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나
안드레 애치먼 지음, 홍한별 옮김 / 비채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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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레 애치먼의 『마리아나』와 『페루에서 온 신사』는 원래 한 권의 책에 함께 실린 두 중편이다. 비채가 두 작품을 나란히 소개한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마리아나』가 사랑의 종결 이후를 바라본다면, 『페루에서 온 신사』는 죽음과 시간까지 건너 사랑이 다시 돌아올 가능성을 상상한다. 하나는 이별 뒤의 기억을, 다른 하나는 상실 이후에도 지속되는 욕망을 다룬다. 그러나 두 작품의 관심은 사랑의 시작이나 연애의 사건 자체에 머물지 않는다. 애치먼이 오래 응시하는 것은 사랑이라는 경험을 통과한 인간의 변화다. 누군가를 사랑한 뒤에는 그 사람을 만나기 전의 자신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 그리고 관계가 사라진 뒤에도 그 변화만은 현재에 남아 있다는 사실이 두 작품을 관통한다.

『마리아나』에서 이 문제는 편지라는 형식을 통해 선명해진다. 이탈리아에서 이타마르를 만난 마리아나는 짧고 강렬한 사랑을 경험하고, 관계가 끝난 뒤 그에게 편지를 쓴다. 하지만 이 편지에서 중요한 것은 수신자의 응답이 아니다. 이미 떠난 사람에게 계속 말을 거는 행위 자체가 마리아나의 시간을 붙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함께했던 장면과 말들을 되짚으며 사랑이 시작된 순간부터 이별에 이르기까지의 시간을 반복해서 통과한다. 과거는 지나간 사건으로 정리되지 않고 현재의 의식 속에서 계속 수정된다. 이타마르가 떠난 뒤에도 마리아나의 삶에는 그와 함께 있을 때 발견했던 욕망과 감각,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자기 자신의 모습이 남는다. 그래서 그녀가 상실한 것은 한 사람만이 아니다. 한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형성된 자기 자신 역시 상실의 일부가 된다.

이때 애치먼의 사랑은 상대방을 소유하는 관계와 상당한 거리를 둔다. 타인은 나의 삶에 들어와 나를 변화시키는 존재이며, 그 변화는 상대가 떠난다고 해서 함께 사라지지 않는다. 사랑의 경험이 한 인간의 자기 인식을 바꾸어놓는다면 관계의 지속 여부만으로 그 사랑의 성패를 판단하기도 어려워진다. 마리아나가 이타마르를 계속 기억하는 이유 역시 그가 특별히 완전한 사람이어서라기보다, 그를 통해 자신 안에 존재하던 무엇인가를 처음 경험했기 때문이다. 사랑의 대상은 기억 속에서 점차 하나의 인물인 동시에 하나의 시기가 된다. 그 사람과 함께했던 시간 속에서만 가능했던 자아의 형태까지 함께 기억되는 것이다.

『마리아나』의 편지는 연애편지이면서 기억의 형식이기도 하다. 애치먼에게 기억은 지나간 시간을 보관하는 기능보다 현재의 감정을 다시 구성하는 힘에 가깝다. 마리아나는 과거를 떠올릴 때마다 그때의 자신을 다시 만난다. 같은 사건도 현재의 감정에 따라 다르게 읽히고, 한때는 사랑의 증거였던 말이 나중에는 이별의 징후로 바뀐다. 사랑했던 순간은 과거에 고정되어 있지 않다. 기억하는 사람의 현재가 달라질 때마다 과거 역시 조금씩 모습을 바꾼다. 그래서 사랑의 종결 이후에 남는 것은 단순한 추억이 아니다. 현재의 자신을 계속 만들어가는 하나의 시간이다.

『페루에서 온 신사』는 이 사고를 현실의 시간 바깥까지 확장한다. 아말피 해안의 호텔에서 우연히 만난 라울은 타인의 통증을 치유하고 그들이 숨겨온 삶의 일부를 알아맞히는 기묘한 인물이다. 오래전 사랑했던 마리아를 사고로 잃은 그는 수십 년이 지난 뒤 만난 마고에게서 그녀의 흔적을 발견한다. 두 사람의 만남은 환생이라는 초현실적인 설정을 통해 진행되지만, 애치먼이 바라보는 것은 환생의 진위보다 한 인간에게 과연 현재의 삶만 존재하는가 하는 문제다. 라울이 말하는 ‘그림자 자아’는 실제로 살아온 나의 뒤편에 존재하는 수많은 가능성의 나를 가리킨다. 다른 선택을 했다면 존재했을 사람, 다른 시간에 누군가를 만났다면 경험했을 사랑, 살아보지 못한 삶까지도 현재의 자아를 구성한다는 발상이다. 사랑은 이처럼 한 사람의 현재를 과거와 미래, 그리고 실현되지 않은 가능성까지 이어놓는다.

두 작품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같은 시간을 바라본다. 마리아나는 이미 끝난 사랑을 기억 속에서 반복하며 ‘다르게 될 수 있었던 우리’를 상상한다. 라울은 시간 자체를 건너 ‘다시 만날 수 있는 우리’를 믿는다. 전자가 기억을 통해 과거의 가능성을 복원한다면 후자는 환생을 통해 가능성을 현재로 불러온다. 현실에서는 실현되지 않았지만 충분히 가능했던 세계, 애치먼이 ‘그럴 수도 있었던 것’과 ‘그럴 수도 있는 것’으로 설명해온 가능성의 영역이 두 작품에서 각기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는 셈이다. 인간은 자신이 살아온 삶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선택하지 않은 길과 만나지 못한 사람, 하지 못한 말과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미래까지 끌어안은 채 현재를 살아간다. 사랑은 특히 이 가능성의 영역을 넓힌다. 사랑에는 언제나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이 함께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랑을 시간 너머로 연장하려는 욕망에는 또 다른 문제가 생긴다. 『페루에서 온 신사』에서 라울이 마고를 마리아와 겹쳐 바라보는 순간, 과거의 사랑을 보존하려는 마음은 현재의 한 사람을 과거의 이미지 안에 가둘 위험을 갖는다. 사랑했던 사람을 기억하는 일과 눈앞의 사람을 그 사람의 대체물로 바라보는 일은 다르다. 애치먼은 이 차이를 명확한 윤리적 선언으로 설명하기보다 라울과 마고 사이의 불안정한 관계 속에 배치한다. 과거를 잃지 않으려는 욕망이 현재를 어떻게 바라보게 만드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사랑에는 소유하려는 충동이 따라붙지만, 상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나의 기억과 욕망으로 완전히 환원될 수 없는 독립된 세계임을 인정하는 일이기도 하다.

두 작품에서 상실은 사랑의 반대편에 놓이지 않는다. 오히려 사랑이 가진 성격을 드러내는 조건으로 작동한다. 사랑했던 사람이 언제까지나 곁에 있을 수 없다는 사실, 함께 상상했던 미래가 현실에서 실현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 때문에 사랑은 현재의 감각을 강렬하게 만든다. 『마리아나』의 마리아나에게는 지나가버린 시간이, 『페루에서 온 신사』의 라울에게는 죽음으로 끊긴 시간이 현재를 향해 되돌아온다. 둘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부재한 사람과 관계를 지속한다. 그 과정에서 사랑은 더 이상 두 사람 사이에서만 발생하는 감정이 아니다. 한 사람이 자기 삶을 해석하는 방식 전체를 바꾸는 경험이 된다.

애치먼의 작품에서 사랑을 흥미롭게 만드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사랑은 행복한 상태로 오래 유지되는 감정이라기보다 인간의 감각과 기억, 시간의식 자체를 변화시키는 사건으로 묘사된다. 그래서 그의 인물들은 사랑했던 사람보다 그 사랑을 경험하면서 달라진 자신을 더 오래 데리고 살아간다. 『마리아나』의 편지는 그 변화를 기록하는 형식이고, 『페루에서 온 신사』의 환생은 그 변화를 시간의 경계까지 밀어붙이는 장치다. 현실적인 실연과 초현실적인 재회라는 전혀 다른 외형을 갖추었지만 두 작품의 내부에서는 같은 일이 일어난다. 사랑이 지나간 뒤에도 인간은 그 이전의 자신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그렇다면 사랑은 왜 반복되는가. 상실의 가능성을 알면서도 다시 누군가에게 마음을 내어주는 이유는 무엇인가. 애치먼의 두 작품은 이에 대한 낙관적인 해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사랑은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면서 동시에 집착과 후회와 그리움의 자리로 데려간다. 그럼에도 사랑을 경험한 사람에게 그 이전의 안전한 상태로 돌아가는 일은 불가능하다. 사랑은 삶에 하나의 가능성을 열고, 그 가능성이 사라진 뒤에도 그것을 경험했던 사람의 감각을 바꾸어놓는다.

결국 『마리아나』와 『페루에서 온 신사』가 함께 보여주는 것은 사랑의 전과 중과 후가 서로 단절된 시간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사랑하기 전에는 가능성이 있고, 사랑하는 동안에는 자아가 변하며, 사랑이 지나간 뒤에는 기억과 상실, 살아보지 못한 삶이 남는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통과한 인간은 다시 사랑할 수 있다. 사랑이 삶을 안전하게 만들어주기 때문이 아니라, 사랑을 통해서만 발견할 수 있는 삶의 감각이 있기 때문이다.

사랑 없는 삶은 상처받을 일도 적을 것이다. 그러나 타인을 향해 자신을 열어본 경험이 없다면 인간은 자신의 세계가 어디까지 넓어질 수 있는지도 알기 어렵다. 애치먼이 두 작품에서 집요하게 바라보는 것은 바로 그 확장이다. 누군가를 사랑한 뒤에는 그 사람과 함께했던 시간뿐 아니라 그 시간 속에서 만들어진 새로운 자신까지 삶에 남는다. 사랑은 떠난 사람을 붙잡아두는 힘이 아니라,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만나 이전과 다른 존재가 되어버리는 사건이다. 그래서 사랑이 끝난 뒤에도 사랑의 흔적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기억 속의 한 장면으로 남는 대신, 이후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의 일부가 된다.

✏️도서출판 비채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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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거 게임 : 50번째 추첨의 날 ㅣ 헝거 게임 시리즈 5
수잔 콜린스 지음, 이원열 옮김 / 북폴리오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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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적인 세계가 오래 지속되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힘이 압도적으로 강해서일 수도 있지만, 더 오래 작동하는 것은 사람들이 그 힘을 거스를 수 없다고 믿게 되는 일이다. 매년 반복되는 추첨과 헝거 게임을 바라보며 열여섯 살 헤이미치가 느끼는 체념도 그와 다르지 않다. 어제까지 일어났던 일이 내일도 일어날 것이라 믿는다면, 그 세계를 바꾸려는 생각은 처음부터 무의미해진다. 그런 질서에 작은 의문을 던지는 목소리가 있다. 반복되었다는 사실만으로 앞으로도 반복될 이유는 없다고. 변화가 불가능하다고 믿는 순간부터 변화할 가능성도 사라진다고. 수잔 콜린스가 이번 작품에서 헤이미치의 과거를 꺼내든 이유는 어쩌면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한 인간이 어떻게 체념을 배우고, 그 체념을 다시 거슬러 나가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소수의 권력이 다수를 지배할 수 있는 까닭은 그 힘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사람들이 그 지배를 하나의 현실로 받아들이고, 현실의 바깥을 상상하기 어려워질 때 권력은 더욱 단단해진다. 캐피톨이 만들어놓은 세계에서 헝거 게임은 더 이상 특별한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매년 반복되는 의식이고, 아이들이 추첨되는 날은 이미 모두가 알고 있는 일정이며, 경기장에서 벌어지는 죽음마저 하나의 익숙한 볼거리가 된다. 끔찍한 일이 반복되면 사람은 그것을 견디는 법부터 배운다. 그리고 견딜 수 있게 된 순간, 부당함에 저항해야 한다는 감각은 조금씩 희미해진다. 헤이미치의 이야기는 그 익숙함을 깨뜨리는 데서 시작된다. 세상이 원래 그런 것이라는 생각에 아주 작은 틈을 내는 것. 어쩌면 저항의 시작은 그 정도로 작을 수 있다.

『헝거 게임 : 50번째 추첨의 날』에서 가장 섬뜩한 것은 아이들이 죽는 장면만이 아니다. 그 죽음이 하나의 방송으로 만들어지는 과정이다. 캐피톨은 조공인들의 몸을 감시하고, 행동을 촬영하고, 그 장면을 편집한다. 그리고 편집된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보여준다. 무엇을 보여줄 것인지 결정하는 순간, 무엇을 믿게 할 것인지도 함께 결정되기 때문이다. 헤이미치가 경기장에서 보여준 행동과 조공인들의 연대는 캐피톨이 원하는 서사와 맞지 않는 순간 삭제되고, 그 자리에 순종적이고 무지하며 서로를 죽이기 위해 모인 아이들의 이미지가 들어선다. 권력은 사람의 피로 자신의 이야기를 그린다. 사람을 죽이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 죽음이 어떤 의미로 기억될 것인지까지 결정하려 한다.

끊임없이 바라보는 눈은 사람의 행동을 통제하고, 자신이 어떻게 보일지를 의식하게 만든다. 여기에 방송과 편집이 결합하면서 감시는 단순히 몸을 통제하는 장치에서 현실을 정의하는 장치로 변한다. 『헝거 게임』의 경기장은 아이들이 죽는 장소인 동시에, 무엇이 진실로 기억될 것인지 결정하는 거대한 스튜디오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소설에서 저항은 거대한 무기를 드는 일보다 먼저 시작된다. 카메라가 원하는 표정을 짓지 않는 것, 죽은 아이의 몸을 감추지 않는 것, 서로를 적으로 취급하지 않는 것. 캐피톨이 가장 원하지 않는 것은 조공인들이 자신들에게 주어진 역할을 거부하는 일이다. 경쟁해야 할 사람들이 서로를 걱정하고, 살아남아야 할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생존을 생각하는 순간 게임의 규칙은 더 이상 완전하지 않게 된다.

억압은 사람을 혼자 남겨둘 때 가장 강력해진다. 반대로 서로가 서로의 고통을 알아보는 순간, 개인의 두려움은 공동의 감각으로 바뀐다. 경기장에 모인 아이들이 만들어가는 연대가 중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들은 모두 서로 다른 구역에서 왔고, 서로를 경쟁자로 만나도록 설계되어 있다. 하지만 함께 살아남을 방법을 찾기 시작하면서 캐피톨이 정해놓은 관계의 질서를 벗어난다. 한나 아렌트가 인간의 행위를 타인과 함께 세계를 만들어가는 일로 바라보았듯, 이들의 연대는 단순한 생존 전략에 머물지 않는다. 혼자 살아남으라는 명령에 함께 살아남겠다고 답하는 것. 누군가의 고통을 나의 생존과 무관한 일로 취급하지 않는 것. 그 순간 개인의 생존은 공동의 저항으로 변한다.

그러나 저항에는 언제나 대가가 따른다. 특히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인간에게 저항은 더욱 잔인한 일이 된다. 사랑은 삶을 견디게 하는 힘이면서 동시에 권력이 겨눌 수 있는 가장 깊은 약점이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모든 것을 잃도록 설계된 판이라면, 그래도 싸워야 할 이유가 남아 있을까. 이 질문 앞에서 헤이미치의 이야기는 단순한 성장담이나 영웅담에서 멀어진다. 그에게 살아남는 일은 무언가를 얻는 일이 아니라, 살아남은 만큼 더 많은 것을 기억해야 하는 일이 되어간다. 경기장에서 만난 사람들, 가족, 레노어 도브와의 관계가 사라질수록 헤이미치에게 남는 것은 기억뿐이다. 그래서 헤이미치의 이후 삶을 바라보는 일은 한 사람이 왜 무너졌는지를 묻는 일과 동시에, 기억을 가진 사람이 어떻게 살아남는지를 바라보는 일이 된다.

기억은 과거를 보존하는 행위에 그치지 않는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말할 수 있는 사람에게는 아직 현실을 다시 해석할 힘이 남아 있다. 권력이 사람의 죽음에 의미를 부여하려 할 때, 살아남은 사람은 자신의 언어로 그 죽음을 기억할 수 있다. 누군가에게 사랑받았던 사람이라는 사실, 누군가와 함께 웃었던 순간, 한때 다른 세계를 꿈꾸었던 시간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캐피톨이 만든 이야기는 완전해지지 않는다. 그래서 헤이미치에게 기억은 축복인 동시에 고통이다. 잊을 수 있다면 조금 편해질 수 있겠지만, 잊는 순간 캐피톨이 원하는 방식으로 역사가 완성되기 때문이다. 그 앞에서 헤이미치는 자주 실패하고, 많은 것을 잃고, 자신마저 잃어버린다. 그럼에도 살아남은 사람에게는 한 가지 일이 남는다. 무엇이 있었는지를 기억하는 것. 누가 사라졌는지를 말하는 것. 자신에게 강요된 이야기 대신 자신의 언어로 과거를 다시 부르는 것.

그래서 마지막에 남는 것은 승리의 감각보다 시간에 대한 생각이다. 헤이미치의 저항은 그가 바라던 방식으로 즉시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 헝거 게임은 계속되고, 캐피톨은 그의 행동을 자기들이 원하는 이야기로 다시 편집한다. 한 사람이 목숨을 걸고 만들어낸 장면조차 권력의 편집 앞에서 사라질 수 있다. 그렇다면 그 저항은 실패한 것일까. 어쩌면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헤이미치의 이야기는 훗날까지 이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헤이미치가 만들었던 작은 저항의 흔적은 훗날 캣니스의 등장과 함께 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 작품 속 플루타르크가 말하듯 저항에는 연속성이 있다. 오늘의 행동이 당장 세상을 바꾸지 못하더라도, 그것이 다음 사람에게 도달한다면 역사는 그 행동을 완전히 지워버릴 수 없다. 한 사람의 실패가 다른 사람에게는 시작이 될 수 있고, 한 세대가 남긴 상처가 다음 세대에게는 다시 일어설 이유가 될 수 있다.

결국 『헝거 게임 : 50번째 추첨의 날』은 헤이미치가 어떻게 헝거 게임의 승자가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이면서, 한 인간이 어떻게 복종을 배우고 그 질서에 저항하는 사람이 되어가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다. 캐피톨이 빼앗으려 한 것은 목숨만이 아니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게 하고, 기억을 빼앗고,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게 만들며, 자신이 살아가는 세계를 바꿀 수 있다는 생각마저 포기하게 만드는 것. 지배는 그렇게 사람의 바깥에서 안쪽으로 들어온다. 그리고 저항 역시 그 안에서 시작된다. 지금의 세계가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 눈앞의 사람이 적이 아니라는 감각, 사라진 사람의 이름을 잊지 않겠다는 마음. 거대한 혁명보다 먼저 필요한 것은 그런 작은 선택들이다.

태양은 매일 떠오른다. 그래서 사람들은 내일도 오늘과 같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반복되는 세계를 그대로 받아들일 것인지, 그 반복에 작은 몸 하나를 세워 다른 가능성을 만들 것인지는 다른 문제다. 헤이미치가 남긴 것은 승리의 영광이 아니었다. 모든 것을 잃은 뒤에도 자신이 보았던 것을 기억하고, 언젠가 다른 사람이 그 자리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작은 자리를 남겨두는 일이었다. 사랑하는 모든 것을 잃도록 설계된 세계에서도 싸울 이유가 남는다면, 아마 그것은 승리하기 위해서만은 아닐 것이다. 누군가의 내일이 오늘과 같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어제까지 당연했던 운명을 내일의 사람에게까지 물려주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한 사람이 남긴 작은 저항이 시간 너머의 누군가에게 닿을 수 있다는 사실을 믿기 위해서.

✏️소정의 원고료와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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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
에두아르 르베 지음, 정영문 옮김 / 은행나무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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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삶을 이야기로 만드는 일에는 일정한 질서가 필요하다. 태어나고, 자라고, 어떤 일을 겪고, 그것을 통해 변하고, 현재에 이르렀다는 시간의 흐름. 무엇이 삶을 바꾼 사건이었는지, 무엇이 사소한 기억에 불과했는지를 가려내는 선택. 그렇게 정리된 삶은 하나의 서사가 되고, 우리는 그 서사를 통해 한 사람을 이해한다. 그러나 에두아르 르베의 『자화상』에는 이런 익숙한 질서가 없다. 르베는 이야기를 만들지 않는다. 사건 사이의 인과를 제거하고, 기억의 순서를 해체하며, 삶을 하나의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중심 사건도 설정하지 않는다. 대신 자신에 관한 수많은 문장을 흩어놓는다.

르베가 연대기와 인과관계를 버린 것은 삶을 무질서하게 재현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삶을 하나의 이야기로 정리하는 순간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선택과 배제를 드러내기 위해서다. 어떤 기억을 중요하게 다루고 어떤 기억을 지워버릴 것인지 결정하는 순간, 자서전은 이미 한 인간을 특정한 서사 안에 배치한다. 어린 시절의 어떤 사건은 현재의 나를 만든 결정적인 계기가 되고, 어떤 만남은 인생을 바꾼 전환점이 되며, 나머지 수많은 날들은 그 사건을 설명하기 위한 배경으로 밀려난다. 삶은 그렇게 의미 있는 것과 의미 없는 것으로 구분된다. 『자화상』은 바로 그 질서를 거부한다. 르베에게는 인생을 바꾼 사건과 별것 아닌 습관 사이에 반드시 존재해야 할 위계가 없다. 폴 리쾨르가 말한 ‘서사적 정체성’은 인간이 자신의 삶을 하나의 이야기로 구성하며 ‘나’라는 존재를 이해한다는 생각에 닿아 있다. 그렇다면 르베의 작업은 그 서사를 구성하는 방식 자체에 작은 반론을 건다.

그래서 이 책에서 죽음과 음식, 사랑과 여행, 어린 시절의 기억과 신체에 대한 감각은 서로 다른 무게를 가진 사건으로 정리되지 않는다. 한 문장이 다른 문장을 설명하지 않고, 어떤 기억이 다음 기억의 원인이 되지도 않는다. 문장들은 저마다 하나의 작은 사실로 존재한다. ‘무엇이 중요한가’라는 판단을 최대한 유보한 채, 삶을 구성했던 것들을 같은 높이에 올려놓는 것이다. 이때 『자화상』은 한 인간의 삶을 특별한 사건들의 연속으로 바라보는 관습에 의문을 던진다. 실제로 한 사람을 이루는 것은 몇 번의 극적인 순간만이 아니다. 매일 반복되는 취향과 습관, 무심코 지나친 감각, 아무에게도 설명하지 않았던 생각과 기억 역시 그 사람의 일부다.

르베는 바로 그 사소함을 집요하게 수집한다.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어떤 사람에게 끌리고 어떤 사람과 거리를 두는지, 여행을 어떻게 느끼는지, 자신의 몸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어떤 기억을 간직하고 어떤 기억을 잊었는지를 기록한다. 그중에는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기 어려운 사실도 많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사소함이 결코 주변부로 밀려나지 않는다. 오히려 특별하지 않다는 이유로 기억에서 탈락했던 것들이 하나씩 불려 나온다. 그렇게 보면 『자화상』은 한 인간을 구성하는 요소들의 목록이면서, 동시에 ‘중요함’이라는 기준을 해체하는 작업이다. 삶을 회고할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의미를 찾는다. 하지만 의미를 부여하는 순간 기억은 다시 편집된다. 수많은 날 가운데 몇 장면만 선택되고, 선택된 장면에는 현재의 내가 알고 있는 의미가 덧씌워진다. 과거의 나는 지금의 나를 설명하기 위한 인물이 되고, 현재의 나는 그 과거를 해석하는 사람이 된다. 르베는 그 해석의 과정을 최대한 걷어낸다. 그에게 과거는 현재를 설명하기 위한 원인이 아니라, 그저 한때 존재했던 수많은 사실 중 하나로 남는다.

그러나 사실을 많이 모은다고 해서 한 사람을 완전히 알게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자화상』에서는 자신에 관한 사실이 쌓일수록 그 사람의 모습이 선명해지기보다,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더 또렷해진다. 르베는 자신에 관해 놀라울 만큼 많은 것을 말하지만, 그 많은 문장은 하나의 완전한 인물상으로 수렴하지 않는다.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일을 겪었는지, 누구를 사랑했는지, 어떤 습관을 가지고 있는지를 안다고 해서 그 사람의 본질까지 알게 되는 것은 아니다. 삶의 사실과 삶의 진실 사이에는 쉽게 건널 수 없는 거리가 놓여 있다. 모든 문장이 사실이라고 해도 그 사실들의 총합이 곧 한 인간의 진실이 되지는 않는다. 기억은 언제나 선택적이고, 자기 자신에 대한 판단에도 현재의 시선이 개입한다. 같은 사건을 다시 떠올릴 때마다 기억은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돌아온다.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순간도 있고, 자신에게는 중요하지 않았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결정적인 사건이었던 순간도 있다. 자기 자신에 대해 가장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정작 자기 자신을 완전히 설명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자신을 말하는 순간에도 선택은 발생한다. 무엇을 기억할 것인지, 어떤 단어를 사용할 것인지, 어떤 사건을 기록할 것인지 결정하는 순간 이미 하나의 ‘나’가 만들어진다. 르베는 이 문제 앞에서 더 많은 사실을 끌어온다. 자신을 가능한 한 많은 문장 속에 분산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그 시도가 자기 자신의 불투명성을 더욱 선명하게 만든다. 수많은 조각을 모았는데도 전체의 모습은 완전히 닫히지 않는다. 자신을 설명하기 위해 쓴 문장이 오히려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을 남긴다. 그리고 그 불완전한 초상 안에는 타인이 끊임없이 들어온다. 친구와 연인, 가족과 낯선 사람, 우연히 스쳐 지나간 사람들의 모습이 르베의 자화상에 함께 놓인다. 자신을 그리는 책인데 정작 혼자서 존재하는 ‘나’는 거의 없다. 인간은 본래 관계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의 나와 혼자 있을 때의 나, 상처를 받았을 때의 나와 타인에게 상처를 주었을 때의 나는 서로 다른 얼굴을 가진다. 타인의 시선은 나를 바라보는 외부의 눈인 동시에 내가 나를 인식하는 방식에 스며든 하나의 기억이기도 하다.

자화상이라는 형식은 본질적으로 모순을 품는다. 자화상은 자신이 자신을 그리는 그림이지만, 자신을 완전히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거울 속 얼굴을 아무리 오래 바라보아도 그 얼굴이 살아온 시간까지 함께 볼 수는 없다. 내가 알고 있는 나와 타인이 기억하는 나는 다르고, 지금의 내가 기억하는 과거의 나와 당시의 내가 느꼈던 나 역시 다르다. 르베의 자화상에 타인의 얼굴이 끊임없이 들어오는 것은 그래서 자연스럽다. 한 사람의 초상은 혼자 그릴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자화상』의 파편적인 형식은 단순한 실험이나 문체적 기교가 아니다. 오히려 인간이라는 존재가 본래 하나의 완결된 서사로 환원되기 어렵다는 사실을 형식 자체로 보여준다. 문장과 문장 사이에 인과관계가 없다는 것은 삶에도 언제나 명확한 인과관계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뜻처럼 읽힌다. 우리는 지나간 사건들에 뒤늦게 이유를 붙이지만, 실제로 살아가는 동안에는 수많은 일이 아무런 설명 없이 지나간다. 삶은 언제나 이야기보다 먼저 존재하고, 이야기는 그것이 지나간 뒤에 만들어진다.

르베는 그 사후적인 질서를 거부한다. 그래서 그의 자화상에는 성장도 없고, 극복도 없고, 완성도 없다. 어떤 사건을 통해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는 식의 결론도 없다. 한 사람은 그저 수많은 순간을 통과하며 존재한다. 서로 모순되는 욕망과 기억, 애정과 무관심, 확신과 망설임을 함께 품은 채로. 결국 『자화상』이 그려내는 것은 완성된 인간의 얼굴이 아니다. 오히려 한 인간을 이루는 수많은 조각과, 그 조각들을 아무리 모아도 완전히 채울 수 없는 빈자리다. 르베는 자신을 설명하기 위해 수많은 사실을 늘어놓지만, 그 사실들이 하나의 정답으로 모이도록 만들지 않는다. 각각의 문장은 자신이었던 어느 한순간을 붙잡고 있을 뿐이다. 그 문장들이 모여 하나의 얼굴을 만들어내는 순간에도, 가까이 들여다보면 얼굴은 다시 무수한 점으로 흩어진다.

그 점에서 『자화상』은 자신을 완성하는 책이 아니라 자신을 완성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책이다. 삶을 하나의 이야기로 정리하면 지나간 시간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지만,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소함이 사라진다. 르베는 그 사라진 것들을 다시 불러낸다. 별것 아닌 취향과 오래된 습관,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과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순간까지 한 사람의 삶으로 되돌려놓는다. 그리고 그 수많은 사실 앞에서 비로소 자화상의 의미가 달라진다. 자신을 닮은 얼굴을 만드는 것이 자화상이라면, 르베의 책은 끝내 하나의 얼굴이 남지 않는다. 그러나 자신을 이루었던 순간들을 빠짐없이 바라보려는 시도가 자화상이라면, 이 책은 누구보다 집요한 초상이다. 인간은 하나의 이야기로 설명되지 않으며, 하나의 얼굴로도 붙잡히지 않는다. 우리가 ‘나’라고 부르는 존재는 수많은 기억과 관계와 습관과 우연이 겹쳐 만들어진 잠정적인 형상에 가깝다.

르베는 그 형상을 억지로 완성하지 않는다. 대신 수많은 문장을 통해 한 사람이었던 순간들을 하나씩 남겨놓는다. 완성된 얼굴 대신 흩어진 조각을, 삶의 의미 대신 삶의 흔적을. 그렇게 『자화상』은 한 인간을 가장 많이 말하면서도 그 인간을 하나의 문장으로 규정하지 않는다. 한 사람을 그린다는 것은 완성된 얼굴을 내놓는 일이 아니라, 그 얼굴을 이루고 있는 수많은 순간을 끝까지 지워버리지 않는 일이다.

한 사람의 얼굴은 가까이 들여다볼수록 오히려 선명한 윤곽을 잃는다. 기억과 습관, 사랑과 무관심, 아무 의미 없이 지나간 하루의 감각까지 서로 다른 크기의 점들이 겹쳐질 때 비로소 한 사람의 모습이 떠오른다. 10년 만에 다시 돌아온 에두아르 르베의 『자화상』은 그렇게 점묘화처럼 흩어진 1,400여 개의 문장으로 한 인간의 초상을 그려낸다. 한 문장만 떼어놓으면 사소하고 무심한 사실에 불과하지만, 그 점들이 한 페이지씩 쌓여갈수록 독자는 르베의 얼굴과 동시에 자신의 얼굴까지 그려보게 된다.

익숙한 소설의 문법에서 벗어난 작품을 찾는 독자, 자기 자신을 바라보고 기록하는 문학을 좋아하는 독자에게 특히 권하고 싶다. 평범한 취향과 오래된 습관,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처럼 쉽게 서사가 되지 못했던 것들을 오래 들여다보는 사람이라면 더욱 그렇다. 소설과 자서전의 경계를 흐리는 실험적인 문학을 좋아하는 독자에게도 르베의 방식은 낯설고 매혹적인 독서가 될 것이다. 한 문장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사람을, 수많은 문장으로 그려낸 책.

2015년 처음 한국에 소개된 뒤 절판되었던 이 책은 재출간을 기다리는 독자들의 목소리와 함께 다시 돌아왔다. 이번 개정판에서는 국내에 르베의 작품을 처음 소개했던 소설가 정영문이 문장을 새롭게 다듬었다. 오래된 책이 다시 돌아왔다는 사실보다 반가운 것은, 그때의 문장들이 지금도 여전히 한 사람의 얼굴을 그릴 수 있다는 점이다. 르베는 자신을 설명하려 수많은 점을 찍어놓았고, 독자는 그 점들을 이어 하나의 얼굴을 만들어보게 된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바라보고 나면 그 얼굴은 르베의 것만으로 남지 않는다. 흩어진 점들 사이에서 저마다의 삶이 하나의 초상으로 떠오르는 순간, 자화상은 비로소 한 사람만의 것이 아니게 된다.

✏️도서출판 은행나무로부터 은행잎 4기 자격으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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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날들은 사라졌고
수잰 레드펀 지음, 김마림 옮김 / 열린책들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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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삶은 대체로 가난한 쪽에서 먼저 의심받는다. 가진 것이 적고 선택지가 좁은 삶을 우리는 쉽게 불행으로 번역하곤 한다. 더 넓은 집, 더 많은 돈, 더 좋은 교육, 더 높은 사회적 지위. 삶의 개선을 설명하는 언어는 늘 ‘더’를 향한다. 수잰 레드펀의 『평범한 날들은 사라졌고』는 그 익숙한 상승의 문법에 작은 함정을 판다. 가족이 더 많은 것을 갖게 되는 동안, 그들이 살던 하루는 하나씩 사라진다.

남편이 떠난 뒤 세 아이를 키우는 여성에게 돈은 추상적인 욕망이 아니다. 그것은 집세와 식탁, 자동차, 아이들의 안전처럼 구체적인 형태를 가진다. 그러니 네 살짜리 아이에게 찾아온 뜻밖의 재능과 그 재능을 돈으로 바꿀 기회 앞에서 물러나는 일은 도덕적으로 간단하지 않다. 가난을 견디는 부모에게 ‘아이의 순수한 어린 시절’을 지키라는 말은 때로 너무 사치스러운 조언이 된다. 이 소설이 출발하는 곳도 바로 그 불편한 현실이다. 아이를 상품화하는 세계와, 아이의 재능을 팔아야만 생존할 수 있는 부모 사이에는 생각보다 선명한 선이 그어져 있지 않다.

문제는 돈을 벌기 시작한 다음부터다. 몰리의 재능은 곧 산업의 언어로 번역된다. 귀여움은 상품성이 되고, 춤은 콘텐츠가 되고, 어린 시절은 촬영 가능한 시간이 된다. 아이가 무엇을 좋아하고 원하는가보다 얼마나 오래 카메라 앞에 설 수 있는가가 중요해지는 순간, 재능은 가능성이라는 이름을 벗어나 하나의 경제적 자원으로 취급되기 시작한다. 네 살이라는 나이는 이 변화를 더욱 잔혹하게 만든다. 아직 자기 노동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는 존재가 자신의 노동으로 가족의 경제적 조건을 바꾸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부모의 역할도 미묘하게 변한다. 보호자는 관리자가 되고, 관리자는 협상자가 된다. 아이의 하루를 지켜보는 일과 아이의 하루를 판매하는 일 사이의 거리는 의외로 짧다. 계약서에 서명하는 손, 촬영 시간을 조율하는 손, 아이가 피곤해하지 않는지 살피는 손이 모두 같은 손인 까닭이다. 사랑과 노동, 보호와 거래가 한 사람 안에서 겹쳐진다.

그래서 이 작품에서 가장 불편한 인물은 특정한 악인이 아니다. 오히려 모두가 어느 정도 선의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가족은 돈이 필요하고, 아이에게는 재능이 있으며, 제작자는 성공적인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어 하고, 대중은 사랑스러운 아이를 보고 싶어 한다. 각각의 욕망만 떼어놓으면 특별히 잔혹한 것은 없다. 그러나 그것들이 한곳에 모이는 순간 어린아이의 시간이 대가로 지불된다. 착한 사람들만으로도 착취는 완성될 수 있다.

가족이라는 단위 역시 이 구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한 사람의 성공은 가족 전체의 성공으로 쉽게 포장되지만, 실제로 가족 구성원들이 치르는 비용까지 균등하게 분배되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돈을 얻고, 누군가는 관심을 잃는다. 누군가는 새로운 기회를 얻고, 누군가는 익숙했던 생활을 잃는다. 같은 식탁에 앉아 있어도 각자가 경험하는 삶의 밀도는 달라진다. 가족이라는 이름은 이 차이를 지워버리는 데 놀라울 만큼 편리한 단어가 되어 버린다. 특히 어린아이에게 성공은 아직 자신의 욕망과 분리되지 않는다. 어른은 성공을 미래의 기회로 해석하지만, 아이에게 시간은 미래를 위한 자원이 아닌 지금 살아야 하는 현재다. 어른에게 몇 시간의 촬영은 경력의 일부지만, 아이에게 그 몇 시간은 친구와 놀 수 있는 오후일 수 있다. 어른에게 유명세는 사회적 자산이지만, 아이에게는 자신을 모르는 사람조차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이상한 세계다. 같은 사건은 나이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이 지점에서 ‘아동의 권리’라는 말도 조금 다른 얼굴을 갖는다. 아이에게 자기결정권을 인정한다고 해서 모든 결정을 아이에게 맡길 수는 없다. 반대로 보호를 이유로 모든 결정을 어른이 가져갈 수도 없다. 아이는 아직 자신을 책임질 수 없기에 보호가 필요하지만, 언젠가 자신을 책임질 사람으로 자라야 하기 때문에 선택의 경험도 필요한 것이다. 부모의 사랑에는 이 두 요구를 동시에 감당해야 하는 모순이 들어 있다.

『평범한 날들은 사라졌고』가 흥미로운 것은 그 모순을 ‘좋은 부모와 나쁜 부모’의 구도로 해결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더 좋은 삶을 주려는 마음은 아이에게서 더 많은 것을 요구하게 만들 수 있고, 아이를 보호하려는 마음은 아이의 선택을 대신하는 권력으로 변할 수 있다. 부모가 아이를 사랑한다는 사실은 그 선택을 정당화해주지 않는다. 그렇다고 부모의 선택을 쉽게 비난할 수도 없다. 사랑과 책임이 만나는 자리에는 언제나 판단의 잔여가 남는다.

성공의 문제도 같은 방식으로 뒤집힌다. 성공은 흔히 축적의 언어로 설명된다. 돈이 얼마나 늘었는지, 얼마나 유명해졌는지, 얼마나 많은 기회를 얻었는지. 그러나 삶의 변화는 축적만으로 계산할 수 없다. 사라진 것도 함께 세어야 한다. 익명성, 한가로운 오후, 가족끼리 나눌 수 있는 시간, 실패해도 누구에게 기록되지 않는 자유.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은 대개 잃고 나서야 가격표가 없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래서 제목의 ‘평범한 날들’은 생활 수준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시간에 대한 명칭이다. 아무도 상품으로 만들지 않은 시간, 성과로 환산되지 않은 시간, 누군가의 경력과 수익을 위해 사용되지 않은 시간, 아이가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 말이다. 인간에게는 그런 시간이 필요하다. 자본의 논리가 삶의 거의 모든 영역에 침투할수록 더욱 그렇다. 이 소설에서 어린 시절은 그래서 가장 먼저 보호받아야 할 노동 이전의 시간으로 읽힌다. 아이는 아직 시장에 자신을 내놓을 이유가 없어야 한다. 잘해서 사랑받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만으로 사랑받는 시간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스타가 된 아이에게는 그 경계가 너무 일찍 사라진다. 웃음도, 춤도, 표정도, 말 한마디도 타인의 시선 안에서 가치가 매겨진다. 성장하기도 전에 자신을 바라보는 법부터 배워야 하는 셈이다.

더 아이러니한 것은 부모 역시 그 시장의 바깥에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돈을 벌어야 하고, 아이의 재능을 경제적 자원으로 활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부모는 자본주의의 가해자이면서 동시에 그 구조에 종속된 존재가 된다. 그래서 이 작품의 갈등을 단순히 부모의 욕심이나 연예 산업의 탐욕으로 축소하면 오히려 중요한 부분이 사라진다. 선택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선택지가 제한된 사람들. 그들의 선택이 또 다른 사람의 자유를 제한하는 구조. 이 모순이 가족극의 표면 아래에서 계속 움직인다.

그렇다면 좋은 삶의 기준은 무엇인가. 더 많은 것을 갖는 것? 아니면 덜 팔리는 것? 더 많은 기회를 갖는 것? 아니면 아직 선택하지 않은 채 머물 수 있는 시간을 갖는 것? 『평범한 날들은 사라졌고』는 성공을 거부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성공이라는 단어가 지워버리는 것들을 다시 화면 안으로 불러들인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하루는 생산성이 낮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삶은 본래 생산성으로만 설명되지 않는다. 아이가 놀고, 가족이 밥을 먹고, 아무 목적 없이 거리를 걷고, 내일의 이익과 상관없는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 시장의 계산법으로는 낭비에 가까운 그 시간들이 인간의 삶을 인간답게, ‘살 만하게’ 만든다.

결국 사라진 것은 단순한 평온이 아니다. 그리고 그 자리를 채운 것은 자신의 시간이 자신의 것으로 남아 있지 않은 삶이다. 유명세는 그 시간을 가져가고, 돈을 그것을 보상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어떤 상실은 아무리 많은 돈을 벌어도 같은 모습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평범한 날들은 특별해질 것을 요구받지 않았기에 귀하다. 누구의 경력이나 상품도 되지 않고, 어떤 성공의 증거로도 제출할 필요가 없는 시간. 아이가 아이로 존재하고, 부모가 부모로 존재하며, 가족이 시장의 단위가 되기 전의 시간. 평범한 날들은 사라졌다. 평범했기에 누구도 붙잡아두지 않았던 날들처럼.

어떤 삶은 더 나은 곳으로 올라가기 위해 달리는 동안, 정작 발밑에 있던 하루부터 잃어버린다. 『평범한 날들은 사라졌고』는 가족을 위한 선택이 어디까지 사랑이고 어디서부터 거래가 되는지, 아이를 보호한다는 말이 언제 아이의 시간을 대신 결정하는 일이 되는지를 집요하게 들여다본다. 가족을 위해 내린 선택의 무게를 생각해본 독자, 아이의 권리와 부모의 책임 사이에서 쉽게 답을 내릴 수 없었던 독자라면 이 소설의 불편한 현실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 여기에 연예 산업과 미디어가 인간의 재능과 시간을 상품으로 바꾸는 방식에 관심 있는 독자, 그리고 성공의 크기보다 그 과정에서 잃어버린 평범한 하루의 가치를 돌아보고 싶은 독자에게도 권하고 싶다. 돈으로 환산되는 것들이 늘어날수록 값으로 매길 수 없는 시간은 오히려 희미해진다. 이 소설은 그 희미해지는 시간을 붙잡기 위해, 우리가 너무 오래 당연하게 여겨온 ‘평범함’의 가격표를 찢어버린다.

✏️도서출판 열린책들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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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과학의 눈으로 보면 기후의 미래가 바뀐다 - 38억 년 생명의 법칙으로 다시 읽는 기후 위기 ㅣ 지식의 눈 3
김미정 지음 / 지상의책(갈매나무)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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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위기를 이야기할 때 가장 익숙하게 등장하는 문장은 ‘지구를 구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김미정의 『생명과학의 눈으로 보면 기후의 미래가 바뀐다』는 이 익숙한 표현을 생명과학의 시간 속에 다시 놓아본다. 기후가 변하는 일은 지구의 역사에서 처음 일어난 사건이 아니다. 지구의 나이는 46억 년에 이르고, 생명의 역사는 그보다 짧지만 38억 년에 걸쳐 이어져 왔다. 그 긴 시간 동안 기후와 대기의 조건은 끊임없이 달라졌고, 생명은 번성하고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그렇다면 지금의 기후위기를 바라보는 시선 역시 달라질 필요가 있다. 46억 년의 시간을 견뎌온 지구에게 인간이 구원자가 되어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 지구는 이미 수없이 뜨거워졌고 차가워졌으며, 대기의 구성이 달라지고 바다가 뒤집히는 시간도 지나왔다. 수많은 생명이 사라졌지만 지구는 계속해서 새로운 생명을 품었다.

이 질문은 ‘지구를 구한다’는 표현에 숨어 있는 인간 중심주의를 드러낸다. 지구를 인간의 보호가 필요한 거대한 생명체처럼 바라보는 태도에는 인간이 세계의 중심에 서 있다는 전제가 숨어 있다. 자연은 인간이 살아갈 수 있도록 주어진 배경이고, 인간은 그 배경을 관리하는 주체라는 생각이다. 그러나 38억 년의 생명사를 따라가면 이 경계는 흐려진다. 생명은 환경의 영향을 받는 수동적인 존재에 머물지 않았다. 광합성을 하는 생명체가 대기의 산소 농도를 변화시켰고, 식물은 탄소의 순환에 개입했으며, 생명체의 활동은 지구의 환경 자체를 바꾸어 왔다. 환경이 생명을 만들고 생명이 다시 환경을 만드는 과정이 오랜 시간 반복되면서 오늘의 지구가 형성되었다.

자연과 생명을 서로 분리된 두 항으로 놓는 순간, 오히려 생명의 역사를 이해하기 어려워진다. 인간 역시 그 관계의 바깥에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자연을 변화시키는 동시에 자신이 만든 변화에 영향을 받는다. 화석연료의 사용으로 대기의 조성을 바꾸고 토지를 이용하는 방식으로 생태계를 변화시킨 행위는 결국 인간의 생존 조건 자체를 변화시키고 있다. 기후위기의 핵심은 자연이 인간에게 보복한다는 데 있지 않다. 인간이 변화시킨 환경의 결과를 인간 역시 감당해야 한다는 데 있다. 자연에 가한 변화가 인간에게 돌아오는 것은 자연이 인간을 심판하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 역시 그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책이 말하는 기후변화의 ‘속도’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생명은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할 수 있지만 적응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유전과 진화는 수많은 세대를 거쳐 이루어지고, 생태계 역시 다양한 관계 속에서 천천히 균형을 조정한다. 항상성에도 감당할 수 있는 범위가 존재한다. 변화가 일정한 한계를 넘어서면 생명체가 지닌 조절 능력과 생태계의 회복력은 더 이상 충분하지 않을 수 있다. 기후위기가 두려운 이유는 단순히 지구의 평균 기온이 상승하기 때문만이 아니다. 생명이 변화에 대응할 시간을 잃어버릴 만큼 변화의 속도가 빨라지고 있다는 데 있다.

이 지점에서 기후위기는 환경의 문제면서 동시에 인간의 힘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에 관한 윤리적 문제가 된다. 인간의 기술은 자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능력을 비약적으로 확대했지만, 능력의 확대가 곧 책임의 확대를 의미한다는 사실은 충분히 따라오지 못했다. 한스 요나스가 기술문명에 새로운 책임윤리를 요청한 까닭도 인간의 힘이 미래에 미칠 영향이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커졌기 때문이다. 인간의 행위가 먼 미래의 생명과 환경에까지 닿는다면, 윤리는 현재의 이익만을 계산하는 방식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존재가 살아갈 조건, 인간 이외의 생명이 지속될 조건까지 고려해야 한다. 기후위기는 인간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묻기보다 무엇을 해서는 안 되는지를 판단할 책임을 요구한다.

그렇다고 생명의 역사가 인간에게 절망만을 건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책에서 의미 있게 읽히는 부분은 생명이 수많은 위기를 견뎌온 방식에 있다. 생명은 모든 변화에 저항함으로써 살아남은 것이 아니다. 환경이 달라질 때마다 유전과 진화를 통해 새로운 형태를 만들어 냈고, 서로 다른 생명들이 연결되면서 생태계 전체의 회복력을 높여왔다. 특히 다양성과 공생은 생명이 변화 속에서 지속될 수 있었던 중요한 조건으로 제시된다. 하나의 존재가 모든 것을 감당하는 시스템보다 서로 다른 존재들이 연결된 시스템이 외부의 충격에 더 오래 견딜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효율성과 동일성을 발전의 기준으로 삼아온 인간 사회를 돌아보게 한다. 더 빠르고 더 많이 생산하기 위해 생물의 다양성을 줄이고, 복잡한 관계를 단순한 시스템으로 바꾸는 과정에서 인간은 편리함을 얻었지만 동시에 취약성도 키워왔다. 생명의 역사가 보여주는 회복력은 강한 하나가 전체를 지배하는 방식에서 만들어지지 않았다. 서로 다른 존재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존재하면서 관계를 맺고, 어느 하나의 실패가 전체의 붕괴로 이어지지 않는 구조를 이루는 데서 생겨났다. 다양성은 아름다움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조건이며, 공존은 도덕적 구호이기 전에 생명의 작동 방식이다.

책의 후반부가 인간의 가능성을 다시 이야기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읽을 수 있다. 인간은 기후를 변화시킨 생명체이면서 자신이 만든 변화를 인식하고 사회적 선택을 통해 방향을 바꿀 수 있는 생명체이기도 하다. 인간에게는 자연의 원리를 관찰하고 그것을 기술과 산업의 형태로 다시 적용하는 능력이 있다. 광합성이나 탄소 순환, 토양과 갯벌의 탄소 저장과 같은 생명의 작동 방식을 기후위기의 해법으로 바라보는 ‘생명 기반 해법’은 자연을 정복해야 할 대상으로 보는 관점에서 벗어나 생명이 이미 작동시켜온 원리에서 해법을 찾으려는 시도다.

지구는 인간 없이도 오래 살아갈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인간과 지금의 문명이 계속 살아갈 수 있는 미래는 저절로 주어지지 않는다. 생명의 역사가 가르쳐주는 것도 바로 그 사실이다. 38억 년의 생명사는 변화가 언제나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킨다는 낙관도, 모든 생명이 결국 적응할 것이라는 위안도 말하지 않는다. 생명에게는 적응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고, 회복할 수 있는 범위가 있으며, 서로 연결되어 살아갈 관계가 필요하다. 인간이 만들어낸 기후변화가 그 조건을 얼마나 빠르게 변화시키고 있는지를 바라보는 것이야말로 지금 필요한 생명과학의 시선일 것이다.

지구의 역사는 인간이 등장하기 훨씬 전부터 수없이 많은 생명의 흥망과 환경의 변화를 품어왔다. 이 책은 그 거대한 시간 앞에서 인간을 세계의 주인공이 아닌, 생명의 그물 안에 놓인 하나의 종으로 바라보게 한다. 기후위기를 숫자와 재난의 언어로만 이해해온 독자라면, 이 책을 통해 광합성과 진화, 탄소 순환과 생물다양성이 서로 얽혀 만들어온 생명의 시간을 천천히 따라가 보길 권한다. 특히 과학을 어렵고 딱딱한 지식의 집합으로 느껴온 청소년에게, 복잡한 생명현상의 근원을 탐구하는 즐거움을 학생들과 나누어온 김미정 선생님의 시선은 좋은 길잡이가 되어준다. 갈매나무의 청소년 교양 브랜드 ‘지상의책’이 건네는 이 책은 생명과학을 처음 만나는 독자에게도,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보고 싶은 독자에게도 적절한 한 권이다. 생명의 복잡한 작동 원리를 하나씩 풀어가는 과정은 기후위기를 거대한 재난으로만 바라보던 시선을 조금씩 바꾸어놓는다. 아는 만큼 세계의 모습이 달라진다는 말이 이 책에서는 지식의 축적을 넘어, 살아 있는 세계를 대하는 태도의 변화로 이어진다. 우리가 살아남는 일은 자연을 이기는 법을 배우는 데 있지 않다. 오래 살아온 생명들이 서로의 삶을 허락하며 만들어온 세계를 읽고, 그 안에서 인간이 감당해야 할 몫을 배워가는 데 있을 것이다.

✏️도서출판 갈매나무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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