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만해 거짓말 ㅣ B사이드 아카이브 4
필리프 베송 지음, 김유빈 옮김 / 니케북스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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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소설을 읽을 때 독자가 가장 먼저 확인하고 싶어지는 것은 사실의 범위다. 이 장면은 실제였는지, 이 인물은 실재하는지, 작가가 자신의 기억을 얼마나 옮겨놓았는지. 그러나 필리프 베송의 『그만해 거짓말』은 그 확인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대신, 사실과 허구를 구분하려는 독법 자체를 다른 방향으로 돌려놓는다. 작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이 작품에서 중요한 것은 사건의 진위보다 기억이 소설의 형식을 거치면서 무엇으로 변하는가에 있다. 어린 시절 타인의 삶을 상상해 이야기를 만들던 필리프에게 어머니가 건넨 “그만해, 거짓말”이라는 말은 훗날 소설가가 된 그의 삶과 묘하게 겹친다. 존재하지 않는 이야기를 만들어내던 아이가 자신의 경험을 소설로 쓰는 사람이 되었을 때, 거짓말과 진실의 관계는 뒤집힌다. 소설은 사실을 그대로 전달하는 형식도, 사실과 무관한 허구도 아니다. 말로 직접 고백하기 어려운 경험을 다른 형태로 변환하면서 오히려 그 안의 진실에 접근하는 형식이다.

열일곱 살의 필리프와 토마에게는 사랑을 감정으로 느끼는 일과 그것을 관계의 이름으로 부르는 일이 서로 다른 문제였다. 두 사람은 서로를 사랑하지만 그 사랑을 공적인 언어로 만들 수 없었다. 여기에서 언어는 감정을 표현하는 수단을 넘어 관계를 사회적 현실로 만드는 힘을 가진다.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 때 두 사람의 관계는 하나의 이름을 얻지만, 그 말을 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사적인 현실로 밀려난다. 말이 없는 사랑. 정확히는 말을 ‘할 수’ 없는 사랑이다. 그래서 두 사람의 사랑에는 유난히 추운 감각이 있다. 한겨울처럼 살을 에는. 차가움이 지나치게 강해지면 오히려 뜨겁게 느껴질 때가 있다. 감정의 강도가 특별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둘러싼 조건이 사랑을 그렇게 감각하게 만든다. 말할 수 없다는 제약은 감정을 약화시키지 않고 시선과 몸짓, 짧은 만남 같은 비언어적 형태에 감정을 집중시킨다. 『그만해 거짓말』은 금지된 사랑을 극적인 사건으로 소비하기보다, 사회적 언어를 얻지 못한 감정이 개인의 삶에서 어떤 방식으로 실재하는지를 보여준다.

달력에서는 한 장씩 지워졌을 시간이 필리프의 내부에서는 그렇게 정직하게 지나가지 않는다. 과거의 사랑은 끝난 날짜에 고정되지 않고 현재의 감각 속으로 되돌아온다. 인간의 과거는 현재와 분리된 저장물이 아니라 현재의 감각과 의식 속에 계속 작용하기 때문이다. 오래전에 지나간 한 사람이 어느 날 다시 현재의 언어를 요구하는 것도 그래서 가능하다. 사랑했던 사람을 잃는다는 것은 그 사람을 기억에서 제거하지 않고, 그 사람이 남긴 시간을 자신의 생애 안에서 계속 운반하는 일이 된다. 함께했던 시간보다 훨씬 긴 시간을 그 사람 없이 살아가면서도, 그 시간의 일부에는 여전히 그 사람이 존재한다.

기억 속에 남은 사람은 사진처럼 원래의 모습으로 보존될 수 있을까. 필리프가 토마를 기억하고 쓰는 순간, 실제로 존재했던 토마와 소설 속 토마 사이에는 필연적으로 간극이 생긴다. 우리는 누구도 기억 속에 원본 그대로 보관할 수 없다. 기억하는 현재의 감정과 언어가 과거의 모습을 다시 배열하기 때문이다. 리쾨르가 기억과 서사의 관계에서 주목했던 것처럼, 인간은 지나간 시간을 단순히 저장하는 대신 이야기의 형태로 이해한다. 베송의 글쓰기도 그렇다. 토마를 다시 쓰는 것은 그를 복원하는 일이면서 동시에 필리프가 기억하는 토마를 구성하는 일이다. 사랑은 기억으로 옮겨가고, 기억은 문장이 된다. 그 문장 속에서 과거의 사람은 현재의 언어를 통해 다시 해석된다.

자신의 삶을 쓴다는 말에는 사실 많은 타인이 숨어 있다. 자전소설은 작가 한 사람의 기억을 펼쳐놓는 형식처럼 보이지만, 그 기억 속에 함께 있었던 사람들까지 작가의 언어 안으로 불러들인다. 특히 그 사람이 더 이상 자신의 이야기를 고쳐 말하거나 반박할 수 없게 된 뒤라면, 남겨진 사람의 기억은 더욱 강한 권한을 갖는다. 내가 기억하는 사람이 그 사람의 전부일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누군가는 그를 말해야 한다. 『그만해 거짓말』은 이 모순을 외면하지 않는다. 베송은 과거를 완벽하게 복원하려 하지 않고, 기억하는 사람이 가진 한계와 욕망까지 문장 안에 함께 배치한다. 그래서 이 소설의 진실은 ‘그때 실제로 무슨 일이 있었는가’에만 있지 않다.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어떻게 기억하고, 왜 다시 써야 했는가에도 진실이 있다. 타인의 삶을 문학으로 옮기는 일은 기억이면서 동시에 해석이며, 사랑의 흔적을 남기는 일인 동시에 그 사람을 자신의 언어로 다시 구성하는 일이기도 하다.

사실을 확인하려는 독자의 시선은 소설이 깊어질수록 조금씩 방향을 잃는다. 이 장면은 실제로 있었을까. 이 감정은 정말 그의 것이었을까. 소설 속 문장 뒤에 아직 쓰이지 않은 기억이 남아 있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사실 여부를 판별하는 데 독서의 목적을 두면 작품의 핵심에서 멀어진다. 이 소설에서 허구는 기억을 말하기 위해 고른 형식이다. 베송은 자신의 삶을 그대로 증명하지 않는다. 삶을 한 번 문학으로 통과시킨 뒤, 그 안에서 자신의 과거를 다시 읽는다. 독자는 그 통로를 따라가며 사실과 허구 사이의 경계를 경험하고, 그 애매함 속에서 한 사람의 감정이 문학으로 변환되는 과정을 보게 된다.

제목 속 한 단어가 소설 전체의 작동 방식을 설명하는 셈이다. 필리프가 어린 시절 지어낸 이야기를 향해 들었던 ‘거짓말’이라는 말은 훗날 그의 문학을 관통하는 언어가 된다. 사랑을 숨기기 위해 필요한 말도 거짓말이고, 지나간 시간을 잊었다고 자신에게 되뇌는 말도 거짓말이며, 자신의 경험을 소설이라는 허구의 형식으로 옮기는 일 역시 넓은 의미에서 거짓말이다. 그러나 그 거짓말이 오히려 진실을 보존한다. 말할 수 없었던 사랑, 지나간 시간을 잊지 못한 사람, 죽음 이후에도 계속되는 기억은 사실이라는 문장만으로는 충분히 담기지 않는다. 허구라는 형식이 개입하면서 사적인 경험은 문학적 진실로 변환된다. ‘거짓말’은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 문학이 선택한 역설적인 언어가 된다.

첫사랑은 이 소설의 소재이지만 작품이 도달하는 곳은 그보다 넓다. 말하지 못한 감정이 침묵 속에 남고, 그것이 기억으로 이어지며, 기억이 문장을 얻어 사라진 사람을 낯선 독자의 세계로 이동시키는 과정이 작품 전체를 관통한다. 한 사람의 경험은 쓰이는 순간 그 사람만의 것이기를 멈춘다. 문학이 되고, 읽히면서 또 다른 사람의 사유 속에서 다시 구성된다. 베송이 자신의 과거를 소설로 만든 것은 그것을 완벽하게 보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불완전한 기억을 통해 한 사람과 그 사랑의 의미를 다시 해석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문학은 사라진 사람을 과거의 모습 그대로 되돌려놓을 수 없다. 대신 그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의 언어 안에 옮겨놓을 수 있다. 『그만해 거짓말』에서 필리프 베송은 어머니에게 거짓말이라 불렸던 언어로 자신의 가장 사적인 경험을 쓴다. 그 과정에서 토마는 한때의 연인에서 기억의 대상이 되고, 기억의 대상에서 문학의 인물이 되며, 마침내 독자가 상상하는 한 사람으로 이동한다. 한 사람을 기억하는 일이 한 사람을 다시 만드는 일이라면, 독서는 그 재구성에 또 한 번 참여하는 행위다. 베송이 기억한 토마를 우리가 읽고, 우리가 읽은 토마를 다시 상상하면서 한 사람의 생은 작가의 기억 바깥으로 확장된다. 사랑했던 사람을 잃는다는 것은 그 사람이 사라지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 사람이 남긴 시간이 이후의 나를 구성하고, 그 시간을 살아가는 일은 때로 그 사람을 다시 말하는 일이 된다. 한때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사랑이 기억을 거쳐 문학이 되고, 문학이 낯선 독자의 독서가 되는 순간, 토마의 시간은 필리프의 과거에만 갇혀 있지 않게 된다. 『그만해 거짓말』은 그렇게 한 사람을 기억하는 일이 한 사람의 죽음 이후에도 계속될 수 있는 가장 문학적인 증언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도서출판 니케북스로부터 가제본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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