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읽고 말하다
아사쿠라 가스미 지음, 전화윤 옮김 / 현암사 / 2026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을 읽는 속도에도 사람마다 다른 시간이 흐른다. 누군가는 빠르게 다음 장으로 넘어가고, 누군가는 한 문장을 오래 바라본다. 젊음이 빠르고 노년이 느리다는 식으로 시간을 나누는 일은 익숙하지만, 아사쿠라 가스미의 『읽고 읽고 말하다』를 읽고 있으면 느림을 바라보는 시선부터 다시 생각하게 된다. 이 소설에는 평균 나이 85세의 독서모임이 등장한다. 여섯 명의 노인과 그들 사이에 들어온 카페 주인이자 소설가 야스다 마쓰오.

오타루의 카페 시트론에서 한 달에 한 번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의 모습은 어딘가 느슨하고, 때로는 엉뚱하며, 젊은 사람의 눈에는 조금 답답해 보이기도 한다. 말이 자주 다른 곳으로 새고, 같은 이야기가 되풀이되며, 책을 읽다가 자신의 옛 기억을 꺼내놓느라 정작 정해진 이야기에서 멀어지기도 한다. 그런데 그 느린 시간이 점점 다르게 보인다. 이들에게 느림은 뒤처짐이 아니라 한 문장에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이다. 책 속의 작은 장면 하나를 붙잡고 오래전의 얼굴을 떠올리고, 오래 묵혀둔 기억을 꺼내며,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기다릴 수 있는 시간이다. 빠르게 읽는 것이 더 많이 읽는 일이라면, 느리게 읽는 것은 한 권의 책 안에 자신이 살아온 시간을 더 많이 포개는 일일 수 있다.

독서의 속도를 효율의 기준으로 바라보는 순간, 읽기는 얼마나 많이 읽었는가를 증명하는 행위가 되기 쉽다. 그러나 이 소설이 보여주는 독서는 정반대의 방향을 향한다. 한 문장을 읽고 멈추고, 그 문장에서 떠오른 기억을 말하고,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으며 다시 책으로 돌아온다. 읽기와 말하기가 반복되는 사이에 책은 더 이상 완결된 텍스트로 머물지 않는다. 한 사람이 읽은 문장은 다른 사람의 기억을 통과하면서 새로운 의미를 얻고, 개인의 경험과 만나면서 또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특히 이들이 책을 소리 내어 읽는다는 점은 독서의 본질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낸다. 문장은 눈으로 읽힐 때 개인의 내면에 머물지만, 목소리를 얻는 순간 타인에게 건너간다. 누군가의 목소리로 읽힌 문장을 듣고 자신의 기억을 꺼내놓는 순간, 독서는 혼자만의 행위에서 관계의 행위로 변한다. 결국 이 소설에서 읽기는 이해를 위한 과정이라기보다 기억을 불러내고 타인에게 건네는 과정에 가깝다.

그래서 같은 책을 읽고도 사람마다 전혀 다른 이야기를 꺼내놓는 풍경이 중요해진다. 책 속에서는 특별할 것 없어 보였던 장면 하나가 누군가에게는 오래전의 사랑을, 다른 누군가에게는 가족의 얼굴을,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지나온 삶의 한 시절을 불러낸다. 텍스트의 의미는 책 안에서 완성되어 독자에게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독자가 살아온 시간과 만나는 순간마다 새롭게 구성된다. 읽기는 텍스트의 의미를 찾아내는 일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삶이라는 지평을 텍스트와 겹쳐보는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독서가 깊어질수록 책에 대한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자신에 대한 이야기로 옮겨간다. 무엇을 읽었는가보다 무엇을 떠올렸는가가 중요해지는 순간이다. 책은 타인의 이야기를 읽게 하는 동시에, 오래 잊고 있던 자신의 이야기를 다시 읽게 하는 매개가 된다.

그렇다면 사람을 만나는 일도 하나의 독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우리 모두 저마다 한 권의 이야기를 살아가고 있으니, 누군가와 마주 앉아 그의 말을 듣는 일은 그 사람이 살아온 페이지를 읽는 일과 닮아 있다. 처음 만난 사람의 말 한마디에서 어린 시절을 짐작하고, 무심코 건넨 한 문장에서 오래 품어온 마음을 알아차리고, 같은 사건을 전혀 다른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기도 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가 나누는 대화 하나하나에도 작은 독서모임이 열린다. 책을 사이에 두고 앉은 사람들만 서로의 이야기를 읽는 것이 아니다. 사람과 사람이 마주 앉는 자리마다 각자의 삶이라는 책이 펼쳐지고, 대화는 그 책을 함께 읽어가는 시간이 된다. 한 사람의 말이 다른 사람에게 새로운 문장을 건네고, 그 문장이 다시 자신의 기억을 불러오는 순간, 대화는 단순한 정보의 교환을 넘어선다. 상대를 안다는 것은 그 사람의 삶을 단번에 이해하는 일이 아니라, 쉽게 읽히지 않는 페이지 앞에서 서두르지 않는 일에 가까울 것이다.

이런 독서가 더욱 각별하게 다가오는 까닭에는 이들이 살아온 시간의 길이도 놓여 있다. 평균 나이 85세라는 숫자는 단순한 배경이 아니다. 긴 시간을 살아온 사람들에게 한 달 뒤의 만남은 젊은 사람에게 주어진 시간과 같은 의미를 가질 수 없다. ‘다음에 만나자’는 말은 언제나 다음을 보장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다시 책을 고르고, 모임을 준비하고, 빈자리를 바라보며 이야기를 이어간다. 삶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다음 책을 펼치는 사람들의 모습은 이상할 만큼 단단하다. 죽음을 멀리 밀어내야만 삶을 잘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언젠가 마지막 페이지가 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지금 펼쳐진 페이지가 소중해진다. 이들에게 책을 읽는 일은 남은 시간을 세는 방식이 아니다. 오히려 아직 함께할 시간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방식이다. 삶의 유한성은 일상을 특별한 사건으로 만들기보다, 평범한 만남의 가치를 조금 더 선명하게 만든다. 함께 읽을 책이 있다는 것, 다음 모임을 약속할 사람이 있다는 것,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는 것. 삶을 이루는 것은 어쩌면 그런 작고 반복되는 시간들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의 죽음은 삶과 대립하는 사건으로만 놓이지 않는다. 누군가의 부재는 그 사람이 공동체 안에서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남겼는지를 오히려 드러낸다. 혼자 태어나 혼자 살아가는 것처럼 보여도, 우리가 기억하는 얼굴에는 언제나 타인의 흔적이 남아 있다. 누군가에게 들려준 말이 그 사람의 기억 속에 남고, 내가 잊은 장면이 다른 사람에게는 선명한 기억으로 살아 있기도 하다. 이 독서모임이 오랜 시간 이어져온 까닭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책을 읽는 사람들은 책만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읽었던 사람을 기억한다. 누군가 떠난 뒤에도 그 사람이 했던 말과 웃음과 낭독은 남은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서 계속 살아간다. 한 사람의 삶이 끝난다고 해서 그 사람의 이야기도 같은 순간에 끝나는 것은 아니다. 기억은 혼자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건네며 이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함께 읽고 함께 말한 시간은 살아 있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계속해서 새로운 형태를 얻는다. 공동체란 어쩌면 사라진 사람의 자리를 기억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이 지점에서 야스다 마쓰오가 겪는 창작의 문제 역시 하나의 질문으로 이어진다. 이야기는 누구의 것인가. 우리가 쓰고 말하는 것 가운데 완전히 혼자 만들어낸 것은 얼마나 될까. 어린 시절의 기억, 타인에게 들은 이야기, 책에서 만난 문장, 함께 보낸 시간과 그때의 감정은 오랫동안 기억 속에서 서로 얽혀 있다. 삶이 하나의 서사라면 그 서사를 구성하는 문장 역시 온전히 개인의 소유라고 말하기 어렵다. 그렇게 책 한 권을 사이에 두고 서로의 삶이 천천히 오간다. 읽고, 읽고, 말하는 동안 사람들은 자신이 살아온 시간을 다시 바라보고, 누군가의 시간을 조금 더 이해하게 된다.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일은 그 사람의 삶을 대신 살아주는 일이 아니지만, 적어도 그 삶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일이 될 수 있다. 그리고 그 기억은 다시 다른 사람에게 옮겨간다. 이야기란 그렇게 개인의 경계를 넘어 살아남는다.

그래서 『읽고 읽고 말하다』에서 독서모임은 책을 읽기 위해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인 동시에, 각자의 삶이 서로에게 읽히는 장소다. 오래 살아온 사람들이 한 권의 책 앞에서 보여주는 모습은 그래서 묘하게 아름답다. 느린 목소리로 문장을 읽고, 그 문장에서 오래된 기억을 꺼내고, 서로의 이야기를 기다린다. 한 사람의 자리가 비어도 책은 다시 펼쳐진다. 떠난 사람의 이야기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책만이 읽어야 할 대상은 아닐 것이다. 우리 모두 저마다 한 권의 이야기를 살아가고 있으므로, 누군가의 말을 듣고 그 사람의 시간을 헤아리는 일 또한 한 사람을 읽는 일이 된다.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가 함께 나누는 대화 하나하나가 작은 독서모임인지도 모른다. 한 권의 책을 읽으며 사람을 만나고, 사람을 만나며 또 다른 이야기를 읽는다.

독서는 혼자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마음에도 이제 조금 다른 풍경이 생긴다. 책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사람들은 같은 문장을 읽고도 서로 다른 삶을 이야기한다. 그 차이를 이해하려는 순간 책의 세계는 사람의 세계로 넓어진다. 그래서 이 책을 읽고 나면 독서의 풍경이 조금 넓어진다. 책을 펼쳐 문장을 읽는 시간뿐 아니라, 누군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시간까지도 읽기의 일부처럼 느껴진다. 우리는 서로의 삶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오래 듣고 천천히 읽어갈 수는 있다. 한 사람을 알아가는 일에도 독서처럼 시간이 필요하다. 몇 개의 문장만으로 한 권의 책을 다 읽을 수 없듯이, 몇 번의 대화만으로 한 사람의 삶을 다 이해할 수도 없다. 그래서 읽고, 또 읽고, 말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아마 『읽고 읽고 말하다』가 말하는 독서의 기쁨은 여기에 있을 것이다. 책은 우리에게 더 많은 이야기를 주기 위해 존재하지만, 때로는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의 이야기를 다시 읽게 만든다. 느린 독서는 그 시간을 허락하고, 낭독은 그 이야기를 타인에게 건네며, 대화는 서로 다른 삶을 한자리에 불러온다. 결국 책 한 권을 읽는 일은 한 권의 세계를 읽는 일에 그치지 않는다. 우리는 책을 읽으며 사람을 만나고, 사람을 읽으며 다시 자신의 삶을 읽는다. 그리고 그렇게 서로의 이야기를 읽어주는 동안, 한 사람의 삶은 혼자 쓰는 책이 아니라 함께 기억되는 이야기가 된다.

책장을 넘기는 일에는 정해진 속도가 없고, 사람을 알아가는 일에도 정해진 순서는 없다. 오래 읽을수록 한 문장 안에서 더 많은 삶을 발견하게 되듯, 한 사람을 오래 바라볼수록 처음에는 보이지 않던 페이지들이 천천히 펼쳐진다. 그래서 이 책은 빠르게 많은 책을 읽어내는 일에 지친 사람에게, 그리고 책을 읽은 뒤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며 그 의미를 넓혀가는 사람에게 잘 어울린다. 사람을 쉽게 판단하기보다 천천히 알아가고 싶은 사람이라면 여섯 노인이 한 문장을 읽고 자신의 기억을 꺼내놓는 느린 시간을 오래 바라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이 듦과 죽음, 기억과 공동체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다면, 마지막 페이지를 알고도 다음 책을 펼치는 이들의 모습에서 삶을 이어가는 또 다른 방식을 발견할 수 있다.

『읽고 읽고 말하다』는 결국 책을 읽는 법에 관한 이야기이면서 사람을 읽는 법에 관한 이야기다. 한 권의 책을 함께 읽으며 서로의 시간을 건네고, 떠난 사람의 이야기를 기억하며, 다시 자신의 삶을 읽어가는 사람들. 책은 그렇게 혼자 펼치는 물건에서 함께 살아온 시간을 비추는 창으로 바뀐다. 책을 덮은 뒤에도 그 안에서 만난 사람의 목소리가 오래 남아 있다면, 독서는 이미 책의 마지막 장을 넘어선 셈이다. 한 문장을 읽고 건넨 이야기가 다른 사람의 기억을 깨우고, 그 기억이 다시 누군가의 삶을 바라보는 눈이 될 때, 책은 한 사람의 것이 아닌 우리 모두의 시간이 된다. 좋은 독서는 많이 읽는 데서 완성되지 않는다. 한 권의 책이 건넨 사람과 시간, 그리고 그 책을 함께 읽었던 마음을 오래 기억하는 순간 비로소 독서는 삶의 일부가 된다.

✏️도서출판 현암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