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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의 책
안나 마촐라 지음, 유소영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6년 4월
평점 :
어떤 시대에는 침묵이 곧 생존이 되었다. 말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말할 수 없도록 길들여진 세계. 『비밀의 책』이 펼쳐 보이는 17세기 로마는 바로 그런 시간이다. 역병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 신의 이름은 여전히 무겁게 남아 있으나 그 아래에서 벌어지는 고통은 좀처럼 구원되지 않는다. 교황청과 종교재판소가 삶의 경계를 규정하던 시대. 신앙은 위안이기 이전에 규율이었고, 질서는 곧 복종의 다른 이름이었다. 폭력은 질서로 불리고, 고통은 개인의 몫으로 밀려난다. 그곳에서 누군가는 끝내 입을 다물고, 또 다른 누군가는 다른 방식으로 말을 시작한다. 말해질 수 없는 것들이 쌓여, 결국 다른 언어를 만들어내는 순간이 온다. 그리고 그 언어는 종종, 금지된 이름으로 불린다.
맞을 이유를 찾는 세계에서, 맞지 않기 위해 선택해야 하는 삶이 있다. 신의 언어로 정당화된 폭력 앞에서, 여자의 몸은 늘 설명되어야 하는 대상이었고, 이해받지 못하는 고통은 결국 스스로 해석될 수밖에 없었다. 법과 도덕이 이미 한쪽으로 기울어진 저울이라면, 그 위에서 내려진 판단은 과연 공정한 것일까. 그 해석의 끝에 놓인 선택이 만약 ‘죄’라면, 그 죄는 과연 누구의 것인가. 누군가는 신의 뜻이라 말하고, 누군가는 생존이라 부른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것을 ‘말레피키아‘라고 부른다. 마녀의 사악한 행위, 혹은 악마와의 계약. 그러나 정말로 그 이름은 그들의 선택을 설명하기에 충분한가. 어쩌면 이 이야기는 죄를 묻기 이전에, 죄를 만들어내는 구조를 먼저 응시하게 만든다.
이 작품이 던지는 불편함은 단순한 사건의 기이함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오히려 더 깊은 곳에서, ‘정상’이라 불려온 질서 자체를 뒤흔든다. 무엇이 악이고 무엇이 선인지 규정해온 목소리는 언제나 단일했으며, 그 판단은 늘 특정한 방향으로만 흘러왔다. 그렇다면 그 기준에서 벗어난 선택들은 정말로 타락이라 불려야 하는가. 아니면 뒤늦게 발견된 또 하나의 생존 방식인가. ‘말레피키아’라는 이름 아래 묶여버린 수많은 행위들-그것들은 과연 악의 증거였을까, 아니면 이해되지 못한 절박함의 흔적이었을까. 도덕은 이 질문 앞에서 더 이상 단단한 기준이 아니라, 시대와 권력에 따라 형태를 바꾸는 유동적인 장치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비로소 말해지지 않았던 이야기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 세계에서 여성들은 서로를 향해 은밀하게 손을 뻗는다. 법도, 신도, 그 어떤 보호도 닿지 않는 자리에서 만들어지는 연대. 그러나 그것은 따뜻함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비밀과 위험, 그리고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이 함께 따라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손을 놓지 않는 이유는 단 하나, 더 이상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로는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이다. 침묵이 강요된 자리에서,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일은 곧 저항이 된다. 그 침묵 속에서 오가는 것은 서로가 어떤 선택을 하게 될지에 대한 암묵적인 승인이다. 어떤 선택은 죄가 아니라 마지막 방어였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방어는, 때로는 가장 조용한 방식으로 세상을 뒤흔든다. 이름 붙여지지 않은 연대를 그렇게 가장 은밀한 형태로 역사를 바꿔나간다.
아직 모든 것이 밝혀지지 않았음에도, 이 작품은 충분히 깊다. 도덕을 쉽게 재단하지 않고, 그 시대의 공기 속으로 독자를 밀어 넣어 선택의 무게를 직접 감각하게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누가 진정한 가해자인지, 누가 살아남기 위해 손을 더럽혀야 했는지-그 질문의 끝을 확인하고 싶어진다. 『비밀의 책』이 완전한 형태로 모습을 드러낼 날을 기다리게 되는 이유는, 아마도 그 답을 얻기 위해서가 그 질문 속에 더 오래 머물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쉽게 판단해왔던 세계를 다시 바라보게 만드는 이야기, 그리고 한 번쯤 스스로의 기준을 의심하게 만드는 이야기. 이야기의 끝에 남는 것은 결말이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쉽게 타인의 절박함을 판단해왔는지에 대한 자각이 될 것이다.
무엇이 옳은지보다 무엇이 불가피했는지를 오래 생각해 본 사람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쉽게 판단하는 일에 익숙해졌지만, 그 판단의 근거를 한 번쯤 의심해본 적 있는 이들, 또한 침묵이 선택이 아닌 조건이었던 순간을 지나온 이들에게. 그리고 무엇보다, 선과 악이라는 단어가 더 이상 충분한 설명이 되지 않는 세계를 마주할 준비가 된 이들이라면, 17세기 로마라는 어둡고 밀도 높은 시간 속으로 기꺼이 걸어 들어가보기를 권한다. 결국 그곳에서 마주하게 되는 것은 낯선 시대가 아니라, 지금까지 너무 쉽게 지나쳐왔던 우리의 시선일지도 모른다.
✏️도서출판 인플루엔셜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