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
문은강 지음 / 다산책방 / 2019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캄보디아 프놈펜이라는, 어디서 들어봤던 것도 같은데 딱히 기억은 안나던 낯선 도시와

FM 호텔 사장 고복희,

그리고 내 주변에 있는 것 같은, 아니 어쩌면 나의 이야기일지도 모르는 박지우,

그리고 프놈펜의 다양한 사람들이 펼쳐내는 너무나도 따뜻하고 잔잔하면서도 유쾌한 이야기.

이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고 가장 먼저 한 일이 무엇이었냐, 하면 구글에 프놈펜을 검색해보는 일이었다. 동남아시아다운 햇살과 낡아빠진 건물들을 보고, 이 소설을 읽으니 존재조차 몰랐던 프놈펜이라는 도시에 대해 많이 알아버린 기분이 들었다. 박지우라는 애는 무슨 생각으로 이 프놈펜에 한달 살기를 하러 떠났나. 박지우가 프놈펜으로 도착하며 시작하는 이 이야기에서, 이 인물의 모습에서 얼핏 나를 본 것 같았다. 한국에서 무얼 할 수 있나. 열심히 공부해서 남들이 조금 잘 봐주는 학력이라는 것까지 얻었는데, 그게 무슨 소용이지? 싶었다. 솔직히 말하면, 그냥 로또 1등이나 당첨되서 전세계에서 한달 살기나 하면서 돌아다니고, 책이나 읽으면서 살고 싶었다.

박지우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인물을 사랑하면서 읽기 시작했다.

이 책의 정체성을 한 단어로 설명하자면, 성장소설이라고 생각한다. 50대의 주인공인 고복희가 뭘 성장하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성장이라 함은 나이를 막론하고 일어나는 일이다. 어쨌든 이 모든 사람들이 서로에게 애정을 품거나 원망하며 달라지는 모습이 성장이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불완전하다. 어딘가 나의 마음에 안드는 구석을 닮아있는 것 같아 짜증이 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다음에 이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할지,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너무 궁금해서 다음 페이지를 넘기게 된다.

변화의 계기는 변화다. 이게 무슨 헛소리냐, 하지 말고 끝까지 읽자.

사람들이 여행을 좋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예전에 <여행의 이유>를 읽고 나서 쓴 글에서도 말한 적이 있었지만, 나의 일상에서 벗어났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주변을 받아들이는 나의 태도에 변화가 생기기 때문이다. 그 여행이 마음에 들든 마음에 들지 않았든간에 여행이라는 것은 필연적으로 변화를 가져온다. 그 변화가 나의 인생을 뒤바꿀 정도로 클 수도 있고, 인스타그램에 마음에 드는 사진 몇 장과 좋은 추억을 남기는 정도로 그칠 수도 있지만 어쨌든 여행이라는 것은 그렇다.

해외 여행을 한 번도 가지 못한 주인공인 박지우에게 프놈펜이라는 낯선 곳에서의 한달 살기는 더욱 낯설었을 것이다. 한국의 상식이 통하지 않는 곳, 모든 게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곳, 처음부터 다시 적응해야 하고 적응할 때가 되면 한국으로 돌아가야 할 때가 되는 곳. 여행은 언젠가는 돌아가야 하기 때문에 더욱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먼 미래를 꿈꾸지 않고, 당장 오늘만을 위해 살아가도 되기 때문이다.

단 한번도 이런 것을 경험하지 못한 박지우에게, 프놈펜으로의 한달 살기가 얼마나 실망스러웠을지, 그리고 얼마나 놀라웠을지 짐작하게 된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별거 아닌 것 같았던 스스로가 프놈펜의 사람들에게는 한달 사이에 얼마나 많은 변화를 일으켰는지 박지우가 좀 잘 알았으면 하고 바라게 된다. 그녀가 스스로를 조금 더 많이 사랑해주고 전세계 곳곳을 돌아다녀봤으면, 한다.

한 편 고복희와 안대용 등 프놈펜에서 많은 시간을 살아왔고 앞으로도 살아갈 이들이 변화하게 된 계기도... 변화다. 박지우, 라는 웬 어린애 하나가 가져온 변화. 그 사소하고 곧 지나갈 것이라고 생각했던 변화가 큰 변화를 가져온 것이다. 감정이 없는 로봇 같았던 고복희가 어떻게 변화하는지는 소설을 통해 직접 확인하는 게 재밌을 것 같다.

차가워진 몸에 옷이 들러붙었다. 빗방울이 대지에 부딪히는 소리, 파도가 몰아치는 소리, 공기가 떨리는 소리. 이 모든 소리가 지구의 리듬이었다. 장영수가 고복희의 손을 잡고 멀리 내보냈다가 가까이 당겼다. 젖은 백사장에 발이 푹푹 빠졌다. 그들은 천천히 한 발짝씩 움직였다.

춤이었다. 둘이서 추는 춤.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 p186

개인적인 감상을 말하자면, 가장 좋았던 부분은 고복희의 과거 이야기였다. 원칙주의자 로봇같은 그녀에게 때로는 불 같고 때로는 바다 같은 남편이 있었다는 것에 대해서, 그리고 왜 고복희가 그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서 생각했다. 그들의 이야기가 시처럼 써있어서, 새벽에 이 책을 읽던 나도 괜히 감성적으로 그들의 사랑을 지켜보았다. 읽으면서 나도 장영수라는 사람을 사랑할 수밖에 없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왜 고복희가 프놈펜으로 와서 원더랜드를 운영하고 있는지에 대해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겨울이 시작되려 하는 지금, 잠깐 햇살이 따가운 캄보디아로 다녀온 것 같은 소설.

그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이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가 끝난 뒤에도 행복하게 살아가길,

그리고 박지우는 언젠가 꼭 앙코르와트에 여행 가기를 바라게 되는 소설. 즐거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세트] 아메리카나 1~2 - 전2권 - 개정판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지음, 황가한 옮김 / 민음사 / 2019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보라색 히비스커스>가 나이지리아라는 낯선 곳에서 펼쳐지는 어딘가 익숙한 이야기였다면, <아메리카나>는 내가 완전히 모르는, 이 책을 읽지 않았다면 앞으로도 오랜 시간 동안 몰랐을 이야기를 펼쳐낸다.

나중에 그 자리를 떠나며 이페멜루는 디케를 생각했다. 디케가 대학에 가면 ASA에 참석할까, BSU에 참석할까, 남들은 그를 미국계 아프리카인으로 생각할까,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 생각할까 궁금했다.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선택해야 할 것이다. 아니, 어쩌면 되레 남들이 그가 누구인지를 선택해 줄지도 모른다.

<아메리카나1>, p239

대한민국은 단일 민족 국가(였)다. 나는 20년 평생의 대부분을 한국에서 살아왔다. 내 친구들은 전부 부모님이 모두 한국인인 아이들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통틀어서 한번도 혼혈 혹은 외국인과 같은 반이 되어 본 적 없다. 부모님이 모두 서울에서 근무하는 경기도의 배드 타운이라는 지역적 특성도 있겠지만, 어쨌든 나는 이런 환경 속에서 살아왔다. 때문에 <아메리카나>가 이야기하는, 미국에서 흑인으로서 살아가는 것은 내게 매우 낯선 이야기였다. 단 한번도 '이질적인 존재'가 되어 본 적 없을 뿐만 아니라, 나의 인종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해 본 적은 단연코 한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나 자신이 그랬을 뿐만 아니라, 주변에 (인종적으로) 그런 상황에 처해있는 사람도 없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메리카나>가 내게 미국에서 타인종으로 살아가는 것은 무엇인가-를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하고 고민하게 되는 계기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타인종으로서 미국이라는, 거대한 용광로에서 자리를 잡아야 할때는 내가 온전히 나로서 평가받기 어렵다. 아마 나는 '한국인' '여성'이라는 인종으로 먼저 평가받게 될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남들이 내가 누구인지를 선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나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온통 낯선 이들로 가득한 곳에서 나는 어떻게 나의 주체성을 획득할 수 있는가?

형광 분홍색 재킷을 입은 자그마한 여자가 말했다. "나는 가나 자선 단체의 이사장이에요. 우리는 시골 여성들과 일하고 항상 아프리카인 직원을 찾고 있어요. 현지 인력을 쓰지 않는 NGO가 되고 싶지는 않거든요. 그러니까 졸업 후에 일자리가 필요하고 아프리카로 돌아가서 일하고 싶거든 나한테 전화해요."

"감사합니다." 이페멜루는 문득 미친 듯이 강한 열망을 느꼈다. 받는 사람들의 나라가 아니라 주는 사람들의 나라 출신이고 싶었고, 가진 것이 많아서 남한테 베푸는 축복을 누려 온 사람 중 한 명이고 싶었고, 넘치는 연민과 동정심을 가질 만큼 여유 있는 사람 중 한 명이고 싶었다 그녀는 신선한 바람을 쐬러 베란다로 나갔다.

<아메리카나1>, p287

이 책을 읽으며, 나 역시 아프리카를 고정관념 속에서 생각하고 있지는 않았나? 생각하게 되었다. 이페멜루는 소설 속에서 꽤 많이, 미국에서 자신은 나이지리아 사람이라기보다는 비미국인 흑인, 아프리카 사람이라고 말한다. 나 역시도 아프리카 사람들이 하루 1달러로 가난하게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았나? 아프리카 사람들이 무슨 언어로 말하고 무슨 음식을 먹는지 알고는 있었나?

그런 의미에서 아디치에가 페미니스트로서뿐만 아니라, 아프리카 사람으로서 얼마나 큰 영향을 지닌 사람인지 다시 한번 깨달았다. '아프리카 사람'이 세계적으로 성공을 거두는 것이 미디어를 통해 많이 노출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우리가 가진, '아프리카에 대한 막연한 고정 관념' 또한 미디어를 통해 형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검은 피부를 가지고 성공한 사람이 버락 오바마뿐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캡틴 마블이 여자도 히어로가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듯, 검은 피부를 가진 아프리카인 여성 또한 성공할 수 있고, 그녀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책을 통해 알아가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내가 초등학교를 다닐 때부터, 유니세프나 초록 우산 등의 자선 단체에 매달 돈을 기부하고 아프리카 어린이의 편지를 받는 것은 '착한 일'이며, 못살다가 잘 살게 된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세계의 빈민들을 돕는 것은 자랑스러운 것처럼 여겨졌다. 물론 자랑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그 사람들의 입장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해 본 적은 있었나? 유명한 연예인들이 아프리카에 가서 학교를 짓고 밥을 먹여주는 모습 말고, 그 아이들이 파업으로 대학 공부를 제대로 마치지 못해 미국으로 떠날 수도 있다고, 그 타국에서 가난을 이기지 못해 성매매의 길목까지 들어갔다가 나올수도 있다고 생각해 본 적 있나? 그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떻게 살아갈지 생각해 본 적 있었나?

솔직히, 나는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페멜루가 말하는 이야기의 이 지점에 새삼스러운 충격을 받았다. 이는 어쩌면 안온한 모국에서 온실 속 화초처럼 살아온 나의 경험 부족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내가 살면서 느끼지 못할 인종적 경험이기도 하다. 내가 같은 상황에 처해있어도, 황인종으로서 느끼는 경험과 나이지리아에서 온 비미국인 흑인이 느끼는 경험은 분명히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나중에 에식스로 가는 기차에서 그는 자기 주위에 앉은 모든 사람이 나이지리아인임을 깨달았다. 요루바어와 피진 잉글리시로 떠들어 대는 시끄러운 대화가 객차 안을 가득 채웠다. 순간 그는 유색인들이 자신의 이국성을 마음껏 드러내고 있는 이 장면을 아까 지하철에서 만났던 백인 여자의 의심스러운 시선을 통해 보았다. 그리고 서점 커피숍에서 만났던 스리랑카 혹은 방글라데시 출신의 여자와 그녀가 막 벗어나고 있던 슬픔의 그림자를 다시 한번 생각했고, 어머니와 이페멜루를 생각했으며, 자신이 갖게 되리라 상상했던 삶, 그리고 노동과 독서, 공포와 희망으로 덧칠된 지금의 삶에 대해 생각했다. 그토록 외롭다고 느꼈던 적이 없었다.

<아메리카나2>, p61

우리나라에서 외국으로 떠나는 사람은 대부분 부유층이다. 대한민국에서 좋은 대학을 가지 못할것 같다, 싶으면 외국으로 보내거나, 외국에서 오래 살다온 사람이 특별 전형으로 쉽게 대학에 입학한다. 그러니까, 대한민국에서 외국 생활의 경험은 일종의 특권처럼 여겨지고, 실제로도 그렇게 작용한다. 그러나 이 이야기, 아프리카에서는 외국 생활을 다르게 정의한다. 부유하기 때문에 해외로 나가서 다양한 경험을 누리는 사람도 분명히 존재하지만, 이들은 나이지리아에서는 학업을 제대로 마칠 수 없어서, 가난해서 미국과 영국으로 떠난다. 그리고 그동안 쌓아왔던 환상과 마주하게 된다.

알렉사와 다른 손님들, 어쩌면 조지나조차도 누군가가 전쟁으로부터, 또는 인간의 영혼을 파괴하는 가난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은 이해했다. 하지만 그들은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다는 사실이 가져다주는 억압적인 무기력으로부터 탈출하고 싶은 욕구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오빈제 같은 사람들, 즉 유복하게 자랐지만 불만에 빠져 있고 태어날 때부터 고국이 아닌 다른 곳을 바라보도록 길들여진, 진정한 삶은 그 다른 곳에 있다고 영구불변하게 확신하는 사람들이 단지 떠나기 위해 - 그중 어느 누구도 굶주리거나 강간당하거나 마을이 불타지 않았지만 그저 선택의 가능성과 확실성에 목말라서- 위험한 일, 불법적인 일을 하기로 결심하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아메리카나2> 中

그렇다. 이페멜루와 오빈제는 우리가 알고있는 아프리카의 전형성처럼 굶주리며 성장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오빈제는 영문학 교수의 아들로, 남부럽지 않은 외모와 환경에서 자랐다. 그런 이가 영국에 가서 화장실을 청소하고, 막노동을 하는 삶을 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만약 몰라서 그랬던 거라면, 그는 어떻게 이 모든 것을 견뎠는가?

그 이유는 책에 나와있다. 외국에서는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보라색 히비스커스>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오빈제에게는 킴벌리의 아버지와 유사한 형태로, 아니 그보다 더 거대한, 아무리 발버둥쳐도 벗어날 수 없는 억압이 존재했다. 도저히 개선할 수 없을 것처럼 여겨지는 어떠한 악습과 제한이 그를 이렇게 만든 것이다.

그때 디케에게서 문자가 와서 그녀의 전화가 삑삑 댔다. 믿기지가 않아. 우리 나라 대통령이 나와 같은 흑인이라니. 그 문자를 몇 번이나 다시 읽는 동안 그녀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텔레비전에서는 버락 오바마와 미셸 오바마와 어린 두 딸이 무대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그들은 쏟아지는 눈부신 빛 속에서 승자다운 미소를 띤 채 바람에 실려 오듯 부드럽게 걸어왔다.

“청년과 노인. 부자와 빈자, 민주당원과 공화당원, 흑인, 백인, 히스패닉, 아시아인, 아메리칸 인디언, 동성애자, 이성애자.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비롯한 우리 미국인들은 지금 전 세계에 우리가 공화당 파와 민주당 파의 단순한 집합이 아님을 보여 줬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도.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미합중국이라는 하나의 국가일 것입니다."

버락 오바마의 목소리가 오르락내리락하는 동안 그의 표정은 엄숙했고 그 주위에는 희망에 찬, 어마어마한 숫자의 빛나는 군중이 있었다. 이페멜루는 이 장면을 보면서 넋을 잃었다. 그 순간에 만은, 그녀에게 미국보다 아름다운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메리카나2> 中

버락 오바마라는 존재가, (비록 '순수'한 흑인은 아닐지라도) 피부색이 검은 사람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는 것 자체가 미국 내의 (비미국인, 미국인을 모두 통틀어) 흑인들에게 얼마나 큰 희망이나 기쁨이 되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실제로 작가가 이 순간에 얼마나 벅차올랐는지를 이페멜루를 통해 말하는 것 같다고 느꼈다. 미셸 오바마의 자서전 <비커밍>과 함께 읽으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통령 당선이라는 동일한 순간에 미셸 오바마가 영부인으로서, 흑인으로서 느꼈던 기쁨과 미국의 흑인들이 느꼈던 환희를 함께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미국처럼 다인종이 뒤섞여 살아가는 국가에서는 인종이라는 개념이 미국인들에게 큰 이슈가 된다. 오바마는 혼혈이지만, 피부색이 검은 사람과 결혼해 검은 아이들을 낳은 사람이 미합중국의 대통령 자리에 오른 것은 어떠한 논의를 떠나서 그 자체로 큰 의미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이 소설은 미국에서의 인종 이야기, 흑인의 머리 이야기 등 나로서는 만나볼 수 없는 다양한 시각을 열어주기도 했지만 일단 이페멜루의 성장 소설이다. 그리고 이페멜루의 청소년기에서부터 그녀에게 큰 영향을, 지속적으로 미친 사람은 오빈제이다. '결혼을 하고 아이까지 있음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사랑을 택한다'는 조금은 진부한 이야기가 이렇게 아름답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보라색 히비스커스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지음, 황가한 옮김 / 민음사 / 2019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지난 학기 교양 수업 중 페미니즘이 주제가 되었던 적이 있었다. 당시 교수님이 본인이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손을 들어 보라고 하셨을 때, 50명이 넘게 듣는 수업에서 손을 든 사람은 10명도 되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솔직히 말하면, 나 역시 손을 들지 않았다. 친구들과 페미니즘 관련 이야기를 하는 것이 꺼려질 뿐만 아니라, 당당하게 손을 드는 것이 웬지모르게 불편했기 때문이다. 이런 나에게, 당당하게 나는 꾸미기를 좋아하고 하고 싶은 것을 하는 페미니스트라고 말하는 아디치에의 존재가 얼마나 소중한 지 모른다. 아디치에 서포터즈를 계기로 SNS에 나 역시 페미니스트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어린 여성들에게 멋진 여성 멘토가 된 아디치에의 첫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나에게 큰 의미가 있었다.

나와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의 첫만남은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에서 였다. 그래서였을까, 아디치에의 첫 소설이라는 <보라색 히비스커스>에서도 아디치에의 사고 방식이 느껴지는 부분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나이지리아에 사는 어린 소녀에게 완전히 이입해서 이 소설을 읽어나가며, 마지막에는 눈물까지 흘렸다.

"오빠는 은수카에 가고 싶어?" 계단 꼭대기에 다다랐을 때 내가 물었다.

"응." 오빠가 말했고 오빠의 눈이 나도 그렇다는 것을 안다고 말해 주었다. 하지만 나는 오빠한테 아버지의 목소리 없이, 계단을 올라오는 발소리 없이 닷새를 보낸다는 생각에 목이 메어 온다고 눈으로 말할 방법을 찾을 수가 없었다.

<보라색 히비스커스>, p139

이 아이들의 아버지, 유진은 분명히 자신의 신념을 무기로 자녀를 마음대로 휘두르는 가정폭력범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캄빌리가 아버지를 사랑한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가정폭력을 정당화하는 것 같아 말하기 조심스럽지만, 그녀는 아버지의 방식이 매우 기형적이지만 그 근원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유진은 자녀에게 말할 수 없이 끔찍한 방식의 폭력을 휘두르고 높은 학업 성취를 강요하지만 그런 후에 약을 발라주고 병원에 데려가는, 모순적인 사람이다.

가정폭력 가해자에게 이런 구체적이고 입체적인 설명이 필요한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캄빌리가 아버지를 정말 사랑하기 때문에, 그의 심정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아버지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캄빌리의 시점에서 진행되는 이 소설에서, 자연스럽게 나 역시 유진을 이해해보려고 노력할 수밖에 없었다.

"<엠네스티 월드>에서 오빠분한테 상을 준다고 어디서 읽었어요." 아마디 신부가 말했다. 그는 천천히, 감탄하듯 고개를 주억거렸고 나는 자랑스러움으로, 아버지와 연관되고 싶다는 욕망으로 온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뭔가를, 아버지가 이페오마 고모의 오빠이자 <스탠더드> 발행인일 뿐만 아니라 우리 아버지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상기시킬 수 있는 뭔가를 이 잘생긴 신부에게 말하고 싶었다. 아마디 신부의 눈에 담긴 구름 같은 따스함의 일부가 내가 옮아오길, 내려앉길 바랐다.

<보라색 히비스커스>, p173

유진은 대외적으로 무척 좋은 사람이었다. 그는 직접 나서서 성당에 헌금을 내고 가난한 이들에게 돈을 나눠줄 뿐만 아니라 익명으로도 소아 병원, 편부 가정, 퇴역 군인을 돕는다. <스탠더드> 발행인으로서 나이지리아의 민주주의를 위해 직접 싸우기도 한다. 깨어있는 지식인일뿐만 아니라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제대로 실천하는 재벌이다. 그러나, 가정에서만큼은 아니었다. 자신이 이교도의 밑에서 가난하게 자랐다는 것을 자식들을 통해 보상받고자 하는 것처럼 행동한다. 이러한 사례는 책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훌륭한 위인들 중에서도, 그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누구보다 잔인했던 사람들이 많다.

"누가 이 집에 저 그림을 들였냐?"

"저요." 내가 말했다.

"저요." 오빠가 말했다.

오빠가 내 쪽을 보기만 했어도 오빠한테 자책하지 말라고 했을 것이다. 다음 순간 아버지가 오빠한테서 그림을 낚아챘다. 아버지의 두 손이 신속하고 조화롭게 움직였다. 그리고 그림이 사라졌다. 원래 그 것은 잃어버린 무언가, 내가 가져 본 적도 없고 영원히 가질 수도 없을 무언가를 상징했다. 그런데 이제는 그 상징마저 사라지고 아버지의 발치에 더운색 줄무늬가 그려진 종잇조각만 놓여 있었다. 아주 꼼꼼히 찢어서 조각이 아주 작았다. 나는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파파은누쿠의 몸이 그렇게 작은 조각으로 잘려서 냉장고에 보관되는 것을 상상했다.

<보라색 히비스커스>, p256

캄빌리의, '내가 가져 본 적도 없고 영원히 가질 수도 없을 무언가'는 타인과의 유대감이었을 것이다. 그것도 할아버지라는 혈연과의, 캄빌리로서는 가질 수가 없었으며 이제는 파파은누쿠의 죽음으로 인해 영원히 가질 수도 없게 된 무언가. 아마카가 그려준 할아버지의 그림은, 예수님이고 이교도고 종교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평화와 햇빛과 공기를 부유하는 먼지 같은 무언가였다. 아마카가 할아버지의 그림을 그리는 부분의 묘사가 너무 아름다워서 그 장면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 했다. 그런 그림을 망설임도 없이 찢어버린 유진과 그것을 잃은 캄빌리의 심정에 대해 생각하며.

그때 나는 이페오마 고모도 사촌들에게 똑같이 해 왔음을 깨달았다. 엄마가 자식한테 어떤 식으로 말하고, 무엇을 기대하는가를 해 그 애들이 뛰어넘어야 할 목표를 점점 더 높였다. 아이들이 반드시 막대를 넘으리라 믿으면서 항상 그랬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됐다. 오빠와 내 경우는 달랐다. 우리는 스스로 막대를 넘을 수 있다고 믿어서 넘은 게 아니라 넘지 못할까 봐 두려워서 넘었다.

<보라색 히비스커스>, p274

의 뒷표지에는, 캄빌리가 2등을 한 뒤 아버지가 교실에 찾아가 나눈 대화가 담겨 있다. 그게 이 책의 첫 인상이었다. 자신의 기준을 강요하며, 1등을 하지 못하면 물리적인 폭력을 가하는 아버지. 그리고 그게 폭력인 줄도 모르고, 아버지를 마치 집안의 예수처럼 신성시하던 캄빌리. 이것은 그동안 자신이 당해온 것이 얼마나 잘못된 교육방식이고 폭력이었는지 깨닫는 순간이다.

내게 익숙한 침묵, 아버지가 살아 있었을 때의 침묵은 내 꿈에 나온다. 악몽 속에서 그것은 수치심과 슬픔과 이름 붙일 수 없는 수많은 것들과 뒤섞여 성령 강림절처럼 내 머리 위에 머무는 파란 불꽃을 만들어 내고 나는 마침내 땀에 흠뻑 젖어 비명을 지르며 잠에서 깬다. 나는 오빠에게 들려주지 않았다. 내가 매주 일요일마다 아버지를 위해 미사 드린다는 얘기를, 꿈에서 아버지를 보고 싶다는 얘기를, 그 소망이 너무 강해서 때로는 비몽사몽 중에 꿈을 지어내기도 한다는 얘기를. 그 꿈에서 나는 아버지를 본다. 아버지가 나를 안으려고 팔을 뻗고 나도 팔을 뻗는다. 하지만 절대 서로 닿지 않는 와중에 뭔가가 나를 확 잡아당긴다. 나는 내가 지어낸 꿈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음을 깨닫는다.

<보라색 히비스커스>, p363

집이란 무엇인가? 가정이란 무엇이고 가족이란 무엇인가? 나는 집이란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 무엇도 나를 위협하지 않음을 아는 상태로 휴식할 수 있는 공간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나의 지론에서, 캄빌리의 집은 절대 진정한 집이라고 할 수 없었다. 그곳은 집이라기보다는 엄격한 규칙이 지배하는 기숙 학교 같았다. 이들의 어머니가 아버지를 죽일 결심을 한 것은 캄빌리와 자자가 은수카, 이모네 집으로 떠나 있을 때였을 것이다. 자녀들에게 가해지던 숨막힘과 폭력까지 모두 집에 홀로 남은 어머니에게 돌아가고, 그의 폭력으로 인해 6주된 생명을 잃어버린 순간에. 캄빌리와 자자가 시간표를 잊고 '무언가가 될 자유', '하느님을 자기 방식대로 사랑하는 자유'를 배워나가는 동안 어머니의 마음을 안에서부터 곪아나가고 있던 것이리라. 이 소설에서 가장 불쌍한 인물은, 캄빌리와 자자의 어머니, 유진의 아내, 남편을 사랑하고 우상화했지만 죽일 수밖에 없었던 여자였다. (이름이 기억나지 않아서 책을 찾아보고 있는데 이름이 정확하게 나온 부분이 없다. '내 아내' (누니에 음), 어머니 등으로 불릴 뿐.)

유진은 가부장제와 종교를 무기로 가족들을 억압한다. 이 가족 구성원의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인 자자 역시 직접적인 피해를 받고 저항했지만, 아디치에의 페미니즘 에세이를 읽은 독자로서, 그리고 대한민국에서 사는 여성으로서 나는 캄빌리와 어머니의 입장에 더욱 이입할 수밖에 없었다. 유진이 (정신적으로) 죽인 여성은 캄빌리뿐만이 아니다. 가장 큰 피해자는 어머니다.

아디치에는 나에게 페미니즘에 대해서 알려 주었을 뿐만 아니라, 아프리카 문학에도 눈을 뜨게 해주었다. 아디치에가 테드 강연에서 말했던 것처럼, 우리는 우리나라의 문학이나 서양의 문학에만 익숙하다. 그러니까 동양이라고도, 서양이라고도 하기 어려운 '아프리카'의 문학에 대해서는 잘 몰랐을 뿐만 아니라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한국의 독자들은 이 소설을 읽으며 낯선 단어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나이지리아 언어와 나이지리아에서 먹는 음식들 (우콰, 오라, 플랜틴 등), 그곳의 풍습까지. 그러한 부분에서 <보라색 히비스커스>가 큰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한다. 이 소설은 일종의 성장소설이기에 캄빌리에게 완전히 빠져들 수밖에 없는데, 그와 동시에 낯설면서도 익숙한 나이지리아 풍경과 만날 수 있다.

아디치에의 첫 소설을 덮고, 아메리카나를 기대하며.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9-08-07 20: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내 문장은 어디서부터 고쳐야 할까? - 선명하고 바르고 오해받지 않는 글쓰기
김은경 지음 / 호우 / 2019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는 어렸을 때부터 글 깨나 쓴다는 소리를 듣고 자랐다. 글쓰기 대회에서 상도 여럿 타고, 대학도 논술로 들어왔다. 그러니까, 나는 내가 글을 잘 쓰는 줄 알고 살아왔다. 그런데 시험 혹은 평가를 위한 글쓰기가 아니라 내가 쓰고 싶어서 시작한 글쓰기를 시작하려니까 내 문장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무언가 이상하다는건 알겠는데, 막상 고치려니 어디를 어떻게 고쳐야 할지 모르겠는 것이다.

이런 증상은 무언가 주장하거나 설명하기 위한 글이 아닌, 내 감정을 정갈하게 풀어내고자 시작한 글에서 더 심하게 나타났다. 내가 쓰고 싶은 글은 훌륭한 작가들의 에세이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다음 내용이 궁금해 술술 읽게 되는 글이었다. 그런데 막상 나의 결과물을 보니 트위터 혹은 인스타그램에서 쓰는 글마냥 정신이 없는 것이다. 매번 140자 제한이 있는 SNS에 내 감정을 비속어 범벅으로 내던지듯이 써오다 보니 든 버릇이리라.

이게 현실과 이상의 괴리라는 걸까? 계속 쓰는 연습을 하다 보면 나아지겠지, 하면서도 어딘가 의구심이 들었다.

이 책은, 그런 사람들을 위한 책이다. 글을 '잘' 쓰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는 사람들. 정돈된 명작들만 보고 자라 눈은 높은데, 정작 내 글은 마음에 안 드는 사람들.

이 책에 쓴 내용 중 외워야 하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열심히 외워봤자 시간이 지나면 다 잊어버릴 테니까요. 대신 저는 이 문장이 왜 어색한지, 쓰고 다듬을 때는 어떤 부분을 중점적으로 봐야 하는지, 도무지 손을 댈 수 없을 때는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지 등 글을 보는 안목을 키워드리려고 합니다. 그러면 이 책에 나온 예문 외 어떤 문장이든 자유로이 쓰고 다듬을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러니 지금 가볍게 한번 읽어보시고, 중요한 글을 쓰기 전 등 필요할 때마다 꺼내 보며 안목을 재충전하시길 바랍니다.

<내 문장은 어디서부터 고쳐야 할까?> 프롤로그 中

과연 이런 책을 쓰는 저자답게 책의 문장들 역시 깔끔하고 읽기 편하다. 글을 볼 때 느끼던 불편함을, 이것 때문이야! 라고 시원하게 집어주는 느낌이다. 한국어 원어민이기 때문에 느끼던 이유 모를 불편함의 근원을 찾은 것이다. 무어라 설명해야 할 지 모를 괴로움이 언어를 찾은 기분이었다.

이 책은 학창 시절 보던 참고서, 그것도 아주아주 친절하고 가벼운 참고서 같다. 예문을 들어 하나하나 설명하고, 이걸 수정하는 방법을 알려주고. 이 책을 쓰신 저자 분을 만나본 적도 없지만, 내 책상에 앉아 이 분의 강의를 듣고 있는 기분이라고 하는 게 제일 적절하겠다.

내 책상 한 켠에 항상 두고 글을 쓸 때, 혹은 글을 읽을 때 언제든 꺼내볼 수 있는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약자를 위한 현실주의 -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이주희 지음 / Mid(엠아이디) / 2019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네이버 뉴스 메인을 보며, 지금 이 시점에 <약자를 위한 현실주의>를 읽게 된 것이 정말 '시의적절한' 일이었다고 느꼈다. 정치적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최근 일본과의 수출규제 갈등으로 일본 여행을 취소했다. 그리고 러시아 여행으로 방향을 바꿨는데 이럴수가, 오늘은 러시아와 영공 침범이니 아니니 공방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아니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내가 여행 가야겠다!라고 결심하고 비행기표를 사기만 하면 신의 장난으로 우리나라랑 사이가 안 좋아지는 건가? 당연히 그럴 리가 없다. 단군이 한반도에 터를 잡은 이래로 주변국과의 크고작은 갈등은 끊임없이 존재했다. 우리가 한국사 교과서에서 보는 귀주대첩이니 임진왜란이니 하는 사건들은 달라진 형태로 여전히 존재한다. 예전에는 대포와 총으로 싸웠다면 지금은 수출 규제와 관세로 싸우는 식이다.

평소 뉴스를 열심히 챙겨보는 종류의 인간이 아니지만, 여행 탓에 최근 뉴스를 정말 열심히 읽으며 대한민국과 주변국과의 갈등은 그 형태만 바뀌었을 뿐 역사책에 나오는 것과 변한 게 없구나, 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국가가 존재하는 이상 이 갈등은 피할 수 없고 그것은 나의 삶에도 매우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구나, 느끼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처럼 복잡한 상황에서 대한민국은 어떠한 태도를 지녀야 하는가? 이 책이 정답은 아니지만, 조금의 방향성은 제시해줄 수 있겠다.

이 책을 덮고 난 후 가장 먼저 생각한 것은, 과거의 사람들이 읽던 병법서가 이런 것이었을까? 하는 감상이었다. <약자를 위한 현실주의>는 정말 21세기의 대한민국 맞춤형의 현대적 병법서이다. 물론 병법서라기보다는 지침서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겠다. 이 책을 대한민국이 가져야 할 태도를 유구한 한반도의 역사를 통해 설명하는 책이라고 정의하고 싶다. '한반도의 역사를 돌아보며 앞으로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탐구'해 보겠다는 식의 거창한 이유 외에도,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한국사를 다른 시각으로 볼 수 있어 내용 자체로도 흥미로웠다. 12년 동안 학교를 다니며 배운 한국사는 '팩트'였다. 고려 대의 거란 전쟁에 대해 배우며 거란의 당대 상황과 입장에 대해 배운 적은 없었고, 병자호란에 대해 배우며 후금의 생각에 대해 고민해 본 적 없었다. 이 책을 읽으며 신라, 고려, 조선의 입장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의 입장에서 내가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역사적 사건들을 되돌아보고, 그것에서 어떤 교훈을 얻어야 하는지 고민할 수 있었다.

역사를 공부해야 하는 이유는, 역사를 통해 현재를 살아가는 법을 배울 수 있기 때문이라고들 한다. 그렇다면 지금 이 글을 쓰는 이 시점에서도 중국과 일본, 러시아 등 주변국과 다양한 양상의 크고작은 갈등과 동시에 협력을 맺고 있는 대한민국이 알아야 할 역사는 바로 한국사다. 책의 들어가는 말에서 지은이가 설명하듯, 대한민국은 결코 약소국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한반도라는 지리적 위치 탓에 항상 주변에 초강대국이 몰려 있고, 외부의 변화에 따라 의도치않게 끊임없이 다른 국가와의 관계를 고민해야 했다. 한반도를 통채로 들어 어디 태평양 한가운데쯤으로 옮길 수는 없는 노릇이므로, 이러한 지리적 위치에서 우리의 선조들은 어떻게 살아남아 왔는지 알기 위해서는 한국사 공부가 필수적이다.

이 책은 크게 4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1장에서는 삼국 통일을 이뤄낸 신라의 이야기를, 2장에서는 신흥 강대국이었던 거란과의 전쟁을 성공적으로 치룬 고려의 이야기를 다룬다. 물론 '성공기'만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3장에서는 몽골제국에 대패한 고려의 이야기를, 4장에서는 조선 대의 병자호란에 대해 이야기한다.

신라는 어떻게 해서 최후의 승자가 될 수 있었을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김춘추와 김유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너무 전통적이고 영웅중심적인 사고방식이라는 비판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어쩔 수 없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노블리스 오블리주와 리더십의 교과서와도 같은 이 두 사람이 없었다면 신라는 결코 최후의 승자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 두 사람은 약자가 살아남기 위해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할 두 가지 덕목을 나누어 가지고 있었다. 바로 정확한 '눈'과 자신만의 '무기'이다.

<약자를 위한 현실주의>, p94

신라가 최후의 승자, 그러니까 삼국 통일의 주인공이 된 이유의 새로운 해석도 흥미로웠지만, 고구려와 백제의 멸망에 대한 이야기도 재미있었다. 우리는 백제가 멸망한 이유로 의자왕과 3000 궁녀 등 의자왕의 향락을 먼저 떠올리지만, 신라와 백제의 결정적인 차이는 시시각각 변화하는 정세에 얼마나 기민하고 적극적으로 대응하느냐-의 차이였다. 다시 말해, 새로운 상황의 변화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만들어' 나가느냐, 아니면 다른 나라들이 만들어낸 상황의 변화를 이해하지 못하고 과거에 비추어 관성적으로 반응했느냐, 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상술했지만, 이처럼 타국에 대한 편견과 과거의 상황에 갇혀 있지 않고 새로운 상황을 '만들어 나가는 자'가 되는 것은 21세기에도 여전히 중요한 일이다. 최근 북한과의 관계 개선으로 북한을 실제로 취재한 기사가 많아지고 탈북인들이 방송뿐만 아니라 1인 미디어에도 적극적으로 나서며, 더 이상 '북한'이라고 하면 뼈만 남아 누워있는 아이들 혹은 우리나라의 80년대에 머물러 있는 것 같은 길거리 풍경을 떠올리지 않게 되었다. 적절한 예시는 아닌 것 같지만, 이처럼 변화하는 상황에 맞추어 다른 나라에 대한 인식을 고쳐 나가는 것은 국가뿐만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는 개인에게도 필수적이다.

조선이 병자호란의 비극을 막지 못한 이유는 결국 '중립의 부재' 때문이 아니다. '무기의 부재'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병자호란의 비극으로부터 우리가 배워야 할 진정한 교훈 역시 '중립'의 중요성이 아니라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무기'의 중요성일 것이다. 그리고 이 교훈은 당연하게도 400년 전 조선에만 유효한 교훈은 아닐 것이다.

<약자를 위한 현실주의>, p334

정세를 정확히 파악하고 자신이 취해야 할 태도를 결정하는 결단력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힘'이다. 우리 자체의 힘이 있어야 다른 나라의 상황에 이리저리 휘둘리지 않고 상황을 만들어나갈 수 있다. 사자를 물리치기 위해 늑대를 불러들인 고종 대의 예시를 굳이 들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이야기다. 그러나 병자호란의 패배 역시 이러한 이유에서 기인했음은 미처 알지 못했다. 그동안 우리는 인조의 구시대적인 친명배금 정책과 강화도 피난 실패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남한산성으로 피신하게 되며 식량이 부족해졌고... 등등의 이유로 병자호란에서 이기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이런 이유도 있겠으나, 인조반정 이후의 여러가지 사정으로 병력이 매우 부족해졌음- 즉 후금에 맞설 제대로 된 '무기'가 없었음은 미처 알지 못했다.

그렇다면 현재의 대한민국은 다른 나라와의 갈등에 제대로 맞설 수 있는 힘이 있는가? 어느 부분이 부족하고, 그렇다면 그 부분은 어떻게 개선할 수 있는가?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고민을 하게 되었다.


약자를 위한 현실주의라니! 발끈하며 이 책을 펼친 사람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게 될 것이다. 이 책은 밤을 새서 읽게 되거나 술술 페이지를 넘길 수 있는 책은 아니다. 현재 대한민국의 상황에 대한 구체적 해결책을 제시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한국사를 새로운 방향으로 돌아보고 생각할 수 있게 만드는, 오랜만에 읽어보는 신선한 역사 교양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