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약자를 위한 현실주의 -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이주희 지음 / Mid(엠아이디) / 2019년 4월
평점 :
네이버 뉴스 메인을 보며, 지금 이 시점에 <약자를 위한 현실주의>를 읽게 된 것이 정말 '시의적절한' 일이었다고 느꼈다. 정치적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최근 일본과의 수출규제 갈등으로 일본 여행을 취소했다. 그리고 러시아 여행으로 방향을 바꿨는데 이럴수가, 오늘은 러시아와 영공 침범이니 아니니 공방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아니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내가 여행 가야겠다!라고 결심하고 비행기표를 사기만 하면 신의 장난으로 우리나라랑 사이가 안 좋아지는 건가? 당연히 그럴 리가 없다. 단군이 한반도에 터를 잡은 이래로 주변국과의 크고작은 갈등은 끊임없이 존재했다. 우리가 한국사 교과서에서 보는 귀주대첩이니 임진왜란이니 하는 사건들은 달라진 형태로 여전히 존재한다. 예전에는 대포와 총으로 싸웠다면 지금은 수출 규제와 관세로 싸우는 식이다.
평소 뉴스를 열심히 챙겨보는 종류의 인간이 아니지만, 여행 탓에 최근 뉴스를 정말 열심히 읽으며 대한민국과 주변국과의 갈등은 그 형태만 바뀌었을 뿐 역사책에 나오는 것과 변한 게 없구나, 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국가가 존재하는 이상 이 갈등은 피할 수 없고 그것은 나의 삶에도 매우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구나, 느끼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처럼 복잡한 상황에서 대한민국은 어떠한 태도를 지녀야 하는가? 이 책이 정답은 아니지만, 조금의 방향성은 제시해줄 수 있겠다.
이 책을 덮고 난 후 가장 먼저 생각한 것은, 과거의 사람들이 읽던 병법서가 이런 것이었을까? 하는 감상이었다. <약자를 위한 현실주의>는 정말 21세기의 대한민국 맞춤형의 현대적 병법서이다. 물론 병법서라기보다는 지침서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겠다. 이 책을 대한민국이 가져야 할 태도를 유구한 한반도의 역사를 통해 설명하는 책이라고 정의하고 싶다. '한반도의 역사를 돌아보며 앞으로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탐구'해 보겠다는 식의 거창한 이유 외에도,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한국사를 다른 시각으로 볼 수 있어 내용 자체로도 흥미로웠다. 12년 동안 학교를 다니며 배운 한국사는 '팩트'였다. 고려 대의 거란 전쟁에 대해 배우며 거란의 당대 상황과 입장에 대해 배운 적은 없었고, 병자호란에 대해 배우며 후금의 생각에 대해 고민해 본 적 없었다. 이 책을 읽으며 신라, 고려, 조선의 입장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의 입장에서 내가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역사적 사건들을 되돌아보고, 그것에서 어떤 교훈을 얻어야 하는지 고민할 수 있었다.
역사를 공부해야 하는 이유는, 역사를 통해 현재를 살아가는 법을 배울 수 있기 때문이라고들 한다. 그렇다면 지금 이 글을 쓰는 이 시점에서도 중국과 일본, 러시아 등 주변국과 다양한 양상의 크고작은 갈등과 동시에 협력을 맺고 있는 대한민국이 알아야 할 역사는 바로 한국사다. 책의 들어가는 말에서 지은이가 설명하듯, 대한민국은 결코 약소국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한반도라는 지리적 위치 탓에 항상 주변에 초강대국이 몰려 있고, 외부의 변화에 따라 의도치않게 끊임없이 다른 국가와의 관계를 고민해야 했다. 한반도를 통채로 들어 어디 태평양 한가운데쯤으로 옮길 수는 없는 노릇이므로, 이러한 지리적 위치에서 우리의 선조들은 어떻게 살아남아 왔는지 알기 위해서는 한국사 공부가 필수적이다.
이 책은 크게 4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1장에서는 삼국 통일을 이뤄낸 신라의 이야기를, 2장에서는 신흥 강대국이었던 거란과의 전쟁을 성공적으로 치룬 고려의 이야기를 다룬다. 물론 '성공기'만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3장에서는 몽골제국에 대패한 고려의 이야기를, 4장에서는 조선 대의 병자호란에 대해 이야기한다.
신라는 어떻게 해서 최후의 승자가 될 수 있었을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김춘추와 김유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너무 전통적이고 영웅중심적인 사고방식이라는 비판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어쩔 수 없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노블리스 오블리주와 리더십의 교과서와도 같은 이 두 사람이 없었다면 신라는 결코 최후의 승자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 두 사람은 약자가 살아남기 위해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할 두 가지 덕목을 나누어 가지고 있었다. 바로 정확한 '눈'과 자신만의 '무기'이다.
신라가 최후의 승자, 그러니까 삼국 통일의 주인공이 된 이유의 새로운 해석도 흥미로웠지만, 고구려와 백제의 멸망에 대한 이야기도 재미있었다. 우리는 백제가 멸망한 이유로 의자왕과 3000 궁녀 등 의자왕의 향락을 먼저 떠올리지만, 신라와 백제의 결정적인 차이는 시시각각 변화하는 정세에 얼마나 기민하고 적극적으로 대응하느냐-의 차이였다. 다시 말해, 새로운 상황의 변화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만들어' 나가느냐, 아니면 다른 나라들이 만들어낸 상황의 변화를 이해하지 못하고 과거에 비추어 관성적으로 반응했느냐, 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상술했지만, 이처럼 타국에 대한 편견과 과거의 상황에 갇혀 있지 않고 새로운 상황을 '만들어 나가는 자'가 되는 것은 21세기에도 여전히 중요한 일이다. 최근 북한과의 관계 개선으로 북한을 실제로 취재한 기사가 많아지고 탈북인들이 방송뿐만 아니라 1인 미디어에도 적극적으로 나서며, 더 이상 '북한'이라고 하면 뼈만 남아 누워있는 아이들 혹은 우리나라의 80년대에 머물러 있는 것 같은 길거리 풍경을 떠올리지 않게 되었다. 적절한 예시는 아닌 것 같지만, 이처럼 변화하는 상황에 맞추어 다른 나라에 대한 인식을 고쳐 나가는 것은 국가뿐만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는 개인에게도 필수적이다.
조선이 병자호란의 비극을 막지 못한 이유는 결국 '중립의 부재' 때문이 아니다. '무기의 부재'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병자호란의 비극으로부터 우리가 배워야 할 진정한 교훈 역시 '중립'의 중요성이 아니라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무기'의 중요성일 것이다. 그리고 이 교훈은 당연하게도 400년 전 조선에만 유효한 교훈은 아닐 것이다.
정세를 정확히 파악하고 자신이 취해야 할 태도를 결정하는 결단력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힘'이다. 우리 자체의 힘이 있어야 다른 나라의 상황에 이리저리 휘둘리지 않고 상황을 만들어나갈 수 있다. 사자를 물리치기 위해 늑대를 불러들인 고종 대의 예시를 굳이 들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이야기다. 그러나 병자호란의 패배 역시 이러한 이유에서 기인했음은 미처 알지 못했다. 그동안 우리는 인조의 구시대적인 친명배금 정책과 강화도 피난 실패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남한산성으로 피신하게 되며 식량이 부족해졌고... 등등의 이유로 병자호란에서 이기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이런 이유도 있겠으나, 인조반정 이후의 여러가지 사정으로 병력이 매우 부족해졌음- 즉 후금에 맞설 제대로 된 '무기'가 없었음은 미처 알지 못했다.
그렇다면 현재의 대한민국은 다른 나라와의 갈등에 제대로 맞설 수 있는 힘이 있는가? 어느 부분이 부족하고, 그렇다면 그 부분은 어떻게 개선할 수 있는가?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고민을 하게 되었다.
약자를 위한 현실주의라니! 발끈하며 이 책을 펼친 사람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게 될 것이다. 이 책은 밤을 새서 읽게 되거나 술술 페이지를 넘길 수 있는 책은 아니다. 현재 대한민국의 상황에 대한 구체적 해결책을 제시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한국사를 새로운 방향으로 돌아보고 생각할 수 있게 만드는, 오랜만에 읽어보는 신선한 역사 교양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