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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해부학 - 완전한 질서 너머 삶의 의미를 찾아서
가브리엘 웨스턴 지음, 김성훈 옮김 / 더퀘스트 / 2026년 9월
평점 :
간호사는 근무를 교대할 때마다 환자를 인계한다. 진단명과 수술명, 검사 결과, 투약과 처치, 앞으로의 치료 계획이 다음 근무자에게 전달된다. 정확한 정보가 끊김 없이 이어져야 안전한 간호도 이어질 수 있다. 인계를 모두 듣고 나면 머릿속에는 몇 개의 문장으로 정리된 사람들이 남는다. 골절로 수술한 환자, 안면마비로 입원한 환자, 어느 수치의 변화를 지켜봐야 하는 환자. 그런데 병실 문을 열고 처음 마주하는 순간부터 그 문장들은 조금씩 길어진다. 단발머리가 유난히 잘 어울리는 사람, 대화할 때 꼭 손을 잡는 사람, 무심하게 툴툴거리면서도 간호사가 돌아설 때마다 고맙다는 말을 덧붙이는 사람. 인계받은 정보는 모두 정확했지만, 그중 어느 것도 한 사람의 전부를 말해주지는 않았다.
가브리엘 웨스턴의 『인생의 해부학』은 바로 그 거리에서 시작하는 책처럼 읽힌다. 외과의사에게 몸은 끊임없이 관찰하고 판단해야 하는 대상이다. 피부를 열고, 뼈와 장기를 보고, 혈액과 조직의 상태를 살피며, 정상과 비정상을 구별한다. 의학은 몸을 세밀하게 나눌수록 더 많은 것을 알아냈고, 그 지식으로 수많은 생명을 살려왔다. 그러나 웨스턴은 『Alive』라는 제목을 붙인 책의 머리말을 ‘죽음’에서 시작한다. 의학 교육에서 만났던 해부학 역시 살아 있는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 죽은 몸을 펼쳐놓는 학문이었다. 이 역설은 책 전체를 움직인다. 죽은 몸을 통해 우리는 살아 있는 인간을 어디까지 알 수 있는가. 피부와 뼈, 자궁과 폐, 뇌와 심장을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게 되었을 때 한 인간에 대해서도 그만큼 많이 알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웨스턴은 뼈에서 심장까지 열한 개의 신체 부위를 지나며 해부학을 다시 살아 있는 사람에게 돌려준다. 뼈는 죽음 뒤에 남는 단단한 구조물이면서 살아 있는 동안 끊임없이 재생되고, 피부는 내부와 외부를 구분하면서 세계를 만지는 접촉면이 된다. 자궁은 임신과 출산에 따라 놀라운 변형을 겪으며, 폐는 인간의 몸과 바깥의 공기를 매 순간 교환한다. 간의 일부는 한 사람의 몸을 떠나 다른 사람의 생명을 유지할 수 있고, 심장은 오랫동안 생명의 상징이었던 동시에 의학에서는 정교한 펌프로 이해되어왔다. 이 기관들에는 생물학적 기능만 존재하지 않는다. 성과 정체성, 임신과 출산, 질병과 노화, 환경과 계급, 돌봄과 죽음이 몸의 구조 위에 겹쳐진다. 해부학 도판에서 명료하게 구분되던 기관들은 실제 삶으로 돌아오는 순간 한 사람의 기억과 관계와 시간 속에 놓인다.
몸을 이해하는 두 가지 방식 사이에는 오래된 철학적 문제가 있다. 우리는 몸을 소유하는가, 몸으로 존재하는가. 메를로퐁티에게 몸은 세계 안에 놓인 하나의 사물이면서 동시에 세계를 경험할 수 있게 하는 조건이었다. 손은 만질 수 있는 신체인 동시에 무언가를 만지는 신체이고, 눈은 타인에게 보이면서 세계를 바라본다. 자신의 몸에서 완전히 빠져나와 그것을 순수한 대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몸은 언제나 ‘나’의 편에 있으면서 세계의 편에도 놓여 있다. 그렇기에 질병은 고장 난 부품 하나의 문제로 머물지 않는다. 걷던 사람이 걷지 못하게 되고, 숨쉬던 사람이 숨을 의식하게 되고, 자신의 심장을 잊고 살던 사람이 심장의 박동을 두려움 속에서 듣기 시작하면 세계를 경험하는 방식까지 달라진다. 웨스턴은 이 두 위치를 여러 번 오간다. 외과의사로서 다른 사람의 몸을 열어보았고, 어머니로서 임신과 출산을 자신의 몸으로 통과했으며, 가족의 질병 앞에서는 보호자가 되었고, 자신의 심장 질환 앞에서는 환자가 된다. 의사였을 때 알고 있던 심장과 자신의 가슴속에서 이상을 일으키는 심장은 해부학적으로 같은 기관이다. 그러나 두 심장을 아는 방식은 같을 수 없다. 지식은 질환의 원인과 경과를 설명할 수 있지만, 그 질환과 함께 살아갈 사람이 느끼는 시간까지 대신 살아주지는 못한다. 의학적 지식이 부족해서 생기는 간극도 아니다. 인간에게 몸은 관찰하는 대상인 동시에 그 관찰을 수행하는 자신의 자리이기 때문이다.
병원에서 심한 욕창을 소독할 때면 그 사실이 낯선 방식으로 다가오곤 했다. 오래 누워 지내는 환자의 피부는 지속되는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진다. 손상이 깊어지면 피부 아래의 조직을 지나 근육과 힘줄, 뼈까지 드러난다. 처음 마주했을 때의 충격은 반복되는 업무 속에서 점차 전문적인 관찰로 바뀐다. 상처의 깊이와 색, 삼출물과 괴사 정도를 확인하고 소독한 뒤 변화 양상을 기록한다. 환자에게 자신의 몸이 그렇게 변했다는 사실은 커다란 충격이지만, 간호사는 그 충격으로부터 어느 정도 거리를 확보해야 정확하게 돌볼 수 있다. 그러다 간호기록을 작성하며 문득 떠오르던 생각이 있었다. 내 피부 아래에도 저런 근육과 저런 뼈가 있다.
그 순간 타인의 몸을 관찰하던 시선은 관찰하는 사람의 몸으로 돌아온다. 피부는 나와 타인을 분명하게 구별하는 경계처럼 보이지만, 그 아래에서 만나는 신체는 오히려 인간이 공유하는 취약성을 드러낸다. 다른 사람의 뼈를 보면서 자신의 뼈를 의식하고, 타인의 상처를 처치하는 손 역시 상처 입을 수 있는 피부로 덮여 있다. 웨스턴이 뼈와 피부를 바라보며 발견하는 생명도 이와 이어져 있다. 가장 단단해 보이는 뼈조차 살아 있는 동안 계속 허물어지고 다시 만들어지며, 몸의 경계를 이루는 피부도 완전히 닫힌 벽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몸은 단단하게 완성된 구조물보다 끊임없이 변화하고 교환하며 가까스로 자신을 유지하는 생명체다. 타인의 몸을 오래 들여다볼수록 인간의 몸에 대한 지식이 늘어나는 동시에 자신의 유한성도 선명해진다.
그렇게 매 순간 달라지는 몸 안에서 우리는 어떻게 어제와 같은 사람으로 살아가는가. 사람은 시간이 지나도 자신을 같은 사람이라고 여기지만 그동안 몸은 쉼 없이 달라진다. 세포가 교체되고, 상처가 생기고, 흉터가 남으며, 임신과 출산을 겪고, 질병을 앓고, 늙는다. 어떤 변화는 너무 커서 이전까지 자신에 대해 가지고 있던 이해를 수정하도록 요구한다. 리쾨르가 인간의 정체성을 고정된 실체보다 시간 속에서 계속 구성되는 이야기와 연결했던 것도 이런 변화의 문제를 생각하게 한다. 어제와 오늘의 몸이 달라져도 우리는 그 변화들을 한 사람의 생애 안에 배열하며 ‘나’라는 연속성을 만들어간다. 질병은 그 서사에 예고 없이 끼어드는 사건이고, 회복은 언제나 질병 이전의 몸으로 돌아가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달라진 몸을 자신의 생애 안에 다시 배치하고, 그 몸으로 가능한 삶의 문법을 새로 익혀야 하는 경우도 있다.
타인의 몸을 읽던 해부학은 저자 자신의 심장에 이르러 읽는 사람과 읽히는 몸의 자리를 뒤바꾼다. 다른 사람의 몸에서 병을 찾아내고 고치는 데 익숙했던 사람이 자신의 몸에서 예측할 수 없는 변화를 경험하면서 해부학의 방향도 달라진다. 몸에 관한 지식은 이제 관찰의 언어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무엇이 몸에서 일어나고 있는가’와 함께 ‘이 몸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가 따라온다. 신체의 변화가 존재 전체를 흔드는 까닭도 몸과 삶을 서로 떼어놓을 수 없는 데 있다. 우리는 몸을 통과해서만 세계에 닿을 수 있기에, 몸의 변화는 자신이 살아가던 세계의 크기와 속도, 가능성의 범위를 함께 바꾼다. 다시 살아간다는 것은 변화를 없었던 일로 만드는 일이 아니라 달라진 신체와 세계 사이에서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된다.
머리말의 ‘죽음’에서 시작해 맺음말의 ‘삶’으로 향하는 구성은 생과 사를 가르는 경계를 다시 들여다보게 한다. 마지막에 등장하는 장기이식에서 한 사람의 죽음 이후 적출된 심장은 몸 밖에서도 뛰며 또 다른 사람의 생명을 향한다. 죽은 몸과 살아 있는 심장이 한 장면에 공존한다. 심장이 뛴다는 사실만으로 한 사람의 삶 전체를 설명할 수 없고, 심장이 멈췄다는 사실만으로 그 사람이 다른 사람들과 맺어온 관계의 흔적까지 사라졌다고 말할 수도 없다. 의학은 생과 사를 판단할 기준을 필요로 하지만, 한 인간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경험은 그 기준보다 훨씬 넓은 곳에서 이루어진다.
신생아중환자실에서 근무하던 시절, 전날까지 돌보았던 아기가 다음 출근 전에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적이 있다. 전날까지 작은 몸을 꼬물거리던 아기. 출근 후 맡게 된 일은 임종간호였다. 몸에 연결되어 있던 관들을 하나씩 제거하고, 부모가 가져온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힌 뒤, 쓰던 젖병과 남은 기저귀를 챙겼다. 그 아기는 퇴근 후 틈틈이 떠서 만든 첫 모자를 씌워주었던 아기이기도 했다. 체온을 유지하기 어려운 아이들에게 씌워주기 위해 만들었던 작은 모자였다. 의료기기가 하나씩 사라지고 부모가 준비한 옷이 그 자리를 채우는 동안, 환자로 돌보던 작은 몸을 다시 누군가의 아이로 돌려보내는 듯한 시간이 흘렀다. 그 사실을 알고 있던 부모가 고맙다는 말을 하며 울었고, 잡은 손 사이에서 의료인과 보호자라는 구분도 잠시 희미해졌다.
그 기억에서 살아 있음은 하나의 장기가 수행하는 기능으로만 떠오르지 않는다. 누군가의 체온을 지키기 위해 모자를 뜨는 시간, 불편한 몸의 자세를 바꾸어주는 손, 대화를 나누기 위해 잡은 손, 떠나는 사람에게 마지막 옷을 입혀주는 손까지 몸과 몸 사이에서 오간 행위들이 함께 떠오른다. 인간의 신체는 한 사람에게 속하지만 평생 완전히 홀로 유지되지는 않는다. 태어날 때부터 타인의 손에 받아들여지고, 아플 때 누군가에게 몸을 맡기며, 때로는 다른 사람의 장기를 받아 살아간다. 독립된 개체라고 믿었던 몸에는 이미 수많은 타인의 시간과 접촉이 스며 있다. 돌봄은 그 관계성을 가장 물질적인 방식으로 보여주는 행위다.
그래서 『인생의 해부학』에서 해부학은 인간을 조각내는 데서 완성되지 않는다. 뼈와 피부와 심장을 따로 떼어 이해했던 해부학의 언어는 살아 있는 몸 안에서 다시 하나의 생애로 모인다. 동시에 그렇게 분리된 기관들은 한 사람의 몸 안에서 함께 아프고 변화하고 늙으며, 그 사람의 기억과 관계 속에서 각기 다른 의미를 얻는다. 인계에서는 몇 줄의 의료정보였던 환자가 병실 문을 열면 목소리와 표정과 습관을 가진 사람으로 나타났던 것처럼, 웨스턴의 해부학에서도 기관의 이름 뒤에서 한 사람의 생애가 모습을 드러낸다.
의학은 몸을 나누어 이해함으로써 인간을 살려왔다. 삶은 그렇게 나누어진 것들을 한 사람 안에서 함께 살아내는 시간이다. 몸에 관해 안다는 것은 장기의 위치와 기능을 익히는 데 그치지 않고, 그 몸이 변화할 때 한 사람의 세계도 함께 움직인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일까지 포함한다. 살아 있는 몸은 계속 바뀌고 손상되고 회복하며 이전과 다른 상태로 우리를 데려간다. 그때 필요한 삶의 태도는 변화 이전의 몸만을 자신이라고 고집하는 데서 생겨나기보다, 달라진 몸 역시 자신의 시간 안에 받아들이며 다시 세계와 관계를 맺는 데서 만들어진다.
『인생의 해부학』이 죽은 몸에서 시작해 살아 있음에 도착하는 동안 해부되는 것은 신체만이 아니다. 몸과 자아, 의학과 삶, 관찰하는 사람과 관찰되는 사람 사이에 그어두었던 구분도 함께 펼쳐진다. 그 안에서 몸은 소유물이면서 존재의 방식이고, 타인과 나를 가르는 경계이면서 서로의 취약성을 알아보게 하는 공통의 조건이 된다. 한 사람을 안다는 것은 그 사람의 몸을 아는 일보다 훨씬 넓다. 그러나 몸을 지나지 않고서는 그 사람의 삶에도 닿을 수 없다. 살아간다는 말이 언제나 몸을 전제로 한다면, 해부학이 향해야 할 마지막 자리에는 장기의 이름보다 그 몸으로 살아온 한 사람이 놓여 있어야 한다.
✏️도서출판 더퀘스트로부터 오퀘스트라 4기 자격으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