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의 황금시대
오경웅 지음, 류시화 옮김 / 경서원 / 1986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조주 스님이 남전스님 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도입니까?'
'평상심이 도이니라..'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까?'
'향하려 하면 벌써 어긋난다.'

이것은 중국선불교의 황금기였던 시대의 조주선사와 남전선사의 대화이다. 선사들의 대화는 이처럼 알쏭달쏭하며 신비하며 때로는 하나의 고함이며, 시 자체였다. 내가 이 책을 읽을 당시, 내가 전혀 불교도가 아니었음을 말해두고 싶다. 내 사고는 공평했고, 공허했으면 무엇이든 옳기만 하면 받아들일 준비가 돼있었다. 우연히, 아주 우연히 이 책을 읽게된 내 그때의 심경을 돌이켜보니, 거의 경련에 가까운 경이감이었다 할까.

그때까지 막연하나마 노장자 철학에 대한 이론을 알고있었고 약간 신비감만 가지고 있었던 내게 전설이 아닌, 실제로 이 정신을 완벽하게 실현한 사람들이 무더기로, 즉 당나라 선의 선사들이 역사적으로 존재했었다는 사실이 얼마나 놀라웠고 신선한 충격이었던지.....

저자 오경웅은 카톨릭의 신부로서 이 책을 저술했다. 선불교 정신의 놀라운 신비, 그 엄청난 비밀에 완전히 매혹되었던 듯 싶다. 세상의 세속적 행복을 위해서가 아닌 단지 한번쯤 궁극적 진리에 대해 절망한 사람이라면 진리로 안내하는 하나의 작은 구멍과 같은 이 책을 접하고 뭔가 잡히는 것이 있으리라. 여기에 등장하는 선사들의 기행의 기록과 어록은 거의 철학이며 광기이며 시이며 자유 그 자체이다. 마하가섭이 부처의 설법 중에 꽃을 들고 미소를 지었던 그 시점부터 禪은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 아름다움을 상상해보자. 꽃을 들고 미소짓던 사람의 깨달음.....

영산회상에서 석가모니가 든 한송이 꽃과 마하가섭의 미소 사이에서 탄생된 선은 어디까지나 비전으로 달마에 까지 전수돼 왔다. 게다가 그때까지 인도에서 전래된 선은 깨달음을 향한 집중적 명상에 불과했다. 그와 같은 정적, 소극적인 인도선이 중국에 와서 노력, 고행이라는 더디고 까다로운 수행법을 극복하고 <직관을 통한 내면의 참본성 자각>으로 환골탈태하니 중국의 선불교, 전혀 새로운 불교이며 불교란 종교를 뛰어넘은 광명의 탄생이라 하겠다.

'몸은 보리수, 마음은 맑은 거울, 부지런히 털고 닦아, 먼지 묻게 하지 않으리'

중국 북선종의 시조 신수가 스승 홍인 대사에게 바친 게송, 단지 이 도덕적이며 초췌한 불교관이었을 뿐... 반면 남선종의 창시자이자 진정한 의미에서 중국 선정신의 개창자인 육조 혜능의 게송을 들어보자.

'보리나무 본래없고 명경 또한 틀이 아니다. 본래 한 물건도 없거늘 어느 곳에 먼지 일랴' 강렬하고, 걸림없는 혁명적 자세가 생생하게 느껴진다.

위에서 볼 수 있듯 중국 선종은 초대 조사 달마의 <부정적 방법>에 의한 전등을 시작으로 혜능에 와서 이처럼 눈부신 발전을 이룩하기에 이른다. 이후 중국선은 경악한 돌발사, 신비한 수수께끼,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피안으로 비약, 기발한 유우머와 우주적 농담, 귀를 찢는 듯한 고함(喝), 가차없는 몽둥이질(棒), 기이한 행동으로 선 정신의 진수를 실천화했다.

중국선의 탄생은 노장자사상의 직접적 영향이라 보아도 틀림없다. 즉 노장의 근본정신에다가 인도에서 전래된 대승불교의 사도적 정열, 추진력을 덧붙힘으로써 당송대에 이르기까지 전무후무한 도가사상의 실천, 대중화시대를 맞이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불교를 아버지라 한다면 도가사상이야말로 비범한 아이 禪의 어머니이다. 그런데 그 아이는 오히려 어머니를 많이 닮았다> 저자는 중국선의 요체를 이렇게 말했다. 날카로운 지적이다. 다시 우리에게 이런 진리의 무법지대이며 황금시대가 올 수 있을까. 그 시대는 정녕 전설이 아니었나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슬픔이여 안녕 - 풍림명작신서 56
프랑소와즈 사강 / 풍림 / 1990년 12월
평점 :
절판


<슬픔이여 안녕> 그리고 <어떤 미소> 그렇게도 익숙했던 책명! 이 책은 내 나이, 훨씬 이전부터 묶은 채로 우리집 서고에 박혀있었다. 어머니가 '아가씨'시절에 보던 책이었던 모양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도저히 우리의 50대 기준으로 상상할 수 없었던 유럽적 도시미, 현대미, 권태, 여유가 물씬 풍기는 것이, 책이었다. 아마도 그 시대에 읽었던 사람들은 무슨 순정문화를 보는 듯했을 것 같다.

그렇게 묶은 책이었는데도 얼핏 보기에 매우 도시적이고 관능적인(그것은 학창시절의 어린 불가해하고 지루한 어른의 세계를 말하는 것 같아서 별로 흥미를 끌지 못했다.)인상을 받았다. 20살이 넘고도 훨씬 이후에 그저 심심풀이로 이책을 주워들었던 나는 깜짝 놀랐다. 그렇게 흡인력있고 그토록 깔끔하고 그토록 가벼운 책이었을 줄이야.

이때까지 무겁고 육중한 고전 문학만을 인정했고 또 그것에 지쳐있을대로 지쳐있었던 내게 그녀의 소설은 거의 신선한 충격이었다. '천의무봉'이란 말을 이런 때 쓰고 싶다. 거의 직감적으로 나는 이 작가가 글을 쓸 때 거침없이, 아주 가벼운 마음으로, 줄줄, 하나도 고치지않고 써내려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재능에 첫눈에 매혹당한 나는 그녀의 소설에 탐닉하기 시작했고 이젠 그녀 재능의 바닥까지 보았다고 할까. 너무나 악의적인, 깜찍한 그녀는 이제는 늙었고, 그런 수법은 더이상 나의 눈길을 끌지 못한다.

<슬픔이여, 안녕><어떤 미소><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일련의 삼총사 걸작을 그 황금의 젊음에 배출해내고는 그 천재성과 그 댓가로 덤으로 글을 쓰며 평생 욹어먹고 있다는 생각마저 든다. 처녀작 <슬픔이여 안녕>으로부터 <어떤 미소><브람스....>까지의 이른바 톡톡 튀는 세련미와 여성적 감수성, 재기발랄한 소설군들 이후엔 이렇다할 작품이 없는 게 안타깝다. 이 삼총사소설군은 어느 하나 무시할 수 없을만큼 완벽한 문체 그 자체이다. 내용도 너무 여성스러워 한편의 베스트극장을 보는 듯한 흠이 있지만 그녀의 인간, 특히 여성 심리(이것은 곧 그녀의 심리이다.)를 간파하고 묘사하는 점은 그 문체와 더불어 그 작품을 가볍게 볼 수 없게 만드는 탁월한 면이 있다.

그리고 어떤 작가들도 세개 이상의 명작(문체와 내용면에)은 쓰지 못한다.

<슬픔이여 안녕>에 나오는 소녀, 여주인공은 곧 사강의 성격에 대한 하나의 자화상이 아니었나 싶다. 첫번부터 나른한 권태가 느껴지는 듯한 말을 해대는, 소녀의 심상치않은 말에 어찌 반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관능적인 반항, 그리고 소녀들 특유의 치기가 결합된 심리를 그 어린 나이에 정확하게 포착한 사강은 그 나이에 모든 것을 간파한 그 이름도 유명한 '천재여류작가'임에 틀림없는 것 같다. 언제나 천재들은 그 젊은 나이에 모든 걸 눈치채고 경험한 결과 남은 생은 그처럼 무방비하고 방만하게 사는 걸까.

그녀가 격찬한 랭보 또한 이미 20살 이전에 모든 정열의 시를 발산하고 전혀 현실적인 삶을 살아버렸다. 문학을 꿈꾸는 작가생들이라면 이런 미워할 수 없는 악의가 느껴지는, 방자하고 거침없는, 자유분방한 문체 하나 만으로 사강을 사랑하고 그녀의 작품을 필수적으로 탐독해야 하지 않나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북회귀선
헨리 밀러 지음, 김진욱 옮김 / 문학세계사 / 1991년 6월
평점 :
절판


대단하다! 그는 거의 성자와도 같다. 별로 의심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가 작품과 완전 일치하는 인간형이라면. 헨리밀러의 소설을 읽노라면 소설을 썼구나 하는 생각보다는 언제 어디서나 길거리에서, 방에서, 술집에서...등에서 즉시 일기를 써내려간 듯한 느낌이다. 작위적인 데가 없고 고친 것 같지도 않은, 흐르는 듯이, 몽환적으로, 즉흥적 느낌이 강하다. 시라고 하기엔 너무나 장황하고 일기라고 하기엔 너무도 고급스럽고 외설고백이기엔 너무도 철학적이고 사색적이다. 예술가이기엔 너무도 허욕과 욕심이 없다. 그러면서도 예술가인 것은 나무라데없는 문체를 구사한다는 점이다. 즉흥적이기에 하나도 흠잡을 데가 없는, 하나의 운명같은, 우연같은 문체!

그는 변덕스럽고 동물적이면서-이는 곧 본능에 완벽히 충실한 점이기도 함- 상반되게도 인간으로서의 위대한 징표인 하늘이 선사한 재능, 신을 닮은, 그 '객관적 시선, 감수성, 통찰'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니었던가 생각된다. 불교적으로 말하자면 禪의 실천과도 흡사한. 미친 듯 이 본능에 경험을 내맡기고 헛된 욕심- 명예, 물욕, 고상- 및 일체의 안정 따위를 바라는 욕망이 없었다. 없었다기보다는 차라리 구애받지 않았다. 즉 여건이 허락하면 그는 잔인하게, 터질 듯이 향락과 쾌락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또 운명이 허락하면 가장 더러운 가난, 퇴폐에도 전락할 베짱이 있었다. 때로 엄습하는 우울이 있었지만 그것에 심각해하지 않았다. 평생을 통해 여인에 대한 애정이 있었지만 집착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고독에 집착하지도 않았다.

구질구질한 습성인, 예술가들의 배부른, 푸념, 응석, 하나의 거창한 생의 목표로 이 작품을 쓴 것도 또 아닌 듯 하다. 차라리 거부할 수 없는 없는 어떤 끼, 감수성과 깨달음의 자연스런 본능으로 써내려갔다고 할까.

그의 주장대로 '작품과 작가가 완전한 동일성'을 갖지 않으면 안된다는 신념은 나의 신념이기도 하다. 그러나 동일성을 갖는 작가라해도 존경을 표시할 수는 없다. 하나의 인간 동물같은 정신 뿐이었더라면, 또 하나의 사색 뿐인 몽상가였더라면..... 내가 헨리밀러를 존경하는 것은 천성적인 동물성과 천성적인 신적 감수성, 냉철, 자유, 태연함 등에 따른 그의 용기이다. 누가 이렇게 솔직해서, 동물적이어서 아름다울 수 있을까. 다만 그가 외설적이라면. 우리가 생각하는 외설은 차라리 동물적이지 않다. 너무도 인위적이고 허위적이어서 표면적이어서 겉으로 호리는 듯, 헛된 상상력의 사기성이 있어서 구역질이 나는 것이다.

그는 허위가 없는 인간 동물 자체였으며 또한 하나의 인간으로서 시인이었으며 또 신의 경지까지 맛본 드문 존재자였다. 몇 천년동안 지켜온 이야기 식의 소설, 허구와 형식을 대충 얼버무려 표현한 쓸어 버릴 만큼 많은 문학을 남김없이 무시해 버리고 오직 자기만의 방식으로 줄줄 써내려간 글, 마치 가장 완숙한 경지의 화가가 가장 초월하 경지의 솜씨로 하나의 어린애 낙서같은, 우스꽝스런, 엉성한 그림을 남긴 것처럼. 그것은 교훈 따위를 전달하지 않으려했기에 오히려 커다란 교훈을 떠오르게 한다.

도대체 열렬히 본능을 지키며 생을 소모하는 것 이외에 이 지상에서 연약한, 한계적 생명체가 할 수 있는 미덕이란게 뭐 특별한 것일까. 안정? 고상? ...... 삶은 그저 제식대로 살아 버리면 그만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롤리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권택영 옮김 / 민음사 / 1999년 6월
평점 :
절판


말이 많았던 '롤리타 신드롬'의 정체.....나는 당황하며 책을 읽어넘겼다. 그리고 그 말이 많았던 소문의 정체에 화가 치밀었다. 이렇게 재밌고 진지한 책을 가지고서? 또다른 점에서 그 독톡한, 문학에 관해 달관한 그 절제된, 정교한 문체에 반해 버렸다. 이와 같은 내용을 만일 다른 문체로 써내려갔다면 나는 어쩌면 다른 사람들처럼 역정을 냈을 지도 모른다. 전혀 관능적인 구석이 없어서. 오히려 불륜이라고는 의식되지 않을 정도로 진지하다. 하마터면 관능적일 뻔했던 도덕을 넘어선 사랑얘기가 나보코프의 절묘한 문체로한 남자의 격정적이고 진지한 연애담을 승화됐다고 할까. 문체의 결정적 공로라고 생각한다.

그러기에 나보코프는 그야말로 문학가다운 문학가이다. 즉 문학가는 어떤 내용을 다루건 간에 그 나무랄데없는 없는 천부의 문체만으로도 면죄부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신이 준 솜씨로 소녀의 누드화를 그린 화가처럼. 나는 그 예술가에게서 어떤 못된 욕이라면 차라리 질투심을 느낄 뿐이다. 그 탁월한 솜씨에. 나도 이렇게 분방하고 고급스럽게 문체를 구사할 수 있다면 얼마나 신날까, 하고?

롤리타는 외설의 따분한 난잡함이 없다. 이것은 고도의, 천재적 어휘로 가다듬어, 상상력(작가의 체험담이었다면 더 좋았을텐데, 아니라고 하니 미심쩍지만 실망스럽다)을 가미한 개성적인 문학적 명작이다.

사랑받는 사람의 앙칼짐 '롤리타',를 사랑하는 자, 주인공 '험버트'의 비굴하고 침울한 어조로, 롤리타를 회상하는 것으로, 법정에서 이 소설은 시작한다. 노예같이 비굴하고 때로는 교활할 정도로 음험하게 사랑하는 사람들의 침울한 심리를 얼마나 적나라하게 묘사했던가. 거의 사랑에 헤어나오지 못한 사람의, 주변을 완전 망각한 주관적, 몰입의 사랑을 있는 그대로 묘사한 점이 놀라울 뿐이다. 험버트 눈에 비추어진 열 세 살 소녀, 롤리타의 잔인하기까지한 요염하고 앙탈스런 묘사도 탁월하다. 이 책을 읽다보면 열서너살 또래의 생활과 성숙함에 우리가 소위 20대라 불리는 청춘이 굉장히 늙어보인다는 것을 실감할 것이다. 열여덟이라 할지라도.

이 세상에서 우리의 행동에 있어 '도덕성'의 잣대로 심판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온갖 일은 가능하기 때문에 일어날 수 있다. 그리고 그 가지각색의 도덕의 일탈이 자행되어도 결코 예전보다 못하거나 나아질 일은 아무것도 없는 것 같다. 롤리타와 험버트 식의 사랑도 그와 같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분례기 - 창비장편소설
방영웅 지음 / 창비 / 1997년 7월
평점 :
품절


문학평론가 구중서는 이 작품을 '생명과 삶에 대한 본능적 긍정이 야만스러울만큼 징그럽게 그려져 있다.'라고 말했다. 기가 막힌 평이다. 책을 넘기다가 똥례의 원시적일 만큼 소박한 행동에 몇 번이나 툭툭 웃음이 터져나오던지. 그러면서도 내내 마음이 개운치 못했다. 뭐랄까. 인간의 삶, 우리가 그토록 인간적이라 부르는 순수한, 순진한 삶이 문화가 빠졌을 때, 예의가 빠졌을 때, 고정관념이 빠졌을 때, 다름아닌 본능적 삶 , 동물로서의 인간 그것이 아닌가!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였다. 인간 동물로서의 비정함, 자유. 잔혹.....

새삼 똥례가 삶의 희생자였느니 어쨌느니 평할 마음은 전혀없다. 사실 똥례는 쾌활하고 순박하며 매사 잘 적응하고 현실적이며 순종하는 성격으로 거의 이런 천품이 본능적, 동물적으로 까지 느껴져셔 나는 그녀에게서 서늘한 해학미밖에 느낄 수 없었다.

철봉의 벙어리 형수가 가권을 휘두르며 '아기'에게 젖은 안주고 남편에게 젖을 주며 아기가 죽은 것. 용팔의 아내 병춘의 도살장에서의 '돼지불알' 도둑질. 똥례와 동평의 그 어머니에 대한 시녀같은 노예적 가사살림, 노랑녀의 축첩(남자 축첩이다!) 거지 미친년 옥화의 행각, 용팔과 병춘의 비사교적이다 못해 주술적인 부부애. 똥례의 처녀쥐..... 삶은 시골적이다 못해 야만적이며 너무도 강결하게 느껴진다. 도시인의 잔인하고 무기력한 패륜에 비한다면 이 시골인들의 패륜은 순박하다못해 너무도 비천하고 생동감넘쳐서 구역질이 날 정도였다.

작가의 문체는 세련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시골에 대한 해박한 상식, 그 야성적인 어투와 절묘하게 섞인 서정성은 번지르르한 작가들의 문체를 압도하는 면이 있다. 이것은 거의 줄거리의 승리랄까. 일본의 일본다운 색깔을 내며 그 전통성과 문학을 절묘하게 결합시킨 작품이 <설국>이라면 이 작품은 내가 알고 있는 한 가장 한국적인 색깔, 한국적 배경, 정신,을 가식없이 있는 그대로, 묘사한 작품이 아닌가 생각된다. 조야하고 음흉하고 원시적이고 뒷담하기 좋아하는 비천한, 잡초같은 사람들......그리고 한국의 자연풍경, 토산물, 등이 가슴 아릴 정도로 풍부하게 생생하게 그 배경을 장식하고 있다. 끝부분, 영철의 노름 장면의 속어와 욕설이 지나치게 장황하고 길 게 설정한 것이 옥에 티였다.

한국의 문학을 세계에 소개하자면 아니 한국 문학의 개성은 바로 이런 식의 소설이 되야하지 않을까. 지나치게 현란한 문체, 중압감, 아니면 도시적 파리함이 느껴지는 가벼움, 상큼함, 재기발랄함. 이 팽배한 오늘날 우리 문학가들에 대한 내 염오를 달래주는 소설이었다.

뛰어난 작품은 십년에 하나 꼴로 나올까말까하다는 것이 내 지론이다. 오늘날처럼 문학과 예술이 일반인의 교양정신에 까지 침투한 결과 '쓸어 버릴 만큼' 예술가들은 많다. 그러나 명작은 아무리 유명한 작가들이 잇달아 히트작을 내도 결국 날이갈수록 좁혀지기 마련이어서 결국 십년에 하나 꼴로 우수작이 탄생하면 다행이다. 그리고 그 걸작은 한 예술가의 기량과 다작이 아닌 그 예술가의 광기와 몰입, 열정, 천재성이 응축돼 일종의 우연으로 다작 중에 하나가 선택되어질 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