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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욕
웨인 케스텐바움 지음, 김정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6년 3월
평점 :
우리는 왜 타인의 추락 앞에서 끝내 시선을 거두지 못할까. 고개를 돌리는 대신, 조금 더 오래 바라본다. 그 장면이 불편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상하리만큼 눈을 떼지 못한다. 혐오와 연민이 동시에 밀려오는 그 기묘한 순간, 감정은 단순히 하나로 설명되지 않는다. 어쩌면 그 시선은 타인을 향한 것이라기보다, 균열이 생긴 자신의 내면을 더듬는 방식에 가깝다. 타인의 무너짐은 낯선 풍경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알고 있는 감각, 한때 스쳐 지나갔거나 아직 오지 않았을 뿐인 어떤 순간의 예감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오래 응시하는 것은 사건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위에 겹쳐진 자기 자신의 가능성이다.
굴욕은 개인의 감정으로 고립되지 않는다. 그것은 누군가의 시선 위에서 비로소 완성되는 하나의 사건이다. 보이는 순간 인간은 더 이상 자신만의 존재로 남아 있지 못한다. 그 자리에 놓이는 것은 ‘나’라는 실체 대신 타인의 눈 속에서 조립된 이미지, 즉 ‘보여진 나’이다. 그래서 굴욕은 늘 관계 속에서 발생한다. 무너짐은 혼자서 일어나지 않는다. 반드시 누군가에게 목격되고, 해석되고, 의미가 덧씌워진다. 이때 시선은 단순한 관찰을 넘어, 존재를 규정하는 장치로 작동한다. 보이지 않던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취급되고, 드러난 것은 과도하게 확정된다. 그 경계 위에서 인간은 스스로를 잃어버리기도 하고, 전혀 다른 모습으로 고정되기도 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타인의 굴욕을 쉽게 비난할 수 없다. 그 장면을 소비하는 순간, 이미 그 일부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실수와 추락을 바라보며 느끼는 감정은 늘 이중적이다. 저 자리에 내가 설 수도 있다는 공포와, 지금은 아니라는 안도. 서로 반대 방향을 향하는 감정이 한 몸처럼 공존하며, 미묘한 긴장을 만들어낸다. 이 긴장은 불편하면서도 낯익다. 인간은 이 모순 속에서 자신을 확인하는 법을 배워왔기 때문이다. 타인의 붕괴를 통해 아직 무너지지 않은 자신을 가늠하는 일. 그것이 반복되며 하나의 은밀한 습관이 되고, 끝내는 시대의 감각으로 굳어진다. 우리는 타인의 장면을 바라보면서, 동시에 그 장면으로부터 도망친다. 그러나 외면하려는 시도는 번번이 실패하고, 도망치는 방향은 언제나 바깥이 아닌 안쪽이 된다.
그리고 어느 순간 왜 우리는 타인의 굴욕을 바라보는가, 라고 묻던 문장은 변형된다. 그 장면이 왜 낯설지 않은가, 라는 자문으로. 우리가 바라보던 것은 타인의 얼굴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던 자신의 표정이다. 굴욕은 특별한 사건이라기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통과했거나 앞으로 통과하게 될 어떤 순간의 이름에 가깝다. 자신을 완전히 통제할 수 없다는 한계,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조건, 그리고 언제든 무너질 수 있다는 가능성. 그 모든 것이 한 점으로 모일 때, 굴욕은 비로소 자신의 얼굴을 드러낸다. 그것은 인간이 세계와 관계 맺는 방식의 한 단면처럼 보인다. 더 나아가, 이 장면은 우리가 스스로를 인식하는 방식이 언제나 타인의 시선을 경유할 수밖에 없다는 조건을 드러낸다. 자아는 고정된 중심이 아니라, 끊임없이 반사되고 재구성되는 표면에 가깝다. 그렇기에 굴욕은 자아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피할 수 없이 발생하는 균열의 흔적이다.
『굴욕』은 타인을 해석하기 위한 텍스트가 아니다. 오히려 끝까지 회피하고 부정하려 했던 자기 자신의 얼굴을 호출하는 기록에 가깝다. 부끄러움과 욕망, 혐오와 매혹이 뒤엉킨 복잡한 내면은 멀리 있지 않다. 그것은 이미 우리의 시선 속에, 그리고 우리가 오래 붙들고 있던 장면들 속에 존재해왔다. 그 장면은 너무도 정확하게 우리를 닮아 있기에, 우리는 끝내 시선을 거두지 못한다. 그 응시는 단순한 호기심이나 잔혹함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에게서 끝내 분리해내지 못한 어떤 가능성을 확인하려는, 거의 본능에 가까운 충동에 가깝다. 시선은 결국 되돌아와, 바깥이 아닌 자기 내부에 멈춰 선다. 그 자리에서 굴욕은 타인의 파열로 환원되지 않는, 타인의 시선을 통과해 드러난 자기 자신의 형식으로 남는다.
타인의 추락 앞에서 쉽게 시선을 거두지 못했던 순간이 있다면, 혹은 그 시선이 어디를 향하고 있었는지 끝내 묻지 못한 채 지나온 적이 있다면, 이 책은 조용히 당신을 다시 그 자리로 데려다 놓을 것이다. 굴욕이라는 감정을 통해 드러나는 것은 타인의 무너짐이 아니라, 그 장면을 바라보던 자신의 시선이다. 인간은 언제나 타인의 눈을 경유해 스스로를 인식한다는 사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균열을 경험하게 된다는 조건. 이 책은 그 불편한 진실을 완곡하게 덮어두지 않는다.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끝내 마주보게 만든다. 그러므로 이 책은 누군가의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한 독서가 아니라, 끝내 외면할 수 없게 된 자기 자신의 얼굴과 마주하기 위한 독서에 가깝다. 그 시선을 더 이상 피하지 말고, 끝까지 따라가보라. 그 끝에서 당신 자신을 마주하라.
✏️도서출판 문학과지성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