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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의 정원
아야세 마루 지음, 이소담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6년 3월
평점 :
감각은 언제나 생각보다 먼저 도착한다. 말로 정리되기 이전에, 이유를 붙이기 이전에, 이미 몸은 알고 있다. 이 작품은 그 선행하는 앎의 자리에서 시작된다. 관계가 변했다는 사실을 인물들은 끝내 설명하지 못하지만, 그 변화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지점에 닿았다는 감각만큼은 또렷하게 붙잡는다. 말은 여전히 이어지지만 그 말이 닿는 자리는 어딘가 비어 있다. 세계는 그대로인데 감각만이 어긋나 있을 때, 인간은 비로소 자신이 서 있는 자리의 균열을 감지한다. 그 균열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한 번 인식된 이상 더 이상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종류의 것이다. 그리고 그 미세한 틈은 시간이 흐를수록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점점 더 또렷한 형태로 감각의 표면 위로 떠오른다. 지워지지 않는 감각은 결국 하나의 방향이 된다.
감각은 단순한 징후로 머무르지 않는다. 그것은 점점 더 깊은 곳으로 가라앉으며 욕망의 형체를 얻는다. 인물들은 무엇을 원한다고 말하기 전에 먼저 강렬하게 느끼고 싶어 한다. 감각이 선명해질수록 존재는 또렷해지고, 감각이 흐려질수록 자신 또한 희미해진다. 그래서 그들은 감각을 밀어붙인다. 부드러움에 집착하거나, 고통을 끌어안거나, 타인의 감정을 자신의 피부처럼 덧씌운다. 감각은 점점 더 과잉의 상태로 치닫고, 그 과잉 속에서만 자신이 살아 있음을 확인하려 한다. 이때 욕망은 선택되지 않는다. 이미 몸속에서부터 올라와 의식을 밀어내며, 자신을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처럼 작동한다. 감각은 더 이상 수단이 아닌 존재를 떠받치는 기반이 된다. 그리고 그 기반 위에서 인간은 끊임없이 자신을 확인하지만, 그 확인은 언제나 잠정적이며 곧 무너질 것을 예감한 채 이루어진다.
그러나 그 욕망이 향하는 방향은 언제나 비껴난다. 타인을 향해 손을 뻗는 듯하지만, 그 손끝이 닿는 것은 끝내 자기 내부의 공백이다. 자크 라캉이 말하듯, 인간의 욕망은 어떤 대상을 통해 충족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채워질 수 없는 결핍을 중심으로 반복된다. 이 작품 속 인물들 또한 다르지 않다. 그들은 상대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통해 자신 안의 비어 있는 자리를 확인한다. 그래서 관계는 만남이 아닌 회귀가 된다. 한 걸음 다가설수록 더 깊은 결핍을 마주하고, 채우려 할수록 더욱 선명하게 비어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관계는 서로를 향해 나아가면서도 끝내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닫힌 궤도를 그린다. 그 궤도 위에서 인물들은 같은 자리를 맴돌며 조금씩 닳아가는 감각만을 남긴다.
그 결과 세계는 기묘하게 일그러진다. 몸은 더 이상 단단한 경계가 아니라 언제든 열리고 파고들 수 있는 틈으로 변한다. 인물들은 그 틈을 통해 안쪽을 확인하려 하고, 때로는 그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려 한다. 피부는 더 이상 보호막이 아니라 내부로 향하는 입구가 되고, 감각은 바깥을 인식하는 도구가 아니라 안쪽을 파헤치는 방식이 된다. 이러한 장면들은 처음에는 낯설고 불편하게 다가오지만 곧 묘한 설득력을 갖는다. 감각을 끝까지 밀어붙인 결과가 바로 이 형태이기 때문이다. 살아 있다는 것은 타자와의 접촉 속에서 끊임없이 변형되는 일이며, 그 변형은 언제나 아름다움과 기괴함을 동시에 품는다. 서로를 밀어내지 못한 채 한 몸처럼 붙어 있는 두 얼굴처럼, 이질적인 것들은 이 세계 안에서 끝내 분리되지 않는다.
<감각의 정원>이 남기는 것은 하나의 고요한 반복이다. 감각은 욕망을 낳고, 욕망은 결핍을 향해 되돌아간다. 그 순환은 멈추지 않는다. 어떤 충족도 그것을 끝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은 다시 손을 뻗는다. 또 다른 감각을 향해, 또 다른 접촉을 향해, 또 다른 실패를 향해. 이 끝나지 않는 운동 속에서 관계는 조금씩 닳아가고, 그 닳아감 속에서만 비로소 자신의 존재를 감지한다. 어쩌면 인간은 결핍을 채우기 위해 욕망하는 존재가 아니라, 결코 채워지지 않을 것임을 확인하기 위해 욕망을 반복하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완전히 채워지는 순간이 오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끝내 멈추지 못한다. 그 멈출 수 없음은 결핍의 증거이면서 동시에 생의 증거로 남는다. 사라지지 않는 공백을 끌어안은 채 계속해서 나아가는 일, 어쩌면 인간이라는 존재가 끝내 포기하지 못하는 유일한 방식.
✏️도서출판 알에이치코리아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