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도 고양이 같은 잠이 필요하다 - 김남희 잡문집
김남희 지음 / 수오서재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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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살아간다는 말에는 속도가 붙어 있다. 얼마나 많이 이루었는지, 얼마나 빨리 앞으로 나아갔는지, 지금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삶의 가치를 측정하는 기준이 성취와 효율에 놓이면서 멈춤은 게으름이 되고, 느린 걸음은 뒤처짐이 되었다. 쉬는 시간마저 다음 일을 위한 회복으로 계산되는 시대. 삶이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향해 달려가야 하는 일이 되어 버렸을 때, 살아가는 일 자체를 천천히 바라보는 사람의 기록은 조금 다른 시선을 건넨다.

김남희의 『우리에게도 고양이 같은 잠이 필요하다』는 2003년부터 2026년까지 24년 간 작가가 써온 글을 한데 모은 잡문집이다.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과 풍경, 그날 먹은 음식과 지출, 사랑과 이별, 외로움과 상실, 나이를 먹으며 달라지는 감정까지 수십 권의 수첩에 기록된 문장들이 시간의 순서에 따라 놓여 있다. 특별히 기억할 만한 사건을 골라 삶을 정리한 회고록이 아니라, 당시에는 대수롭지 않았을 하루의 조각들이 오랜 시간을 건너 하나의 삶으로 읽히게 된 기록이다. 이 책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을 기록했느냐보다 사라질 것들을 기록했다는 사실에 있다. 일상의 하루는 대부분 기억할 만한 사건 없이 지나간다. 날씨와 식사, 어느 길에서 마주친 풍경, 잠시 스쳐간 사람, 그날의 기분처럼 특별한 이름을 얻지 못한 순간들이 하루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러나 삶을 뒤돌아보았을 때 남는 것 역시 그런 조각들이다. 수첩에 적힌 한 문장은 지나간 시간을 보존하는 동시에, 그때의 자신을 다시 불러내는 작은 문이 된다. 기록은 시간을 멈추게 하지는 않지만, 흘러간 시간에 다시 들어갈 수 있는 길을 만든다.

24년의 문장을 한 권으로 읽는 일은 그래서 한 사람의 삶을 연대기적으로 바라보는 것과도 다르다. 젊은 날의 감정과 시간이 흐른 뒤의 감정이 나란히 놓이고, 한때 중요했던 것이 희미해지는 동안 별것 아니었던 장면이 오래 남는다. 삶은 그 순간에는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없는 조각들의 집합이고, 시간이 흐른 뒤에야 그 조각들이 서로 이어져 하나의 삶의 윤곽을 만든다. 수첩은 그 과정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장소다. 쓰는 순간에는 하루를 붙잡고, 읽는 순간에는 지나온 삶을 다시 바라보게 한다.

그런 기록 사이사이에 고양이가 나타난다. 다마스쿠스의 시장 골목에서, 그리스의 오래된 항구에서, 알바니아의 숲속에서, 자동차와 쓰레기통 위에서 고양이들은 저마다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설명하지도 않고, 무엇인가를 이루기 위해 서두르지도 않는다. 햇볕이 들면 햇볕 아래 누워 있고, 졸리면 잠들며, 마음에 드는 곳에서는 한없이 느긋하다. 세계 곳곳을 걷던 작가가 오랫동안 고양이를 바라보고 기록해왔다는 사실은 우연한 취향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고양이는 인간이 잃어버린 시간을 보여주는 존재가 아닐까. 인간에게 휴식은 쉽게 목적을 요구받는다. 피로를 회복하기 위해 쉬고, 내일의 일을 잘하기 위해 잠들며, 효율을 높이기 위해 여가를 활용한다. 반면 고양이의 낮잠에는 다음 단계가 없다. 잠을 자는 것 자체가 하나의 완전한 행위가 된다.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는 시간에도 존재의 가치는 줄어들지 않는다. 어쩌면 ‘고양이 같은 잠’이란 바로 그런 시간일 것이다. 더 나은 자신이 되지 않아도 되는 시간.

고양이는 단순한 위안의 이미지에서 삶의 태도를 보여주는 상징으로 확장된다. 계획과 목표에서 잠시 이탈해도 되고, 조금 덜 애써도 되고, 자신을 끊임없이 밀어붙이지 않아도 된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언제나 더 강한 의지나 더 효율적인 시간 관리가 아닐 수 있다. 때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견디고, 그 시간을 낭비라고 부르지 않는 능력도 필요하다. 삶을 바꾸겠다는 결심보다 삶을 대하는 속도를 조금 늦추는 허락이 필요한 순간들.

김남희가 걸어온 길에는 이러한 삶의 속도가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 걷기는 목적지에 가장 빨리 도착하기 위한 방법이 아니다. 한 걸음씩 움직이는 동안 주변을 바라보고, 예상치 못한 곳에서 멈추고, 길 위의 사람과 풍경을 만나는 행위다. 이 책의 문장들도 그러하다. 하나의 결론을 향해 직선으로 나아가기보다 짧은 조각들 사이를 오가며 사람과 장소와 감정의 순간을 건넌다. 빠르게 읽어내야 할 이유가 없는 글들이다. 그래서 이 책의 짧은 글들은 하나의 여행 방식처럼 읽힌다. 카페에서 친구를 기다리다가, 고단한 퇴근길 지하철에서, 잠들지 못하는 밤에, 느긋한 주말 오후에 아무 쪽이나 펼쳐 읽어도 좋다는 작가의 말처럼 독자는 어느 페이지에서든 길을 시작할 수 있다. 작가는 세계 곳곳을 걸으며 우연히 만난 풍경을 기록했고, 독자는 책장을 넘기다 우연히 한 문장에 머문다. 길 위에서 발견한 사람과 고양이와 거리가 문장을 거쳐 다시 독자의 세계로 들어온다. 책 속의 한 문장은 독자를 잠시 다른 장소로 데려가고, 다른 사람의 눈으로 익숙한 하루를 바라보게 한다.

결국 이 책이 오래 바라보는 여행도, 고양이도, 기록도 모두 삶의 속도에 관한 문제다. 어떤 삶이 좋은 삶인지 세상이 정해놓은 기준을 따라가는 대신, 자신의 몸과 마음이 감당할 수 있는 보폭을 찾아가는 것. 빠르게 걷는 사람에게는 느린 사람이 답답해 보이고, 멈춰 있는 사람에게는 모두가 너무 빠르게 지나가는 것처럼 보인다. 중요한 것은 어느 쪽이 옳으냐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어떤 속도로 살아낼 것인가를 스스로 선택하는 일일 것이다. 24년 동안 수첩에 쌓인 문장들은 그 선택이 특별한 결심에서 시작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걷고, 먹고, 자고, 사람을 만나고, 고양이를 바라보고, 사라질 하루를 몇 줄의 문장으로 남기는 일. 때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는 일.

잘 살아간다는 것은 삶을 한순간도 놓치지 않는 일이 아니다. 흘러가는 삶을 바라볼 줄 알고, 때로는 그 흐름을 거스르지 않는 것. 목적지를 향해 가는 걸음 사이에는 아무 목적 없는 시간이 있고, 애써 살아가는 날들 사이에는 고양이처럼 몸을 누이고 잠드는 시간이 있다. 삶에는 걸어가는 시간만큼이나 아무 데도 가지 않는 시간이 필요하다. 고양이가 낮잠 속에서 그러하듯, 그 시간에도 삶은 제 몫을 살아낸다.

✏️도서출판 수오서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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