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문자 뱀
피에르 르메트르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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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이름보다 오래된 역할 속에서 살아간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 역할은 점점 더 단단해지고, 마침내 사람을 대신해 그 자리에 남는다. 인간은 하나의 존재로 태어나지만, 세상은 끊임없이 그 존재를 기능으로 정리하려 한다. 누군가는 판단하고, 누군가는 실행한다. 누군가는 명령하고, 또 누군가는 그 명령을 현실로 만든다. 그렇게 나뉜 자리에서 사람들은 조금씩 자신의 얼굴을 잃어 간다. <대문자 뱀>은 바로 그 경계 위에 서 있는 세계를 펼쳐 보인다. 한 사람이 너무 오랫동안 하나의 역할로 살아갈 때, 그 역할은 어디까지 인간을 대신하게 될까. 이 소설이 그리는 세계는 정의와 악을 가르는 단순한 구도보다 더 오래된 질문을 품고 있다. 인간은 언제부터 하나의 ‘역할’로 환원되기 시작하는가. 그리고 그 순간에도 여전히 인간이라는 이름은 남아 있는가.

누아르라는 장르는 오래전부터 폭력과 어둠을 이야기해 왔다. 그러나 어떤 작품들은 그 어둠을 단순한 사건의 연속으로 소비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어둠 속에서 인간이 어떤 방식으로 세계와 연결되어 있는지를 보여 준다. 이 작품 역시 그렇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움직이는 존재들이 있고, 그 움직임을 대신 수행하는 존재들이 있다. 세계는 그 사이에서 조용히 굴러간다. 그 구조는 우리에게 그리 낯설지만은 않다. 사회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결정을 내리고, 누군가는 그것을 실행한다. 그 사이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어떤 역할을 맡고 있는지조차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때때로 자신의 선택으로 살아간다고 믿지만, 사실은 이미 주어진 자리 속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누아르가 보여주는 세계는 더 이상 낯선 범죄의 풍경이 아닌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의 또 다른 얼굴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그러나 시간은 어떤 역할도 영원히 고정된 상태로 두지 않는다. 완벽해 보이던 기능도 언젠가는 미묘한 균열을 드러낸다. 오래 사용한 기계가 오차를 내기 시작하듯 인간 역시 시간 앞에서 흔들린다. 이 소설의 긴장은 바로 그 균열에서 태어난다. 한때는 정확했던 움직임이 서서히 어긋나기 시작할 때, 세계는 어떤 표정을 짓게 될까. 쓸모로 평가되던 존재가 더 이상 완벽하지 않게 되었을 때, 그 존재는 여전히 인간으로 남을 수 있을까. 누아르가 지닌 냉소는 종종 인간의 어둠을 향하지만, 때로는 인간을 기능으로만 바라보는 세계의 시선을 향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는 질문하게 된다. 인간은 역할을 수행하는 존재인가, 아니면 역할에 의해 만들어지는 존재인가.

그 균열의 중심에는 언제나 시간이라는 것이 놓여 있다. 기억은 조금씩 흐릿해지고 확신은 서서히 낡아 간다. 시간은 많은 것을 지워 간다. 그러나 어떤 것들은 오히려 더 깊게 몸에 남는다. 오래 붙잡고 있던 신념일까, 아니면 스스로도 자각하지 못한 채 반복해 온 습관일까. 인간의 삶은 생각보다 단순하게 자신을 남긴다. 결국 남는 것은 우리가 무엇을 계속해 왔는가이다. 너무 오래 반복된 행동은 어느 순간 몸의 일부가 된다. 그것이 사랑이든, 노동이든, 혹은 폭력이든. 인간은 결국 자신이 가장 오래 해 온 행동으로 설명되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어떤 삶은 그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닫는다. 그래서 이 소설이 만들어 내는 분위기는 단순한 긴장감보다 더 묘한 종류의 씁쓸함을 품고 있다.

<대문자 뱀>이 남기는 인상은 사건의 구조보다 질문의 잔향에 가깝게 느껴진다. 이야기가 끝난 뒤에도 오래 남는 것은 무엇이 일어났는가가 아니라, 인간이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게 되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인간이 하나의 역할로 너무나 오래 살아갈 때, 그 역할은 어디까지 인간을 대신하게 될까. 그리고 그 역할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는 순간, 그 삶은 어디로 흘러가게 될까. 세계는 늘 기능을 원하지만 인간은 결코 완전히 기능이 될 수는 없다. 어쩌면 이 차갑고 기묘한 누아르가 끝내 보여 주는 것은 그 단순한 사실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역할을 수행하며 살아가지만, 동시에 그 역할에 의해 조금씩 다른 존재로 변해 간다. 시간이 흐른 뒤에도 끝내 남는 것은 우리가 누구였는가가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계속해 왔는가일지도 모른다.

✏️도서출판 열린책들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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