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나토노트 1 (연장정)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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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늘 끝으로 호명되어 왔다. 그러나 어떤 이들에게 그것은 가장 집요한 시작의 이름이 되기도 한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타나토노트』는 바로 그 기묘한 역전에서 출발한다. 삶이 멈춘 자리에서 오히려 질문이 태어나고, 닫혀 있어야 할 문은 탐구의 대상으로 다시 열린다. 금기라는 말이 붙는 순간, 인간은 그 경계에 더 가까이 다가가려 한다. 알 수 없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하나의 유혹이 되고, 그것은 결국 인간을 움직이는 원동력이 된다. 죽음은 더 이상 두려움의 형상이 아니라, 인간이 끝내 손을 뻗어보려는 마지막 미지의 영역이 된다. 그리고 그 손짓은 언제나 이해하고자 하는 욕망과 넘어서려는 충동이 뒤섞인 채로 이루어진다.

죽음 이후에도 우리는 여전히 ‘나’일 수 있는가. 육체를 벗어난 뒤에도 기억과 감정, 의식이 남아 있다면 그것을 동일한 존재라 부를 수 있을까. 이 물음은 단순히 사후 세계에 대한 호기심을 넘어, ‘자아’라는 개념 자체를 흔든다. 우리가 ‘나’라고 믿어온 것은 고정된 실체라기보다 끊임없이 갱신되는 흐름에 가깝지 않은가. 기억과 감정, 관계는 끊임없이 변형되고 재구성된다. 그렇다면 동일성은 어디에서 확보되는가. 이 질문은 과학도, 종교도, 철학도 끝내 완전히 답하지 못하고 자리를 남겨두었다. 그 빈자리는 오래된 사유들의 층위를 쌓아올리면서도 끝내 봉합되지 않는다. 동일성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갱신되면서도 스스로를 동일하다고 믿게 만드는 하나의 구조적 환상일지도 모른다.

그 틈으로 인간은 기어이 발을 들여놓는다. 알 수 없는 것을 알 수 있는 영역으로 끌어들이려는 욕망, 세계를 전부 이해 가능한 것으로 환원하려는 충동은 오랫동안 인간을 움직여온 힘이었다. 세계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것을 분해하고, 이름 붙이고, 다시 배열하는 일이다. 그러나 모든 것이 해석되는 순간, 세계는 더 이상 다가갈 대상이 아니라 소비되는 대상으로 변한다. 이해는 곧 거리를 만들어내고, 그 거리는 결국 감각의 무뎌짐으로 이어진다. 죽음마저 설명 가능한 대상이 되는 순간, 인간은 더 이상 경외를 느끼지 못하는 자리로 밀려난다. 그리고 그때, 인간은 스스로를 어디에 위치시켜야 할지 다시 묻게 된다. 설명된 세계는 더 이상 경험되는 세계가 아니라, 관리되고 통제되는 대상으로 전환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죽음을 향한 집요한 시선은 삶을 흐릿하게 만든다. 아직 닿지 않은 곳에 대한 지속적인 사유는 이미 손에 쥐고 있는 시간의 밀도를 옅게 만든다. 삶은 유한하기에 의미를 가진다는 오래된 명제는, 죽음을 하나의 연속된 과정으로 이해하려는 시도 앞에서 서서히 균형을 잃는다. 끝이 더 이상 절대적인 단절이 아니라면, 지금 이 순간을 붙드는 이유는 무엇으로 설명될 수 있을까. 의미는 종착점에서 오는가, 아니면 그 과정 자체에서 발생하는가. 끝이 사라진 자리에 남는 것은 해방이 아니라 방향을 상실한 상태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렇게 삶은 다시 정의를 요구받는다. 의미는 더 이상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라진 종착점 위에서 스스로 구성해야 할 과제가 된다.

인간은 언제나 경계를 넘으려 하고, 그 충동은 때로 눈부시게 아름답다. 미지에 손을 뻗는 행위는 세계를 넓혀왔고, 그 과정에서 우리는 더 많은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해의 확장은 언제나 책임을 동반한다. 한 번 넘어선 경계는 다시 이전으로 되돌릴 수 없으며, 그로 인해 발생하는 변화는 고스란히 인간이 감당해야 할 몫으로 남는다. 어떤 문은 열리는 순간 새로운 가능성을 제공하지만, 동시에 이전의 세계를 소멸시킨다. 『타나토노트』는 그 문 앞에 서 있는 인간의 모습을 오래 바라보게 만든다. 끝내 알아낸 진실은 과연 우리를 더 나은 존재로 이끌 수 있을까. 혹은 단지 더 이상 돌아갈 수 없는 지점을 만들어내는 것에 불과할까. 그 선택의 순간, 인간은 더 넓어진 존재가 되는 동시에 이전의 자신으로부터 되돌릴 수 없을만큼 멀어진다.

단순한 재미로 소비되기에는 지나치게 깊고, 그렇다고 사유만으로 머물기에는 놀라울 만큼 흡입력 있는 이야기이다. 죽음을 단순한 끝으로 받아들이기엔, 아직 질문이 너무 많이 남아 있는 이들에게 이 책은 마음 깊이 다가갈 것이다. 눈앞의 삶을 붙들고 있으면서도, 그 너머를 한 번쯤 상상해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더욱 그렇다. ‘나’라는 존재가 어디까지 이어질 수 있는지, 그리고 무엇을 잃는 순간 더 이상 ‘나’라고 부를 수 없게 되는지에 대해 오래 머물러본 이들에게, 이 이야기는 하나의 사유 실험처럼 펼쳐질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려는 욕망, 그 끝에서 인간이 어떤 존재로 남게 되는지를 끝까지 바라보고 싶은 사람이라면, 이 책은 결국 지나칠 수 없는 하나의 경계로 남게 될 것이다. 그리고 결국, 이 끝없는 질문의 가장 먼 곳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왜 베르나르 베르베르라는 이름이 이토록 오래, 이토록 깊이 사랑받아왔는지를.

✏️도서출판 열린책들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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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
에바 틴드 지음, 손화수 옮김 / 산지니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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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한다는 감각은 흔히 결핍으로 불린다. 그러나 에바 틴드는 말한다. 그것은 잃어버린 자리라기보다,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상태에 가깝다고. 인물들은 끊임없이 이동한다. 덴마크에서 스웨덴의 숲으로, 인도의 공동체로, 그리고 바다 끝 작은 섬까지. 그러나 그들의 여정은 결코 ‘돌아갈 곳’을 찾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과정에 가깝다. 낯선 곳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방향을 잃은 표류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한 가지 공통된 움직임이 있다. 이미 정해진 삶의 틀에서 벗어나, 스스로를 다시 구성하려는 의지. 주어진 이름과 자리로는 설명되지 않던 어떤 것을 자기 손으로 붙잡아보려는 시도.

이 세계에서 고향은 더 이상 좌표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지도 위에 찍히는 점이 아니라 도달해야 할 어떤 상태에 가깝다. 그렇기에 인물들이 마주하는 풍경은 낯설수록 선명해진다. 스웨덴의 숲은 인간의 부재를 통해, 인도의 공동체는 과잉된 믿음을 통해, 마라도의 바다는 끝없이 이어지는 노동과 생존을 통해 묻는다. 너는 어디에 속할 수 있는가, 혹은 끝내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존재인가. 그리고 그 질문은 외부에서 시작된 듯 보이지만 결국 자기 안으로 돌아온다. 장소를 바꿀수록 선명해지는 것은 풍경이 아니라, 그 풍경 앞에서 흔들리는 자신의 내적 반응이다. 익숙함이 사라진 자리에서야 비로소 드러나는 것들, 애써 외면해왔던 감정과 설명되지 않던 불안이 조용히 떠오른다.

이 작품에서 ‘뿌리’란 발견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누군가에게서 물려받아 단번에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흔들리는 자리 위에서 스스로 만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인물들은 혈연과 기억, 국적과 시간 사이에서 갈라진다. 그 틈 사이로 자신을 새롭게 정의할 수 있는 가능성이 스며든다. 기원을 잃어버린 자는 비로소 선택할 수 있게 된다. 무엇을 붙잡고, 무엇을 버릴 것인지. 그리고 그 선택들이 쌓여 하나의 형태를 이룰 때, 비로소 ‘머무를 수 있는 상태’에 가까워진다.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 이미 어떤 이야기 속에 놓이지만, 그 이야기를 그대로 이어갈 것인지, 다른 방향으로 다시 써 내려갈 것인지는 자신의 몫으로 남는다. 이미 정해진 본질이 부재한 자리에서, 인간은 스스로를 이어갈 수밖에 없다. 정해진 서사에서 벗어나 스스로를 규정하는 일, 그 불확실한 과정 자체가 한 사람을 형성해간다.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에는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도 끝내 닿지 않는 거리가 함께 놓여 있다. 서로에게 닿을 수 없는 거리를 인정하는 순간, 비로소 서로를 놓아줄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 느슨한 거리 위에서 관계는 다른 형태로 지속된다. 서로를 온전히 알 수 없다는 전제는 단절이 아니라, 오히려 관계를 숨 쉬게 하는 조건처럼 느껴진다. 이해하려는 시도가 때로는 상대를 가두는 방식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 관계는 비로소 타인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은 채 머무른다. 가까움이란 동일함이라기보다 다른 채로 함께 존재하는 일이다. 타인을 이해하려는 욕망을 내려놓는 순간, 관계는 비로소 소유가 아닌 공존의 형태를 갖게 된다. 완전히 알 수 없음을 견디는 일. 그것이 관계를 지속시키는 가장 근본적인 방식이다.

돌아갈 곳이 없는 사람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돌아갈 곳이 없다는 사실 앞에서, 무너질 것인가, 아니면 스스로 머무를 자리를 만들어낼 것인가. 설명되지 않던 내면을 끌어안고, 불확실한 채로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일. 그 불완전한 상태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순간, 비로소 한 사람은 자신의 자리에 도착한다. 근원은 단 하나의 시작점으로 고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끊임없이 되돌아가게 만드는 하나의 흐름이다. 바다가 그러하듯, 모든 것을 품어내면서도 동시에 개별적인 형태를 지워내는 자리. 그곳은 특정한 장소라기보다, 각자가 끝내 감당해내야 할 하나의 상태로 남는다. 그리고 그 상태를 외면하지 않을 때 비로소 한 사람은 스스로의 뿌리에 가까워진다. 어느 곳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한 채 흔들리는 시간들 속에서, 자신만의 흐름과 방향을 만들어가는 일. 그 지난한 축적 끝에 비로소 한 사람은 말할 수 있게 된다. 여기가 나의 자리라고.

어디로 돌아가야 할지 알 수 없을 때, 우리는 비로소 스스로의 방향을 묻게 된다. 주어진 자리와 이름으로는 설명되지 않던 삶을 한 번쯤 의심해본 적 있다면 이 이야기는 낯설지 않을 것이다. 혈연과 기억, 관계와 시간 사이에서 쉽게 규정되지 않는 존재로 남아본 사람이라면, 이 책은 하나의 해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대신, 계속해서 이어가야 할 사유의 자리를 남겨둔다. 고향을 잃어버린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돌아갈 좌표가 아니라, 머무를 수 있는 방식일지도 모른다. 그 방식을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면, 혹은 이미 만들어가고 있다면, 『뿌리』는 그 과정을 더 깊은 곳으로 밀어 넣어 줄 것이다. 정해진 자리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은, 다른 방식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선언과도 같다. 그 선언을 받아들이는 순간, 당신의 삶은 처음으로 자신의 것이 된다.

✏️도서출판 산지니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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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임시 보관 중
가키야 미우 지음, 김윤경 옮김 / 문예춘추사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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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종종 이미 늦어버린 삶을 살고 있다고 믿는다. 선택은 지나갔고, 가능성은 닫혔다고. 그렇게 스스로에게 선을 긋는 순간, 삶은 더 이상 흐르지 않고 반복되기 시작한다. 정말로 늦은 것일까, 아니면 멈춰버린 자신을 합리화하기 위해 ‘늦음’이라는 말을 붙이고 있는 것일까. 시간은 언제나 앞으로 흐르지만, 삶은 반드시 그렇지 않다. 어떤 이들은 같은 자리에서 같은 선택을 되풀이하며, 이미 한 번 살아낸 인생을 다시 살아간다. 그렇게 축적된 하루들은 방향을 잃은 채 쌓이고, 어느 순간 그것을 ‘나의 성격’이나 ‘어쩔 수 없는 운명’이라 부르게 된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 타고난 것인지, 아니면 반복된 선택이 굳어진 결과인지에 대해서는 좀처럼 묻지 않는다.

마사미의 타임슬립은 그래서 기적이라기보다, 오히려 비유에 가깝다. 우리는 실제로 과거로 돌아갈 수 없지만, 이미 수없이 많은 선택의 기로를 지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 채 같은 자리로 되돌아오는 순간들. 그 반복의 감각이야말로 이 소설이 말하는 또 하나의 시간이다. 중학생으로 돌아간 마사미는 비로소 그 반복을 인식하고, 이전과는 다른 방향으로 발걸음을 내딛는다. 침묵하지 않고 말하는 것, 당연하게 여겨지던 질서를 의심하는 것. 주어진 역할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 역할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되짚어보는 태도. 삶은 그렇게 조금씩 다른 궤도로 미끄러지기 시작한다. 그것은 이미 정해져 있다고 믿었던 길이, 사실은 수많은 선택 위에 놓여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는 과정이기도 하다.

하지만 세계는 쉽게 변하지 않는다. 가족도, 사회도, 회사도 여전히 같은 방식으로 작동한다. 노력과 의지로는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벽들이 존재하고, 개인은 그 앞에서 번번이 부딪힌다. 여기서 작가가 보여주는 것은 통쾌한 변화가 아니라, 오히려 바뀌지 않는 현실의 단단함이다. 사람은 자신이 속한 환경을 벗어나지 못한 채, 그 안에서 주어진 역할을 수행하도록 길들여진다. 여성에게 요구되는 태도, 직장에서 기대되는 위치, 관계 속에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는 위계. 그것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규칙처럼 작동하며, 어느 순간 스스로의 선택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사미는 그 규칙을 의심한다.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더라도, 그것이 당연하지 않다는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 삶의 결이 달라진다.

성취도, 안정도 아닌 감각. 삶을 판단하는 잣대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 미세하게 흔들리는 어떤 떨림에 있다는 것. 설렘이라는 이름의 그것. 그것은 단순한 감정이라기보다, 자신이 아직 살아 있다는 사실을 감각하는 방식이다. 타인의 기준이 아닌 자신의 기준으로 세계를 다시 측정하기 시작할 때, 비로소 삶은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방향을 갖는다. 우리는 흔히 더 나은 삶을 말할 때 결과를 떠올리지만, 이 작품은 그 기준을 다른 곳으로 옮겨놓는다. 무엇을 이루었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느끼며 살아왔는가. 아마가세가 말했던 것처럼, 어쩌면 더 좋은 인생이란 더 많은 것을 이루는 삶이 아니라, 더 자주 마음이 움직이는 삶일지도 모른다. 반복 속에서 무뎌졌던 감각이 살아나는 순간, 그때 비로소 삶은 다시 현재로 돌아온다.

지금 이 순간, 마음이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 어쩌면 삶을 다시 시작한다는 것은 거창한 결심이 아니라, 그 감각을 놓치지 않는 일에 더 가까운지도 모른다. 늦었다고 믿는 바로 그 순간, 비로소 삶이 시작될 수 있다는 말은 그래서 틀리지 않다. 시간은 이미 흘러갔지만, 선택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과거는 되돌릴 수 없지만, 과거를 해석하는 방식은 언제든 바꿀 수 있다. 그리고 그 해석이 바뀌는 순간, 같은 삶도 전혀 다른 방향을 갖게 된다. 그 선택은 언제나 크고 결정적인 형태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아주 사소한 방향 전환 속에서도 이루어진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하루를 바라보는 일, 더 이상 스스로를 미루지 않는 일. 그 작고 조용한 변화는 결국 한 사람의 생을 완전히 다른 자리로 옮겨놓는다.

이미 늦었다고 믿는 사람에게 마사미의 이야기는 다른 가능성을 건넨다. 되돌릴 수 없는 시간 앞에서 우리는 종종 스스로를 포기한 채, 익숙한 선택을 반복하며 살아간다. 그 반복은 정말 운명인가, 아니면 오래 이어온 선택의 습관인가. 타인의 기대에 맞춰 살아온 사람, 자신의 욕망을 뒤로 미뤄온 사람, 구조 속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같은 하루를 반복해온 사람, 그리고 더 이상 무엇을 기준으로 살아가야 할지 묻고 있는 사람에게 마사미는 분명하게 말을 건넨다. 더 많은 것을 이루는 삶이 아니라, 더 분명하게 느끼는 삶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선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무엇을 이루었는가가 아니라, 지금 무엇을 느끼고 있는가를 삶의 중심에 적어 넣을 것. 한 번쯤 자신의 만다라 차트를 펼쳐, 미뤄두었던 문장들을 다시 채워볼 것. 선택이 아직 가능한지 망설이고 있다면, 그리고 지금의 삶이 반복처럼 느껴진다면, 그 망설임이야말로 아직 되찾을 수 있는 시간이 남아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도서출판 문예춘추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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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욕
웨인 케스텐바움 지음, 김정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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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타인의 추락 앞에서 끝내 시선을 거두지 못할까. 고개를 돌리는 대신, 조금 더 오래 바라본다. 그 장면이 불편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상하리만큼 눈을 떼지 못한다. 혐오와 연민이 동시에 밀려오는 그 기묘한 순간, 감정은 단순히 하나로 설명되지 않는다. 어쩌면 그 시선은 타인을 향한 것이라기보다, 균열이 생긴 자신의 내면을 더듬는 방식에 가깝다. 타인의 무너짐은 낯선 풍경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알고 있는 감각, 한때 스쳐 지나갔거나 아직 오지 않았을 뿐인 어떤 순간의 예감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오래 응시하는 것은 사건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위에 겹쳐진 자기 자신의 가능성이다.

굴욕은 개인의 감정으로 고립되지 않는다. 그것은 누군가의 시선 위에서 비로소 완성되는 하나의 사건이다. 보이는 순간 인간은 더 이상 자신만의 존재로 남아 있지 못한다. 그 자리에 놓이는 것은 ‘나’라는 실체 대신 타인의 눈 속에서 조립된 이미지, 즉 ‘보여진 나’이다. 그래서 굴욕은 늘 관계 속에서 발생한다. 무너짐은 혼자서 일어나지 않는다. 반드시 누군가에게 목격되고, 해석되고, 의미가 덧씌워진다. 이때 시선은 단순한 관찰을 넘어, 존재를 규정하는 장치로 작동한다. 보이지 않던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취급되고, 드러난 것은 과도하게 확정된다. 그 경계 위에서 인간은 스스로를 잃어버리기도 하고, 전혀 다른 모습으로 고정되기도 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타인의 굴욕을 쉽게 비난할 수 없다. 그 장면을 소비하는 순간, 이미 그 일부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실수와 추락을 바라보며 느끼는 감정은 늘 이중적이다. 저 자리에 내가 설 수도 있다는 공포와, 지금은 아니라는 안도. 서로 반대 방향을 향하는 감정이 한 몸처럼 공존하며, 미묘한 긴장을 만들어낸다. 이 긴장은 불편하면서도 낯익다. 인간은 이 모순 속에서 자신을 확인하는 법을 배워왔기 때문이다. 타인의 붕괴를 통해 아직 무너지지 않은 자신을 가늠하는 일. 그것이 반복되며 하나의 은밀한 습관이 되고, 끝내는 시대의 감각으로 굳어진다. 우리는 타인의 장면을 바라보면서, 동시에 그 장면으로부터 도망친다. 그러나 외면하려는 시도는 번번이 실패하고, 도망치는 방향은 언제나 바깥이 아닌 안쪽이 된다.

그리고 어느 순간 왜 우리는 타인의 굴욕을 바라보는가, 라고 묻던 문장은 변형된다. 그 장면이 왜 낯설지 않은가, 라는 자문으로. 우리가 바라보던 것은 타인의 얼굴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던 자신의 표정이다. 굴욕은 특별한 사건이라기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통과했거나 앞으로 통과하게 될 어떤 순간의 이름에 가깝다. 자신을 완전히 통제할 수 없다는 한계,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조건, 그리고 언제든 무너질 수 있다는 가능성. 그 모든 것이 한 점으로 모일 때, 굴욕은 비로소 자신의 얼굴을 드러낸다. 그것은 인간이 세계와 관계 맺는 방식의 한 단면처럼 보인다. 더 나아가, 이 장면은 우리가 스스로를 인식하는 방식이 언제나 타인의 시선을 경유할 수밖에 없다는 조건을 드러낸다. 자아는 고정된 중심이 아니라, 끊임없이 반사되고 재구성되는 표면에 가깝다. 그렇기에 굴욕은 자아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피할 수 없이 발생하는 균열의 흔적이다.

『굴욕』은 타인을 해석하기 위한 텍스트가 아니다. 오히려 끝까지 회피하고 부정하려 했던 자기 자신의 얼굴을 호출하는 기록에 가깝다. 부끄러움과 욕망, 혐오와 매혹이 뒤엉킨 복잡한 내면은 멀리 있지 않다. 그것은 이미 우리의 시선 속에, 그리고 우리가 오래 붙들고 있던 장면들 속에 존재해왔다. 그 장면은 너무도 정확하게 우리를 닮아 있기에, 우리는 끝내 시선을 거두지 못한다. 그 응시는 단순한 호기심이나 잔혹함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에게서 끝내 분리해내지 못한 어떤 가능성을 확인하려는, 거의 본능에 가까운 충동에 가깝다. 시선은 결국 되돌아와, 바깥이 아닌 자기 내부에 멈춰 선다. 그 자리에서 굴욕은 타인의 파열로 환원되지 않는, 타인의 시선을 통과해 드러난 자기 자신의 형식으로 남는다.

타인의 추락 앞에서 쉽게 시선을 거두지 못했던 순간이 있다면, 혹은 그 시선이 어디를 향하고 있었는지 끝내 묻지 못한 채 지나온 적이 있다면, 이 책은 조용히 당신을 다시 그 자리로 데려다 놓을 것이다. 굴욕이라는 감정을 통해 드러나는 것은 타인의 무너짐이 아니라, 그 장면을 바라보던 자신의 시선이다. 인간은 언제나 타인의 눈을 경유해 스스로를 인식한다는 사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균열을 경험하게 된다는 조건. 이 책은 그 불편한 진실을 완곡하게 덮어두지 않는다.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끝내 마주보게 만든다. 그러므로 이 책은 누군가의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한 독서가 아니라, 끝내 외면할 수 없게 된 자기 자신의 얼굴과 마주하기 위한 독서에 가깝다. 그 시선을 더 이상 피하지 말고, 끝까지 따라가보라. 그 끝에서 당신 자신을 마주하라.

✏️도서출판 문학과지성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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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의 책
안나 마촐라 지음, 유소영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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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시대에는 침묵이 곧 생존이 되었다. 말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말할 수 없도록 길들여진 세계. 『비밀의 책』이 펼쳐 보이는 17세기 로마는 바로 그런 시간이다. 역병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 신의 이름은 여전히 무겁게 남아 있으나 그 아래에서 벌어지는 고통은 좀처럼 구원되지 않는다. 교황청과 종교재판소가 삶의 경계를 규정하던 시대. 신앙은 위안이기 이전에 규율이었고, 질서는 곧 복종의 다른 이름이었다. 폭력은 질서로 불리고, 고통은 개인의 몫으로 밀려난다. 그곳에서 누군가는 끝내 입을 다물고, 또 다른 누군가는 다른 방식으로 말을 시작한다. 말해질 수 없는 것들이 쌓여, 결국 다른 언어를 만들어내는 순간이 온다. 그리고 그 언어는 종종, 금지된 이름으로 불린다.

맞을 이유를 찾는 세계에서, 맞지 않기 위해 선택해야 하는 삶이 있다. 신의 언어로 정당화된 폭력 앞에서, 여자의 몸은 늘 설명되어야 하는 대상이었고, 이해받지 못하는 고통은 결국 스스로 해석될 수밖에 없었다. 법과 도덕이 이미 한쪽으로 기울어진 저울이라면, 그 위에서 내려진 판단은 과연 공정한 것일까. 그 해석의 끝에 놓인 선택이 만약 ‘죄’라면, 그 죄는 과연 누구의 것인가. 누군가는 신의 뜻이라 말하고, 누군가는 생존이라 부른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것을 ‘말레피키아‘라고 부른다. 마녀의 사악한 행위, 혹은 악마와의 계약. 그러나 정말로 그 이름은 그들의 선택을 설명하기에 충분한가. 어쩌면 이 이야기는 죄를 묻기 이전에, 죄를 만들어내는 구조를 먼저 응시하게 만든다.

이 작품이 던지는 불편함은 단순한 사건의 기이함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오히려 더 깊은 곳에서, ‘정상’이라 불려온 질서 자체를 뒤흔든다. 무엇이 악이고 무엇이 선인지 규정해온 목소리는 언제나 단일했으며, 그 판단은 늘 특정한 방향으로만 흘러왔다. 그렇다면 그 기준에서 벗어난 선택들은 정말로 타락이라 불려야 하는가. 아니면 뒤늦게 발견된 또 하나의 생존 방식인가. ‘말레피키아’라는 이름 아래 묶여버린 수많은 행위들-그것들은 과연 악의 증거였을까, 아니면 이해되지 못한 절박함의 흔적이었을까. 도덕은 이 질문 앞에서 더 이상 단단한 기준이 아니라, 시대와 권력에 따라 형태를 바꾸는 유동적인 장치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비로소 말해지지 않았던 이야기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 세계에서 여성들은 서로를 향해 은밀하게 손을 뻗는다. 법도, 신도, 그 어떤 보호도 닿지 않는 자리에서 만들어지는 연대. 그러나 그것은 따뜻함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비밀과 위험, 그리고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이 함께 따라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손을 놓지 않는 이유는 단 하나, 더 이상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로는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이다. 침묵이 강요된 자리에서,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일은 곧 저항이 된다. 그 침묵 속에서 오가는 것은 서로가 어떤 선택을 하게 될지에 대한 암묵적인 승인이다. 어떤 선택은 죄가 아니라 마지막 방어였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방어는, 때로는 가장 조용한 방식으로 세상을 뒤흔든다. 이름 붙여지지 않은 연대를 그렇게 가장 은밀한 형태로 역사를 바꿔나간다.

아직 모든 것이 밝혀지지 않았음에도, 이 작품은 충분히 깊다. 도덕을 쉽게 재단하지 않고, 그 시대의 공기 속으로 독자를 밀어 넣어 선택의 무게를 직접 감각하게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누가 진정한 가해자인지, 누가 살아남기 위해 손을 더럽혀야 했는지-그 질문의 끝을 확인하고 싶어진다. 『비밀의 책』이 완전한 형태로 모습을 드러낼 날을 기다리게 되는 이유는, 아마도 그 답을 얻기 위해서가 그 질문 속에 더 오래 머물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쉽게 판단해왔던 세계를 다시 바라보게 만드는 이야기, 그리고 한 번쯤 스스로의 기준을 의심하게 만드는 이야기. 이야기의 끝에 남는 것은 결말이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쉽게 타인의 절박함을 판단해왔는지에 대한 자각이 될 것이다.

무엇이 옳은지보다 무엇이 불가피했는지를 오래 생각해 본 사람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쉽게 판단하는 일에 익숙해졌지만, 그 판단의 근거를 한 번쯤 의심해본 적 있는 이들, 또한 침묵이 선택이 아닌 조건이었던 순간을 지나온 이들에게. 그리고 무엇보다, 선과 악이라는 단어가 더 이상 충분한 설명이 되지 않는 세계를 마주할 준비가 된 이들이라면, 17세기 로마라는 어둡고 밀도 높은 시간 속으로 기꺼이 걸어 들어가보기를 권한다. 결국 그곳에서 마주하게 되는 것은 낯선 시대가 아니라, 지금까지 너무 쉽게 지나쳐왔던 우리의 시선일지도 모른다.

✏️도서출판 인플루엔셜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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