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
에바 틴드 지음, 손화수 옮김 / 산지니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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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한다는 감각은 흔히 결핍으로 불린다. 그러나 에바 틴드는 말한다. 그것은 잃어버린 자리라기보다,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상태에 가깝다고. 인물들은 끊임없이 이동한다. 덴마크에서 스웨덴의 숲으로, 인도의 공동체로, 그리고 바다 끝 작은 섬까지. 그러나 그들의 여정은 결코 ‘돌아갈 곳’을 찾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과정에 가깝다. 낯선 곳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방향을 잃은 표류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한 가지 공통된 움직임이 있다. 이미 정해진 삶의 틀에서 벗어나, 스스로를 다시 구성하려는 의지. 주어진 이름과 자리로는 설명되지 않던 어떤 것을 자기 손으로 붙잡아보려는 시도.

이 세계에서 고향은 더 이상 좌표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지도 위에 찍히는 점이 아니라 도달해야 할 어떤 상태에 가깝다. 그렇기에 인물들이 마주하는 풍경은 낯설수록 선명해진다. 스웨덴의 숲은 인간의 부재를 통해, 인도의 공동체는 과잉된 믿음을 통해, 마라도의 바다는 끝없이 이어지는 노동과 생존을 통해 묻는다. 너는 어디에 속할 수 있는가, 혹은 끝내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존재인가. 그리고 그 질문은 외부에서 시작된 듯 보이지만 결국 자기 안으로 돌아온다. 장소를 바꿀수록 선명해지는 것은 풍경이 아니라, 그 풍경 앞에서 흔들리는 자신의 내적 반응이다. 익숙함이 사라진 자리에서야 비로소 드러나는 것들, 애써 외면해왔던 감정과 설명되지 않던 불안이 조용히 떠오른다.

이 작품에서 ‘뿌리’란 발견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누군가에게서 물려받아 단번에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흔들리는 자리 위에서 스스로 만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인물들은 혈연과 기억, 국적과 시간 사이에서 갈라진다. 그 틈 사이로 자신을 새롭게 정의할 수 있는 가능성이 스며든다. 기원을 잃어버린 자는 비로소 선택할 수 있게 된다. 무엇을 붙잡고, 무엇을 버릴 것인지. 그리고 그 선택들이 쌓여 하나의 형태를 이룰 때, 비로소 ‘머무를 수 있는 상태’에 가까워진다.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 이미 어떤 이야기 속에 놓이지만, 그 이야기를 그대로 이어갈 것인지, 다른 방향으로 다시 써 내려갈 것인지는 자신의 몫으로 남는다. 이미 정해진 본질이 부재한 자리에서, 인간은 스스로를 이어갈 수밖에 없다. 정해진 서사에서 벗어나 스스로를 규정하는 일, 그 불확실한 과정 자체가 한 사람을 형성해간다.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에는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도 끝내 닿지 않는 거리가 함께 놓여 있다. 서로에게 닿을 수 없는 거리를 인정하는 순간, 비로소 서로를 놓아줄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 느슨한 거리 위에서 관계는 다른 형태로 지속된다. 서로를 온전히 알 수 없다는 전제는 단절이 아니라, 오히려 관계를 숨 쉬게 하는 조건처럼 느껴진다. 이해하려는 시도가 때로는 상대를 가두는 방식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 관계는 비로소 타인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은 채 머무른다. 가까움이란 동일함이라기보다 다른 채로 함께 존재하는 일이다. 타인을 이해하려는 욕망을 내려놓는 순간, 관계는 비로소 소유가 아닌 공존의 형태를 갖게 된다. 완전히 알 수 없음을 견디는 일. 그것이 관계를 지속시키는 가장 근본적인 방식이다.

돌아갈 곳이 없는 사람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돌아갈 곳이 없다는 사실 앞에서, 무너질 것인가, 아니면 스스로 머무를 자리를 만들어낼 것인가. 설명되지 않던 내면을 끌어안고, 불확실한 채로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일. 그 불완전한 상태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순간, 비로소 한 사람은 자신의 자리에 도착한다. 근원은 단 하나의 시작점으로 고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끊임없이 되돌아가게 만드는 하나의 흐름이다. 바다가 그러하듯, 모든 것을 품어내면서도 동시에 개별적인 형태를 지워내는 자리. 그곳은 특정한 장소라기보다, 각자가 끝내 감당해내야 할 하나의 상태로 남는다. 그리고 그 상태를 외면하지 않을 때 비로소 한 사람은 스스로의 뿌리에 가까워진다. 어느 곳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한 채 흔들리는 시간들 속에서, 자신만의 흐름과 방향을 만들어가는 일. 그 지난한 축적 끝에 비로소 한 사람은 말할 수 있게 된다. 여기가 나의 자리라고.

어디로 돌아가야 할지 알 수 없을 때, 우리는 비로소 스스로의 방향을 묻게 된다. 주어진 자리와 이름으로는 설명되지 않던 삶을 한 번쯤 의심해본 적 있다면 이 이야기는 낯설지 않을 것이다. 혈연과 기억, 관계와 시간 사이에서 쉽게 규정되지 않는 존재로 남아본 사람이라면, 이 책은 하나의 해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대신, 계속해서 이어가야 할 사유의 자리를 남겨둔다. 고향을 잃어버린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돌아갈 좌표가 아니라, 머무를 수 있는 방식일지도 모른다. 그 방식을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면, 혹은 이미 만들어가고 있다면, 『뿌리』는 그 과정을 더 깊은 곳으로 밀어 넣어 줄 것이다. 정해진 자리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은, 다른 방식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선언과도 같다. 그 선언을 받아들이는 순간, 당신의 삶은 처음으로 자신의 것이 된다.

✏️도서출판 산지니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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