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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색 히비스커스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지음, 황가한 옮김 / 민음사 / 2019년 6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지난 학기 교양 수업 중 페미니즘이 주제가 되었던 적이 있었다. 당시 교수님이 본인이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손을 들어 보라고 하셨을 때, 50명이 넘게 듣는 수업에서 손을 든 사람은 10명도 되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솔직히 말하면, 나 역시 손을 들지 않았다. 친구들과 페미니즘 관련 이야기를 하는 것이 꺼려질 뿐만 아니라, 당당하게 손을 드는 것이 웬지모르게 불편했기 때문이다. 이런 나에게, 당당하게 나는 꾸미기를 좋아하고 하고 싶은 것을 하는 페미니스트라고 말하는 아디치에의 존재가 얼마나 소중한 지 모른다. 아디치에 서포터즈를 계기로 SNS에 나 역시 페미니스트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어린 여성들에게 멋진 여성 멘토가 된 아디치에의 첫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나에게 큰 의미가 있었다.
나와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의 첫만남은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에서 였다. 그래서였을까, 아디치에의 첫 소설이라는 <보라색 히비스커스>에서도 아디치에의 사고 방식이 느껴지는 부분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나이지리아에 사는 어린 소녀에게 완전히 이입해서 이 소설을 읽어나가며, 마지막에는 눈물까지 흘렸다.
"오빠는 은수카에 가고 싶어?" 계단 꼭대기에 다다랐을 때 내가 물었다.
"응." 오빠가 말했고 오빠의 눈이 나도 그렇다는 것을 안다고 말해 주었다. 하지만 나는 오빠한테 아버지의 목소리 없이, 계단을 올라오는 발소리 없이 닷새를 보낸다는 생각에 목이 메어 온다고 눈으로 말할 방법을 찾을 수가 없었다.
이 아이들의 아버지, 유진은 분명히 자신의 신념을 무기로 자녀를 마음대로 휘두르는 가정폭력범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캄빌리가 아버지를 사랑한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가정폭력을 정당화하는 것 같아 말하기 조심스럽지만, 그녀는 아버지의 방식이 매우 기형적이지만 그 근원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유진은 자녀에게 말할 수 없이 끔찍한 방식의 폭력을 휘두르고 높은 학업 성취를 강요하지만 그런 후에 약을 발라주고 병원에 데려가는, 모순적인 사람이다.
가정폭력 가해자에게 이런 구체적이고 입체적인 설명이 필요한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캄빌리가 아버지를 정말 사랑하기 때문에, 그의 심정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아버지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캄빌리의 시점에서 진행되는 이 소설에서, 자연스럽게 나 역시 유진을 이해해보려고 노력할 수밖에 없었다.
"<엠네스티 월드>에서 오빠분한테 상을 준다고 어디서 읽었어요." 아마디 신부가 말했다. 그는 천천히, 감탄하듯 고개를 주억거렸고 나는 자랑스러움으로, 아버지와 연관되고 싶다는 욕망으로 온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뭔가를, 아버지가 이페오마 고모의 오빠이자 <스탠더드> 발행인일 뿐만 아니라 우리 아버지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상기시킬 수 있는 뭔가를 이 잘생긴 신부에게 말하고 싶었다. 아마디 신부의 눈에 담긴 구름 같은 따스함의 일부가 내가 옮아오길, 내려앉길 바랐다.
유진은 대외적으로 무척 좋은 사람이었다. 그는 직접 나서서 성당에 헌금을 내고 가난한 이들에게 돈을 나눠줄 뿐만 아니라 익명으로도 소아 병원, 편부 가정, 퇴역 군인을 돕는다. <스탠더드> 발행인으로서 나이지리아의 민주주의를 위해 직접 싸우기도 한다. 깨어있는 지식인일뿐만 아니라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제대로 실천하는 재벌이다. 그러나, 가정에서만큼은 아니었다. 자신이 이교도의 밑에서 가난하게 자랐다는 것을 자식들을 통해 보상받고자 하는 것처럼 행동한다. 이러한 사례는 책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훌륭한 위인들 중에서도, 그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누구보다 잔인했던 사람들이 많다.
"누가 이 집에 저 그림을 들였냐?"
"저요." 내가 말했다.
"저요." 오빠가 말했다.
오빠가 내 쪽을 보기만 했어도 오빠한테 자책하지 말라고 했을 것이다. 다음 순간 아버지가 오빠한테서 그림을 낚아챘다. 아버지의 두 손이 신속하고 조화롭게 움직였다. 그리고 그림이 사라졌다. 원래 그 것은 잃어버린 무언가, 내가 가져 본 적도 없고 영원히 가질 수도 없을 무언가를 상징했다. 그런데 이제는 그 상징마저 사라지고 아버지의 발치에 더운색 줄무늬가 그려진 종잇조각만 놓여 있었다. 아주 꼼꼼히 찢어서 조각이 아주 작았다. 나는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파파은누쿠의 몸이 그렇게 작은 조각으로 잘려서 냉장고에 보관되는 것을 상상했다.
캄빌리의, '내가 가져 본 적도 없고 영원히 가질 수도 없을 무언가'는 타인과의 유대감이었을 것이다. 그것도 할아버지라는 혈연과의, 캄빌리로서는 가질 수가 없었으며 이제는 파파은누쿠의 죽음으로 인해 영원히 가질 수도 없게 된 무언가. 아마카가 그려준 할아버지의 그림은, 예수님이고 이교도고 종교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평화와 햇빛과 공기를 부유하는 먼지 같은 무언가였다. 아마카가 할아버지의 그림을 그리는 부분의 묘사가 너무 아름다워서 그 장면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 했다. 그런 그림을 망설임도 없이 찢어버린 유진과 그것을 잃은 캄빌리의 심정에 대해 생각하며.
그때 나는 이페오마 고모도 사촌들에게 똑같이 해 왔음을 깨달았다. 엄마가 자식한테 어떤 식으로 말하고, 무엇을 기대하는가를 해 그 애들이 뛰어넘어야 할 목표를 점점 더 높였다. 아이들이 반드시 막대를 넘으리라 믿으면서 항상 그랬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됐다. 오빠와 내 경우는 달랐다. 우리는 스스로 막대를 넘을 수 있다고 믿어서 넘은 게 아니라 넘지 못할까 봐 두려워서 넘었다.
책의 뒷표지에는, 캄빌리가 2등을 한 뒤 아버지가 교실에 찾아가 나눈 대화가 담겨 있다. 그게 이 책의 첫 인상이었다. 자신의 기준을 강요하며, 1등을 하지 못하면 물리적인 폭력을 가하는 아버지. 그리고 그게 폭력인 줄도 모르고, 아버지를 마치 집안의 예수처럼 신성시하던 캄빌리. 이것은 그동안 자신이 당해온 것이 얼마나 잘못된 교육방식이고 폭력이었는지 깨닫는 순간이다.
내게 익숙한 침묵, 아버지가 살아 있었을 때의 침묵은 내 꿈에 나온다. 악몽 속에서 그것은 수치심과 슬픔과 이름 붙일 수 없는 수많은 것들과 뒤섞여 성령 강림절처럼 내 머리 위에 머무는 파란 불꽃을 만들어 내고 나는 마침내 땀에 흠뻑 젖어 비명을 지르며 잠에서 깬다. 나는 오빠에게 들려주지 않았다. 내가 매주 일요일마다 아버지를 위해 미사 드린다는 얘기를, 꿈에서 아버지를 보고 싶다는 얘기를, 그 소망이 너무 강해서 때로는 비몽사몽 중에 꿈을 지어내기도 한다는 얘기를. 그 꿈에서 나는 아버지를 본다. 아버지가 나를 안으려고 팔을 뻗고 나도 팔을 뻗는다. 하지만 절대 서로 닿지 않는 와중에 뭔가가 나를 확 잡아당긴다. 나는 내가 지어낸 꿈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음을 깨닫는다.
집이란 무엇인가? 가정이란 무엇이고 가족이란 무엇인가? 나는 집이란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 무엇도 나를 위협하지 않음을 아는 상태로 휴식할 수 있는 공간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나의 지론에서, 캄빌리의 집은 절대 진정한 집이라고 할 수 없었다. 그곳은 집이라기보다는 엄격한 규칙이 지배하는 기숙 학교 같았다. 이들의 어머니가 아버지를 죽일 결심을 한 것은 캄빌리와 자자가 은수카, 이모네 집으로 떠나 있을 때였을 것이다. 자녀들에게 가해지던 숨막힘과 폭력까지 모두 집에 홀로 남은 어머니에게 돌아가고, 그의 폭력으로 인해 6주된 생명을 잃어버린 순간에. 캄빌리와 자자가 시간표를 잊고 '무언가가 될 자유', '하느님을 자기 방식대로 사랑하는 자유'를 배워나가는 동안 어머니의 마음을 안에서부터 곪아나가고 있던 것이리라. 이 소설에서 가장 불쌍한 인물은, 캄빌리와 자자의 어머니, 유진의 아내, 남편을 사랑하고 우상화했지만 죽일 수밖에 없었던 여자였다. (이름이 기억나지 않아서 책을 찾아보고 있는데 이름이 정확하게 나온 부분이 없다. '내 아내' (누니에 음), 어머니 등으로 불릴 뿐.)
유진은 가부장제와 종교를 무기로 가족들을 억압한다. 이 가족 구성원의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인 자자 역시 직접적인 피해를 받고 저항했지만, 아디치에의 페미니즘 에세이를 읽은 독자로서, 그리고 대한민국에서 사는 여성으로서 나는 캄빌리와 어머니의 입장에 더욱 이입할 수밖에 없었다. 유진이 (정신적으로) 죽인 여성은 캄빌리뿐만이 아니다. 가장 큰 피해자는 어머니다.
아디치에는 나에게 페미니즘에 대해서 알려 주었을 뿐만 아니라, 아프리카 문학에도 눈을 뜨게 해주었다. 아디치에가 테드 강연에서 말했던 것처럼, 우리는 우리나라의 문학이나 서양의 문학에만 익숙하다. 그러니까 동양이라고도, 서양이라고도 하기 어려운 '아프리카'의 문학에 대해서는 잘 몰랐을 뿐만 아니라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한국의 독자들은 이 소설을 읽으며 낯선 단어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나이지리아 언어와 나이지리아에서 먹는 음식들 (우콰, 오라, 플랜틴 등), 그곳의 풍습까지. 그러한 부분에서 <보라색 히비스커스>가 큰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한다. 이 소설은 일종의 성장소설이기에 캄빌리에게 완전히 빠져들 수밖에 없는데, 그와 동시에 낯설면서도 익숙한 나이지리아 풍경과 만날 수 있다.
아디치에의 첫 소설을 덮고, 아메리카나를 기대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