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읽고 말하다
아사쿠라 가스미 지음, 전화윤 옮김 / 현암사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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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 속도에도 사람마다 다른 시간이 흐른다. 누군가는 빠르게 다음 장으로 넘어가고, 누군가는 한 문장을 오래 바라본다. 젊음이 빠르고 노년이 느리다는 식으로 시간을 나누는 일은 익숙하지만, 아사쿠라 가스미의 『읽고 읽고 말하다』를 읽고 있으면 느림을 바라보는 시선부터 다시 생각하게 된다. 이 소설에는 평균 나이 85세의 독서모임이 등장한다. 여섯 명의 노인과 그들 사이에 들어온 카페 주인이자 소설가 야스다 마쓰오.

오타루의 카페 시트론에서 한 달에 한 번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의 모습은 어딘가 느슨하고, 때로는 엉뚱하며, 젊은 사람의 눈에는 조금 답답해 보이기도 한다. 말이 자주 다른 곳으로 새고, 같은 이야기가 되풀이되며, 책을 읽다가 자신의 옛 기억을 꺼내놓느라 정작 정해진 이야기에서 멀어지기도 한다. 그런데 그 느린 시간이 점점 다르게 보인다. 이들에게 느림은 뒤처짐이 아니라 한 문장에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이다. 책 속의 작은 장면 하나를 붙잡고 오래전의 얼굴을 떠올리고, 오래 묵혀둔 기억을 꺼내며,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기다릴 수 있는 시간이다. 빠르게 읽는 것이 더 많이 읽는 일이라면, 느리게 읽는 것은 한 권의 책 안에 자신이 살아온 시간을 더 많이 포개는 일일 수 있다.

독서의 속도를 효율의 기준으로 바라보는 순간, 읽기는 얼마나 많이 읽었는가를 증명하는 행위가 되기 쉽다. 그러나 이 소설이 보여주는 독서는 정반대의 방향을 향한다. 한 문장을 읽고 멈추고, 그 문장에서 떠오른 기억을 말하고,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으며 다시 책으로 돌아온다. 읽기와 말하기가 반복되는 사이에 책은 더 이상 완결된 텍스트로 머물지 않는다. 한 사람이 읽은 문장은 다른 사람의 기억을 통과하면서 새로운 의미를 얻고, 개인의 경험과 만나면서 또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특히 이들이 책을 소리 내어 읽는다는 점은 독서의 본질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낸다. 문장은 눈으로 읽힐 때 개인의 내면에 머물지만, 목소리를 얻는 순간 타인에게 건너간다. 누군가의 목소리로 읽힌 문장을 듣고 자신의 기억을 꺼내놓는 순간, 독서는 혼자만의 행위에서 관계의 행위로 변한다. 결국 이 소설에서 읽기는 이해를 위한 과정이라기보다 기억을 불러내고 타인에게 건네는 과정에 가깝다.

그래서 같은 책을 읽고도 사람마다 전혀 다른 이야기를 꺼내놓는 풍경이 중요해진다. 책 속에서는 특별할 것 없어 보였던 장면 하나가 누군가에게는 오래전의 사랑을, 다른 누군가에게는 가족의 얼굴을,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지나온 삶의 한 시절을 불러낸다. 텍스트의 의미는 책 안에서 완성되어 독자에게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독자가 살아온 시간과 만나는 순간마다 새롭게 구성된다. 읽기는 텍스트의 의미를 찾아내는 일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삶이라는 지평을 텍스트와 겹쳐보는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독서가 깊어질수록 책에 대한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자신에 대한 이야기로 옮겨간다. 무엇을 읽었는가보다 무엇을 떠올렸는가가 중요해지는 순간이다. 책은 타인의 이야기를 읽게 하는 동시에, 오래 잊고 있던 자신의 이야기를 다시 읽게 하는 매개가 된다.

그렇다면 사람을 만나는 일도 하나의 독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우리 모두 저마다 한 권의 이야기를 살아가고 있으니, 누군가와 마주 앉아 그의 말을 듣는 일은 그 사람이 살아온 페이지를 읽는 일과 닮아 있다. 처음 만난 사람의 말 한마디에서 어린 시절을 짐작하고, 무심코 건넨 한 문장에서 오래 품어온 마음을 알아차리고, 같은 사건을 전혀 다른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기도 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가 나누는 대화 하나하나에도 작은 독서모임이 열린다. 책을 사이에 두고 앉은 사람들만 서로의 이야기를 읽는 것이 아니다. 사람과 사람이 마주 앉는 자리마다 각자의 삶이라는 책이 펼쳐지고, 대화는 그 책을 함께 읽어가는 시간이 된다. 한 사람의 말이 다른 사람에게 새로운 문장을 건네고, 그 문장이 다시 자신의 기억을 불러오는 순간, 대화는 단순한 정보의 교환을 넘어선다. 상대를 안다는 것은 그 사람의 삶을 단번에 이해하는 일이 아니라, 쉽게 읽히지 않는 페이지 앞에서 서두르지 않는 일에 가까울 것이다.

이런 독서가 더욱 각별하게 다가오는 까닭에는 이들이 살아온 시간의 길이도 놓여 있다. 평균 나이 85세라는 숫자는 단순한 배경이 아니다. 긴 시간을 살아온 사람들에게 한 달 뒤의 만남은 젊은 사람에게 주어진 시간과 같은 의미를 가질 수 없다. ‘다음에 만나자’는 말은 언제나 다음을 보장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다시 책을 고르고, 모임을 준비하고, 빈자리를 바라보며 이야기를 이어간다. 삶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다음 책을 펼치는 사람들의 모습은 이상할 만큼 단단하다. 죽음을 멀리 밀어내야만 삶을 잘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언젠가 마지막 페이지가 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지금 펼쳐진 페이지가 소중해진다. 이들에게 책을 읽는 일은 남은 시간을 세는 방식이 아니다. 오히려 아직 함께할 시간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방식이다. 삶의 유한성은 일상을 특별한 사건으로 만들기보다, 평범한 만남의 가치를 조금 더 선명하게 만든다. 함께 읽을 책이 있다는 것, 다음 모임을 약속할 사람이 있다는 것,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는 것. 삶을 이루는 것은 어쩌면 그런 작고 반복되는 시간들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의 죽음은 삶과 대립하는 사건으로만 놓이지 않는다. 누군가의 부재는 그 사람이 공동체 안에서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남겼는지를 오히려 드러낸다. 혼자 태어나 혼자 살아가는 것처럼 보여도, 우리가 기억하는 얼굴에는 언제나 타인의 흔적이 남아 있다. 누군가에게 들려준 말이 그 사람의 기억 속에 남고, 내가 잊은 장면이 다른 사람에게는 선명한 기억으로 살아 있기도 하다. 이 독서모임이 오랜 시간 이어져온 까닭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책을 읽는 사람들은 책만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읽었던 사람을 기억한다. 누군가 떠난 뒤에도 그 사람이 했던 말과 웃음과 낭독은 남은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서 계속 살아간다. 한 사람의 삶이 끝난다고 해서 그 사람의 이야기도 같은 순간에 끝나는 것은 아니다. 기억은 혼자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건네며 이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함께 읽고 함께 말한 시간은 살아 있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계속해서 새로운 형태를 얻는다. 공동체란 어쩌면 사라진 사람의 자리를 기억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이 지점에서 야스다 마쓰오가 겪는 창작의 문제 역시 하나의 질문으로 이어진다. 이야기는 누구의 것인가. 우리가 쓰고 말하는 것 가운데 완전히 혼자 만들어낸 것은 얼마나 될까. 어린 시절의 기억, 타인에게 들은 이야기, 책에서 만난 문장, 함께 보낸 시간과 그때의 감정은 오랫동안 기억 속에서 서로 얽혀 있다. 삶이 하나의 서사라면 그 서사를 구성하는 문장 역시 온전히 개인의 소유라고 말하기 어렵다. 그렇게 책 한 권을 사이에 두고 서로의 삶이 천천히 오간다. 읽고, 읽고, 말하는 동안 사람들은 자신이 살아온 시간을 다시 바라보고, 누군가의 시간을 조금 더 이해하게 된다.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일은 그 사람의 삶을 대신 살아주는 일이 아니지만, 적어도 그 삶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일이 될 수 있다. 그리고 그 기억은 다시 다른 사람에게 옮겨간다. 이야기란 그렇게 개인의 경계를 넘어 살아남는다.

그래서 『읽고 읽고 말하다』에서 독서모임은 책을 읽기 위해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인 동시에, 각자의 삶이 서로에게 읽히는 장소다. 오래 살아온 사람들이 한 권의 책 앞에서 보여주는 모습은 그래서 묘하게 아름답다. 느린 목소리로 문장을 읽고, 그 문장에서 오래된 기억을 꺼내고, 서로의 이야기를 기다린다. 한 사람의 자리가 비어도 책은 다시 펼쳐진다. 떠난 사람의 이야기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책만이 읽어야 할 대상은 아닐 것이다. 우리 모두 저마다 한 권의 이야기를 살아가고 있으므로, 누군가의 말을 듣고 그 사람의 시간을 헤아리는 일 또한 한 사람을 읽는 일이 된다.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가 함께 나누는 대화 하나하나가 작은 독서모임인지도 모른다. 한 권의 책을 읽으며 사람을 만나고, 사람을 만나며 또 다른 이야기를 읽는다.

독서는 혼자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마음에도 이제 조금 다른 풍경이 생긴다. 책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사람들은 같은 문장을 읽고도 서로 다른 삶을 이야기한다. 그 차이를 이해하려는 순간 책의 세계는 사람의 세계로 넓어진다. 그래서 이 책을 읽고 나면 독서의 풍경이 조금 넓어진다. 책을 펼쳐 문장을 읽는 시간뿐 아니라, 누군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시간까지도 읽기의 일부처럼 느껴진다. 우리는 서로의 삶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오래 듣고 천천히 읽어갈 수는 있다. 한 사람을 알아가는 일에도 독서처럼 시간이 필요하다. 몇 개의 문장만으로 한 권의 책을 다 읽을 수 없듯이, 몇 번의 대화만으로 한 사람의 삶을 다 이해할 수도 없다. 그래서 읽고, 또 읽고, 말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아마 『읽고 읽고 말하다』가 말하는 독서의 기쁨은 여기에 있을 것이다. 책은 우리에게 더 많은 이야기를 주기 위해 존재하지만, 때로는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의 이야기를 다시 읽게 만든다. 느린 독서는 그 시간을 허락하고, 낭독은 그 이야기를 타인에게 건네며, 대화는 서로 다른 삶을 한자리에 불러온다. 결국 책 한 권을 읽는 일은 한 권의 세계를 읽는 일에 그치지 않는다. 우리는 책을 읽으며 사람을 만나고, 사람을 읽으며 다시 자신의 삶을 읽는다. 그리고 그렇게 서로의 이야기를 읽어주는 동안, 한 사람의 삶은 혼자 쓰는 책이 아니라 함께 기억되는 이야기가 된다.

책장을 넘기는 일에는 정해진 속도가 없고, 사람을 알아가는 일에도 정해진 순서는 없다. 오래 읽을수록 한 문장 안에서 더 많은 삶을 발견하게 되듯, 한 사람을 오래 바라볼수록 처음에는 보이지 않던 페이지들이 천천히 펼쳐진다. 그래서 이 책은 빠르게 많은 책을 읽어내는 일에 지친 사람에게, 그리고 책을 읽은 뒤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며 그 의미를 넓혀가는 사람에게 잘 어울린다. 사람을 쉽게 판단하기보다 천천히 알아가고 싶은 사람이라면 여섯 노인이 한 문장을 읽고 자신의 기억을 꺼내놓는 느린 시간을 오래 바라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이 듦과 죽음, 기억과 공동체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다면, 마지막 페이지를 알고도 다음 책을 펼치는 이들의 모습에서 삶을 이어가는 또 다른 방식을 발견할 수 있다.

『읽고 읽고 말하다』는 결국 책을 읽는 법에 관한 이야기이면서 사람을 읽는 법에 관한 이야기다. 한 권의 책을 함께 읽으며 서로의 시간을 건네고, 떠난 사람의 이야기를 기억하며, 다시 자신의 삶을 읽어가는 사람들. 책은 그렇게 혼자 펼치는 물건에서 함께 살아온 시간을 비추는 창으로 바뀐다. 책을 덮은 뒤에도 그 안에서 만난 사람의 목소리가 오래 남아 있다면, 독서는 이미 책의 마지막 장을 넘어선 셈이다. 한 문장을 읽고 건넨 이야기가 다른 사람의 기억을 깨우고, 그 기억이 다시 누군가의 삶을 바라보는 눈이 될 때, 책은 한 사람의 것이 아닌 우리 모두의 시간이 된다. 좋은 독서는 많이 읽는 데서 완성되지 않는다. 한 권의 책이 건넨 사람과 시간, 그리고 그 책을 함께 읽었던 마음을 오래 기억하는 순간 비로소 독서는 삶의 일부가 된다.

✏️도서출판 현암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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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호수, 우리가 사랑한 이상한 세계
캐롤라인 트레이시 지음, 김민정 옮김 / 일레븐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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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은 가장 짠 곳에서도 살아간다. 소금호수의 물은 지나치게 짜고, 땅은 메마르며, 계절과 기후에 따라 호수의 모습마저 달라진다. 인간의 기준으로 바라보면 그곳은 생명이 살아가기 어려운 장소처럼 보인다. 그런데 그곳에는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생명들이 있다. 미생물과 브라인슈림프가 물속을 채우고, 그것을 먹기 위해 철새들이 먼 길을 날아온다. 어떤 생명은 혹독한 환경을 견디기 위해 자신의 몸과 삶의 방식을 바꾸고, 어떤 생명은 물이 차오르는 짧은 순간을 기다리며 존재한다. 캐롤라인 트레이시는 소금호수를 바라보며 생명이란 무엇인지, 살아남는다는 것은 무엇인지 천천히 들여다본다. 그리고 그 시선은 자연을 향한 관찰에서 한 사람의 삶을 향한 성찰로 조용히 옮겨간다.

우리는 살아남는 일을 강해지는 일과 자주 겹쳐 생각한다. 더 많이 견디고, 더 단단해지고,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존재가 되는 것. 그러나 이 책이 관찰하는 생명은 강인함을 다른 방식으로 정의한다. 소금호수의 생명들은 환경을 정복하지 않는다. 자신이 살아갈 조건을 스스로 선택할 수도 없다. 대신 달라지는 환경에 맞추어 삶의 방식을 바꾸고, 다른 생명과 맺는 관계 속에서 존재를 지속한다. 생존은 완고한 자기 보존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변화에 반응하고, 새로운 조건을 받아들이고, 관계의 형태를 조정하는 능력 역시 생명을 지속시키는 힘이다. 트레이시가 포착하는 소금호수의 생태는 진화와 적응을 단순한 생물학적 개념에 머물게 하지 않는다. 살아 있다는 것은 변화하는 세계 속에서 자신의 존재 방식을 끊임없이 새로 만들어가는 일이다.

그런 생명의 터전을 위협한 것은 자연의 가혹함만이 아니었다. 인간은 오랫동안 자연을 ‘쓸모’라는 기준으로 바라보았다. 농업에 사용할 수 있는 물, 도시를 움직이는 물, 산업을 성장시키는 물에는 가치가 부여되었지만, 짜서 마실 수도 없고 농사를 지을 수도 없는 물은 쉽게 쓸모없는 것으로 취급되었다. 강에서 호수로 흘러가야 할 물을 인간의 필요에 맞게 돌려놓는 동안 호수의 수위는 낮아졌고, 그곳에서 살아가던 생명들도 함께 삶의 터전을 잃었다. 그러나 호수는 처음부터 인간만을 위해 존재한 적이 없었다. 철새에게는 긴 여정에서 몸을 회복하는 쉼터였고, 작은 생명들에게는 하나의 세계였으며, 어떤 공동체에게는 역사와 기억이 깃든 장소였다. 인간에게 유용하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존재의 가치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자연을 바라보는 우리의 가장 오래된 오만은 세상의 가치를 인간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는가로 계산해왔다는 데 있을 것이다.

이 지점에서 『소금호수, 우리가 사랑한 이상한 세계』는 환경 위기를 기록하는 책에서 가치의 질서를 되묻는 책으로 확장된다. 소금호수의 몰락은 단순한 기후변화의 결과가 아니다. 물을 누구에게 배분할 것인지, 무엇을 생산할 것인지, 어떤 생명을 보호할 것인지 결정해온 인간의 역사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자연을 관리한다는 명분 아래 인간은 자신에게 필요한 것과 필요하지 않은 것을 구분했고, 그 구분의 바깥으로 밀려난 존재들의 가치를 쉽게 지워왔다. 트레이시는 여러 소금호수의 역사를 따라가며 이 익숙한 질서에 제동을 건다. 자연은 인간의 목적을 위해 존재하는 배경이 아니며, 생태계는 인간이 계산할 수 있는 효용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환경을 바라보는 관점의 전환은 결국 인간이 세계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다시 생각하는 일과 맞닿아 있다.

그 전환은 작가 자신의 삶을 바라보는 시선에서도 이어진다. 자연을 오래 관찰하면 ‘정상적인 생명’이라는 말 자체가 얼마나 협소한 기준 위에 놓여 있는지 드러난다. 암컷과 수컷의 역할이 우리가 익숙하게 생각해온 방식과 다르게 나타나는 생명도 있고, 극단적인 환경에서만 살아가는 생명도 있으며, 계절의 짧은 순간에 모습을 드러냈다가 사라지는 생명도 있다. 자연은 애초부터 하나의 방식으로만 존재하지 않았다. 세상에는 하나의 정상적인 삶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다른 방식으로 사랑하고 다른 형태의 관계를 만들며 살아가는 삶 역시 자연스럽고 온전한 삶이라는 사실을 소금호수의 생태가 가르쳐준다. 다양성은 자연이 가진 예외적인 특성이 아니라 생명이 존재하기 위한 본래의 조건에 가깝다.

그래서 트레이시의 생태학은 자연을 보호하는 기술에만 머물지 않는다. 퀴어 생태학이라는 관점에서 자연과 인간을 함께 바라볼 때, ‘정상성’이라는 개념 자체가 재검토된다. 자연을 하나의 질서로 규정하고 그 바깥을 예외로 취급하는 방식은 인간 사회에서도 반복되어왔다. 작가는 소금호수의 낯선 생태를 통해 자신이 살아온 삶의 낯섦을 설명하고, 자신이 선택한 사랑과 관계 역시 세계가 가진 수많은 생존 방식 가운데 하나임을 발견한다. 자연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일과 인간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일은 서로 다른 윤리적 과제가 아니다. 둘 모두 세계를 하나의 기준으로 재단하지 않는 데서 출발한다.

그렇게 소금호수에 관한 이야기는 어느 순간 사랑에 관한 이야기가 된다. 영원하지 않은 것을 사랑하는 일, 변해가는 장소를 돌보는 일, 언젠가는 사라질 수도 있는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일. 인간은 영원할 것 같은 것에 마음을 놓지만, 실제 삶에서 우리가 사랑하는 것들은 대부분 유한하다. 사람도 장소도 계절도 언젠가는 달라진다. 그렇다면 사랑은 영원성을 약속받은 대상을 소유하는 감정이 아니라, 사라질 가능성을 품은 존재에게 시간을 내어주는 행위다. 이 책에서 자연을 돌보는 일은 그래서 거대한 구호가 되지 않는다. 물이 줄어드는 호수를 바라보고, 그곳을 떠날 수 없는 생명을 살피고, 변화한 환경에서도 다시 살아갈 조건을 마련하는 일이다. 돌봄은 완전한 회복을 약속하지 않는다. 다만 계속 살아갈 수 있는 관계를 포기하지 않는다.

『소금호수, 우리가 사랑한 이상한 세계』가 보여주는 자연은 아름답고도 불안정하다. 물은 줄어들고, 풍경은 변하고, 인간의 욕망은 그 위에 흔적을 남긴다. 그럼에도 생명은 사라지는 자리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살아갈 방법을 찾아낸다. 이 책이 건네는 희망은 모든 것을 과거의 모습으로 되돌릴 수 있다는 낙관에 있지 않다. 변화한 세계를 외면하지 않고, 그곳에서 다시 관계를 만들고 서로의 삶을 돌보는 데 있다. 자연을 이해하는 일이 결국 인간을 이해하는 일과 닮아 있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우리 역시 소금호수처럼 끊임없이 변하고, 때로는 메말라가며,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을 건너간다. 그럼에도 새로운 물이 흘러들 자리는 남아 있다.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영원히 마르지 않는 삶이 아니라, 변화한 세계에서 다시 생명이 머물 수 있는 자리를 만드는 일이다.

호수는 가만히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서는 언제나 무언가가 사라지고 생겨난다. 물의 높이가 달라지고, 소금의 농도가 변하고, 그곳을 터전 삼아 살아가던 생명들의 자리가 조금씩 옮겨간다. 『소금호수, 우리가 사랑한 이상한 세계』는 그렇게 변화하는 소금호수를 따라가며 자연과 인간이 서로에게 얼마나 깊이 얽혀 있는지를 들여다보는 책이다. 기후위기와 생태계의 변화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우리가 숫자와 그래프로만 바라보았던 환경의 변화를 한층 구체적인 풍경으로 만날 수 있을 것이고, 자연을 인간 바깥에 존재하는 무언가로 여기기보다 우리의 삶과 맞물린 하나의 세계로 바라보고 싶은 사람에게도 좋은 길잡이가 되어준다. 여행자의 눈으로 낯선 풍경을 바라보면서도 그곳에 깃든 과학적 사실과 사람들의 삶을 함께 읽어내는 논픽션을 좋아한다면 이 책의 여정은 더욱 흥미로울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을 환경에 관한 이야기로만 읽을 필요는 없다. 캐롤라인 트레이시는 소금호수의 변화를 따라가는 동안 자연의 회복과 인간의 회복이 서로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천천히 보여준다. 무언가가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오는 것만을 회복이라 부를 수 있을까. 이미 달라져버린 세계를 받아들이면서도 그 안에서 다시 살아갈 방법을 찾아가는 일 역시 회복이라면, 이 책은 상실 이후의 삶을 생각해본 사람에게도 특별한 의미를 건넨다. 결국 소금호수를 바라본다는 것은 사라지는 것을 세는 일만은 아니다. 물이 빠져나간 자리에 무엇이 다시 자랄 수 있는지, 달라진 세계에서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는지를 오래 바라보는 일이기도 하다.

✏️도서출판 일레븐으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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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니주의보
정지아 지음 / 창비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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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일상만이 존재하던 『찌니주의보』의 배경 수평마을. 누군가는 밭을 매고, 누군가는 반찬을 만들고, 누군가는 마을회관에 모여 시답잖은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그렇게 오래 반복된 풍경 속으로 서울에서 내려온 두 젊은 여자인 혜진과 성진, 즉 찌니들이 들어온다. 마을은 술렁인다. 그러나 이 소설의 관심은 갈등 그 자체보다, 갈등 이후에도 사람들이 어떻게 같은 마을에서 얼굴을 마주하며 살아가는가에 머문다.

인간은 낯선 것을 쉽게 이해하지 못한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경계하고, 경계하는 것을 두려워하며, 두려운 것을 멀리 밀어내려 한다. 수평마을 사람들이 찌니들을 대하는 방식 역시 다르지 않다. 두 사람이 레즈비언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는 순간, 따뜻하게 음식을 나누고 이름을 불러주던 손길은 순식간에 차갑게 식는다. 그들의 태도는 분명 상처를 남긴다. 하지만 정지아는 그 장면에서 누구 하나를 악인으로 규정하지 않는다. 사람은 대개 악해서가 아니라, 익숙하지 않아서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소설에서 가장 오래 바라보게 되는 것은 편견 자체보다도 편견이 서서히 바뀌어 가는 시간이다.

사람의 마음은 생각보다 느리게 움직인다. 익숙하게 믿어온 세계를 단숨에 바꾸는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오랫동안 당연하다고 여겼던 질서와 가치관은 낯선 존재를 만나는 순간 흔들리지만, 그 흔들림이 곧 이해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해에는 용기보다 시간이 먼저 필요하다. 그래서 이 소설이 들려주는 변화는 극적이지 않다. 계절이 바뀌듯 조금씩 스며들고, 어느새 마음 한구석의 굳은살을 부드럽게 만든다. “잘 모리던 것을 워치케 냉큼 받아들이냐. 시간이 약이다. 시간이 약이여.”(165쪽)이라는 한마디에는 인간을 바라보는 정지아의 시선이 담겨 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경험만큼만 세상을 이해한다. 그래서 낯선 삶을 만났을 때 서툴고, 때로는 상처를 주기도 한다. 그러나 그 서툶을 부끄러워하며 조금씩 마음의 폭을 넓혀가는 과정 또한 인간의 모습이다. 작품은 이해를 타고나는 자질보다 살아가는 동안 천천히 익혀가는 마음의 습관으로 바라본다.

『찌니주의보』에서 자주 등장하는 것은 음식이다. 문고리에 걸린 호박전, 이름 없이 놓여 있는 나물 반찬, 함께 둘러앉아 먹는 조기매운탕, 슬그머니 놓여 있는 장조림과 전복장. 한국인의 밥상은 오래전부터 사랑과 사과를 같은 그릇에 담아왔다. 미안하다는 말을 쉽게 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국을 한 그릇 더 떠주고, 걱정된다는 말을 삼키는 대신 반찬을 챙겨준다. 수평마을 사람들도 다르지 않다. 미처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마음은 음식이 되어 대문 앞에 걸리고, 그 밥상 위에서 조금씩 관계가 회복된다. ‘식구(食口)’라는 말은 한솥밥을 먹는 사람을 뜻한다. 피를 나눈 사이가 아니라도 같은 밥을 나누는 순간 사람은 식구가 된다. 그래서 수평마을의 밥상은 허기를 채우는 자리가 아니라, 서로를 삶 안으로 들이는 의식처럼 읽힌다. 말보다 먼저 밥을 건네는 사람들, 용서보다 먼저 숟가락을 놓아주는 사람들. 정지아는 한 끼의 식사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우리’라는 이름을 천천히 만들어가는 과정을 따뜻하게 그려낸다.

이 작품에는 저마다 다른 생을 살아온 사람들이 등장한다. 누군가는 오랜 세월 한곳을 지키며 살아왔고, 누군가는 낯선 땅에 뿌리를 내렸으며, 또 다른 누군가는 자신의 삶을 숨긴 채 여러 번 터전을 옮겨야 했다. 서로의 사연은 닮지 않았지만, 외로움과 두려움만큼은 이상하리만치 서로를 알아본다. 작품은 성소수자라는 소재를 전면에 내세우지만, 읽는 동안 더욱 선명해지는 것은 결국 모든 사람이 누군가에게는 낯선 존재라는 사실이다. 세대가 달라도, 살아온 환경이 달라도, 국적이 달라도, 사랑하는 방식이 달라도 우리는 끊임없이 타인을 만난다. 인간은 타인의 삶을 모두 이해할 수는 없어도, 상처의 결은 알아볼 수 있다. 결국 다름 앞에서 중요한 것은 상대를 얼마나 빨리 이해했는지가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곁에 남아 있었는가 하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수평마을’이라는 이름은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상징처럼 읽힌다. 수평은 모두가 같은 모습이 되는 상태가 아니다. 각자의 삶을 그대로 지닌 채 서로를 위아래 없이 바라볼 수 있는 관계의 높이다. 누구는 먼저 이해하고 누구는 끝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저마다 다른 속도로 마음을 움직이며 같은 자리로 다가가는 풍경. 공동체란 서로 다른 삶들이 한 방향을 바라보려 애쓰는 시간 속에서 자라난다. 상대를 바꾸기보다 함께 살아가는 법을 익혀가는 동안, 낯선 사람은 조금씩 이웃이 되고 이웃은 어느새 서로의 삶을 기대어 사는 사람이 된다.

정지아는 이번에도 사람을 쉽게 믿지 않는다. 인간 안의 편견과 고집, 무지를 숨기지 않는다. 그럼에도 사람을 포기하지는 않는다. 누군가는 조용히 음식을 들고 찾아오고, 누군가는 먼저 등을 쓸어주며, 누군가는 가장 미워했던 이를 위해 기꺼이 손을 내민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거대한 선언보다 그런 사소한 마음들이라는 사실을, 『찌니주의보』는 전라도 사투리처럼 구수하고 따뜻한 목소리로 오래 들려준다. 그리고 그 믿음은, 서로를 닮아서가 아니라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시간을 내어주는 사람들 덕분에 공동체가 유지된다는 진실을 다시 한번 일깨워준다.

낯선 사람이 이웃이 되는 데에는 특별한 계기보다 오래 함께한 시간과 작은 마음들이 필요하다. 한 끼의 밥을 나누고, 서툰 사과를 건네고, 이해하지 못했던 존재를 천천히 알아가는 과정 속에서 사람 사이의 거리는 조금씩 달라진다. 『찌니주의보』는 그렇게 서로 다른 삶들이 한 마을 안에서 부딪히고 어울리며, 결국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워가는 이야기다.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 속에서 인간의 다정함을 발견하는 독자, 세대와 가치관이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공동체의 모습을 바라보고 싶은 독자, 타인을 이해한다는 일이 무엇인지 오래 생각해 보고 싶은 독자에게 이 소설은 깊은 울림을 건넬 것이다. 또한 피를 나눈 관계만이 가족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 같은 밥을 나누는 순간 서로의 삶에 들어설 수 있다는 따뜻한 감각을 만나고 싶은 독자에게도 이 책은 특별한 의미로 다가갈 것이다. 정지아는 누군가의 마음이 아주 조금 움직이는 순간들을 포착하며, 우리가 서로의 곁을 지키며 살아가는 이유를 조용히 보여준다.

✏️도서출판 창비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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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들면 눈뜬다
김종일 지음 / 황금가지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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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는 목적지를 향해 달리는 공간이지만, 이상하게도 그곳에서 인간의 본성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평소에는 신호를 지키고 차례를 기다리던 사람이 운전대를 잡는 순간 욕설을 내뱉고, 경적을 울리고, 상대를 쫓아가 보복하려 한다. 출판사가 이 소설을 ‘로드 레이지 스릴러’라고 표현한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로드 레이지는 운전 중의 단순한 짜증이 분노와 공격적인 행동으로 번지는 현상을 가리킨다. 『잠들면 눈뜬다』는 그 짧은 순간, 감정이 이성을 앞지르며 일상의 도로가 폭력의 공간으로 바뀌는 지점에서 공포를 시작한다.

분노는 혼자 머물지 않는다. 누군가의 난폭한 행동은 또 다른 사람의 분노를 부르고, 그 분노는 다시 다른 사람에게 옮겨간다. 처음에는 경적 한 번, 욕설 한마디였던 것이 보복 운전이 되고, 위협이 되고, 돌이킬 수 없는 폭력으로 자라난다. 그렇게 보면 도로 위에서 벌어지는 폭력은 한 사람의 성격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타인의 분노가 나의 분노가 되고, 나의 분노가 다시 타인의 삶을 망가뜨리는 순간, 폭력은 개인의 감정을 넘어 하나의 흐름이 된다. 작품 속 미아즈마가 인간의 감정을 증폭시킨다는 설정이 섬뜩한 것도 그래서다. 인간에게 이미 자리한 감정은 작은 자극 하나만으로도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어느 순간 한 사람의 마음을 넘어 다른 사람의 삶까지 집어삼킨다.

괴물을 인간의 바깥에만 두고 바라보면 이 소설은 그저 초자연적인 존재를 다룬 스릴러로 남는다. 그러나 인간에게 이미 분노와 증오, 폭력성이 존재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누구에게나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이 함께 있고, 평소에는 감춰져 있던 어둠이 어떤 순간 주인이 되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괴물’은 인간과 완전히 다른 존재가 아니라, 인간이 외면하고 싶었던 자신의 한 모습일 수도 있다. 고야의 「이성이 잠들면 괴물이 눈뜬다」를 떠올리게 하는 제목처럼, 이 소설에서 두려운 것은 괴물이 눈을 뜬다는 사실만이 아니다. 그 괴물이 인간의 모습으로 눈을 뜰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 생각에 닿고 나면 ‘무영’이라는 이름도 문득 다르게 읽힌다. 작가가 실제로 그림자를 염두에 두고 지은 이름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이름 그대로 풀이하면 ‘그림자가 없다’는 뜻이 된다. 그런데 그림자가 없는 인간은 과연 온전한 인간일까. 빛을 받는 모든 것에 그림자가 생기듯, 인간에게도 감추고 싶은 마음과 인정하기 어려운 어둠이 있다. 선한 인간이란 그림자가 없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그림자를 알고도 그것이 자신의 전부가 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 사람일 것이다. 분노할 이유가 있어도 폭력을 선택하지 않고, 상처받았어도 같은 상처를 타인에게 돌려주지 않는 것. 괴물이 눈을 뜨는 순간에도 인간으로 남는 일은 어쩌면 그런 선택에서 시작된다.

그래서 이 소설의 마지막이 의미 있게 다가온다. 악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미아즈마는 세상 어딘가에 남아 있고, 인간의 분노 역시 언제든 다시 고개를 들 수 있다. 그럼에도 이야기는 절망으로 닫히지 않는다. 세상에는 선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남겨둔다. 악이 없는 세계에서 선을 선택하는 일보다, 악이 존재하는 세계에서 선을 선택하는 일이 훨씬 어렵다.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사람, 자신의 분노를 폭력으로 돌려주지 않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 어쩌면 인간을 인간으로 남게 하는 것은 악이 없는 마음이 아니라, 악을 마주한 순간에도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는 힘일 것이다.

도로 위에서 우리는 매일 이름 모를 사람들과 스쳐 지나간다. 잠깐의 짜증이 분노가 되고, 분노가 폭력이 될 수 있는 순간도 찾아온다. 그때 무엇을 눈뜨게 할 것인지는 결국 인간의 몫이다. 잠들면 눈을 뜨는 것이 있다. 그것은 괴물일 수도, 인간일 수도 있다.

괴물이 사라졌다고 해서 도로가 평온해지는 것은 아니다. 오늘도 누군가는 경적을 울리고, 누군가는 사소한 끼어들기에 이를 악물며, 아주 짧은 순간 자신의 분노를 타인에게 던질 준비를 한다. 『잠들면 눈뜬다』는 그렇게 평범한 일상에 숨어 있던 폭력의 얼굴을 끌어올린다. 익숙한 도로가 어느 순간 공포의 무대로 변하는 로드 레이지 스릴러를 찾는 독자라면 이 소설의 질주를 즐길 수 있을 것이고, 인간의 선량함보다 그 이면에 감춰진 분노와 폭력성에 오래 시선을 두는 독자라면 더욱 깊숙이 들어갈 수 있다. 특히 일상의 틈에서 서서히 광기가 번져가는 심리 스릴러를 좋아하거나, 모든 악이 깔끔하게 사라지는 결말보다 사건이 끝난 뒤에도 세계 어딘가에 불온한 기척이 남아 있는 이야기를 선호한다면 이 소설은 꽤 오래 달려갈 만한 길이 되어줄 것이다. 결국 이 책이 보여주는 것은 괴물이 사라지는 순간보다 괴물을 마주한 인간의 모습이다. 어둠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어둠을 품고도 다른 방향으로 핸들을 꺾는 사람. 그 선택이 가능한 인간을 믿어보고 싶은 독자에게 권하고 싶다.

✏️도서출판 황금가지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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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가 만든 천재들 - 광기와 창조성은 어떻게 연결되는가
마리오 데 라 피에드라 월터 지음, 성소희 옮김 / 흐름출판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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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라는 말을 들으면 대개 비슷한 모습을 떠올린다. 남들과 다른 감각을 가진 사람,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사람, 평범한 사고의 범위를 벗어나는 사람. 그래서 천재의 뇌 역시 특별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뇌가 만든 천재들』은 그 막연한 믿음을 실제 예술가들의 뇌와 삶으로 가져간다. 프리다 칼로의 고통, 도스토옙스키의 뇌전증, 버지니아 울프의 정신적 고통과 남다른 감각을 따라가다 보면 천재에게 특별한 무언가가 있다는 생각보다 먼저 묻게 되는 것이 있다. 대체 무엇을 기준으로 한 사람의 뇌를 ‘정상’이라고 부르는가.

인간의 뇌는 처음부터 모두 다르다. 감각의 민감도도, 기억하는 방식도, 집중하는 방식도 제각각이다. 어떤 사람에게 소리는 색으로 경험되고, 어떤 사람은 특정한 영역의 정보를 놀라울 만큼 오래 기억한다. 사회가 정해놓은 평균에서 멀어질수록 그 차이는 재능보다 먼저 이상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그런데 평균은 능력의 기준이 될 수 있을까. 많은 사람이 그렇게 한다는 이유만으로 그것이 더 온전한 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천재를 특별한 뇌의 소유자로 보는 관점에는 이 모순이 따라붙는다. 남들과 다르기 때문에 천재라고 부르면서, 다른 사람의 차이는 병리나 결핍으로 판단하는 것이다. 한쪽에서는 차이를 숭배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교정하려 한다. 신경다양성을 천재성의 증거처럼 소비하는 태도 역시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어떤 뇌가 특별하다는 사실과 그 사람이 특별한 예술을 만들어낸다는 사실 사이에는 수많은 삶의 경험이 놓여 있기 때문이다.

프리다 칼로의 그림을 그녀의 고통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녀가 겪은 사고와 수술, 반복되는 통증은 분명 작품의 중요한 배경이 되었지만, 고통이 곧 예술을 만들어낸 것은 아니다. ‘고통받은 예술가’라는 이미지는 너무 매력적이어서 오히려 위험하다. 상처가 작품을 낳았다는 설명이 반복될수록 그 상처를 가진 사람의 삶은 작품을 위한 재료처럼 취급되기 쉽다. 도스토옙스키의 뇌전증 역시 마찬가지다. 질병은 그의 삶에 실제로 영향을 미쳤지만, 그것을 문학적 천재성의 비밀로 만들어버리는 순간 질병은 인간의 경험에서 떼어져 하나의 낭만적인 장치가 된다.

예술가의 정신적 고통을 바라보는 방식은 여성에게서 더욱 복잡해진다. 버지니아 울프나 실비아 플라스, 앤 섹스턴의 삶에는 오래도록 ‘광기’라는 단어가 따라다녔다. 그들의 고통을 병리적인 개인의 문제로 기록하는 동안, 그들이 어떤 시대를 살았고 여성에게 무엇이 요구되었는지는 상대적으로 덜 이야기되었다. 한 사람의 고통을 설명하면서 그 사람이 놓여 있던 세계를 지워버리는 것이다.

‘광기’라는 이름은 그래서 중립적인 단어가 아니다. 누군가의 경험을 정상과 비정상으로 나누는 순간 그 기준을 가진 쪽에 해석의 권한이 생긴다. 푸코가 광기의 역사를 살핀 것도 이러한 분류의 역사였다. 한 시대가 정상이라고 정한 범주에서 밀려난 사람들은 치료되거나 격리되거나 기록되었다. 시간이 흐른 뒤 그들 가운데 일부는 천재로 다시 불렸다. 과거의 광인이 오늘날의 천재가 되는 이 역설 앞에서, 천재와 광기를 처음부터 서로 다른 본질로 생각하기는 어려워진다.

더구나 천재라는 이름은 때때로 예술가의 고통을 아름답게 포장한다. 칼로의 상처, 도스토옙스키의 발작, 울프의 정신적 고통이 작품의 위대함과 한데 묶이면 고통은 예술가에게 주어진 운명처럼 보인다. 하지만 질병은 누구에게나 잔인한 현실일 뿐이다. 그것이 작품의 가치 때문에 아름다운 경험으로 바뀌지는 않는다. 예술가를 존중하는 일은 그의 고통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이 작품과 삶 가운데 어떤 자리를 차지했는지를 구별해서 바라보는 데 있을 것이다.

결국 ‘천재의 뇌는 무엇이 다른가’라는 물음은 그리 오래 남지 않는다. 더 오래 붙잡게 되는 것은 인간의 뇌를 하나의 기준으로 나누어도 되는가 하는 문제다. 평균에서 멀어진 감각을 가진 사람에게 이상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그 사람이 뛰어난 작품을 남기고 나서야 천재라는 이름으로 다시 불러주는 일. 그 과정에서 바뀐 것은 그 사람의 뇌가 아니다. 사람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이다.

인공지능이 글을 쓰고 그림을 만드는 지금은 이 문제를 다른 방향에서도 바라보게 한다. 계산하고 기억하고 패턴을 찾아내는 능력만으로 천재성을 설명한다면 인간의 독점적인 영역은 빠르게 줄어든다. 그렇다고 인간의 창작이 단순한 능력의 결과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인간은 몸으로 세계를 겪고, 어떤 경험은 오래 기억하고 어떤 경험은 잊으며, 관계 속에서 자신을 만들어간다. 같은 사건을 겪은 두 사람이 전혀 다른 작품을 만들어내는 이유도 그곳에 있다.

천재를 특별한 뇌를 가진 사람이라고 정의하는 순간, 우리는 인간을 능력의 차이로만 바라보게 된다. 반대로 인간마다 다른 뇌와 몸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서 출발하면 천재라는 말의 의미도 달라진다. 누군가의 특별함은 정상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졌는지를 보여주는 숫자가 아니다. 그 사람이 자신에게 주어진 감각으로 어떤 세계를 경험했고, 그 경험을 어떤 형태로 남겼는지가 중요하다.

천재의 비밀을 특별한 뇌에서 찾으려는 시선은 결국 인간을 분류하는 방식으로 되돌아온다. 평균에서 벗어난 감각에는 이상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뛰어난 성취가 확인된 뒤에는 같은 차이를 천재성이라 부른다. 달라진 것은 그 사람의 뇌가 아니다. 달라진 것은 그 차이를 바라보는 사회의 언어다. 정상이라는 이름으로 너무 많은 차이를 지워왔고, 천재라는 이름으로 또 다른 차이를 지나치게 미화해왔다. 천재와 광기 사이의 선은 생각보다 단단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 선의 두께가 아니라, 누가 그어놓은 선인가 하는 데 있다.

한 사람의 머릿속에는 그가 살아온 세계가 얼마나 많이 들어 있을까. 감각의 차이, 기억의 방식, 몸에 남은 고통과 설명하기 어려운 정신의 움직임까지. 《뇌가 만든 천재들》은 천재를 특별한 능력의 소유자로 세워두기보다 그 능력이 태어난 자리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신경과학과 예술의 접점을 따라 천재성과 창의성의 본질을 궁금해하는 독자, 프리다 칼로와 도스토옙스키, 버지니아 울프처럼 작품만큼이나 삶의 궤적이 강렬한 예술가들을 다른 각도에서 만나고 싶은 독자에게 특히 어울린다. 그리고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기준, 광기라는 이름으로 누군가의 삶을 규정해온 방식에 의문을 품어본 사람이라면 책의 여러 사례가 한층 복잡한 표정을 보여줄 것이다. 인간의 뇌가 모두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받아들인다는 사실 앞에서 천재라는 이름도 조금 낯설어진다. 특별한 사람을 찾아내는 책을 기대했다면 그보다 더 깊은 곳에서, 인간을 특별함과 평범함으로 나누어온 우리의 시선까지 마주하게 될 것이다.

✏️흐름출판으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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