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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날들은 사라졌고
수잰 레드펀 지음, 김마림 옮김 / 열린책들 / 2026년 7월
평점 :
평범한 삶은 대체로 가난한 쪽에서 먼저 의심받는다. 가진 것이 적고 선택지가 좁은 삶을 우리는 쉽게 불행으로 번역하곤 한다. 더 넓은 집, 더 많은 돈, 더 좋은 교육, 더 높은 사회적 지위. 삶의 개선을 설명하는 언어는 늘 ‘더’를 향한다. 수잰 레드펀의 『평범한 날들은 사라졌고』는 그 익숙한 상승의 문법에 작은 함정을 판다. 가족이 더 많은 것을 갖게 되는 동안, 그들이 살던 하루는 하나씩 사라진다.
남편이 떠난 뒤 세 아이를 키우는 여성에게 돈은 추상적인 욕망이 아니다. 그것은 집세와 식탁, 자동차, 아이들의 안전처럼 구체적인 형태를 가진다. 그러니 네 살짜리 아이에게 찾아온 뜻밖의 재능과 그 재능을 돈으로 바꿀 기회 앞에서 물러나는 일은 도덕적으로 간단하지 않다. 가난을 견디는 부모에게 ‘아이의 순수한 어린 시절’을 지키라는 말은 때로 너무 사치스러운 조언이 된다. 이 소설이 출발하는 곳도 바로 그 불편한 현실이다. 아이를 상품화하는 세계와, 아이의 재능을 팔아야만 생존할 수 있는 부모 사이에는 생각보다 선명한 선이 그어져 있지 않다.
문제는 돈을 벌기 시작한 다음부터다. 몰리의 재능은 곧 산업의 언어로 번역된다. 귀여움은 상품성이 되고, 춤은 콘텐츠가 되고, 어린 시절은 촬영 가능한 시간이 된다. 아이가 무엇을 좋아하고 원하는가보다 얼마나 오래 카메라 앞에 설 수 있는가가 중요해지는 순간, 재능은 가능성이라는 이름을 벗어나 하나의 경제적 자원으로 취급되기 시작한다. 네 살이라는 나이는 이 변화를 더욱 잔혹하게 만든다. 아직 자기 노동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는 존재가 자신의 노동으로 가족의 경제적 조건을 바꾸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부모의 역할도 미묘하게 변한다. 보호자는 관리자가 되고, 관리자는 협상자가 된다. 아이의 하루를 지켜보는 일과 아이의 하루를 판매하는 일 사이의 거리는 의외로 짧다. 계약서에 서명하는 손, 촬영 시간을 조율하는 손, 아이가 피곤해하지 않는지 살피는 손이 모두 같은 손인 까닭이다. 사랑과 노동, 보호와 거래가 한 사람 안에서 겹쳐진다.
그래서 이 작품에서 가장 불편한 인물은 특정한 악인이 아니다. 오히려 모두가 어느 정도 선의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가족은 돈이 필요하고, 아이에게는 재능이 있으며, 제작자는 성공적인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어 하고, 대중은 사랑스러운 아이를 보고 싶어 한다. 각각의 욕망만 떼어놓으면 특별히 잔혹한 것은 없다. 그러나 그것들이 한곳에 모이는 순간 어린아이의 시간이 대가로 지불된다. 착한 사람들만으로도 착취는 완성될 수 있다.
가족이라는 단위 역시 이 구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한 사람의 성공은 가족 전체의 성공으로 쉽게 포장되지만, 실제로 가족 구성원들이 치르는 비용까지 균등하게 분배되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돈을 얻고, 누군가는 관심을 잃는다. 누군가는 새로운 기회를 얻고, 누군가는 익숙했던 생활을 잃는다. 같은 식탁에 앉아 있어도 각자가 경험하는 삶의 밀도는 달라진다. 가족이라는 이름은 이 차이를 지워버리는 데 놀라울 만큼 편리한 단어가 되어 버린다. 특히 어린아이에게 성공은 아직 자신의 욕망과 분리되지 않는다. 어른은 성공을 미래의 기회로 해석하지만, 아이에게 시간은 미래를 위한 자원이 아닌 지금 살아야 하는 현재다. 어른에게 몇 시간의 촬영은 경력의 일부지만, 아이에게 그 몇 시간은 친구와 놀 수 있는 오후일 수 있다. 어른에게 유명세는 사회적 자산이지만, 아이에게는 자신을 모르는 사람조차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이상한 세계다. 같은 사건은 나이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이 지점에서 ‘아동의 권리’라는 말도 조금 다른 얼굴을 갖는다. 아이에게 자기결정권을 인정한다고 해서 모든 결정을 아이에게 맡길 수는 없다. 반대로 보호를 이유로 모든 결정을 어른이 가져갈 수도 없다. 아이는 아직 자신을 책임질 수 없기에 보호가 필요하지만, 언젠가 자신을 책임질 사람으로 자라야 하기 때문에 선택의 경험도 필요한 것이다. 부모의 사랑에는 이 두 요구를 동시에 감당해야 하는 모순이 들어 있다.
『평범한 날들은 사라졌고』가 흥미로운 것은 그 모순을 ‘좋은 부모와 나쁜 부모’의 구도로 해결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더 좋은 삶을 주려는 마음은 아이에게서 더 많은 것을 요구하게 만들 수 있고, 아이를 보호하려는 마음은 아이의 선택을 대신하는 권력으로 변할 수 있다. 부모가 아이를 사랑한다는 사실은 그 선택을 정당화해주지 않는다. 그렇다고 부모의 선택을 쉽게 비난할 수도 없다. 사랑과 책임이 만나는 자리에는 언제나 판단의 잔여가 남는다.
성공의 문제도 같은 방식으로 뒤집힌다. 성공은 흔히 축적의 언어로 설명된다. 돈이 얼마나 늘었는지, 얼마나 유명해졌는지, 얼마나 많은 기회를 얻었는지. 그러나 삶의 변화는 축적만으로 계산할 수 없다. 사라진 것도 함께 세어야 한다. 익명성, 한가로운 오후, 가족끼리 나눌 수 있는 시간, 실패해도 누구에게 기록되지 않는 자유.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은 대개 잃고 나서야 가격표가 없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래서 제목의 ‘평범한 날들’은 생활 수준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시간에 대한 명칭이다. 아무도 상품으로 만들지 않은 시간, 성과로 환산되지 않은 시간, 누군가의 경력과 수익을 위해 사용되지 않은 시간, 아이가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 말이다. 인간에게는 그런 시간이 필요하다. 자본의 논리가 삶의 거의 모든 영역에 침투할수록 더욱 그렇다. 이 소설에서 어린 시절은 그래서 가장 먼저 보호받아야 할 노동 이전의 시간으로 읽힌다. 아이는 아직 시장에 자신을 내놓을 이유가 없어야 한다. 잘해서 사랑받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만으로 사랑받는 시간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스타가 된 아이에게는 그 경계가 너무 일찍 사라진다. 웃음도, 춤도, 표정도, 말 한마디도 타인의 시선 안에서 가치가 매겨진다. 성장하기도 전에 자신을 바라보는 법부터 배워야 하는 셈이다.
더 아이러니한 것은 부모 역시 그 시장의 바깥에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돈을 벌어야 하고, 아이의 재능을 경제적 자원으로 활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부모는 자본주의의 가해자이면서 동시에 그 구조에 종속된 존재가 된다. 그래서 이 작품의 갈등을 단순히 부모의 욕심이나 연예 산업의 탐욕으로 축소하면 오히려 중요한 부분이 사라진다. 선택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선택지가 제한된 사람들. 그들의 선택이 또 다른 사람의 자유를 제한하는 구조. 이 모순이 가족극의 표면 아래에서 계속 움직인다.
그렇다면 좋은 삶의 기준은 무엇인가. 더 많은 것을 갖는 것? 아니면 덜 팔리는 것? 더 많은 기회를 갖는 것? 아니면 아직 선택하지 않은 채 머물 수 있는 시간을 갖는 것? 『평범한 날들은 사라졌고』는 성공을 거부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성공이라는 단어가 지워버리는 것들을 다시 화면 안으로 불러들인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하루는 생산성이 낮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삶은 본래 생산성으로만 설명되지 않는다. 아이가 놀고, 가족이 밥을 먹고, 아무 목적 없이 거리를 걷고, 내일의 이익과 상관없는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 시장의 계산법으로는 낭비에 가까운 그 시간들이 인간의 삶을 인간답게, ‘살 만하게’ 만든다.
결국 사라진 것은 단순한 평온이 아니다. 그리고 그 자리를 채운 것은 자신의 시간이 자신의 것으로 남아 있지 않은 삶이다. 유명세는 그 시간을 가져가고, 돈을 그것을 보상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어떤 상실은 아무리 많은 돈을 벌어도 같은 모습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평범한 날들은 특별해질 것을 요구받지 않았기에 귀하다. 누구의 경력이나 상품도 되지 않고, 어떤 성공의 증거로도 제출할 필요가 없는 시간. 아이가 아이로 존재하고, 부모가 부모로 존재하며, 가족이 시장의 단위가 되기 전의 시간. 평범한 날들은 사라졌다. 평범했기에 누구도 붙잡아두지 않았던 날들처럼.
어떤 삶은 더 나은 곳으로 올라가기 위해 달리는 동안, 정작 발밑에 있던 하루부터 잃어버린다. 『평범한 날들은 사라졌고』는 가족을 위한 선택이 어디까지 사랑이고 어디서부터 거래가 되는지, 아이를 보호한다는 말이 언제 아이의 시간을 대신 결정하는 일이 되는지를 집요하게 들여다본다. 가족을 위해 내린 선택의 무게를 생각해본 독자, 아이의 권리와 부모의 책임 사이에서 쉽게 답을 내릴 수 없었던 독자라면 이 소설의 불편한 현실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 여기에 연예 산업과 미디어가 인간의 재능과 시간을 상품으로 바꾸는 방식에 관심 있는 독자, 그리고 성공의 크기보다 그 과정에서 잃어버린 평범한 하루의 가치를 돌아보고 싶은 독자에게도 권하고 싶다. 돈으로 환산되는 것들이 늘어날수록 값으로 매길 수 없는 시간은 오히려 희미해진다. 이 소설은 그 희미해지는 시간을 붙잡기 위해, 우리가 너무 오래 당연하게 여겨온 ‘평범함’의 가격표를 찢어버린다.
✏️도서출판 열린책들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