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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명치료는 사양하겠습니다 - 오래 사는 시대, 우리는 어떻게 떠날 것인가
양성관 지음 / 히포크라테스 / 2026년 9월
평점 :
의학은 죽음을 늦추는 놀라운 능력을 갖게 되었다. 심장이 멎으면 다시 뛰게 하고, 숨을 쉬지 못하면 기계가 대신 호흡하며, 더 이상 스스로 먹지 못하는 몸에도 영양을 공급할 수 있다. 한때 죽음의 영역에 속했던 일들이 이제는 의료의 이름으로 연장된다. 인간은 그렇게 이전보다 오래 살게 되었다. 그러나 오래 산다는 일이 언제나 잘 살아가는 일과 같은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다. 생명의 길이를 늘릴 수 있게 된 순간부터 인간에게는 새로운 숙제가 생겼다. 얼마나 오래 살 것인가보다, 그 시간 동안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 것인가를 결정하는 일이다.
『연명치료는 사양하겠습니다』는 바로 그 숙제 앞에 서 있는 책이다. 양성관 의사는 호스피스와 요양시설, 병원 현장에서 마주한 죽음과 돌봄의 현실을 기록하며 연명의료를 둘러싼 여러 얼굴을 보여준다. 의학의 발전으로 죽음이 삶에서 멀어진 만큼, 사람들은 죽음을 맞이하는 방법조차 의료진과 가족의 판단에 맡기게 되었다. 병원에서 죽는 일이 익숙해진 시대, 죽음은 더 이상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한순간의 사건이 아니라 수많은 결정이 이어지는 긴 과정이 되었다.
이때 연명의료를 둘러싼 가장 어려운 문제는 ‘무엇이 최선인가’라는 물음이다. 환자를 조금이라도 더 살리고 싶은 가족에게는 하루의 연장이 사랑일 수 있고, 가능한 치료를 시행하려는 의료진에게는 그것이 책임일 수 있다. 그러나 환자에게는 다른 기준이 있을 수 있다. 의식이 유지되는 것, 고통을 줄이는 것,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것, 자신의 의사를 존중받는 것. 생명을 바라보는 기준이 서로 다르다면 ‘살린다’는 말 하나만으로 그 선택의 가치를 판단하기 어려워진다.
의학이 생명을 다루는 방식이 달라지면서 환자를 바라보는 기준도 함께 달라져야 한다. 의료윤리에서 환자의 자율성이 중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인간을 단순히 생물학적 기능을 가진 신체로 본다면 심장과 호흡을 유지하는 것이 치료의 궁극적인 목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환자를 자신의 가치와 의사를 가진 인간으로 본다면 치료의 목적 역시 달라진다. 가능한 처치를 모두 시행하는 것과 환자가 원하는 삶을 지켜주는 것은 같은 의미가 아닐 수 있다. 생명을 연장할 수 있다는 의학적 가능성이 곧 그 연장을 정당화하는 윤리적 근거가 되지는 않는다.
이론으로 배운 자기결정권은 병실에 들어서는 순간 전혀 다른 무게를 갖는다. 병세가 심한 환자가 입원하면 간호사인 나는 DNR 여부부터 확인하곤 했다. 기계적으로, 익숙한 순서에 따라. DNR(Do Not Resuscitate)은 심정지나 호흡정지가 발생했을 때 심폐소생술을 시행하지 않겠다는 결정이다. 환자가 생사의 경계에 놓였을 때 어떤 간호를 해야 하는지 미리 알고 대비하기 위한 일이었고, 수없이 반복했던 만큼 익숙한 업무의 한 과정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그 환자가 내 가족이라면 어떨까 생각했다. 차트 위에 놓인 DNR이라는 글자를 같은 마음으로 확인할 수 있을까. 의료인으로서 환자의 의사와 치료 방향을 확인하는 일과, 가족으로서 사랑하는 사람의 마지막을 받아들이는 일은 전혀 다른 무게를 가질 것이다. 생명을 연장하는 선택이 의료진에게는 하나의 판단으로 다가오더라도, 가족에게는 사랑하는 사람을 어떻게 보내줄 것인가를 결정하는 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죽음에 관한 선택지를 들여다보면 사회마다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지가 선명해진다. 미국에서는 사전의료의향서와 의료대리인 지정 등을 통해 환자가 의사표현을 할 수 없게 되었을 때에도 자신의 뜻이 의료결정에 반영될 수 있도록 준비한다. 다만 미국은 하나의 통일된 연명의료법 체계를 가진 것이 아니라 주마다 관련 법과 서식, 절차가 다르다. 일본에서는 후생노동성이 ‘인생회의(人生会議)’라는 이름으로 사전 돌봄 계획을 알리고 있으며, 임종기의 의료·돌봄 결정에서도 본인의 의사결정을 가장 중요한 원칙으로 제시한다. 적극적 안락사는 이 지침의 대상에서 제외되어 있다.
유럽에서는 더욱 다양한 선택이 나타난다. 네덜란드는 안락사와 의사조력자살을 원칙적으로 형사범죄로 규정하면서도, 환자의 자발적이고 숙고된 요청과 회복 가능성이 없는 참을 수 없는 고통, 합리적인 다른 대안의 부재 등 법에서 정한 요건을 충족하고 의사가 주의의무를 지킨 경우 예외를 인정한다. 반면 이러한 제도를 모든 국가가 동일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연명의료의 중단과 완화의료, 의사조력사망을 어디까지 허용할 것인지는 국가마다 다른 법과 윤리적 기준 속에서 결정된다.
제도의 차이에는 각 사회가 인간의 존엄을 바라보는 방식이 비친다. 이 차이를 단순히 어느 나라의 제도가 더 앞서 있다고 평가할 수는 없다. 죽음에 관한 법과 의료의 형태는 그 사회가 인간의 존엄을 어디에서 찾는지 보여주는 하나의 거울이기 때문이다. 개인의 자기결정권을 중심에 놓는 사회가 있는가 하면, 가족과 의료진의 책임을 중시하는 사회도 있다. 어떤 곳에서는 죽음을 앞둔 사람의 고통을 덜어주는 것에 더 큰 의미를 두고, 어떤 곳에서는 생명을 의도적으로 단축하는 행위에 더욱 엄격한 경계를 세운다. 결국 연명의료의 문제는 의료기술의 수준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인간을 어떤 존재로 바라보는가에 따라 마지막의 풍경도 달라진다.
한국 역시 연명의료결정제도를 통해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의 자기결정권을 제도적으로 보장하고 있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는 등록기관에서 충분한 설명을 듣고 본인이 직접 작성하며, 연명의료의 시행 또는 중단 등에 관한 의사를 미리 남길 수 있다. 작성한 뒤에도 자신의 뜻이 달라지면 변경하거나 철회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이 문서가 죽음을 선택하는 선언문이 아니라, 자신이 어떤 의료와 돌봄을 원하는지 살아 있을 때 미리 표현하는 제도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제도가 마련되었다고 해서 죽음에 관한 모든 선택이 쉬워지는 것은 아니다. 실제 현장에서는 환자의 의사와 가족의 바람, 의료진의 판단이 복잡하게 얽힌다. 법이 죽음의 절차를 정할 수는 있어도 한 사람에게 무엇이 좋은 마지막인지를 대신 결정해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죽음이 임박한 순간의 결단만이 아니다. 죽음은 한 번 찾아오지만 그 앞에서 이루어지는 결정은 수없이 많다. 심폐소생술을 받을 것인지, 인공호흡기를 사용할 것인지, 적극적인 치료를 이어갈 것인지, 호스피스 돌봄을 선택할 것인지. 의식이 사라진 뒤 가족에게 판단을 맡겨야 하는 상황까지 생각한다면, 자기결정권은 죽기 직전에 행사하는 권리가 아니라 살아 있을 때부터 준비해야 하는 권리가 된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는 자신의 마지막을 한 문장으로 미리 규정하는 서류가 아니다. 그것은 ‘연명치료를 받지 않겠다’는 한 문장으로 자신의 죽음을 정리하는 서류가 아니다. 어떤 연명의료를 원하는지, 호스피스를 이용할 것인지, 자신의 뜻이 어떤 방식으로 존중되기를 바라는지 미리 생각하고 표현하는 과정이다. 죽음에 관한 대화가 어려운 이유는 죽음을 말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대화 속에서 결국 자신의 삶을 무엇으로 가치 있게 여겼는지 드러나기 때문이다.
삶의 마지막에서 인간은 가장 선명하게 서로에게 기대게 된다. 더구나 죽음은 개인의 결정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인간은 삶의 마지막에서 가장 많이 타인에게 의존한다. 몸을 움직일 수 없을 때 누군가의 손이 필요하고, 의사를 표현할 수 없을 때 누군가가 그 뜻을 기억해야 하며, 오랜 간병이 이어질 때 가족의 시간과 노동이 필요하다. 자기결정권을 중요하게 생각할수록 오히려 돌봄의 관계를 함께 바라봐야 하는 이유다. 인간의 자율성은 타인과 완전히 분리된 독립성 위에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 의존하는 삶 속에서 실현되기도 한다.
돌봄의 무게까지 함께 바라볼 때 연명의료라는 문제의 크기도 달라진다. 이 책이 연명의료를 넘어 돌봄의 현실까지 바라보는 이유도 분명하다. 한 사람의 생명을 연장하는 데에는 그만큼 누군가의 시간이 필요하다. 긴 간병 속에서 가족의 일상과 경제적 기반이 흔들리고, 환자 역시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부담이 된다는 죄책감을 경험할 수 있다. 따라서 좋은 죽음은 환자가 원하는 치료를 선택할 권리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누구나 늙고 병들며 돌봄을 필요로 하는 사회에서, 그 마지막 시간을 누가 어떻게 책임질 것인가라는 사회적 질문까지 함께 다뤄야 한다.
결국 연명의료에 관한 논의는 죽음을 선택할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다.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인간에게 어떤 삶의 기준을 마지막까지 인정할 것인가에 관한 문제다. 오래 살고 싶은 마음은 자연스럽지만, 삶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 시간의 양만큼 삶의 모습도 중요해진다. 의학이 생명을 붙잡을 수 있는 시대에 필요한 것은 더 오래 살게 하는 기술만이 아니라, 무엇을 위해 그 생명을 연장하는지 판단할 수 있는 윤리적 기준이다.
죽음을 준비한다는 것은 죽을 날을 기다리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지금 어떤 삶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지 확인하는 일이다. 의식이 유지되는 삶을 원하는지, 고통 없는 시간을 원하는지, 사랑하는 사람의 곁에 있는 시간을 원하는지, 익숙한 공간에서 자신의 방식으로 생을 마무리하기를 원하는지. 각자의 답은 다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 답이 자신의 삶에서 비롯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의학은 죽음의 시간을 늦출 수 있다. 그러나 그 시간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는 의료기술만으로 결정할 수 없다. 생명의 길이를 늘리는 능력이 커질수록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오히려 삶의 가치를 판단하는 능력일 것이다. 무엇을 연장할 것인지 결정하는 일보다, 무엇을 지키기 위해 연장할 것인지 아는 일이 더 중요할 때가 있다. 그래서 이 책이 결국 향하는 곳은 죽음이 아니라 삶이다. 마지막 순간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지 생각하는 일은 지금의 삶에서 무엇을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지 돌아보는 일과 맞닿아 있다. 죽음은 한 번 찾아오지만, 좋은 마지막을 위한 준비는 살아 있는 동안 매일의 가치관 속에서 이루어진다. 당신은 얼마나 오래 살고 싶은가. 그리고 그보다 먼저, 어떤 모습으로 마지막을 맞이하고 싶은가.
✏️도서출판 히포크라테스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