다. 문학이 되고, 읽히면서 또 다른 사람의 사유 속에서 다시 구성된다. 베송이 자신의 과거를 소설로 만든 것은 그것을 완벽하게 보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불완전한 기억을 통해 한 사람과 그 사랑의 의미를 다시 해석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문학은 사라진 사람을 과거의 모습 그대로 되돌려놓을 수 없다. 대신 그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의 언어 안에 옮겨놓을 수 있다. 『그만해 거짓말』에서 필리프 베송은 어머니에게 거짓말이라 불렸던 언어로 자신의 가장 사적인 경험을 쓴다. 그 과정에서 토마는 한때의 연인에서 기억의 대상이 되고, 기억의 대상에서 문학의 인물이 되며, 마침내 독자가 상상하는 한 사람으로 이동한다. 한 사람을 기억하는 일이 한 사람을 다시 만드는 일이라면, 독서는 그 재구성에 또 한 번 참여하는 행위다. 베송이 기억한 토마를 우리가 읽고, 우리가 읽은 토마를 다시 상상하면서 한 사람의 생은 작가의 기억 바깥으로 확장된다. 사랑했던 사람을 잃는다는 것은 그 사람이 사라지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 사람이 남긴 시간이 이후의 나를 구성하고, 그 시간을 살아가는 일은 때로 그 사람을 다시 말하는 일이 된다. 한때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사랑이 기억을 거쳐 문학이 되고, 문학이 낯선 독자의 독서가 되는 순간, 토마의 시간은 필리프의 과거에만 갇혀 있지 않게 된다. 『그만해 거짓말』은 그렇게 한 사람을 기억하는 일이 한 사람의 죽음 이후에도 계속될 수 있는 가장 문학적인 증언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도서출판 니케북스로부터 가제본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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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명치료는 사양하겠습니다 - 오래 사는 시대, 우리는 어떻게 떠날 것인가
양성관 지음 / 히포크라테스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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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은 죽음을 늦추는 놀라운 능력을 갖게 되었다. 심장이 멎으면 다시 뛰게 하고, 숨을 쉬지 못하면 기계가 대신 호흡하며, 더 이상 스스로 먹지 못하는 몸에도 영양을 공급할 수 있다. 한때 죽음의 영역에 속했던 일들이 이제는 의료의 이름으로 연장된다. 인간은 그렇게 이전보다 오래 살게 되었다. 그러나 오래 산다는 일이 언제나 잘 살아가는 일과 같은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다. 생명의 길이를 늘릴 수 있게 된 순간부터 인간에게는 새로운 숙제가 생겼다. 얼마나 오래 살 것인가보다, 그 시간 동안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 것인가를 결정하는 일이다.

『연명치료는 사양하겠습니다』는 바로 그 숙제 앞에 서 있는 책이다. 양성관 의사는 호스피스와 요양시설, 병원 현장에서 마주한 죽음과 돌봄의 현실을 기록하며 연명의료를 둘러싼 여러 얼굴을 보여준다. 의학의 발전으로 죽음이 삶에서 멀어진 만큼, 사람들은 죽음을 맞이하는 방법조차 의료진과 가족의 판단에 맡기게 되었다. 병원에서 죽는 일이 익숙해진 시대, 죽음은 더 이상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한순간의 사건이 아니라 수많은 결정이 이어지는 긴 과정이 되었다.

이때 연명의료를 둘러싼 가장 어려운 문제는 ‘무엇이 최선인가’라는 물음이다. 환자를 조금이라도 더 살리고 싶은 가족에게는 하루의 연장이 사랑일 수 있고, 가능한 치료를 시행하려는 의료진에게는 그것이 책임일 수 있다. 그러나 환자에게는 다른 기준이 있을 수 있다. 의식이 유지되는 것, 고통을 줄이는 것,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것, 자신의 의사를 존중받는 것. 생명을 바라보는 기준이 서로 다르다면 ‘살린다’는 말 하나만으로 그 선택의 가치를 판단하기 어려워진다.

의학이 생명을 다루는 방식이 달라지면서 환자를 바라보는 기준도 함께 달라져야 한다. 의료윤리에서 환자의 자율성이 중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인간을 단순히 생물학적 기능을 가진 신체로 본다면 심장과 호흡을 유지하는 것이 치료의 궁극적인 목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환자를 자신의 가치와 의사를 가진 인간으로 본다면 치료의 목적 역시 달라진다. 가능한 처치를 모두 시행하는 것과 환자가 원하는 삶을 지켜주는 것은 같은 의미가 아닐 수 있다. 생명을 연장할 수 있다는 의학적 가능성이 곧 그 연장을 정당화하는 윤리적 근거가 되지는 않는다.

이론으로 배운 자기결정권은 병실에 들어서는 순간 전혀 다른 무게를 갖는다. 병세가 심한 환자가 입원하면 간호사인 나는 DNR 여부부터 확인하곤 했다. 기계적으로, 익숙한 순서에 따라. DNR(Do Not Resuscitate)은 심정지나 호흡정지가 발생했을 때 심폐소생술을 시행하지 않겠다는 결정이다. 환자가 생사의 경계에 놓였을 때 어떤 간호를 해야 하는지 미리 알고 대비하기 위한 일이었고, 수없이 반복했던 만큼 익숙한 업무의 한 과정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그 환자가 내 가족이라면 어떨까 생각했다. 차트 위에 놓인 DNR이라는 글자를 같은 마음으로 확인할 수 있을까. 의료인으로서 환자의 의사와 치료 방향을 확인하는 일과, 가족으로서 사랑하는 사람의 마지막을 받아들이는 일은 전혀 다른 무게를 가질 것이다. 생명을 연장하는 선택이 의료진에게는 하나의 판단으로 다가오더라도, 가족에게는 사랑하는 사람을 어떻게 보내줄 것인가를 결정하는 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죽음에 관한 선택지를 들여다보면 사회마다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지가 선명해진다. 미국에서는 사전의료의향서와 의료대리인 지정 등을 통해 환자가 의사표현을 할 수 없게 되었을 때에도 자신의 뜻이 의료결정에 반영될 수 있도록 준비한다. 다만 미국은 하나의 통일된 연명의료법 체계를 가진 것이 아니라 주마다 관련 법과 서식, 절차가 다르다. 일본에서는 후생노동성이 ‘인생회의(人生会議)’라는 이름으로 사전 돌봄 계획을 알리고 있으며, 임종기의 의료·돌봄 결정에서도 본인의 의사결정을 가장 중요한 원칙으로 제시한다. 적극적 안락사는 이 지침의 대상에서 제외되어 있다.

유럽에서는 더욱 다양한 선택이 나타난다. 네덜란드는 안락사와 의사조력자살을 원칙적으로 형사범죄로 규정하면서도, 환자의 자발적이고 숙고된 요청과 회복 가능성이 없는 참을 수 없는 고통, 합리적인 다른 대안의 부재 등 법에서 정한 요건을 충족하고 의사가 주의의무를 지킨 경우 예외를 인정한다. 반면 이러한 제도를 모든 국가가 동일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연명의료의 중단과 완화의료, 의사조력사망을 어디까지 허용할 것인지는 국가마다 다른 법과 윤리적 기준 속에서 결정된다.

제도의 차이에는 각 사회가 인간의 존엄을 바라보는 방식이 비친다. 이 차이를 단순히 어느 나라의 제도가 더 앞서 있다고 평가할 수는 없다. 죽음에 관한 법과 의료의 형태는 그 사회가 인간의 존엄을 어디에서 찾는지 보여주는 하나의 거울이기 때문이다. 개인의 자기결정권을 중심에 놓는 사회가 있는가 하면, 가족과 의료진의 책임을 중시하는 사회도 있다. 어떤 곳에서는 죽음을 앞둔 사람의 고통을 덜어주는 것에 더 큰 의미를 두고, 어떤 곳에서는 생명을 의도적으로 단축하는 행위에 더욱 엄격한 경계를 세운다. 결국 연명의료의 문제는 의료기술의 수준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인간을 어떤 존재로 바라보는가에 따라 마지막의 풍경도 달라진다.

한국 역시 연명의료결정제도를 통해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의 자기결정권을 제도적으로 보장하고 있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는 등록기관에서 충분한 설명을 듣고 본인이 직접 작성하며, 연명의료의 시행 또는 중단 등에 관한 의사를 미리 남길 수 있다. 작성한 뒤에도 자신의 뜻이 달라지면 변경하거나 철회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이 문서가 죽음을 선택하는 선언문이 아니라, 자신이 어떤 의료와 돌봄을 원하는지 살아 있을 때 미리 표현하는 제도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제도가 마련되었다고 해서 죽음에 관한 모든 선택이 쉬워지는 것은 아니다. 실제 현장에서는 환자의 의사와 가족의 바람, 의료진의 판단이 복잡하게 얽힌다. 법이 죽음의 절차를 정할 수는 있어도 한 사람에게 무엇이 좋은 마지막인지를 대신 결정해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죽음이 임박한 순간의 결단만이 아니다. 죽음은 한 번 찾아오지만 그 앞에서 이루어지는 결정은 수없이 많다. 심폐소생술을 받을 것인지, 인공호흡기를 사용할 것인지, 적극적인 치료를 이어갈 것인지, 호스피스 돌봄을 선택할 것인지. 의식이 사라진 뒤 가족에게 판단을 맡겨야 하는 상황까지 생각한다면, 자기결정권은 죽기 직전에 행사하는 권리가 아니라 살아 있을 때부터 준비해야 하는 권리가 된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는 자신의 마지막을 한 문장으로 미리 규정하는 서류가 아니다. 그것은 ‘연명치료를 받지 않겠다’는 한 문장으로 자신의 죽음을 정리하는 서류가 아니다. 어떤 연명의료를 원하는지, 호스피스를 이용할 것인지, 자신의 뜻이 어떤 방식으로 존중되기를 바라는지 미리 생각하고 표현하는 과정이다. 죽음에 관한 대화가 어려운 이유는 죽음을 말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대화 속에서 결국 자신의 삶을 무엇으로 가치 있게 여겼는지 드러나기 때문이다.

삶의 마지막에서 인간은 가장 선명하게 서로에게 기대게 된다. 더구나 죽음은 개인의 결정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인간은 삶의 마지막에서 가장 많이 타인에게 의존한다. 몸을 움직일 수 없을 때 누군가의 손이 필요하고, 의사를 표현할 수 없을 때 누군가가 그 뜻을 기억해야 하며, 오랜 간병이 이어질 때 가족의 시간과 노동이 필요하다. 자기결정권을 중요하게 생각할수록 오히려 돌봄의 관계를 함께 바라봐야 하는 이유다. 인간의 자율성은 타인과 완전히 분리된 독립성 위에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 의존하는 삶 속에서 실현되기도 한다.

돌봄의 무게까지 함께 바라볼 때 연명의료라는 문제의 크기도 달라진다. 이 책이 연명의료를 넘어 돌봄의 현실까지 바라보는 이유도 분명하다. 한 사람의 생명을 연장하는 데에는 그만큼 누군가의 시간이 필요하다. 긴 간병 속에서 가족의 일상과 경제적 기반이 흔들리고, 환자 역시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부담이 된다는 죄책감을 경험할 수 있다. 따라서 좋은 죽음은 환자가 원하는 치료를 선택할 권리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누구나 늙고 병들며 돌봄을 필요로 하는 사회에서, 그 마지막 시간을 누가 어떻게 책임질 것인가라는 사회적 질문까지 함께 다뤄야 한다.

결국 연명의료에 관한 논의는 죽음을 선택할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다.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인간에게 어떤 삶의 기준을 마지막까지 인정할 것인가에 관한 문제다. 오래 살고 싶은 마음은 자연스럽지만, 삶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 시간의 양만큼 삶의 모습도 중요해진다. 의학이 생명을 붙잡을 수 있는 시대에 필요한 것은 더 오래 살게 하는 기술만이 아니라, 무엇을 위해 그 생명을 연장하는지 판단할 수 있는 윤리적 기준이다.

죽음을 준비한다는 것은 죽을 날을 기다리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지금 어떤 삶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지 확인하는 일이다. 의식이 유지되는 삶을 원하는지, 고통 없는 시간을 원하는지, 사랑하는 사람의 곁에 있는 시간을 원하는지, 익숙한 공간에서 자신의 방식으로 생을 마무리하기를 원하는지. 각자의 답은 다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 답이 자신의 삶에서 비롯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의학은 죽음의 시간을 늦출 수 있다. 그러나 그 시간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는 의료기술만으로 결정할 수 없다. 생명의 길이를 늘리는 능력이 커질수록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오히려 삶의 가치를 판단하는 능력일 것이다. 무엇을 연장할 것인지 결정하는 일보다, 무엇을 지키기 위해 연장할 것인지 아는 일이 더 중요할 때가 있다. 그래서 이 책이 결국 향하는 곳은 죽음이 아니라 삶이다. 마지막 순간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지 생각하는 일은 지금의 삶에서 무엇을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지 돌아보는 일과 맞닿아 있다. 죽음은 한 번 찾아오지만, 좋은 마지막을 위한 준비는 살아 있는 동안 매일의 가치관 속에서 이루어진다. 당신은 얼마나 오래 살고 싶은가. 그리고 그보다 먼저, 어떤 모습으로 마지막을 맞이하고 싶은가.

✏️도서출판 히포크라테스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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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미술관은 재밌다 - 세계 6개 미술관에서 처음 시작하는 그림 여행
박혜성 지음 / 아날로그(글담)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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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여행에서는 장소보다 그곳에서 느려진 시간이 더 오래 기억된다. 미술관에 들어서는 순간이 그렇다. 바깥에서는 다음 목적지를 향해 부지런히 걷다가도 전시장 안에서는 걸음이 묘하게 풀어진다. 유명한 그림 앞에 반드시 서야 할 이유도, 모든 작품을 이해해야 할 의무도 사라진다. 한 점 앞에서 발이 멈추면 그걸로 충분하다. 여행의 한 시간이 조금 다른 질감으로 흘러가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미술관 안에서도 우리는 서두른다. 루브르에 가면 모나리자를 찾아야 하고, MoMA에 가면 피카소와 반 고흐를 만나야 한다. 사람들이 몰려 있는 곳으로 자연스럽게 발길이 향하고, 텅 빈 전시장에서는 혹시 중요한 것을 지나치고 있는 건 아닌지 불안해진다. 많이 봤다는 사실이 여행의 성과처럼 느껴지는 순간이다. 효율을 좇던 습관이 그림 앞에서도 좀처럼 신발을 벗지 못한다. 박혜성의 『어쨌든 미술관은 재밌다』는 그 바쁜 발걸음을 잠시 늦춘다. 작가는 2014년부터 매년 한 달씩 미술관을 여행했고, 그 시간 가운데 루브르·메트로폴리탄·내셔널 갤러리·우피치·프라도·MoMA 여섯 곳을 골라 이야기를 펼친다. 흥미로운 것은 작품 목록보다 미술관 자체를 먼저 바라보게 한다는 점이다. 그림이 걸리기 전부터 그곳에는 왕궁의 역사도, 시민의 기부도, 권력자의 취향도, 새로운 예술을 받아들이려 했던 사람들의 용기도 있었다.

루브르는 왕궁의 문을 닫고 예술을 만인의 공간으로 열었고, 메트로폴리탄은 시민들의 손으로 커졌다. 우피치에는 메디치가의 후원이 르네상스의 시간과 겹쳐 있고, 프라도에는 스페인 왕실의 영광과 그늘이 함께 걸려 있다. 내셔널 갤러리의 무료 개방과 MoMA의 실험적인 컬렉션을 따라가다 보면 미술관의 벽은 더 이상 배경으로 보이지 않는다. 한 시대가 무엇을 사고, 사랑하고, 숭배하고, 보존하기로 결정했는지가 그 안에 켜켜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 벽을 따라 그림을 보다 보면 작품 속 인간도 달라 보인다. 나폴레옹은 단순히 위풍당당한 황제가 아니고, 르네상스의 누드화는 아름다운 신체만을 보여주는 이미지가 아니다. 고야의 전쟁 장면에는 총성이 지나간 뒤의 공포가 있고, 카라바조의 어둠에는 그림 바깥의 삶까지 비친다. 그림 한 장이 만들어진 시대를 들여다보는 순간, 오래된 캔버스가 박물관 유리 너머의 과거에서 빠져나와 지금의 우리와 마주 앉는다.

그런데 오래 바라볼수록 이상한 일이 생긴다. 그림을 보던 눈이 어느 순간 나를 보고 있다. 왜 어떤 얼굴에는 오래 시선이 머물고, 어떤 색은 유난히 선명하게 기억될까. 같은 작품을 보고도 누구는 빛을 이야기하고 누구는 슬픔을 이야기한다. 그림을 보는 일에는 각자가 살아온 시간이 섞여 들어가기 때문이 아닐까. 내가 지나온 계절과 사랑했던 사람, 한 번도 말하지 못했던 감정 같은 것들이 설명할 틈도 없이 그림 앞에서 먼저 반응한다. 그래서 미술관은 취향을 숨기기 어려운 장소다. 모두가 명작이라고 부르는 그림 앞에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 수도 있고,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한 작품 하나가 이상할 만큼 오래 따라올 수도 있다. 미술에 관한 지식은 더 많은 것을 보게 해주지만, 무엇을 좋아할지는 대신 결정해주지 못한다. 그림 앞에서 가장 솔직한 것은 감상평이 아닌 발걸음이다.

박혜성은 미술을 어렵게 만드는 방식 대신 그림과 가까워지는 길을 택한다. 화가이자 작가, 아트 스토리텔러로 살아온 사람이 오랜 시간 직접 미술관을 걸으며 모은 이야기에는 작품의 정보만큼이나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의 온도가 있다. 그래서 미술관은 거대한 시험장이 아니라 잠시 혼자 있어도 되는 장소가 된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것을 판단하며 산다. 빨리 읽고, 빨리 답하고, 다음 장소로 이동한다. 가만히 바라보는 일에는 아무런 생산성이 없어 보인다. 미술관에서는 그 무용해 보이는 시간을 되찾을 수 있다. 한 작품 앞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서 있는 일. 그 몇 분이 하루의 속도를 거꾸로 감아놓는다.

미술관을 나서면 다시 도시가 움직인다. 자동차가 지나가고 사람들은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며 걷는다. 그런데 전시장 안에서 늦춰졌던 눈은 쉽게 원래 속도로 돌아가지 않는다. 건물에 비친 오후의 빛이나, 맞은편 사람의 표정, 길가에 놓인 작은 색 하나가 전보다 선명해진다. 그림을 바라보던 눈이 아직 조금 느린 것이다. 『어쨌든 미술관은 재밌다』가 건네는 즐거움은 더 많은 작품을 아는 데 있지 않다. 조금 천천히 보고, 마음이 가는 곳에서 멈추고, 내가 무엇을 바라보는 사람인지 알아가는 데 있다. 세계의 미술관을 걷는 일은 언젠가 직접 떠날 여행일 수도 있고, 오늘 집 근처의 작은 미술관에서 시작할 수도 있다. 중요한 건 어디까지 갔느냐보다 그곳에서 얼마나 오래 바라보았느냐일 테니까. 미술관을 나온 뒤에도 한동안 세상이 그림처럼 보이는 날이 있다. 그런 날에는 평범했던 하루에도 이전에는 없던 색이 하나쯤 생긴다.

✏️도서출판 글담으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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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도 고양이 같은 잠이 필요하다 - 김남희 잡문집
김남희 지음 / 수오서재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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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살아간다는 말에는 속도가 붙어 있다. 얼마나 많이 이루었는지, 얼마나 빨리 앞으로 나아갔는지, 지금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삶의 가치를 측정하는 기준이 성취와 효율에 놓이면서 멈춤은 게으름이 되고, 느린 걸음은 뒤처짐이 되었다. 쉬는 시간마저 다음 일을 위한 회복으로 계산되는 시대. 삶이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향해 달려가야 하는 일이 되어 버렸을 때, 살아가는 일 자체를 천천히 바라보는 사람의 기록은 조금 다른 시선을 건넨다.

김남희의 『우리에게도 고양이 같은 잠이 필요하다』는 2003년부터 2026년까지 24년 간 작가가 써온 글을 한데 모은 잡문집이다.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과 풍경, 그날 먹은 음식과 지출, 사랑과 이별, 외로움과 상실, 나이를 먹으며 달라지는 감정까지 수십 권의 수첩에 기록된 문장들이 시간의 순서에 따라 놓여 있다. 특별히 기억할 만한 사건을 골라 삶을 정리한 회고록이 아니라, 당시에는 대수롭지 않았을 하루의 조각들이 오랜 시간을 건너 하나의 삶으로 읽히게 된 기록이다. 이 책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을 기록했느냐보다 사라질 것들을 기록했다는 사실에 있다. 일상의 하루는 대부분 기억할 만한 사건 없이 지나간다. 날씨와 식사, 어느 길에서 마주친 풍경, 잠시 스쳐간 사람, 그날의 기분처럼 특별한 이름을 얻지 못한 순간들이 하루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러나 삶을 뒤돌아보았을 때 남는 것 역시 그런 조각들이다. 수첩에 적힌 한 문장은 지나간 시간을 보존하는 동시에, 그때의 자신을 다시 불러내는 작은 문이 된다. 기록은 시간을 멈추게 하지는 않지만, 흘러간 시간에 다시 들어갈 수 있는 길을 만든다.

24년의 문장을 한 권으로 읽는 일은 그래서 한 사람의 삶을 연대기적으로 바라보는 것과도 다르다. 젊은 날의 감정과 시간이 흐른 뒤의 감정이 나란히 놓이고, 한때 중요했던 것이 희미해지는 동안 별것 아니었던 장면이 오래 남는다. 삶은 그 순간에는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없는 조각들의 집합이고, 시간이 흐른 뒤에야 그 조각들이 서로 이어져 하나의 삶의 윤곽을 만든다. 수첩은 그 과정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장소다. 쓰는 순간에는 하루를 붙잡고, 읽는 순간에는 지나온 삶을 다시 바라보게 한다.

그런 기록 사이사이에 고양이가 나타난다. 다마스쿠스의 시장 골목에서, 그리스의 오래된 항구에서, 알바니아의 숲속에서, 자동차와 쓰레기통 위에서 고양이들은 저마다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설명하지도 않고, 무엇인가를 이루기 위해 서두르지도 않는다. 햇볕이 들면 햇볕 아래 누워 있고, 졸리면 잠들며, 마음에 드는 곳에서는 한없이 느긋하다. 세계 곳곳을 걷던 작가가 오랫동안 고양이를 바라보고 기록해왔다는 사실은 우연한 취향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고양이는 인간이 잃어버린 시간을 보여주는 존재가 아닐까. 인간에게 휴식은 쉽게 목적을 요구받는다. 피로를 회복하기 위해 쉬고, 내일의 일을 잘하기 위해 잠들며, 효율을 높이기 위해 여가를 활용한다. 반면 고양이의 낮잠에는 다음 단계가 없다. 잠을 자는 것 자체가 하나의 완전한 행위가 된다.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는 시간에도 존재의 가치는 줄어들지 않는다. 어쩌면 ‘고양이 같은 잠’이란 바로 그런 시간일 것이다. 더 나은 자신이 되지 않아도 되는 시간.

고양이는 단순한 위안의 이미지에서 삶의 태도를 보여주는 상징으로 확장된다. 계획과 목표에서 잠시 이탈해도 되고, 조금 덜 애써도 되고, 자신을 끊임없이 밀어붙이지 않아도 된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언제나 더 강한 의지나 더 효율적인 시간 관리가 아닐 수 있다. 때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견디고, 그 시간을 낭비라고 부르지 않는 능력도 필요하다. 삶을 바꾸겠다는 결심보다 삶을 대하는 속도를 조금 늦추는 허락이 필요한 순간들.

김남희가 걸어온 길에는 이러한 삶의 속도가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 걷기는 목적지에 가장 빨리 도착하기 위한 방법이 아니다. 한 걸음씩 움직이는 동안 주변을 바라보고, 예상치 못한 곳에서 멈추고, 길 위의 사람과 풍경을 만나는 행위다. 이 책의 문장들도 그러하다. 하나의 결론을 향해 직선으로 나아가기보다 짧은 조각들 사이를 오가며 사람과 장소와 감정의 순간을 건넌다. 빠르게 읽어내야 할 이유가 없는 글들이다. 그래서 이 책의 짧은 글들은 하나의 여행 방식처럼 읽힌다. 카페에서 친구를 기다리다가, 고단한 퇴근길 지하철에서, 잠들지 못하는 밤에, 느긋한 주말 오후에 아무 쪽이나 펼쳐 읽어도 좋다는 작가의 말처럼 독자는 어느 페이지에서든 길을 시작할 수 있다. 작가는 세계 곳곳을 걸으며 우연히 만난 풍경을 기록했고, 독자는 책장을 넘기다 우연히 한 문장에 머문다. 길 위에서 발견한 사람과 고양이와 거리가 문장을 거쳐 다시 독자의 세계로 들어온다. 책 속의 한 문장은 독자를 잠시 다른 장소로 데려가고, 다른 사람의 눈으로 익숙한 하루를 바라보게 한다.

결국 이 책이 오래 바라보는 여행도, 고양이도, 기록도 모두 삶의 속도에 관한 문제다. 어떤 삶이 좋은 삶인지 세상이 정해놓은 기준을 따라가는 대신, 자신의 몸과 마음이 감당할 수 있는 보폭을 찾아가는 것. 빠르게 걷는 사람에게는 느린 사람이 답답해 보이고, 멈춰 있는 사람에게는 모두가 너무 빠르게 지나가는 것처럼 보인다. 중요한 것은 어느 쪽이 옳으냐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어떤 속도로 살아낼 것인가를 스스로 선택하는 일일 것이다. 24년 동안 수첩에 쌓인 문장들은 그 선택이 특별한 결심에서 시작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걷고, 먹고, 자고, 사람을 만나고, 고양이를 바라보고, 사라질 하루를 몇 줄의 문장으로 남기는 일. 때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는 일.

잘 살아간다는 것은 삶을 한순간도 놓치지 않는 일이 아니다. 흘러가는 삶을 바라볼 줄 알고, 때로는 그 흐름을 거스르지 않는 것. 목적지를 향해 가는 걸음 사이에는 아무 목적 없는 시간이 있고, 애써 살아가는 날들 사이에는 고양이처럼 몸을 누이고 잠드는 시간이 있다. 삶에는 걸어가는 시간만큼이나 아무 데도 가지 않는 시간이 필요하다. 고양이가 낮잠 속에서 그러하듯, 그 시간에도 삶은 제 몫을 살아낸다.

✏️도서출판 수오서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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