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뜨거운 여름에 우리는 죽기로 했다
다카야마 간 지음, 이정미 옮김 / 허밍북스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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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인간은 언젠가 죽는다. 이 사실만큼 공평한 운명은 없다. 태어난 순간부터 누구에게나 죽음은 주어지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그것을 아직 오지 않은 미래로 밀어 둔 채 살아간다. 그래서 내일을 당연하게 여기고, 하고 싶은 일은 다음으로 미루며, 사랑도 언젠가는 전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죽음은 모두에게 찾아오지만, 그 존재를 의식하는 사람은 드물다. 죽음을 잊는 순간 시간은 끝없이 이어질 것처럼 느껴진다. 유한함을 자각하는 순간에야 비로소 하루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시간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여명 1년의 소녀와 여명 2년의 소년. 두 사람은 자신의 삶이 언제 끝날지를 알고 있다. 그들에게 죽음은 더 이상 막연한 미래가 아닌, 오늘을 구성하는 현실이 된다. 이 작품은 죽음을 현재의 시간으로 받아들인 인간이 삶을 어떻게 다시 바라보게 되는지를 따라간다. 미래가 당연하지 않은 사람에게 현재는 흘러가는 시간이 아니라, 스스로 완성해야 하는 시간이 된다.

죽음을 안다는 것은 축복일까, 저주일까. 처음에는 저주처럼 느껴진다. 앞으로 살아갈 날보다 잃어버릴 시간이 먼저 보이고, 무엇을 시작하든 끝이 먼저 떠오른다. 세상을 원망하고, 운명을 미워하고, 남은 시간을 절망 속에서 흘려보내도 이상하지 않다. 그러나 다카야마 간은 죽음을 절망의 언어로만 그려내지 않는다. 두 사람은 남은 시간을 세는 대신 남은 시간을 살아간다. 하고 싶었던 일들을 하나씩 이루고, 서로의 하루를 함께 채우며, 다가오는 끝을 외면하지도 않는다. 끝이 선명해질수록 그 유한함 속에서 하루는 이전보다 더 충만한 시간을 품기 시작한다. 이 작품이 보여 주는 것은 죽음을 극복하는 인간이 아니라, 죽음을 품은 채 끝까지 삶을 선택하는 인간의 모습이다.

하이데거는 인간을 ‘죽음을 향해 존재하는 존재’로 이해했다. 인간은 죽음을 피할 수 없기에 삶은 유한하며, 바로 그 유한성 때문에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질 수 있다고 보았다. 죽음은 삶의 마지막 사건이 아닌 삶 전체를 비추는 조건이라는 뜻이다. 작품 속 두 사람 역시 죽음을 통해 삶의 우선순위를 새롭게 바라본다. 무엇을 붙잡고 무엇을 내려놓아야 하는지, 어떤 하루를 살아야 하는지가 이전과는 전혀 다른 무게로 다가온다. 인간은 시간을 많이 가질수록 삶이 풍요로워질 것이라 믿지만, 시간의 길이가 의미를 보장한 적은 없다. 오히려 유한함을 의식할 때 하루는 그저 흘려보내는 시간을 넘어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완성해 가는 시간이 된다.

인간은 극한의 상황에서 본성이 드러난다고들 말한다. 그렇다면 죽음 앞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본성은 과연 무엇일까. 생존만을 좇는 이기심일까, 아니면 끝까지 타인을 품으려는 선함일까. 다카야마 간은 선함을 거창한 희생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함께 웃어주는 일, 하고 싶은 일을 함께하는 일, 상대의 시간을 소중히 여기는 일처럼 아주 작은 행동들을 통해 인간다움이란 무엇인지 보여 준다. 삶이 짧아질수록 욕망은 조금씩 자리를 잃고, 그 끝에서 남는 것은 누군가와 함께 보낸 시간이다. 선함이란 유한한 시간을 누구와 어떻게 나눌 것인가를 스스로 선택하는 삶의 태도다.

결국 이 소설은 죽음을 이야기하면서 삶을 말하는 작품이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여명을 알든 모르든 모든 인간은 같은 목적지를 향해 걸어간다. 차이가 있다면, 어떤 사람은 그 사실을 잊은 채 살아가고, 어떤 사람은 그 사실을 품은 채 살아간다는 점뿐이다. 『가장 뜨거운 여름에 우리는 죽기로 했다』는 죽음을 가장 가까이에서 바라본 사람들이 오히려 삶을 가장 깊이 사랑하게 되는 과정을 담아낸 이야기다. 작품 속 두 사람에게만 여명이 주어진 것은 아니다. 보이지 않을 뿐, 우리에게도 각자의 여명은 이 순간에도 조용히, 쉼 없이 흘러가고 있다. 끝을 알지 못한다는 이유로 오늘을 무한한 시간처럼 살아갈 뿐이다. 삶을 완성하는 것은 얼마나 많은 시간이 남았는지가 아니다. 오늘이라는 하루를 어떤 마음으로 살아냈는지가 한 사람의 생을 만들어 간다. 우리는 지금, 자신의 여명을 의식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가장 뜨거운 여름은 어쩌면 가장 치열하게 살아낸 시간의 다른 이름인지도 모른다. 『가장 뜨거운 여름에 우리는 죽기로 했다』는 시한부라는 비극을 눈물의 장치로 소비하지 않고, 언젠가 끝날 삶 앞에서 인간이 무엇을 선택하고 무엇을 사랑하게 되는지를 오래 바라보는 작품이다. 죽음을 삶의 의미로 다시 사유해 보고 싶은 사람, 오늘이라는 시간을 조금 더 깊이 살아가고 싶은 사람이라면 더욱 권하고 싶다. 실존철학을 품은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 절망보다 인간의 선함을 믿고 싶은 독자에게도 이 여름은 오래도록 함께할 것이다. 여명을 아는 두 사람의 시간은 결국 우리 모두의 시간을 비춘다. 보이지 않을 뿐, 우리 또한 각자의 여명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도서출판 허밍북스로부터 가제본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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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괜찮을 미래 - 소아청소년암과 그 곁을 지킨 사람들 7편의 인터뷰
박지영.이건명 지음 / 크루즈엑스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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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암은 더 이상 일부 사람들의 특별한 경험이 아니다. 국민의 생애 암 발생 위험과 암 유병자 수는 꾸준히 증가하고 있으며, 소아청소년암은 전체 암 가운데 차지하는 비율은 크지 않지만 성장기라는 특수한 시기에 발생한다는 점에서 삶에 미치는 영향은 결코 작지 않다. 더욱이 소아청소년암은 성인암과 달리 발병 원인이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경우가 많아 예방 또한 쉽지 않다. 그럼에도 우리는 질병을 헤아리기보다 질병을 경험한 사람을 먼저 규정하는 데 익숙하다.

모든 사람에게는 하나의 사건이 있다. 누군가는 사고를 겪었고, 누군가는 장애를 얻었으며, 누군가는 가족을 잃었다. 어떤 이는 암을 경험했다. 그러나 사건은 삶의 한 페이지일 뿐인데도 우리는 종종 그 한 장면으로 사람 전체를 기억한다. 이름보다 사건을 먼저 떠올리고, 얼굴보다 상처를 먼저 본다. 그렇게 한 사람은 어느새 ‘암을 앓았던 아이’, ‘아픈 사람’, ‘불쌍한 사람’이라는 이름으로 환원된다. 타인의 삶은 결코 하나의 정보나 경험만으로 설명될 수 없다. 그 안에는 타인이 끝내 다 헤아릴 수 없는 시간과 기억, 수많은 인연이 겹겹이 쌓여 있다. 그럼에도 가장 눈에 띄는 사건 하나만으로 존재 전체를 이해했다고 믿는 순간, 사람은 한 인간이 아닌 하나의 이미지로 축소된다.

『꽤 괜찮을 미래』가 가장 먼저 흔드는 것은 바로 이 익숙한 시선이다. 이 책은 소아청소년암을 설명하기 위해 쓰인 책이라기보다, 암이라는 하나의 경험 뒤에 여전히 살아가는 누군가를, 그리고 그 곁을 지키는 또 다른 누군가를 다시 바라보게 하는 책이다.

그 사실은 책의 형식에서부터 드러난다. 이 이야기는 소설도, 에세이도 아니다. 소설이었다면 가공의 인물의 삶을 상상해 완성했을 것이고, 에세이였다면 한 사람의 독백으로 흘러갔을 것이다. 그러나 인터뷰는 다르다. 인터뷰어가 묻고, 누군가가 답하는 동안 독자는 그 사이에 조용히 자리를 얻는다.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것은 멀리서 관찰하는 일이 아니라 그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는 일임을, 이 책은 형식 자체로 보여준다. 이해는 상대를 대신 해석하는 능력이 아니라 서로 다른 삶이 잠시 마주 앉아 자신의 세계를 나누는 과정에서 자라난다. 그래서 대화는 정보를 주고받는 행위를 넘어, 타인의 삶을 함부로 결론짓지 않게 만드는 태도가 된다.

그래서 이 책에는 거대한 극복 서사가 없다. 영웅도 없고, 기적도 없다. 대신 학교로 돌아가는 길이 있고, 친구들과 어울리는 평범한 하루가 있고, 진로를 고민하는 시간이 있다. 부모의 걱정이 있고, 형제자매의 마음이 있고, 의료진과 교사, 사회복지사와 연구자가 각자의 자리에서 이어온 시간이 있다. 서로 다른 목소리들은 한 사람의 삶이 얼마나 많은 관계 위에서 이어지는지 보여주며, 암은 그 삶을 설명하는 전부가 될 수 없다고 말한다. 한 사람은 여러 관계 속에서 삶의 모습을 갖춰간다. 어느 하나의 사건만으로 삶을 정의할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오히려 오래 남는 것은 병보다 시선이다. 병은 치료가 끝날 수 있지만, 사람들의 시선은 쉽게 끝나지 않는다. ‘불쌍하다’는 말은 위로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때로는 상대를 한없이 작게 만든다. 아이를 바라보는 대신 병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사람을 바라보는 대신 살아남은 사람을 바라본다. 선의라는 이름으로 건네진 말들이 누군가에게는 평생 벗기 어려운 이름표가 되기도 한다. 시선은 눈으로만 머무르지 않는다. 그것은 언어가 되고, 언어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를 만들며, 그 거리는 한 사람이 사회 안에서 살아가는 방식까지 바꾸어 놓는다. 결국 사람을 가장 오래 붙잡는 것은 질병 자체보다 타인이 붙여준 이름일 때가 많다.

신생아중환자실에서 근무하던 시절이 떠올랐다. 치료를 위해 환아가 담긴 인큐베이터를 끌고 중환자실 밖으로 나갈 때면,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의 말이 들리곤 했다. ‘너무 불쌍하다.’, ‘엄마 뱃속에서 무슨 일이 있었길래’, ‘곧 죽겠네.’ 그 말들은 환아의 병을 말하는 듯했지만, 실은 한 생명을 병으로 덮어버리는 시선이다. 보호자도 아닌 의료진의 마음조차 무너질 만큼 아팠던 그 순간들이 있었는데, 실제로 그 삶을 살아야 했던 아이들과 가족은 얼마나 깊은 상처를 견뎌야 했을까. 『꽤 괜찮을 미래』 속 목소리들은 그 상처가 병보다 오래 남는다는 사실을 들려준다. 누군가를 연민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순간, 그의 삶은 현재형을 벗어나 과거의 사건에 머무르게 된다. 반대로 한 사람의 이름을 불러주는 일은 그가 다시 자신의 오늘을 살아갈 수 있도록 자기 삶을 되돌려주는 일이기도 하다.

이 책이 반복해서 말하는 ‘평범함’이라는 단어는 유난히 크게 다가온다. 평범하다는 것은 아무 일도 없는 삶이 아니다. 누구에게도 특별한 존재로 취급되지 않고, 학교에 가고, 친구를 만나고, 미래를 계획하며 살아갈 수 있는 삶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너무 당연해서 의식조차 하지 않는 일상이 누군가에게는 오랫동안 바라던 미래가 된다. 평범함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누려야 할 존엄의 다른 이름이다. 인간다운 삶은 거창한 성취보다 자신의 가능성을 펼치고, 관계를 맺고, 내일을 계획할 수 있는 일상에서 시작된다. 그래서 평범함은 소박한 바람이 아니라 사회가 모든 사람에게 보장해야 할 삶의 조건이 된다.

그래서 치료는 끝났지만 삶은 끝나지 않는다. 병원 문을 나선 뒤에도 학교가, 사회가, 사람들의 시선이 있다. 의학은 몸을 치료할 수 있지만, 평범한 일상을 회복시키는 일은 사회 전체의 몫이다. 치료 이후를 살아갈 수 있는 제도와 이해, 그리고 편견 없는 시선이 없다면 완치는 의학적 성공으로만 남을 뿐 삶의 성공으로 이어지지 못한다. 삶의 회복은 개인의 의지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개인을 둘러싼 제도와 공동체, 그리고 서로를 대하는 태도가 함께 회복될 때 비로소 일상은 다시 이어질 수 있다.

이 책이 말하는 미래는 거창한 희망이 아니다. 암을 경험한 사람이 더 이상 특별한 존재로 불리지 않는 사회, 동정이 아닌 존중으로 서로를 마주하는 사회, 병을 먼저 보지 않고 사람을 먼저 바라보는 사회. 그런 일상이 가능해질 때 비로소 미래는 ‘꽤 괜찮다’라는 이름을 얻게 될 것이다.

인간은 자신에게 일어난 사건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질병도, 상처도, 실패도 한 사람의 삶을 구성하는 수많은 장면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너무 자주 누군가를 하나의 사건으로 기억하고, 하나의 단어로 정의한다. 『꽤 괜찮을 미래』는 그 단순한 습관을 멈추게 한다. 그리고 사건 너머에서 살아가는 사람을 바라보도록 우리의 시선을 이끈다. 이해는 상대를 설명하는 데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한 사람의 삶이 자신의 이름을 되찾도록 끝까지 귀 기울이는 데서 시작된다. 인간은 자신의 이름으로 살아갈 때 가장 인간답다. 한 사람의 이름을 끝까지 지켜주는 사회. 『꽤 괜찮을 미래』가 꿈꾸는 미래는 결국 그런 세계일 것이다.

인간은 질병 그 자체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병을 품은 채 자신의 삶을 이어간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 쉽게 한 사람을 하나의 사건으로 기억하고, 하나의 이름으로 불러버린다. 그래서 이 책은 소아청소년암을 이야기하면서도 결국 인간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을 되묻게 한다. 누군가를 하나의 경험으로 정의해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의료인과 교사, 사회복지사처럼 타인의 삶 가까이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면 더욱 오래 곁에 두고 읽었으면 한다. 병을 함께 견디며 보호자의 시간을 살아가는 가족들에게도 이 책은 자신의 마음을 비로소 언어로 마주하는 시간이 되어줄 것이다. 질병 이후에도 계속되는 삶과 그 삶을 함께 지탱하는 사회의 역할을 고민하는 사람, 이해란 상대를 대신 설명하는 일이 아니라 그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는 일임을 믿고 싶은 사람에게도 권하고 싶은 책이다.

✏️비영리프로젝트 슈가스퀘어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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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리어
한지수 지음 / &(앤드)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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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떠나는 이유는 저마다 다르다. 낯선 풍경을 만나기 위해, 익숙한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기 위해, 혹은 지금의 자신으로부터 조금 멀어지기 위해 길을 나선다. 그러나 어떤 여행은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기보다 오래 묻어 두었던 삶을 다시 펼쳐 보인다. 낯선 도시의 골목은 잊고 있던 기억을 불러내고, 처음 듣는 언어는 오래전부터 마음속에 맴돌던 감정을 번역해 낸다. 이때 여행은 장소를 바꾸는 일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다시 읽게 만드는 시간이 된다.

『캐리어』 속 인물들 역시 저마다의 여행을 시작한다. 파리와 발리, 교토와 이스탄불, 그라나다를 향해 걸음을 옮기지만, 그들이 발견하는 것은 새로운 풍경보다 오래된 자신이다. 외면해 두었던 상실과 침묵, 사랑과 죄책감은 낯선 장소에서 전혀 다른 얼굴로 모습을 드러낸다. 도시를 거닐던 시간이 삶을 바라보는 시선을 바꾸는 것이다. 같은 기억도 다른 계절의 빛 아래에서는 전혀 다른 의미를 품는다. 기억은 지나간 시간에 머물러 있지만, 그것을 이해하는 마음은 오늘의 삶과 함께 자라난다. 여행은 과거를 지우는 기술이 아니라, 과거를 다시 해석하는 언어를 배우는 과정처럼 읽힌다.

그 점에서 제목인 ‘캐리어’는 여행 가방이면서 동시에 한 사람이 살아온 시간을 끌고 다니는 삶의 은유이다. 사람은 새로운 도시에는 도착할 수 있어도 그곳에 빈손으로 도착하지는 못한다. 여행지까지 함께 따라오는 것은 짐만이 아니라 오래된 기억과 감정, 아직 이름 붙이지 못한 상실과 관계들이다. 그래서 이 소설집에서 여행은 이야기를 시작하기 위한 배경이 아니라, 삶을 다시 읽게 만드는 서사의 형식이 된다. 인물들은 낯선 도시를 걸으며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기보다, 이미 살아온 삶을 다른 순서로 읽어 낸다. 캐리어를 여는 순간 꺼내지는 것은 옷이나 기념품이 아니라, 미처 이해하지 못했던 자신의 삶이다.

이 작품은 누구의 삶도 극적으로 바꾸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미 지나간 시간을 새롭게 배열하는 데 더 큰 관심을 둔다. 그 변화는 해석에서 비롯된다. 같은 과거라도 어떤 자리에서 다시 마주하는가에 따라 삶의 의미는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지수의 여행은 현실을 벗어나기 위한 이동이 아니라, 삶의 서사가 새롭게 구성되는 문학적 공간이 된다. 여행이 소설이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낯선 장소는 기억을 장식하는 풍경이 아니라 기억을 다시 읽게 만드는 문장이 된다. 결국 인간을 이루는 것은 지나온 사건들의 목록이 아닌, 그 사건들을 어떤 이야기로 엮으며 살아왔는지에 대한 이해일 것이다.

좋은 여행은 더 많은 풍경을 보여주는 여행보다, 돌아온 뒤 자신의 삶을 이전과는 다른 문장으로 말할 수 있게 만드는 여행일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여행에서 가져오는 가장 귀한 기념품은 사진도, 엽서도 아니다. 같은 삶을 조금 다른 언어로 이해하게 된 마음 하나. 『캐리어』는 여행을 기록하는 대신, 여행이 한 사람의 삶을 어떤 이야기로 다시 쓰게 되는지를 보여준다. 그래서 오래 기억에 남는 것은 이국의 풍경보다, 자신의 삶 역시 아직 다른 이야기로 읽힐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

여행은 풍경을 수집하는 일이 아니라, 오래 품어 온 삶을 다른 자리에서 다시 읽어 보는 경험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국의 도시가 품은 아름다움보다 그곳에서 비로소 모습을 드러내는 인간의 시간이 더 궁금한 독자, 여행을 삶의 성찰로 읽는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에게 이 작품을 권하고 싶다. 한지수는 여행을 사건의 무대로 소비하지 않는다. 낯선 장소를 빌려 사람이 자기 삶을 어떻게 다시 이해하게 되는지를 차분히 그려 낸다. 기억과 상실, 관계와 침묵이 하나의 서사가 되어 다시 이어지는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여행이 어떻게 소설이 되는지, 그리고 소설이 어떻게 한 사람의 삶을 다시 읽게 만드는지 발견하게 될 것이다.


✏️도서출판 넥서스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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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한 어둠
황시운 지음 / 마이디어북스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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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면서 얻는 가장 깊은 상처는 낯선 사람에게서 오지 않는다. 마음을 내어준 사람, 믿음을 맡긴 사람, 삶의 일부가 되어버린 사람에게서 비롯된다. 가족 역시 그렇다. 가장 안전해야 할 울타리이기에 가장 아프게 흔들리고, 오래 곁에 머무는 존재이기에 가장 쉽게 서로를 무너뜨린다. 『환한 어둠』은 한순간의 사고로 해체된 가족을 그려낸 이야기이지만, 실은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살아가는 인간의 본성을 응시한다. 피를 나눈 관계란 상처를 입히고도 서로의 삶에서 완전히 사라질 수 없는 관계다.

사고는 단 한 번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은 가족 모두의 시간을 서로 다른 방향으로 흩어 놓았다. 한 사람의 잘못은 다른 사람의 삶으로 흘러들었고, 한 사람의 아픔은 또 다른 사람의 짐이 되었다. 그 앞에서 누구를 완전한 가해자라 부를 수도, 누구를 오롯한 피해자라 말할 수도 없었다. 가족 안에서 고통은 결코 한 사람에게만 머물지 않는다. 서로의 삶을 통과하며 다른 이름의 상처로 번져 간다. 책임은 의지보다 먼저 관계 위에 내려앉고, 그 무게는 각자의 삶에서 서로 다른 모습으로 견뎌진다.

용서는 선악을 판결하는 일이 아니다. 잘못을 지워 주는 행위도 아니다. 함께 살아야 하는 존재 앞에서 미움만으로는 삶을 지속할 수 없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가족은 선택으로 시작되지 않았기에 쉽게 끝낼 수도 없다. 태어남과 동시에 주어진 관계는 의지보다 오래 남고, 감정보다 깊게 삶에 새겨진다. 그렇기에 관계를 이어 간다는 것은 상대를 이해했다는 뜻이 아니라, 이해할 수 없는 마음까지 삶의 일부로 품겠다는 결심이다.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아도, 관계는 그 상처를 끌어안은 채 다시 움직일 수 있다. 이 소설이 들려주는 희망은 상처가 남아 있는 자리에서 피어난다.

우리는 흔히 사랑의 반대편에 증오가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증오 역시 관계 안에서만 자라난다. 아무 감정도 남지 않은 사람에게는 미움조차 생기지 않는다. 멀어지는 일은 가능하지만, 삶 깊숙이 스며든 사람을 완전히 지워 내는 일은 좀처럼 이루어지지 않는다. 사랑은 아픔을 지우지 못하지만, 그 아픔을 견디는 이유가 되어 준다. 서로를 향한 원망과 죄책감, 미안함과 애틋함이 한자리에 공존하는 모습은 인간의 마음이 얼마나 모순적인지를 보여 준다. 그 모순은 관계를 끝내 포기하지 않는 인간다움의 또 다른 증거이기도 하다.

어둠은 늘 빛의 부재로 설명된다. 하지만 이 작품의 어둠은 완전히 캄캄하지 않다. 인간은 상처를 남기면서도 서로를 향해 다시 걸어가는 존재다. 서로에게 상처를 남긴 사람들이 다시 손을 내밀고, 무너진 시간을 조금씩 함께 견뎌 내려는 마음이 희미한 빛이 되어 스며든다. 빛은 어둠이 사라진 뒤에 오는 것이 아니라, 어둠을 견디려는 마음에서 먼저 태어난다. 가장 깊은 상처는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서 시작되지만, 삶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힘 또한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서 비롯된다.

사람은 가장 오래 사랑한 사람에게 가장 깊은 상처를 남긴다. 『환한 어둠』은 그 지워지지 않는 흔적 위에서도 우리는 왜 다시 서로를 향해 걸어가는지를 담담히 그려 낸다. 가족이라는 이름의 무게를 오래 생각해 보고 싶은 사람, 용서를 아름답게 꾸미지 않는 소설을 찾는 사람이라면 더욱 깊이 읽힐 것이다. 인간의 마음은 선과 악으로 깔끔하게 나뉘지 않고, 사랑과 미움 또한 서로를 밀어내지 못한 채 한자리에 머문다. 관계의 본질을 오래 사유하는 문학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그리고 다정함이란 무엇인지 다시 정의해 보고 싶은 이들에게 이 작품을 권한다. 누군가를 용서하는 일보다 더 어려운 것은, 상처를 품은 채 다시 같은 사람 곁에 머무는 일이다. 그 마음은 상처를 없애지는 못하지만, 서로의 삶을 다시 이어 갈 만큼의 빛은 되어 준다.

✏️도서출판 마이디어북스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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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통역사
리 랑그바드 지음, 손화수 옮김 / 푸른숲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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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말을 사용하면 서로를 이해할 수 있고, 서로를 이해하면 관계는 자연스럽게 가까워질 수 있을까. 해외 입양인인 ‘나’는 친가족을 만나기 위해 한국을 찾지만, 가족과 나누는 모든 대화는 통역사를 거쳐야만 한다. 가족이 웃고, 묻고, 설명하는 동안 주인공에게 직접 도착하는 말은 많지 않다. 공백과 마침표로 채워진 페이지는 읽는 이마저 그 대화에서 한 발 떨어진 자리로 데려간다. 무엇이 오가고 있는지 알 수 없다는 사실보다 더 선명하게 읽히는 것은, 이해받고 싶다는 마음조차 타인을 통해 전달해야 하는 한 사람의 외로움이다. 언어가 사라진 자리에는 침묵과 더불어, 스스로 자신의 삶에서 한 발 비껴난 듯한 감각도 머문다.

그러나 언어를 잃은 사람만이 고립되는 것은 아니다.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가족도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 채 살아가지 않는가. 원가족은 주인공의 삶보다 결혼 여부와 화장, 애인 같은 질문을 반복하고, 언니들은 그의 존재를 자신의 가족에게조차 숨긴다. 관심처럼 보이는 말은 상처가 되고, 침묵은 거리가 된다. 반대로 가장 깊은 마음을 나누는 존재는 혈연이 아닌 통역사이자 연인이다. 이 모습을 따라가다 보면 관계를 이어주는 것은 상대의 삶을 이해하려는 태도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말은 같아도 마음은 멀 수 있고, 말이 달라도 한 사람의 침묵을 오래 품어 줄 수 있다. 인간은 같은 시간을 살아도 서로 다른 시간을 견디며 살아간다. 관계는 그 시간을 성급히 판단하지 않을 때 가까워진다.

통역은 중립적인 행위가 아니다. 말을 다른 언어로 옮기는 일은 언제나 누군가의 해석을 거친다. 어떤 표현은 부드럽게 바뀌고, 어떤 감정은 생략되며, 어떤 고백은 번역조차 되지 않는다. 작품 속 통역사는 주인공의 연인이기도 하기에 더욱 그렇다. 사랑하는 사람을 보호하려는 마음과 진실을 전달해야 하는 책임 사이에서 끊임없이 흔들린다. 모든 관계에는 저마다의 통역이 존재한다. 부모는 자식을 이해하기 위해 자신의 언어로 해석하고, 자식은 부모의 침묵을 나름의 방식으로 번역한다. 연인과 친구 또한 상대의 표정과 말투, 망설임을 제각기 읽어 낸다. 우리가 이해했다고 믿는 많은 순간에도 저마다의 해석은 겹겹이 포개져 있다. 같은 말을 듣고도 서로 다른 의미를 품는 이유는, 말보다 먼저 각자의 삶이 그것을 읽어 내기 때문이다. 그렇게 인간은 서로를 해석하며 살아가지만, 그 번역은 언제나 완전하지 않다.

그렇다면 이해란 무엇일까. 그것은 상대를 남김없이 알아내는 일이라기보다, 이해되지 않는 부분을 쉽게 지워 버리지 않는 태도에 가까울 것이다. 『나의 통역사』에는 쉽게 설명되지 않는 감정이 많다. 주인공은 가족을 그리워하면서도 선뜻 다가가지 못하고, 원가족을 만나러 오면서도 한국어를 배우지 않는다. 그 모순은 너무도 인간적이다. 상처는 사랑과 거리를 동시에 만들고, 인간은 가까워지고 싶으면서도 또다시 다칠 가능성을 경계한다. 그래서 서로를 향해 조금씩 다가가는 시간은 언어를 배우는 시간보다 훨씬 더 오래 걸린다. 사람은 타인을 모두 이해하는 순간보다, 이해할 수 없는 부분까지도 그의 삶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더욱 깊은 신뢰를 쌓아 간다. 서로에게 닿지 않는 영역이 있다는 사실은 한 사람을 하나의 세계로 존중하는 출발점이 된다.

리 랑그바드가 들려준 것은 입양인만의 이야기는 아니었다. 살아온 시간이 다르고 품어 온 상처가 다른 이상, 누구도 타인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 가족도, 연인도, 친구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우리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말을 건네고, 서툰 번역을 반복하며 관계를 이어 간다. 이해는 평생에 걸쳐 계속되는 실천이다. 서로를 섣불리 규정하지 않으려는 마음이 관계를 오래 지켜 낸다. 이해란 결국, 한 사람을 끝까지 하나의 세계로 남겨 두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 조용하고도 지난한 과정을 통해, 사람과 사람이 만난다는 일이 얼마나 어렵고 또 얼마나 소중한 기적인지를 오래 바라보게 만드는 작품, 『나의 통역사』.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일은 하나의 언어를 배우는 일과 닮아 있다. 아무리 오래 곁에 머물러도 끝내 해석되지 않는 문장이 있고, 설명되지 않는 침묵도 있다. 가족을 이해하고 싶지만 자꾸만 엇갈린다고 느껴본 사람, 해외 입양인의 삶과 디아스포라의 시간을 조금 더 가까이 들여다보고 싶은 사람이라면 이 작품은 타인을 이해한다는 일의 속도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의 모든 것을 알아내는 일이 아니다. 닿지 않는 부분까지도 한 사람의 삶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그리고 언어와 관계를 철학적으로 바라보는 문학을 사랑하는 독자, 한 사람을 쉽게 규정하기보다 그의 세계를 오래 바라보는 법을 배우고 싶은 이들에게도 권하고 싶다. 모든 마음이 번역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이해하려는 마음은 언제나 관계를 시작하게 하는 가장 오래된 언어가 된다.

✏️도서출판 푸른숲으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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