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만나는 철학의 세계 - 삶에 철학이 들어오는 순간 ㅣ 처음 만나는 세계 시리즈 2
성창원 지음 / 북플레저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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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매일 수많은 판단을 내린다. 무엇을 좋아할지, 누구의 말을 믿을지, 어느 쪽이 옳다고 여길지 결정하며 살아간다. 대부분의 선택은 너무 빠르게 이루어져 그 아래 놓인 이유까지 들여다볼 기회가 드물다. 그러나 자신의 판단에 ‘왜’라는 말을 붙이는 순간 익숙했던 확신은 조금 복잡해진다. 좋은 결과를 만들었다면 그 행동은 옳은가. 사랑하는 사람을 다른 사람보다 우선하는 것은 공평하지 않은가.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는 어디까지 인정되어야 하는가. 철학은 삶과 동떨어진 곳에서 만들어진 추상적인 언어처럼 보이지만, 실은 이렇게 당연하다고 여겼던 판단의 근거를 살피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성창원의 『처음 만나는 철학의 세계』는 바로 그 ‘왜’를 스물세 개의 물음으로 펼쳐놓는다. 행복에서 시작한 이야기는 도덕과 책임, 약속과 미래 세대, 죽음과 전쟁, 정의와 국가를 지나 AI와 인간의 관계에 닿는다. 각각의 물음 앞에는 오래 축적된 철학적 논쟁이 자리하지만 책이 독자를 데려가는 곳은 철학자의 결론보다 논쟁이 만들어지는 과정이다. 하나의 주장에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여긴 순간 반대편에서 또 다른 이유가 모습을 드러낸다. 그 사이를 오가다 보면 처음에는 분명했던 판단의 윤곽도 차츰 복잡해진다. 이미 가지고 있던 확신을 꺼내어 살피고, 그 확신이 어디까지 견딜 수 있는지 시험하는 일이다.

좋은 결과를 만드는 쪽을 선택하면 된다고 생각하면 도덕은 한결 명료해 보인다. 더 많은 사람이 행복해지는 방향을 찾고 그 결과를 향해 움직이면 된다. 그러나 그 행복을 위해 한 사람의 권리를 희생해야 하는 순간 계산법은 달라진다. 그렇다면 누구도 수단으로 삼지 않겠다는 원칙을 세우면 해결될까. 이번에는 원칙을 지킨 결과로 더 큰 고통이 발생하는 상황이 기다린다. 결과주의가 선택이 만들어낼 결과의 무게를 보여준다면, 의무론은 그 결과와 함께 고려해야 할 행위의 원칙과 인간에 대한 의무를 불러온다. 여기에 관계주의는 판단의 시선을 ‘나와 타인이 서로에게 어떤 이유를 제시할 수 있는가’라는 관계의 문제로 옮겨놓는다. 이들 사이의 논쟁에서 중요한 것은 어느 쪽을 빠르게 선택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의 가치로 삶의 모든 선택을 환산하기 어려운 까닭을 이해하는 데 있다. 도덕적 갈등은 악한 선택을 피하는 순간보다 소중한 두 가치 가운데 하나를 더 무겁게 들어야 하는 순간에 훨씬 첨예해진다.

윤리의 저울은 모든 사람을 같은 무게로 올려놓으려 하지만, 우리의 마음은 늘 가까운 쪽으로 기운다. 가족의 고통은 낯선 사람의 고통보다 가까이 느껴지고, 오늘 발생하는 손실은 수십 년 뒤 누군가가 감당할 손실보다 절박하게 다가온다. 그렇다면 책임에도 거리가 있을까. 사랑하는 사람을 특별히 대하는 마음과 모두를 공평하게 대해야 한다는 원칙 사이에는 얼마만큼의 간격이 허용될까. 아직 태어나지 않은 미래 세대에게 남겨놓은 위험은 현재의 우리가 얼마나 짊어져야 할까. 책에서 서로 다른 장에 놓인 가족, 타인에 대한 도움, 미래 세대, 위험과 전쟁의 문제는 이 물음을 사이에 두면 하나의 긴 선으로 이어진다. 인간은 가까운 것에 더 크게 반응하지만, 윤리의 범위는 감정이 닿는 거리보다 멀리 뻗어 있다. 한스 요나스가 기술 문명의 힘이 커질수록 책임의 시간 또한 미래로 확장되어야 한다고 보았듯, 지금의 선택은 아직 만나지 못한 사람의 삶에도 이미 흔적을 새긴다.

그 거리가 생명과 자유의 경계에 닿으면 선택의 무게도 달라진다. 자신의 생명을 결정할 자유와 생명을 보호해야 한다는 의무가 만나는 안락사의 문제, 공동체를 지켜야 한다는 명분과 인간의 생명이 충돌하는 전쟁, 자유로운 표현과 타인에게 가해지는 해악이 맞서는 상황에서는 평소 나란히 간직했던 가치들이 서로 다른 선택을 요구한다. 이때 철학은 극단적인 사례를 통해 우리가 가진 원칙의 강도를 측정한다. ‘자유는 중요하다’는 말은 쉽게 할 수 있지만, 그 자유가 누군가의 안전을 침범하는 순간에도 같은 원칙을 유지할 수 있는지 살펴야 한다. 생명의 존엄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에게도 자신의 고통과 죽음을 결정하려는 타인의 자율성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가 남는다. 하나의 가치에 동의하는 일보다 그 가치가 다른 가치와 맞닿았을 때 어디까지 적용될 수 있는지를 따지는 과정에서 철학적 판단의 어려움이 드러난다.

성창원의 설명은 쉽게 읽히지만 생각은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 일상의 사례가 먼저 등장하고 철학적 개념과 여러 입장이 뒤따르기 때문에 독자는 개념을 이해하기 전에 이미 상황 속에서 어느 쪽인가를 선택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리고 철학자들의 논쟁을 따라가는 동안 처음의 선택으로 돌아가 그 근거를 다시 살펴보게 된다. 쉬운 언어는 사유의 깊이를 덜어내는 장치보다 깊은 곳까지 독자를 데려가기 위한 통로로 쓰인다. 각 파트의 인포그래픽은 이러한 사유의 흐름을 한눈에 펼쳐놓는다. 행복을 다루는 쾌락주의와 욕구 충족설에서 칸트의 정언명령, 스캔런의 관계주의, 롤스의 정의론과 계약론에 이르기까지 앞에서 만난 개념은 뒤의 문제 속에서 다시 호출되고 다른 의미를 얻는다. 철학 이론이 별개의 지식으로 머무는 대신 책임과 약속, 편향과 미래 세대 같은 구체적인 문제를 바라보는 여러 개의 좌표가 되는 셈이다. 입문이라는 말의 의미도 여기서 달라진다. 철학의 문턱을 낮추는 친절은 개념을 단순하게 만드는 데 머무르지 않고, 독자가 자신의 힘으로 그다음 사고를 이어갈 수 있게 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마지막에 이르면 책은 AI 시대의 프라이버시와 인간과 로봇의 관계를 향한다. 홀로 있을 권리는 개인의 정보를 얼마나 감출 수 있는가를 넘어, 자신의 삶에 대한 접근과 통제의 범위를 누가 결정하는가라는 권리의 문제로 이어진다. 더 흥미로운 것은 앞에서 인간관계를 설명했던 ‘편향성’이 로봇과의 관계에서 다시 호출된다는 점이다. 우리는 가까운 사람을 특별히 대하고 그에게 더 많은 관심과 애정을 기울인다. 그런데 인간이 로봇에게 같은 애정을 느끼고, 로봇 역시 그것에 맞추어 애정을 표현한다면 둘 사이에는 진정한 관계가 형성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책은 여기서 관계의 쌍방향성을 들여다본다. 인간의 편향된 애정에 반응하도록 설계된 로봇의 애정과 서로가 서로를 특별한 존재로 대하는 인간관계 사이에는 ‘관계’라는 말만으로 지우기 어려운 차이가 생긴다. 이 물음은 앞에서 반복해온 ‘이유’의 문제와도 이어진다. 이제 AI는 어떤 판단에 여러 근거를 제시하고, 반론을 구성하며, 서로 충돌하는 윤리 이론까지 비교할 수 있다. 관계의 언어 역시 점점 능숙하게 수행한다. 그렇다면 이유를 말하고 애정을 표현하는 행위가 정교해질수록 인간의 판단과 관계를 인간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인간은 자신이 선택한 이유 이후의 시간을 살아간다. 그 판단으로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선택의 결과를 함께 겪으며, 자신의 이유가 타인에게 미친 몫까지 다음 삶 속으로 가져간다. 관계 역시 상대의 반응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행동을 다시 조정하는 시간 속에서 만들어진다. 책이 AI 시대에 프라이버시라는 권리와 관계의 쌍방향성을 함께 꺼내놓는 순간, 인간의 자율성과 관계는 결국 ‘나의 삶을 누가 결정하는가’와 ‘나는 누구와 서로의 삶에 참여하는가’라는 두 방향의 문제로 만난다.

『처음 만나는 철학의 세계』의 스물세 개 물음을 지나왔다고 해서 선택이 수월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행복을 말할 때 도덕을 함께 보게 되고, 자유를 선택할 때 책임의 범위를 헤아리게 되며, 옳다고 믿는 순간에도 그 믿음을 지탱하는 이유를 한 번 더 살피게 된다. 철학은 삶을 명료한 답안으로 정리하기보다 판단 하나에 포함된 사람과 가치와 결과를 더 많이 보게 만든다. 그렇게 더 많이 보게 된 사람에게 선택은 이전보다 무거워진다. 삶은 그 무게가 충분히 계산될 때까지 기다려주지 않는다. 우리는 불완전한 이해 속에서도 누군가를 돕거나 외면하고, 약속을 지키거나 어기며, 어떤 가치를 다른 가치보다 앞에 놓는다. 그때 철학이 할 수 있는 일은 선택의 부담을 덜어주는 데 있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고른 답이 어떤 이유 위에 놓여 있는지, 그 이유가 타인의 삶 앞에서도 설명될 수 있는지 계속 살피게 하는 것. 어쩌면 ‘처음 만나는 철학’의 처음은 철학자의 이름을 처음 외우는 순간보다, 당연했던 자신의 판단 앞에 멈춰 서서 그 이유의 무게를 처음 헤아리는 순간에 더 잘 어울린다.

✏️소정의 원고료와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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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해부학 - 완전한 질서 너머 삶의 의미를 찾아서
가브리엘 웨스턴 지음, 김성훈 옮김 / 더퀘스트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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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호사는 근무를 교대할 때마다 환자를 인계한다. 진단명과 수술명, 검사 결과, 투약과 처치, 앞으로의 치료 계획이 다음 근무자에게 전달된다. 정확한 정보가 끊김 없이 이어져야 안전한 간호도 이어질 수 있다. 인계를 모두 듣고 나면 머릿속에는 몇 개의 문장으로 정리된 사람들이 남는다. 골절로 수술한 환자, 안면마비로 입원한 환자, 어느 수치의 변화를 지켜봐야 하는 환자. 그런데 병실 문을 열고 처음 마주하는 순간부터 그 문장들은 조금씩 길어진다. 단발머리가 유난히 잘 어울리는 사람, 대화할 때 꼭 손을 잡는 사람, 무심하게 툴툴거리면서도 간호사가 돌아설 때마다 고맙다는 말을 덧붙이는 사람. 인계받은 정보는 모두 정확했지만, 그중 어느 것도 한 사람의 전부를 말해주지는 않았다.

가브리엘 웨스턴의 『인생의 해부학』은 바로 그 거리에서 시작하는 책처럼 읽힌다. 외과의사에게 몸은 끊임없이 관찰하고 판단해야 하는 대상이다. 피부를 열고, 뼈와 장기를 보고, 혈액과 조직의 상태를 살피며, 정상과 비정상을 구별한다. 의학은 몸을 세밀하게 나눌수록 더 많은 것을 알아냈고, 그 지식으로 수많은 생명을 살려왔다. 그러나 웨스턴은 『Alive』라는 제목을 붙인 책의 머리말을 ‘죽음’에서 시작한다. 의학 교육에서 만났던 해부학 역시 살아 있는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 죽은 몸을 펼쳐놓는 학문이었다. 이 역설은 책 전체를 움직인다. 죽은 몸을 통해 우리는 살아 있는 인간을 어디까지 알 수 있는가. 피부와 뼈, 자궁과 폐, 뇌와 심장을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게 되었을 때 한 인간에 대해서도 그만큼 많이 알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웨스턴은 뼈에서 심장까지 열한 개의 신체 부위를 지나며 해부학을 다시 살아 있는 사람에게 돌려준다. 뼈는 죽음 뒤에 남는 단단한 구조물이면서 살아 있는 동안 끊임없이 재생되고, 피부는 내부와 외부를 구분하면서 세계를 만지는 접촉면이 된다. 자궁은 임신과 출산에 따라 놀라운 변형을 겪으며, 폐는 인간의 몸과 바깥의 공기를 매 순간 교환한다. 간의 일부는 한 사람의 몸을 떠나 다른 사람의 생명을 유지할 수 있고, 심장은 오랫동안 생명의 상징이었던 동시에 의학에서는 정교한 펌프로 이해되어왔다. 이 기관들에는 생물학적 기능만 존재하지 않는다. 성과 정체성, 임신과 출산, 질병과 노화, 환경과 계급, 돌봄과 죽음이 몸의 구조 위에 겹쳐진다. 해부학 도판에서 명료하게 구분되던 기관들은 실제 삶으로 돌아오는 순간 한 사람의 기억과 관계와 시간 속에 놓인다.

몸을 이해하는 두 가지 방식 사이에는 오래된 철학적 문제가 있다. 우리는 몸을 소유하는가, 몸으로 존재하는가. 메를로퐁티에게 몸은 세계 안에 놓인 하나의 사물이면서 동시에 세계를 경험할 수 있게 하는 조건이었다. 손은 만질 수 있는 신체인 동시에 무언가를 만지는 신체이고, 눈은 타인에게 보이면서 세계를 바라본다. 자신의 몸에서 완전히 빠져나와 그것을 순수한 대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몸은 언제나 ‘나’의 편에 있으면서 세계의 편에도 놓여 있다. 그렇기에 질병은 고장 난 부품 하나의 문제로 머물지 않는다. 걷던 사람이 걷지 못하게 되고, 숨쉬던 사람이 숨을 의식하게 되고, 자신의 심장을 잊고 살던 사람이 심장의 박동을 두려움 속에서 듣기 시작하면 세계를 경험하는 방식까지 달라진다. 웨스턴은 이 두 위치를 여러 번 오간다. 외과의사로서 다른 사람의 몸을 열어보았고, 어머니로서 임신과 출산을 자신의 몸으로 통과했으며, 가족의 질병 앞에서는 보호자가 되었고, 자신의 심장 질환 앞에서는 환자가 된다. 의사였을 때 알고 있던 심장과 자신의 가슴속에서 이상을 일으키는 심장은 해부학적으로 같은 기관이다. 그러나 두 심장을 아는 방식은 같을 수 없다. 지식은 질환의 원인과 경과를 설명할 수 있지만, 그 질환과 함께 살아갈 사람이 느끼는 시간까지 대신 살아주지는 못한다. 의학적 지식이 부족해서 생기는 간극도 아니다. 인간에게 몸은 관찰하는 대상인 동시에 그 관찰을 수행하는 자신의 자리이기 때문이다.

병원에서 심한 욕창을 소독할 때면 그 사실이 낯선 방식으로 다가오곤 했다. 오래 누워 지내는 환자의 피부는 지속되는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진다. 손상이 깊어지면 피부 아래의 조직을 지나 근육과 힘줄, 뼈까지 드러난다. 처음 마주했을 때의 충격은 반복되는 업무 속에서 점차 전문적인 관찰로 바뀐다. 상처의 깊이와 색, 삼출물과 괴사 정도를 확인하고 소독한 뒤 변화 양상을 기록한다. 환자에게 자신의 몸이 그렇게 변했다는 사실은 커다란 충격이지만, 간호사는 그 충격으로부터 어느 정도 거리를 확보해야 정확하게 돌볼 수 있다. 그러다 간호기록을 작성하며 문득 떠오르던 생각이 있었다. 내 피부 아래에도 저런 근육과 저런 뼈가 있다.

그 순간 타인의 몸을 관찰하던 시선은 관찰하는 사람의 몸으로 돌아온다. 피부는 나와 타인을 분명하게 구별하는 경계처럼 보이지만, 그 아래에서 만나는 신체는 오히려 인간이 공유하는 취약성을 드러낸다. 다른 사람의 뼈를 보면서 자신의 뼈를 의식하고, 타인의 상처를 처치하는 손 역시 상처 입을 수 있는 피부로 덮여 있다. 웨스턴이 뼈와 피부를 바라보며 발견하는 생명도 이와 이어져 있다. 가장 단단해 보이는 뼈조차 살아 있는 동안 계속 허물어지고 다시 만들어지며, 몸의 경계를 이루는 피부도 완전히 닫힌 벽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몸은 단단하게 완성된 구조물보다 끊임없이 변화하고 교환하며 가까스로 자신을 유지하는 생명체다. 타인의 몸을 오래 들여다볼수록 인간의 몸에 대한 지식이 늘어나는 동시에 자신의 유한성도 선명해진다.

그렇게 매 순간 달라지는 몸 안에서 우리는 어떻게 어제와 같은 사람으로 살아가는가. 사람은 시간이 지나도 자신을 같은 사람이라고 여기지만 그동안 몸은 쉼 없이 달라진다. 세포가 교체되고, 상처가 생기고, 흉터가 남으며, 임신과 출산을 겪고, 질병을 앓고, 늙는다. 어떤 변화는 너무 커서 이전까지 자신에 대해 가지고 있던 이해를 수정하도록 요구한다. 리쾨르가 인간의 정체성을 고정된 실체보다 시간 속에서 계속 구성되는 이야기와 연결했던 것도 이런 변화의 문제를 생각하게 한다. 어제와 오늘의 몸이 달라져도 우리는 그 변화들을 한 사람의 생애 안에 배열하며 ‘나’라는 연속성을 만들어간다. 질병은 그 서사에 예고 없이 끼어드는 사건이고, 회복은 언제나 질병 이전의 몸으로 돌아가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달라진 몸을 자신의 생애 안에 다시 배치하고, 그 몸으로 가능한 삶의 문법을 새로 익혀야 하는 경우도 있다.

타인의 몸을 읽던 해부학은 저자 자신의 심장에 이르러 읽는 사람과 읽히는 몸의 자리를 뒤바꾼다. 다른 사람의 몸에서 병을 찾아내고 고치는 데 익숙했던 사람이 자신의 몸에서 예측할 수 없는 변화를 경험하면서 해부학의 방향도 달라진다. 몸에 관한 지식은 이제 관찰의 언어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무엇이 몸에서 일어나고 있는가’와 함께 ‘이 몸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가 따라온다. 신체의 변화가 존재 전체를 흔드는 까닭도 몸과 삶을 서로 떼어놓을 수 없는 데 있다. 우리는 몸을 통과해서만 세계에 닿을 수 있기에, 몸의 변화는 자신이 살아가던 세계의 크기와 속도, 가능성의 범위를 함께 바꾼다. 다시 살아간다는 것은 변화를 없었던 일로 만드는 일이 아니라 달라진 신체와 세계 사이에서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된다.

머리말의 ‘죽음’에서 시작해 맺음말의 ‘삶’으로 향하는 구성은 생과 사를 가르는 경계를 다시 들여다보게 한다. 마지막에 등장하는 장기이식에서 한 사람의 죽음 이후 적출된 심장은 몸 밖에서도 뛰며 또 다른 사람의 생명을 향한다. 죽은 몸과 살아 있는 심장이 한 장면에 공존한다. 심장이 뛴다는 사실만으로 한 사람의 삶 전체를 설명할 수 없고, 심장이 멈췄다는 사실만으로 그 사람이 다른 사람들과 맺어온 관계의 흔적까지 사라졌다고 말할 수도 없다. 의학은 생과 사를 판단할 기준을 필요로 하지만, 한 인간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경험은 그 기준보다 훨씬 넓은 곳에서 이루어진다.

신생아중환자실에서 근무하던 시절, 전날까지 돌보았던 아기가 다음 출근 전에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적이 있다. 전날까지 작은 몸을 꼬물거리던 아기. 출근 후 맡게 된 일은 임종간호였다. 몸에 연결되어 있던 관들을 하나씩 제거하고, 부모가 가져온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힌 뒤, 쓰던 젖병과 남은 기저귀를 챙겼다. 그 아기는 퇴근 후 틈틈이 떠서 만든 첫 모자를 씌워주었던 아기이기도 했다. 체온을 유지하기 어려운 아이들에게 씌워주기 위해 만들었던 작은 모자였다. 의료기기가 하나씩 사라지고 부모가 준비한 옷이 그 자리를 채우는 동안, 환자로 돌보던 작은 몸을 다시 누군가의 아이로 돌려보내는 듯한 시간이 흘렀다. 그 사실을 알고 있던 부모가 고맙다는 말을 하며 울었고, 잡은 손 사이에서 의료인과 보호자라는 구분도 잠시 희미해졌다.

그 기억에서 살아 있음은 하나의 장기가 수행하는 기능으로만 떠오르지 않는다. 누군가의 체온을 지키기 위해 모자를 뜨는 시간, 불편한 몸의 자세를 바꾸어주는 손, 대화를 나누기 위해 잡은 손, 떠나는 사람에게 마지막 옷을 입혀주는 손까지 몸과 몸 사이에서 오간 행위들이 함께 떠오른다. 인간의 신체는 한 사람에게 속하지만 평생 완전히 홀로 유지되지는 않는다. 태어날 때부터 타인의 손에 받아들여지고, 아플 때 누군가에게 몸을 맡기며, 때로는 다른 사람의 장기를 받아 살아간다. 독립된 개체라고 믿었던 몸에는 이미 수많은 타인의 시간과 접촉이 스며 있다. 돌봄은 그 관계성을 가장 물질적인 방식으로 보여주는 행위다.

그래서 『인생의 해부학』에서 해부학은 인간을 조각내는 데서 완성되지 않는다. 뼈와 피부와 심장을 따로 떼어 이해했던 해부학의 언어는 살아 있는 몸 안에서 다시 하나의 생애로 모인다. 동시에 그렇게 분리된 기관들은 한 사람의 몸 안에서 함께 아프고 변화하고 늙으며, 그 사람의 기억과 관계 속에서 각기 다른 의미를 얻는다. 인계에서는 몇 줄의 의료정보였던 환자가 병실 문을 열면 목소리와 표정과 습관을 가진 사람으로 나타났던 것처럼, 웨스턴의 해부학에서도 기관의 이름 뒤에서 한 사람의 생애가 모습을 드러낸다.

의학은 몸을 나누어 이해함으로써 인간을 살려왔다. 삶은 그렇게 나누어진 것들을 한 사람 안에서 함께 살아내는 시간이다. 몸에 관해 안다는 것은 장기의 위치와 기능을 익히는 데 그치지 않고, 그 몸이 변화할 때 한 사람의 세계도 함께 움직인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일까지 포함한다. 살아 있는 몸은 계속 바뀌고 손상되고 회복하며 이전과 다른 상태로 우리를 데려간다. 그때 필요한 삶의 태도는 변화 이전의 몸만을 자신이라고 고집하는 데서 생겨나기보다, 달라진 몸 역시 자신의 시간 안에 받아들이며 다시 세계와 관계를 맺는 데서 만들어진다.

『인생의 해부학』이 죽은 몸에서 시작해 살아 있음에 도착하는 동안 해부되는 것은 신체만이 아니다. 몸과 자아, 의학과 삶, 관찰하는 사람과 관찰되는 사람 사이에 그어두었던 구분도 함께 펼쳐진다. 그 안에서 몸은 소유물이면서 존재의 방식이고, 타인과 나를 가르는 경계이면서 서로의 취약성을 알아보게 하는 공통의 조건이 된다. 한 사람을 안다는 것은 그 사람의 몸을 아는 일보다 훨씬 넓다. 그러나 몸을 지나지 않고서는 그 사람의 삶에도 닿을 수 없다. 살아간다는 말이 언제나 몸을 전제로 한다면, 해부학이 향해야 할 마지막 자리에는 장기의 이름보다 그 몸으로 살아온 한 사람이 놓여 있어야 한다.

✏️도서출판 더퀘스트로부터 오퀘스트라 4기 자격으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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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 숨 섬 - 마음을 찾는 사람들
김한수 지음 / 생각정원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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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는 흔들린다. 물결이 솟았다가 가라앉고 다시 밀려오는 운동을 멈추는 순간, 파도는 파도가 아니게 된다. 사람의 마음도 크게 다르지 않다. 태어날 때부터 완성된 사람은 없으며, 살아 있는 동안 우리는 끊임없이 흔들린다. 불안과 실패, 상실과 슬픔이 밀려왔다 빠져나가고, 때로는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거센 물결이 삶의 중심을 휩쓸기도 한다. 그러니 평온을 한 점의 동요도 없는 상태라고 여긴다면 인간은 평생 그곳에 도착할 수 없을 것이다. 필요한 것은 파도를 없애는 힘보다 물결이 높아졌을 때 다시 자신의 호흡을 찾아가는 힘이다. 거친 파도를 고요히 흐르는 물로 되돌리는 일. 『쉼 숨 섬』의 스물일곱 사람은 저마다 다른 자리에서 그 방법을 연습해왔다.

김한수는 지난 2년간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섯 갈래로 엮는다. 종교인과 명상가만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만화가 이현세와 래퍼 김하온, 야구선수 한유섬, 모델 박우성을 비롯해 정신과 의사와 심리학자, 과학자와 화가가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본 시간을 이야기한다. 살아온 경로도, 믿는 종교도, 마음을 다루는 방식도 서로 다르다. 누군가는 명상하고 누군가는 기도하며, 또 누군가는 자신의 호흡과 감각을 오래 바라본다. 그들의 이야기를 하나로 이어주는 것은 완성된 평온보다 반복되는 연습이다. 이미 흔들림을 극복한 사람들이 자신의 비법을 알려주는 자리가 아니라, 흔들릴 때마다 자신에게 돌아가는 방법을 익혀온 사람들이 각자의 경험을 내어놓는 자리.

그래서 이 책에서 ‘쉼’은 삶의 바깥으로 물러나는 시간이 아니다. 걷기를 포기하는 정지도 아니다. 다음 걸음을 내딛기 위해 지금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는 간격이다. ‘숨’은 그 간격을 현재와 이어준다. 생각은 지나간 실패를 되짚고 아직 오지 않은 불안을 앞당겨 살아내지만, 호흡은 언제나 지금의 몸에서 일어난다. ‘섬’ 역시 세상과 단절된 고립으로 읽히지 않는다. 바다가 거칠어졌을 때 잠시 발을 딛고 자신의 좌표를 확인할 수 있는 내면의 자리다. 쉼과 숨과 섬은 서로 다른 세 개의 처방보다 하나의 운동을 이루는 세 순간처럼 이어진다. 멈추고, 바라보고, 다시 선다.

그 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마음속에서 일어난 것에 곧바로 반응하지 않는 것이다. 불안이 찾아오면 불안해하고, 분노가 솟으면 분노하며, 실패를 경험하면 자신의 삶 전체가 실패했다고 판단하기 쉽다. 감정과 사건 사이에 거리가 사라질수록 하나의 순간은 빠르게 삶 전체의 크기로 팽창한다. 『쉼 숨 섬』에서 반복되는 명상과 자기 관찰은 그 사이에 아주 작은 틈을 만든다. 지금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 그것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얼마나 큰지 먼저 바라보는 시간. 감정을 제거하지 않은 채 감정과 자신 사이에 관찰할 수 있는 거리를 마련하는 것.

자동차의 사이드미러에는 ‘사물이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습니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마음에도 이와 비슷한 원근의 착시가 있다. 마음속에서 보이는 것의 크기와 실제로 그것이 차지하는 크기가 늘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당장의 불안이 너무 커 보여 삶 전체를 뒤덮기도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겨 오래 방치했던 상처가 예상보다 깊은 곳까지 뿌리내리고 있기도 하다. 어떤 것은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고 어떤 것은 훨씬 멀리 있다. 고통의 크기와 거리에는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의 인식이 개입한다. 그러므로 관찰한다는 것은 마음의 원근법을 다시 맞추는 작업이다.

현상학에서는 이미 알고 있다고 믿는 판단을 잠시 유보하고 눈앞에 나타나는 것을 살피는 태도를 중요하게 다룬다. 마음을 관찰하는 과정에도 비슷한 움직임이 있다. 후설이 말한 ‘판단중지’는 경험 자체를 부정하거나 감정을 억누르는 태도가 아니라, 대상에 관해 이미 내려진 해석과 판단을 잠시 괄호 안에 넣어두는 일이다. 그렇게 잠시 판단을 멈추면 대상에 대한 익숙한 해석을 앞세우기 전에 ‘그것이 지금 나에게 어떻게 경험되고 있는가’를 들여다볼 여지가 생긴다. 마음을 관찰하는 일 역시 감정의 존재를 지우기보다 감정이 의식 안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지를 살피는 데서 시작한다. ‘나는 불안한 사람이다’라는 판단과 ‘지금 내 안에 불안이 일어나고 있다’는 관찰 사이에는 작은 차이가 존재하지만, 그 작은 거리가 사람을 전혀 다른 위치에 세운다. 전자에서는 감정이 곧 자신이 되고, 후자에서는 감정을 바라보는 자신이 남는다. 경험하는 감정과 그것을 경험하는 자신을 완전히 겹쳐놓지 않을 때, 하나의 감정은 정체성 전체를 점유하지 못한다. 불안이 없어지지 않아도 불안이 나의 전부일 필요는 없어진다. 고통 역시 삶에 존재하면서 삶 전체를 대표하지 않을 수 있다. 책 속 사람들이 반복해서 명상하고 기도하며 자신을 살피는 이유도 한 번의 깨달음으로 모든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서라기보다, 매번 흐트러지는 마음의 초점을 다시 맞추기 위해서일 것이다.

자신을 제대로 바라보는 일은 타인을 바라보는 방식에도 이어진다. 인간은 자신의 취약함을 견디지 못할수록 다른 사람의 취약함에도 쉽게 인색해진다. 부족함을 실패로 받아들이고 흔들림을 결함으로 판단하는 시선은 자신에게만 머물지 않는다. 반대로 자신의 두려움과 실패, 부끄러움까지 인간에게 가능한 경험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하면 타인의 불완전함 앞에서도 조금 더 넓은 자리를 내어줄 수 있다. 자신을 돌보며 넓어진 내면은 그렇게 타인의 불완전함까지 받아들일 여백을 갖는다. 자기연민은 스스로를 특별히 아끼는 태도보다 인간이 취약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자신에게도 허락하는 데서 시작하고, 그 허락은 다른 사람에게도 건너간다.

안셀름 그륀 신부가 타인의 부족함을 견디기 어려워했던 시간을 지나 다른 사람을 있는 모습으로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간 이야기나, 저마다 실패와 슬럼프, 상실을 경험한 이들의 고백은 수행을 완성의 언어에서 내려놓는다. 이들은 마음의 파도를 완전히 정복한 사람들이 아니다. 자신도 흔들린다는 사실을 알고 그 흔들림을 대하는 태도를 조금씩 바꾸어온 사람들이다. 자신을 받아들이는 데에도 연습이 필요하고, 타인을 포용하는 데에도 반복이 필요하다.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은 어느 날 획득하여 소유할 수 있는 능력보다 매일 조금씩 길을 내는 행위에 해당한다.

그런 의미에서 여러 종교의 수행을 함께 다루는 4부는 특히 인상적이다. 불교의 선과 가톨릭의 관상, 개신교의 묵상과 원불교의 좌선은 서로 다른 역사와 교리를 지닌다. 각 전통이 향하는 초월의 의미까지 하나라고 말한다면 그 차이를 지나치게 평평하게 만들게 된다. 그러나 서로 다른 이름의 신과 진리를 향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순간에는 닮은 움직임이 보인다. 멈추고, 침묵하고, 호흡하고, 듣는다. 즉각적인 판단을 내려놓고 자신보다 큰 무엇을 향해 감각을 연다. 수행은 이때 각 종교의 교리를 확인하는 행위인 동시에, 자신의 목소리만으로 가득했던 내면에 다른 존재가 들어올 여백을 마련하는 일이 된다. 기독교의 기도가 신을 향하고 불교의 수행이 마음과 존재를 바라보는 서로 다른 전통 위에 놓여 있어도,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상태에서 벗어나려 한다는 점에서는 서로를 비추어볼 수 있다. 종교적 수행의 공통성을 찾는 일은 서로 다른 믿음을 하나의 결론으로 합치는 데 목적이 있지 않다. 그보다 인간이 자기 자신을 넘어서는 방식을 얼마나 오래 탐구해왔는지를 살피게 한다.

신의 존재를 확신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이러한 장면은 충분히 의미를 갖는다. 무엇을 믿는가와 별개로 인간이 아주 오래전부터 침묵과 기도와 명상을 반복해왔다는 사실은 인간의 내면이 무엇을 필요로 해왔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기 생각의 소음만으로 살아가기 어렵다. 때로는 말하기를 멈추고 듣는 시간이 필요하고, 자신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감각을 조금 느슨하게 만들 필요도 있다. 종교 경험을 철학과 심리학의 관점에서 탐구한 미국의 철학자이자 심리학자인 윌리엄 제임스가 제도와 교리만큼 개인이 직접 경험하는 종교적 삶에 관심을 두었던 까닭도 이런 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에게 종교는 제도의 바깥에서도 한 개인의 내면에서 실제로 경험되는 사건이었고, 중요한 것은 교리의 추상적 진술만큼 그것이 한 사람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키는가였다. 『쉼 숨 섬』에서 서로 다른 수행자들의 목소리를 함께 읽는 경험도 이와 맞닿는다. 서로 다른 종교의 수행을 나란히 바라보다 보면 신에 대한 합의보다 먼저, 자신의 한계를 넘어 더 넓은 존재와 연결되고자 했던 인간의 오래된 욕망이 보인다.

그 연결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다. 수행은 산속이나 명상실에 있는 동안에만 유효한 것이 아니다. 누군가의 말에 화가 솟는 순간, 실패가 자신의 가치를 흔드는 순간, 불안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를 현재로 끌고 오는 순간에 수행의 시간이 시작된다. 바로 반응하는 대신 잠시 바라보는 것. 불안의 모양과 색과 크기를 살펴보고 그것이 자신과 얼마나 가까운 곳에 있는지 가늠해보는 것. 그 짧은 시간 동안 고통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어도 고통과 자신 사이의 관계는 달라질 수 있다. 관찰하는 순간 인간은 자신의 감정에 끌려가는 자리에서, 그것과 함께 살아갈 방법을 선택하는 자리로 조금 이동한다.

이 과정에 완성은 없다. 오늘 자신을 잘 이해했다고 내일도 같은 방식으로 자신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한 번 평온을 경험했다고 다음 파도가 찾아오지 않는 것도 아니다. 불교가 오래전부터 모든 것이 변한다는 무상을 이야기해온 것처럼 마음 역시 계속 움직인다. 감정이 움직이고 관계가 변하며 삶의 조건도 달라진다. 그래서 수행에는 반복이 필요하다. 한 번의 거대한 깨달음보다 다시 한 호흡으로 돌아오는 일이 중요해진다. 흐트러지면 살피고, 넘어지면 일어나고, 다시 흔들리면 또 자신의 자리로 돌아오는 것. 스물일곱 사람의 이야기는 서로 다른 언어로 그 반복을 보여준다.

물은 움직인다. 파도가 되기도 하고 강이 되기도 하며, 어느 순간에는 거세게 소용돌이친다. 물을 영원히 고요하게 만들 수는 없다. 움직임을 완전히 잃고 한곳에 고인 물은 언젠가 탁해지고 썩는다. 삶도 그러하다. 고통을 없애야 앞으로 갈 수 있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고통이 사라지는 날만 기다리며 같은 자리에 서 있게 된다. 『쉼 숨 섬』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고통이 존재하는 동안에도 다시 흐를 수 있는 방법에 관한 것이다. 평온은 아무것도 흔들리지 않는 상태로 주어지지 않고, 수없이 흔들리면서도 돌아올 곳을 알고 있다는 감각 속에서 조금씩 만들어진다. 잠시 쉬어 물결을 가라앉히고, 한 번의 숨으로 지금의 자신을 확인하고, 자신의 섬에 발을 딛는다. 그리고 다시 움직인다. 한평생을 잘 살아내야 한다는 생각은 너무 크고 먼 시간을 한꺼번에 짊어지게 하지만, 한 호흡은 지금 이 자리에서 감각할 수 있다. 사람은 그렇게 한 호흡을 지나 다음 호흡으로, 한 번의 흔들림을 지나 다음 흐름으로 살아간다. 쉼과 숨과 섬은 그렇게 흔들리는 삶 속에서 자신의 물길을 되찾게 하는 세 개의 좌표가 된다.

✏️도서출판 생각정원으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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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생의 언어 - 소리, 몸짓, 냄새로 소통하며 진화해 온 생물들
롭 던 지음, 송근아 옮김 / 흐름출판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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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오래도록 독립을 힘의 언어로 사용해왔다. 홀로 설 수 있다는 것은 성숙과 능력의 증거가 되었고, 문명의 발전 역시 자연의 제약에서 얼마나 멀리 벗어났는가로 설명되곤 했다. 그러나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독립했다는 감각과 실제 인간이 살아가는 방식 사이에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도시의 가장 높은 건물 안에서도 우리는 식물이 만든 산소를 호흡하고, 다른 생명이 길러낸 것을 먹으며, 눈에 보이지 않는 미생물과 하나의 몸을 공유한다. 문명이 정교해질수록 의존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그 과정이 인간의 눈에서 멀어진 것이다. 『공생의 언어』는 자연과 인간 사이의 단절보다, 여전히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자신을 독립된 존재로 상상하는 인간의 역설을 들여다본다.

이 역설은 생명의 단위를 바라보는 방식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하나의 개체는 어디에서 시작해 어디에서 끝나는가. 자신의 힘만으로 생존하는 완결된 생명이라는 개념은 실제 생태계 앞에서 흐릿해진다. 인간의 몸에도 수많은 미생물이 살아가고, 서로 다른 종은 먹이와 서식처를 주고받으며 때로 상대가 없이는 지금과 같은 삶을 지속하기 어렵다. ‘나’라고 부르는 존재조차 이미 다른 생명의 활동을 품고 있다면 관계는 완성된 존재들이 뒤늦게 맺는 부수적인 연결로만 볼 수 없다. 생명은 관계 속에서 자신의 형태와 가능성을 얻어왔고, 살아간다는 것은 이미 누군가의 삶에 기대는 일이기도 하다.

이렇게 바라본 생명의 역사는 우리가 익숙하게 배워온 경쟁의 서사를 조금 다르게 읽게 한다. 살아남는다는 말에는 더 강한 것이 승리하고 약한 것은 도태된다는 문법이 깊이 스며들어 있다. 실제 자연에는 포식도 경쟁도 영역 다툼도 존재한다. 동시에 꽃과 수분매개자, 숙주와 미생물처럼 서로 다른 생명이 상대의 능력을 자신의 생존 조건으로 삼아온 역사도 존재한다. 한쪽은 승패가 분명하고 극적인 사건이 되지만 다른 한쪽은 일상의 지속 속에서 좀처럼 눈에 띄지 않는다. 『공생의 언어』가 상리공생을 자연사의 중심으로 불러오는 순간, 생존이라는 말의 의미도 넓어진다. 살아남은 존재의 강인함만큼 그 존재를 살아남게 한 관계를 함께 바라보는 일. 생명의 역사는 개체들의 계보인 동시에 서로가 서로의 조건이 되어온 관계들의 계보이기도 하다.

현대의 인간은 그 어느 시대보다 복잡한 생태적 관계에 의존하면서도 그 관계를 감각하기 어려운 환경에서 살아간다. 던이 타임스퀘어에서 바라본 풍경은 이 역설이 압축되어 있다. 도시의 불빛 아래 식물과 동물은 좀처럼 눈에 띄지 않지만 보이지 않는 미생물은 여전히 인간 곁에 존재한다. 식탁에 놓인 음식 뒤에는 토양과 작물, 수분매개자와 미생물이 있고, 마시는 물과 숨 쉬는 공기에도 다른 생명의 활동이 개입한다. 인간을 둘러싼 연결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그것을 직접 경험할 기회는 줄어들었다. 달라진 것은 연결의 정도보다 연결을 알아차리는 감각이다. 의존은 이어져도 그 대상은 시야에서 사라지고, 관계는 유지되어도 그 관계를 감각하는 능력은 희미해진다. 그렇게 인간은 수많은 존재와 함께 살아가면서 자신을 고립된 존재로 상상하게 되었다.

《아바타》의 판도라는 이러한 현대인의 생태적 고립을 반대편에서 비추는 세계처럼 읽힌다. 눈부신 자연을 구현한 기술의 힘 너머에는 생명과 직접 연결되고 서로의 신호를 몸으로 이해하는 세계가 있다. 나비족은 자연을 배경이나 자원으로 경험하지 않는다. 그들의 몸은 다른 생명과 접촉하고 그 접촉은 세계가 하나의 관계망이라는 사실을 감각하게 한다. 이들에게 연결은 자연에 관한 지식이나 관념으로 머무르지 않고 삶의 방식 자체를 구성한다. 다른 생명과 관계 맺는 일은 세계를 소유하고 관리하는 주체의 자리에서 벗어나 자신 역시 그 관계망에 속해 있음을 받아들이는 일이 된다. 최첨단 기술로 만들어낸 미래의 행성을 바라보며 현대인이 갈망하는 것이 오히려 아주 오래된 감각이라는 점도 인상적이다. 수많은 생명과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 자신이 혼자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는 감각. 판도라에 대한 동경에는 현대 문명이 희미하게 만든 생태적 친밀성에 대한 갈망도 섞여 있을 것이다. 눈앞에 펼쳐진 것은 먼 미래의 세계지만, 그 세계를 통해 되찾고 싶은 것은 인간이 다른 생명과 자신의 삶을 분리하기 이전부터 이어져 온 관계의 감각이다.

그 오래된 연결의 감각을 실제 생명의 세계에서 보여주는 존재가 원제의 꿀잡이새다. 꿀잡이새는 벌집을 발견하면 인간에게 신호를 보내고, 인간은 그 소리를 따라가 벌집을 연다. 인간은 꿀을 얻고 새는 인간이 열어놓은 벌집에서 밀랍을 얻는다. 서로 다른 두 종은 같은 언어를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상대의 신호를 의미로 받아들인다. 자연의 언어는 인간의 말과 문법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소리와 몸짓, 냄새와 화학물질, 이동과 계절의 리듬도 생명이 서로의 존재를 감지하고 반응하는 방식이다. 자연은 인간의 언어로 말하지 않을 뿐 수많은 신호를 끊임없이 주고받아왔다. 인간이 그 신호를 언어로 받아들이는 감각을 잃어갈수록 자연은 점차 침묵하는 세계처럼 인식된다. 그렇기에 공생의 출발에는 다른 생명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그들이 보내는 신호를 감지하는 ‘주의’가 놓인다. 인간의 삶이 어떤 존재들의 활동에 기대고 있는지를 인식하고, 타자를 인간에게 유용한 자원으로 번역하기 전에 그 존재가 살아가는 방식을 살피는 태도다. 듣는다는 행위는 여기에서 하나의 생태적 실천이 된다. 우리는 자연의 목소리를 대신해 말하기에 앞서 이미 도착하고 있는 수많은 신호를 들을 감각부터 회복해야 한다.

그리고 관계에는 생명체와 마찬가지로 사라질 가능성이 있다. 꿀잡이새가 살아 있어도 인간이 더 이상 그 부름을 듣지 않고 따라가지 않는다면 오랜 시간 두 종 사이에서 형성된 상호작용은 소멸한다. 종의 멸종만을 헤아려서는 포착하기 어려운 상실이다. 한 생명이 사라지지 않았어도 그 생명과 다른 존재 사이를 오가던 신호와 행동, 의존과 교환의 방식은 사라질 수 있다. 그렇다면 생태계를 보존한다는 말에는 개체와 종을 지키는 일뿐 아니라 생명 사이의 관계가 지속될 조건을 지키는 일도 포함되어야 한다.

인간의 특별함을 다른 생명보다 우월한 능력에서 찾는 대신, 롭 던은 어떤 관계를 만들어갈지 선택할 수 있다는 데서 찾는다. 이 선택은 공생을 아름다운 도덕적 이상으로 받아들이라는 요구와도 다르다. 자연에는 경쟁도 포식도 존재하며 모든 관계가 평화롭지도 않다. 중요한 것은 인간의 미래를 인간만의 이야기로 설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일이다. 기후와 생태계의 위기는 우리가 얼마나 많은 종을 구할 수 있는지만 묻지 않는다. 앞으로 어떤 생명들과 서로의 삶의 조건이 되어줄 것인지, 어떤 관계를 이어가고 어떤 관계를 새롭게 만들어갈 것인지까지 함께 생각하게 한다.

생명의 역사를 홀로 살아남은 자들의 기록으로만 읽으면 인간 역시 혼자 살아남아야 할 존재가 된다. 그러나 그 역사를 서로의 삶을 가능하게 해온 관계들의 기록으로 다시 읽는 순간 미래의 모습도 달라진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연으로 되돌아가는 낭만적인 회귀보다 이미 자연 안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감각하는 일일 것이다. 몸속의 미생물에서 숲의 균사망까지, 식탁의 작물에서 멀리서 인간을 부르는 한 마리 새까지 생명은 끊임없이 다른 생명에게 기대어 자신의 세계를 이어왔다. 꿀잡이새는 여전히 부르고 있다. 이제 우리가 다시 배워야 할 것은 그 오래된 언어를 듣는 법이다.

✏️흐름출판으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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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는 노래
최진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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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은 자신의 시간이 다시 올 때까지 기다린다. 쓰인 문장은 그대로여도 그것을 읽는 사람과 세계가 달라지고, 한때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의미가 새로운 시간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2011년에 처음 출간된 최진영의 『끝나지 않는 노래』가 15년을 건너 다시 독자에게 돌아왔다. 그사이 최진영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몸으로 감당하고, 살아남은 자의 고통을 쓰고, 무너진 세계에서도 서로를 돌보는 사람들을 거쳐 생명의 기원까지 자신의 문학을 넓혀왔다. 오래전부터 그의 소설을 읽어온 독자에게 이 책과의 재회가 각별한 이유도 그 시간에 있다. 한 권의 책이 처음 세상에 나왔을 때와 다시 돌아왔을 때 사이에는 작가가 써온 시간과 독자가 읽어온 시간이 함께 쌓여 있기 때문이다. 오래된 책의 귀환은 과거의 복원이면서 현재의 독서다. 같은 문장을 다시 읽는 일에는 그동안 흘러간 시간까지 함께 읽는 경험이 포함된다. 2026년의 『끝나지 않는 노래』는 그렇게 두 번째 시간을 얻었다.

1927년에 태어난 두자, 그의 쌍둥이 딸 수선과 봉선, 그리고 손녀 은하. 소설은 서로 다른 시대를 살아가는 여성들의 생을 따라 긴 시간을 건넌다. 이들을 묶어 ‘여성 3대’라고 부르면 간단하지만, 최진영은 그 간편한 호명에서 한 사람씩 꺼내온다. 두자에게는 두자의 시간이 있고 수선과 봉선에게는 각자의 욕망과 좌절이 있으며 은하에게도 자신의 오늘이 있다. 누군가를 엄마나 할머니라고 부르는 순간 우리는 자신과 맺은 관계를 통해 그를 이해하기 쉽다. 엄마에게 엄마가 아니었던 시간이 있었다는 사실, 할머니에게도 누군가의 딸이었던 시절과 젊은 몸과 욕망이 있었다는 사실은 그 익숙한 호칭 뒤로 밀려난다. 그래서 이 소설이 긴 시간을 거슬러 하는 일은 한 가족의 역사를 정리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관계의 이름에 가려진 고유한 생을 다시 호명하는 일. 두자. 수선. 봉선. 은하. 이름을 되돌려주는 순간 역할로 기억되던 사람에게 한 사람의 생애가 돌아온다.

그 생애를 옥죄는 것은 언제나 거대한 사건의 모습으로 찾아오지도 않는다. 먹을 것의 개수를 헤아리는 눈, 집 안의 한 공간, 밥과 노동과 결혼과 출산처럼 너무 일상적이어서 역사라고 부르지 않았던 것들이 한 여성의 세계를 결정한다. 특히 아픈 것은 여성을 억압하는 오래된 질서가 여성과 여성 사이에서도 되풀이된다는 사실이다. 시어머니와 며느리, 어머니와 딸의 관계에는 사랑만큼이나 오래된 규범이 스며 있다. 자신도 그 질서 안에서 상처 입은 사람이 어느 순간 다음 사람에게 같은 규칙을 요구한다. 폭력은 누군가의 악의만으로 지속되지 않는다. 오랫동안 당연하다고 배운 것이 생활의 규칙이 되고, 그 규칙이 다시 누군가의 삶을 좁힐 때 폭력은 한 개인보다 오래 살아남는다.

그래서 이 소설의 여성들은 사랑하면서 상처 입히고, 상처 입으면서도 누군가의 행복을 바란다. 자신의 삶이 종지에 담긴 까만 간장처럼 좁고 짜고 독하게 느껴지면서도 딸에게는 더 넓은 삶을 바라게 되는 마음. 그 모순은 이들의 사랑을 불완전하게 만드는 결함이라기보다 사랑조차 자신이 살아온 세계의 언어로밖에는 표현할 수 없었던 삶의 흔적처럼 보인다. 고통과 함께, 그 고통을 다음 사람에게는 조금 덜 건네고 싶다는 마음도 세대를 건너 전해진다. 한 세대가 다음 세대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완전히 새로운 세계가 아니라면, 적어도 자신이 받은 상처의 양을 조금 줄이는 일은 가능할 것이다. 이 소설에서 희망은 그렇게 작은 단위로 존재한다.

여성들의 이야기는 왜 이다지도 뼛속까지 시린가. 두자의 시대를 살아본 적도, 수선과 봉선이 통과한 시간을 경험한 적도 없는데 그들의 삶을 읽다 보면 어느 순간 겪어보지 못한 기억을 몸소 겪은 사람처럼 아파진다. 문학이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게 한다는 말만으로는 이 감각이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다. 이해에는 여전히 나와 타인의 경계가 있지만, 어떤 소설은 그 경계를 잠시 흐린다. 알지 못했던 사람의 배고픔과 두려움, 분노와 체념이 문장을 통과해 읽는 사람의 감각 안으로 들어온다. 경험하지 않은 과거가 기억과 비슷한 무게를 얻는 순간이다.

최진영은 그 긴 역사를 거대한 사건보다 몸과 생활의 감각으로 전한다. 국가의 언어로 쓰인 역사는 식민지와 전쟁, 산업화라는 이름으로 시대를 구분하지만 한 사람의 몸을 통과한 역사는 그렇게 반듯하게 나뉘지 않는다. 거기에는 먹어야 했던 밥과 해야 했던 노동, 낳아야 했던 아이와 견뎌야 했던 관계가 있다. 공식적인 기록에서 한 줄이 되는 시간이 누군가에게는 평생이 된다. 여성의 입으로 전하는 여성의 이야기가 갖는 힘도 여기에 있다. 역사 바깥에 새로운 사실을 보태는 데서 그치지 않고, 무엇을 역사라고 부를 것인지 그 기준을 바꾼다. 시대를 움직인 거대한 사건 옆에 한 사람이 견딘 하루를 놓는다. 그러면 사적인 삶이라고 여겼던 것들이 한 시대의 가장 정밀한 기록이 된다.

이런 감각은 최진영의 소설을 오래 읽게 만드는 힘과도 맞닿아 있다. 그의 인물들은 고통을 설명하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상처 입은 사람에게 피해자의 역할만을 맡기지도 않는다. 살아남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다시 누군가를 돌보는 동안 한 인간은 어떤 명사 하나로 정리되지 않는 존재가 된다. 최진영은 그 복잡함을 쉽게 정돈하지 않는다. 독자를 설득하려 애쓰기보다 한 사람의 삶을 충분히 살아 있게 만들고, 그 생의 감각이 독자에게 도달하도록 둔다. 그래서 그의 소설을 읽고 난 뒤에는 이야기를 이해했다는 감각보다 누군가의 시간을 한동안 함께 통과했다는 감각이 먼저 찾아온다. 『끝나지 않는 노래』에는 이후 여러 작품을 거치며 더욱 깊어진 그 문학의 오래된 맥박이 이미 뛰고 있다. 실제로 최진영은 이번 개정판에서 지난 15년 동안 같은 물음을 서로 다른 이야기로 전해왔음을 깨달았다고 썼다.

제목의 ‘끝나지 않음’도 그래서 고통의 반복만을 뜻하지 않는다. 두자에게서 수선과 봉선으로, 다시 은하에게로 시간이 흐르는 동안 삶을 둘러싼 조건은 모습을 바꾸고 이전 세대가 남긴 것은 다음 세대에서 조금 다른 형태를 얻는다. 같은 노래를 이어 부른다고 해서 같은 소절을 부르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견뎠던 자리에서 다른 누군가는 조금 더 움직이고, 한 사람이 바라기만 했던 삶을 다음 사람은 조금 더 가까이 살아본다. 반복 속에서 생겨나는 그 미세한 차이가 세대라는 긴 시간을 앞으로 움직인다.

그러므로 15년 만에 돌아온 이 책에서 다시 듣게 되는 것은 여성들의 고통만은 아니다. 자신에게 허락되지 않았던 행복을 다른 사람에게 바라주었던 마음, 살아온 세계보다 조금 넓은 세계를 다음 사람에게 건네고 싶었던 마음도 함께 이어진다. 최진영은 이번 개정판에서 희망을 자신의 바깥이 아닌 안에 존재하는 것으로 이야기한다. 누군가의 행복을 바라는 마음이 한 사람 안에서 다음 사람에게 건너갈 수 있다면, 삶은 물려받은 것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고통이 반복되는 동안에도 사람은 조금씩 다른 소절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이 노래에는 마침표가 없다. 오래전 한 여성의 몸에서 시작된 삶은 다른 몸과 다른 시대를 지나며 계속 변주된다. 누군가에게 받은 상처와 누군가에게 건네고 싶었던 사랑, 살아낸 날들과 살아보지 못한 삶에 대한 바람까지 한 소절씩 보태어진다. 우리는 앞선 사람의 노래를 그대로 반복하지 않는다. 다만 그 목소리를 들은 사람으로 살아간다. 세대가 이어진다는 것은 같은 삶을 물려받는 일이 아니라, 앞선 사람의 목소리를 기억한 채 자신의 소절을 부르는 일일 것이다. 『끝나지 않는 노래』가 다시 돌아온 지금도 그 노래가 계속 들리는 이유다.

✏️한겨레출판으로부터 하니포터 13기 자격으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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