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생의 언어 - 소리, 몸짓, 냄새로 소통하며 진화해 온 생물들
롭 던 지음, 송근아 옮김 / 흐름출판 / 2026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인간은 오래도록 독립을 힘의 언어로 사용해왔다. 홀로 설 수 있다는 것은 성숙과 능력의 증거가 되었고, 문명의 발전 역시 자연의 제약에서 얼마나 멀리 벗어났는가로 설명되곤 했다. 그러나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독립했다는 감각과 실제 인간이 살아가는 방식 사이에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도시의 가장 높은 건물 안에서도 우리는 식물이 만든 산소를 호흡하고, 다른 생명이 길러낸 것을 먹으며, 눈에 보이지 않는 미생물과 하나의 몸을 공유한다. 문명이 정교해질수록 의존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그 과정이 인간의 눈에서 멀어진 것이다. 『공생의 언어』는 자연과 인간 사이의 단절보다, 여전히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자신을 독립된 존재로 상상하는 인간의 역설을 들여다본다.

이 역설은 생명의 단위를 바라보는 방식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하나의 개체는 어디에서 시작해 어디에서 끝나는가. 자신의 힘만으로 생존하는 완결된 생명이라는 개념은 실제 생태계 앞에서 흐릿해진다. 인간의 몸에도 수많은 미생물이 살아가고, 서로 다른 종은 먹이와 서식처를 주고받으며 때로 상대가 없이는 지금과 같은 삶을 지속하기 어렵다. ‘나’라고 부르는 존재조차 이미 다른 생명의 활동을 품고 있다면 관계는 완성된 존재들이 뒤늦게 맺는 부수적인 연결로만 볼 수 없다. 생명은 관계 속에서 자신의 형태와 가능성을 얻어왔고, 살아간다는 것은 이미 누군가의 삶에 기대는 일이기도 하다.

이렇게 바라본 생명의 역사는 우리가 익숙하게 배워온 경쟁의 서사를 조금 다르게 읽게 한다. 살아남는다는 말에는 더 강한 것이 승리하고 약한 것은 도태된다는 문법이 깊이 스며들어 있다. 실제 자연에는 포식도 경쟁도 영역 다툼도 존재한다. 동시에 꽃과 수분매개자, 숙주와 미생물처럼 서로 다른 생명이 상대의 능력을 자신의 생존 조건으로 삼아온 역사도 존재한다. 한쪽은 승패가 분명하고 극적인 사건이 되지만 다른 한쪽은 일상의 지속 속에서 좀처럼 눈에 띄지 않는다. 『공생의 언어』가 상리공생을 자연사의 중심으로 불러오는 순간, 생존이라는 말의 의미도 넓어진다. 살아남은 존재의 강인함만큼 그 존재를 살아남게 한 관계를 함께 바라보는 일. 생명의 역사는 개체들의 계보인 동시에 서로가 서로의 조건이 되어온 관계들의 계보이기도 하다.

현대의 인간은 그 어느 시대보다 복잡한 생태적 관계에 의존하면서도 그 관계를 감각하기 어려운 환경에서 살아간다. 던이 타임스퀘어에서 바라본 풍경은 이 역설이 압축되어 있다. 도시의 불빛 아래 식물과 동물은 좀처럼 눈에 띄지 않지만 보이지 않는 미생물은 여전히 인간 곁에 존재한다. 식탁에 놓인 음식 뒤에는 토양과 작물, 수분매개자와 미생물이 있고, 마시는 물과 숨 쉬는 공기에도 다른 생명의 활동이 개입한다. 인간을 둘러싼 연결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그것을 직접 경험할 기회는 줄어들었다. 달라진 것은 연결의 정도보다 연결을 알아차리는 감각이다. 의존은 이어져도 그 대상은 시야에서 사라지고, 관계는 유지되어도 그 관계를 감각하는 능력은 희미해진다. 그렇게 인간은 수많은 존재와 함께 살아가면서 자신을 고립된 존재로 상상하게 되었다.

《아바타》의 판도라는 이러한 현대인의 생태적 고립을 반대편에서 비추는 세계처럼 읽힌다. 눈부신 자연을 구현한 기술의 힘 너머에는 생명과 직접 연결되고 서로의 신호를 몸으로 이해하는 세계가 있다. 나비족은 자연을 배경이나 자원으로 경험하지 않는다. 그들의 몸은 다른 생명과 접촉하고 그 접촉은 세계가 하나의 관계망이라는 사실을 감각하게 한다. 이들에게 연결은 자연에 관한 지식이나 관념으로 머무르지 않고 삶의 방식 자체를 구성한다. 다른 생명과 관계 맺는 일은 세계를 소유하고 관리하는 주체의 자리에서 벗어나 자신 역시 그 관계망에 속해 있음을 받아들이는 일이 된다. 최첨단 기술로 만들어낸 미래의 행성을 바라보며 현대인이 갈망하는 것이 오히려 아주 오래된 감각이라는 점도 인상적이다. 수많은 생명과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 자신이 혼자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는 감각. 판도라에 대한 동경에는 현대 문명이 희미하게 만든 생태적 친밀성에 대한 갈망도 섞여 있을 것이다. 눈앞에 펼쳐진 것은 먼 미래의 세계지만, 그 세계를 통해 되찾고 싶은 것은 인간이 다른 생명과 자신의 삶을 분리하기 이전부터 이어져 온 관계의 감각이다.

그 오래된 연결의 감각을 실제 생명의 세계에서 보여주는 존재가 원제의 꿀잡이새다. 꿀잡이새는 벌집을 발견하면 인간에게 신호를 보내고, 인간은 그 소리를 따라가 벌집을 연다. 인간은 꿀을 얻고 새는 인간이 열어놓은 벌집에서 밀랍을 얻는다. 서로 다른 두 종은 같은 언어를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상대의 신호를 의미로 받아들인다. 자연의 언어는 인간의 말과 문법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소리와 몸짓, 냄새와 화학물질, 이동과 계절의 리듬도 생명이 서로의 존재를 감지하고 반응하는 방식이다. 자연은 인간의 언어로 말하지 않을 뿐 수많은 신호를 끊임없이 주고받아왔다. 인간이 그 신호를 언어로 받아들이는 감각을 잃어갈수록 자연은 점차 침묵하는 세계처럼 인식된다. 그렇기에 공생의 출발에는 다른 생명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그들이 보내는 신호를 감지하는 ‘주의’가 놓인다. 인간의 삶이 어떤 존재들의 활동에 기대고 있는지를 인식하고, 타자를 인간에게 유용한 자원으로 번역하기 전에 그 존재가 살아가는 방식을 살피는 태도다. 듣는다는 행위는 여기에서 하나의 생태적 실천이 된다. 우리는 자연의 목소리를 대신해 말하기에 앞서 이미 도착하고 있는 수많은 신호를 들을 감각부터 회복해야 한다.

그리고 관계에는 생명체와 마찬가지로 사라질 가능성이 있다. 꿀잡이새가 살아 있어도 인간이 더 이상 그 부름을 듣지 않고 따라가지 않는다면 오랜 시간 두 종 사이에서 형성된 상호작용은 소멸한다. 종의 멸종만을 헤아려서는 포착하기 어려운 상실이다. 한 생명이 사라지지 않았어도 그 생명과 다른 존재 사이를 오가던 신호와 행동, 의존과 교환의 방식은 사라질 수 있다. 그렇다면 생태계를 보존한다는 말에는 개체와 종을 지키는 일뿐 아니라 생명 사이의 관계가 지속될 조건을 지키는 일도 포함되어야 한다.

인간의 특별함을 다른 생명보다 우월한 능력에서 찾는 대신, 롭 던은 어떤 관계를 만들어갈지 선택할 수 있다는 데서 찾는다. 이 선택은 공생을 아름다운 도덕적 이상으로 받아들이라는 요구와도 다르다. 자연에는 경쟁도 포식도 존재하며 모든 관계가 평화롭지도 않다. 중요한 것은 인간의 미래를 인간만의 이야기로 설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일이다. 기후와 생태계의 위기는 우리가 얼마나 많은 종을 구할 수 있는지만 묻지 않는다. 앞으로 어떤 생명들과 서로의 삶의 조건이 되어줄 것인지, 어떤 관계를 이어가고 어떤 관계를 새롭게 만들어갈 것인지까지 함께 생각하게 한다.

생명의 역사를 홀로 살아남은 자들의 기록으로만 읽으면 인간 역시 혼자 살아남아야 할 존재가 된다. 그러나 그 역사를 서로의 삶을 가능하게 해온 관계들의 기록으로 다시 읽는 순간 미래의 모습도 달라진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연으로 되돌아가는 낭만적인 회귀보다 이미 자연 안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감각하는 일일 것이다. 몸속의 미생물에서 숲의 균사망까지, 식탁의 작물에서 멀리서 인간을 부르는 한 마리 새까지 생명은 끊임없이 다른 생명에게 기대어 자신의 세계를 이어왔다. 꿀잡이새는 여전히 부르고 있다. 이제 우리가 다시 배워야 할 것은 그 오래된 언어를 듣는 법이다.

✏️흐름출판으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