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 앞에 선 그대에게 - 21세기 페미니즘에 대한 7가지 질문
강남순 지음 / 한길사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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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서도 페미니즘에 대한 나의 생각을 여러 번 기록한 바 있다. 나는 페미니스트다. 대학 강의에서도 페미니즘 관련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며 내가 페미니스트임을 숨기려고 한 적 없다. 그동안 다양한 책을 읽었다. 페미니즘 책을 읽으며 화장을 꼭 해야만 할 것 같은 과거의 나, 친가 제사에 가면 꼭 일을 해야 할 것 같았던 과거의 나는 해방되었다. 페미니즘은 확실히 내 삶을 바꿨다. 뿐만 아니라, 페미니즘은 그것을 의도적으로 피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까지 바꿔주고 있다.

그러나 숙명여대의 트렌스젠더 입학과 관련된 일련의 사건 이후 페미니즘에 대한 나의 혼란이 시작되었다. 과거의 사건들은 페미니즘과 안티-페미니즘의 대립이었다면, 그 사건을 달랐다. 본인이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서로 싸웠다. 그래서 혼란스러웠다.

이것은 페미니즘이라는 것이 하나가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고, 대한민국에서는 처음 마주한 문제였기 때문에 발생한 논쟁이기도 하다. 어쨌든, 나는 트렌스젠더 수술까지 마친, 법적으로도 여성으로 인정받은 사람이 대체 왜 여대에 입학하면 안 되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다. 트렌스젠더의 여대 입학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의견이 궁금해서 <젠더는 없다> 따위의 책을 읽어보기도 했다. (그 책은 읽다보니까 너무 짜증이 나서 끝까지 읽지도 않았다.) 그게 페미니즘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나는 페미니즘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렇다면 저들과 무엇이 다른가, 내 생각은 어디서 나온걸까?

소수자를 차별하자는 의견에서 느껴지는 직접적인 불쾌함과 부정의함을 어떻게 페미니즘을 통해 설명할 수 있을지 헷갈렸다. 그러다 보니 나 역시도 나모르게 페미니즘에 대해 거리감을 느끼기 시작한 것 같다. 예전에는 페미니즘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나고 많은 사건들을 겪을수록 그 시야가 흐릿해지는 느낌이었다.

<페미니즘 앞에 선 그대에게>는 이런 나에게 정답을 제시해 주었다. 잠깐 잊고 있었던 관심을 다시 일깨워 주었다.

나는 책을 굉장히 아끼는 사람이다. 소장하는 책을 고르는데도 까다롭고, 내가 가진 책들에 웬만하면 필기도 잘 안한다. 강박적일 정도로 책을 접고 뭔가 묻히는 걸 싫어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익는 동안 연필을 꺼내지 않을 수 없었다. 책이 좋아서, 필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 밑줄을 긋고 별표를 치고 읽는 동안 떠오른 의문들을 책 구석에 적다. 읽는 중간중간 다른 페미니즘 책들을 꺼내 읽기도 하고, 인터넷으로 공부를 해가며 책을 읽었다.

그래서, 이 책을 읽는 데 오래 걸렸다.

페미니즘은 '여성도 인간이라는 급진적 사상'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페미니즘의 도착점은 여성만이 아니라, 젠더, 인종, 계층, 성적 지향, 장애, 국적, 종교와 상관없이 '모든' 사람이 인간이라는 급진적 사상이어야 한다.

<페미니즘 앞에 선 그대에게>, p67

그래. 페미니즘은 모든 사람이 인간이라는 급진적 사상이다. 여성의 임금 차별을 이야기하는 것만이 페미니즘이 아니다. 코로나 19 사태로 인해 뉴욕 한복판에서 흑인 남성에게 뺨을 맞는 동양인 여성의 이야기도, 완전히 수술까지 마쳐 여성이 된 트렌스젠더가 여대에 입학을 포기하게 된 것도 모두 페미니즘의 영역이다. 우리는 모두 어떤 부분에서는 소수자에 속해 있고, 어떤 부분에서는 강자에 속해있다.

나는 동양인이고 여성이지만, 동시에 비장애인이고 고학벌이며 이성애자다. 따라서 나는 여성으로서의 나, 동양인으로서의 내 권리를 포기하지 않기 위해 페미니즘과 함께 맞설 것이나, 비장애인이며 이성애자인 나 역시도 모른 척 하지 않을 것이다. 나 역시 누군가의 차별 위에 올라서 있을 수 있다는 걸 안다. 나뿐만 아니라 모두 그렇다. 이게 바로 페미니즘이 필요한 이유다.

페미니즘은 크게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기능을 한다. 첫째, '탈자연화'의 기능이다. 페미니즘은 그토록 오랫동안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여겨왔던 행위, 사유방식, 관계방식이 근원적으로 성차별적이며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탈자연화'를 통해 개선해나가야 한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어떤 현상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간주할 때부터 '왜'라는 물음표는 박탈된다.

~ 둘째, 페미니즘은 사적, 공적 영역에서 다양한 '변혁적 균열'을 낸다.

~ 셋째, 페미니즘은 긍정의 언어, 즉 대안적 세계를 제시한다.

<페미니즘 앞에 선 그대에게>, 여섯 번째 질문

페미니즘과 관련된 책들은 서점에만 가도 아주 많다. 당장 인터넷 서점에 '페미니즘'만 검색해봐도 우리가 아는, 혹은 모르는 책들이 줄을 서 있다. 거대한 도서 시장에서 페미니즘이라는 영역은 아주 큰 부분이다. 이때, <페미니즘 앞에 선 그대에게>는 이 시장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할 수 있는가?

카드뉴스 마지막 장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이 책은 '페미니즘을 잊은 사람들에게, 페미니즘이 궁금한 사람들에게, 그리고 이 세상이 어떻게 해야 더 나아질 수 있는지 궁금한 사람들에게' 모두 완벽한 선택이 될 수 있다.

페미니즘의 정의라는 가장 기본부터 시작해 페미니스트들이 잊고 있던 지점, 누군가를 공격하느라 외면하고 있던 지점을 짚어 준다. 따라서 나와 같이 '페미니즘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잘 모르겠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인사이트를 준다.

또한, 페미니즘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어려운 철학자나 개론 근거로 들지 않고, 매 장 끝마다 'Key Ideas Box'를 붙여 친절하게 요약까지 해준다. 강의로 따지면 '중간고사 전에 시험에 낼 부분을 다 알려주는 꿀강'이다. 내용은 진중하지만 문체 자체는 편안하기 때문에 '페미니즘을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적절하다. 페미니즘을 오해하며 애써 그것에 대한 언급을 피해온 사람들에게도 좋은 책일 수 있겠다.

그래, 제목 그대로다. 페미니즘 앞에 서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 책은 한번 페미니즘을 '제대로' 마주해 보라고 손을 내민다. 페미니즘이 기본적 소양으로 자리잡고 있는 이 21세기에, 이 정도도 모르고 살아갈 수는 없다. 우리 한번, 이 책의 손을 잡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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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수수께끼 - 개정판 마빈 해리스 문화인류학 3부작 1
마빈 해리스 지음, 박종렬 옮김 / 한길사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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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들에 대한 설명은 메시아에 대한 설명과, 메시아에 대한 설명은 대인에 대한 설명과, 대인은 성차별주의와, 성차별주의는 돼지숭배와, 돼지숭배는 돼지 혐오와, 돼지 혐오는 암소 숭배와 관계된다. 이 세상이 암소 숭배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생활양식의 여러 원인을 이해하기 위해 나는 암소숭배부터 연구해보려 한다. 따라서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이 독단적으로 해석하지 않기를 부탁드린다.

이 책의 각 장은 상호 독자적인 근거에 의존하고 있으면서도 서로 연결되는 특징이 있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 학문 분야의 전문가들이 내게 퍼붓고 싶은 공격에 대항할 어떤 방어수단도 갖지 못할 것이다. 나는 전문가를 존경하며 그들에게서 여러 견해를 듣고 싶다. 그러나 독자들이 여러 전문가의 견해를 동시에 받아들이려 한다면, 이는 도움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방해가 될 것이다.

<문화의 수수께끼>, p24-25

이 책은 번역된 지 35년이 지난 <문화의 수수께끼> 개정판이다. 표지부터 내부까지 깔끔하게 바뀌고 앞부분에 화보가 추가해 다시 태어났다. <문화의 수수께끼>, <식인문화의 수수께끼>, <음식문화의 수수께끼>로 이루어진 마빈 해리스의 문화인류학 3부작 가운데 1권이다.

<문화의 수수께끼>는 1장-거룩한 어머니 암소에서 출발해 돼지숭배와 돼지혐오, 원시 전쟁, 성차별에서부터 구세주, 메시아, 마녀사냥에 대한 이야기까지 흘러간다. 매 장마다 다른 주제를 가지고 있지만 결론적으로 모든 이야기들은 서로 통합되어 흘러간다는 생각이 든다. 심심할 때 가볍게 읽은 만한 책은 아니고, 문화인류학적 학술서에 가깝지만 그런 분야와 멀었던 사람이, 진지하게 문화인류학을 맛보고 싶을 때 읽을 법 하다.

그렇지만, 그냥 왜 어디는 암소를 숭배하고 어디는 돼지를 숭배하는지, 중세 시대의 마녀사냥은 어떤 맥락에서 이루어진건지 궁금할 때 읽어도 좋겠다. 궁금하지만 인터넷에 찾아봐도 얕은 설명 이상으로는 찾을 수 없었던 것들이 마치 보물처럼 이 책 안에 담겨있다.

그래, 이 책은 마치 원시시대부터 현재까지의 이리저리 뒤엉켜 있는 실타래들을 우리가 잘 볼 수 있게 살짝 풀고 정리해서 알려준다. 결론적으로 인류의 생활양식들을 잘 다듬어서 내놓은 셈이다. 그것도 아무거나 내놓은 게 아니라, 정말 '수수께끼' 같은, 2020년에 이 책을 읽으면서도 대체 왜 이런 문화양식이 만들어지고 유지된 걸까?- 싶은 주제들을 골라 내놓았다. 물 흐르듯이 이 주제들을 요리하는 마빈 해리스의 글솜씨에 빠져들면서, 문화 인류학에 이런 재미가 있구나, 도 함께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책이 너무 예쁘다!

 


돼지 숭배자들은 기르고 있는 돼지를 자기 식구로 생각하고, 돼지들과 잠자리를 같이 하고, 돼지들과 말을 주고받고, 돼지들을 애무하고 쓰다듬어주며, 끈으로 매어 들로 데리고 다니고, 이름을 붙여 부르고, 돼지들이 아프거나 다치면 마음 아파하고, 가족의 식탁에서 음식을 추려서 먹인다. 그러나 힌두교도들의 암소 숭배와는 다르게 돼지를 의무적인 희생 제물로 바치기도 하고, 특별한 명절에는 잡아먹기도 한다. 제사용이나 성스러운 축제용으로 돼지를 잡아 죽이기 때문에 돼지 숭배는 힌두교 농부들과 그들이 숭배하는 암소들 간에 존재하는 유대 관계보다 더 폭넓은 인간과 동물 간의 유대관계를 이해할 수 있는 전망을 제공해준다. 돼지 숭배의 클라이막스는 돼지의 살과 그 주인인 사람의 살을 결합시키고 돼지의 혼과 조상들의 혼을 결합시키는 때다.

<문화의 수수께끼> p80-81

나에게 가장 가볍고 재미있었던 것, 진지하면서 재미있었던 것. 두 가지는 음식 문화와 마녀에 대한 이야기였다.

<문화의 수수께끼> 첫 장은 '거룩한 어머니 암소', 두번째 장은 '돼지숭배자와 돼지혐오자'이다. 말그대로, 힌두교도의 암소 숭배와 그에 대비되는 돼지 숭배, 돼지 혐오에 대한 이야기다. 더 짧게 줄이면 '돼지와 소, 고기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다. 힌두교라서 소를 안먹는 인도 사람들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그러나, 왜? 왜 그들은 소를 먹지 않는 것일까? 종교적 이유에서라면, 그 종교는 어떤 이유로 소를 먹는 것을 금지했을까?

지금까지는 굉장히 추상적으로 그들의 문화를 이해하는 척 해왔지만 이 책을 읽고 나니 내가 교과서적 상대문화주의에 물들어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진짜로 그들이 소를 먹지 않는 이유는, 환경과 경제적 이유에 있었다. 인도의 경제 성장을 저지하고 청결성에 문제가 있어 보이게 하는 암소 숭배는 서구적 시선으로 봤을 때는 바뀌어야 할 구시대적이고 종교적인 문화이다. 그러나, 그 암소들은 전 생애에 걸쳐 인도의 중하층민들에게 지대한 도움을 주며 농작물 찌꺼기와 장터의 쓰레기들을 먹어치운다. 또한 큰 에너지 소비를 요구하는 쇠고기 도축 산업의 억제를 통해 인도의 특수한 환경에 인간이 적응하고 살아갈 수 있도록 했다. 일종의 생존 수단으로 시작된 종교적 명제였으나, 지금은 인도 사람들의 생활, 생산 구조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2장에서 다루는 돼지에 대한 이야기도 유사한 맥락이다. 소나 양보다 훨씬 시원한 사육 환경이 필요한 돼지를 기르고 도축하기에는 환경적으로 적합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종교적으로 금지하여 고기에 대한 욕구를 막은 것이다.

 


기원후 1000년에는 그렇게 날아다니는 존재가 있다고 믿는 것을 금지했다. 1480년 이후부터는 날아다니는 존재가 없다고 믿는 것을 금지했다. 기원후 1000년경 교회는 날아다니는 마녀라는 말은 악마가 조작해낸 환영에 불과하다고 공식 발표했다. 500년 후 교회는 날아다니는 마녀는 환영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악마와 손잡은 사람들이라고 공식 표명했다.

<문화의 수수께끼> p281

9장, 10장, 11장은 '마녀'에 대해 이야기한다. 마녀-라는 것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마녀 사냥이라는 제도가 어떤 식으로 누구를 위해 활용되었는지, 그리고 그것이 지금까지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어린 시절, 뾰족한 모자를 쓰고 빗자루를 타며 하늘을 날아다니는 매부리코의 마녀에 대한 인상을 기억한다. 21세기에 태어난 한국인까지 이런 기억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면, 중세의 마녀 사냥이 인간의 역사에 있어서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으며 지금도 미치고 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인간의 행동들은 긴 역사의 흐름에서 돌아보면 참 자기모순적이며 웃기기도 하다. 교회도 그 예외는 아니다. 마녀가 있다고 믿는 것을 금지했다가, 마녀가 없다고 믿는 것을 금지하고 여자들에게 누명을 씌워 고문하고 화형시켰다가.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걸까? 마빈 해리스는 차근차근 설명해나간다. 중세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겠지만 인간의 지성에 대한 의문과 동시에 중세라는 이성의 부재기에 힘과 권력이 어떤 식으로 사용되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이 책은 원시시대부터 중세시대, 현재를 이야기한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았던 문화의 수수께끼를 하나하나 풀어나가며, 이런 문화를 맥락적으로 이해하고 궁극적으로는 문화를 스스로 창조해나가는 주체적 해독자가 되기를 바라는 작가의 마음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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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으로 박완서를 읽다
김민철 지음 / 한길사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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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 꽃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

김춘수 시인의 꽃-처럼, 어떤 꽃의 이름을 알고 불러주었을 때 그것은 비로소 의미를 가지게 된다. 박완서 작가도, 이 책을 쓴 김민철 작가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박완서 작가는 소설을 쓰며 '이름모를 꽃'이 아닌 칸나, 며느리밥풀, 노란 장미를 하나하나 불러주었고 그녀가 이 세상을 떠난지 9년이 된 지금, 그녀의 문학 속 꽃들의 이름을 다시 한번 불러주는 책이 등장했다.

사람들마다 자기의 개인적 경험, 혹은 배경지식에 따라 서로 다른 모양과 색깔의 창을 가지고 어떤 문학을 들여다보고 있다.

김민철 작가는 박완서의 소설을 꽃이 가득한 창을 통해 들여다보고 있던 것 같다. 꽃과 문학에 대한 관심이 이렇게 멋진 결과물로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박완서의 문학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꽃과 식물에 대한 작가의 애정까지 느껴졌다. 단순히 박완서의 소설 속에서 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에 그치지 않고, 그렇다면 우리 주변의 어디에서 이 꽃을 찾아볼 수 있는지, 어떻게 구분하는지도 자세히 설명해준다. 꼭 들꽃박사인 삼촌이 내 옆에서 설명해주고 있는 기분이다. 그런 의미에서, 제목이 이렇게 잘 어울리는 책도 또 없을 것이다.

이 책의 가장 좋은 점은 사진이 함께 있다는 점이다. 김민철 작가가 직접 찍은 사진, 그리고 이 책속에 직접 인용된 박완서 작가의 소설 대목을 읽다보면 나 역시도 그 꽃을 스쳐지나갔던 기억을 떠올리게 된다. <아주 오래된 농담>에 등장한 능소화를 설명하는 부분에서는 나 역시 매일 지나다니는 버스 정류장 옆에 피어있는 능소화를 떠올리고,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속 목련의 생명력을 보며 봄이 되면 가장 먼저 피고 떨어지는 아파트 화단의 목련을 생각한다.

박완서의 소설 <저문 날의 삽화4>에서 주인공이 젊은 시절을 회상하는 대목을 보면 "그는 미루나무처럼 키 크고 씩씩했고 나는 어여쁘고 팽팽했더랬다"라는 문장이 있다. 작품에는 미루나무라고 나와 있지만 "키 크고"라는 표현으로 보아 양버들이 아닌가 싶다.

<꽃으로 박완서를 읽다> p140

이 책이 꽃으로 박완서를 '어떻게' 읽고 있는지 보여주는 대목을 하나 가져왔다. 작가는 이런 식으로 박완서의 소설 속 나무와 꽃들에 대한 나름의 해석과 개인적 기억을 덧붙여 가며 글을 전개한다. 그 과정이 퍽 흥미로워서, 이 책을 마치 서랍에 넣어놓은 사탕처럼 시간이 날 때마다 한 챕터씩 읽게 된다. 소설이나 철학 에세이처럼 엄청난 몰입과 생각을 요하는 책은 아니지만, 읽을 때마다 기분이 좋아진다. 꽃이 피는 봄날을 생각하게 만드는 책이다.

매일 지나다니며 봐온 익숙한 꽃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 그리고 앞으로 그 꽃을 볼 때마다 무언가를 떠오르게 하는것.

그것이 문학이 가진 특별한 힘이 아닐까?

박완서 소설을 다시 펼쳐보게 싶게 만들 뿐만 아니라, 다니는 길목에 핀 들꽃들을 들여다보고 싶게 만드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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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의 섬 : 나의 투쟁 4
칼 오베 크나우스고르 지음, 손화수 옮김 / 한길사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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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어떤 책인지 알기 위해서, 우선 아래 대목을 먼저 읽어봤으면 좋겠다.

나는 캄캄한 밤에 차를 타고 집에 도착할 때의 그 특별한 느낌도 좋아한다. 마당에 깔려 있는 자갈돌 위를 걷는 발소리, 차문이 닫히는 날카로운 소리, 열쇠가 서로 부딪혀 만들어내는 달그락거리는 소리, 대문 앞 랜턴빛 속에서 눈에 익숙한 것들을 발견했을 때의 그 느낌. 눈동자처럼 보이는 운동화의 신발 끈 구멍과 이마처럼 보이는 신발의 앞부분, 벽 가장자리를 따라 나직하게 붙어 있는 하얀 전기 콘센트는 차가운 눈빛을 연상시켰고, 외면하듯 모퉁이를 향해 돌아서 있는 옷걸이는 응석 부리는 어린아이를 떠오르게 한다.

<유년의 섬>, p219

세상의 전부가 특별하면서도 지겨웠던 어린 날. 캄캄한 밤에 차를 타고 이동하는 것마저 특별했고 모든 감각이 활짝 열려있었던 그때. <유년의 섬>은 그런 유년기의 기억들을 차례차례 풀어놓는다. 세상의 주목을 받을만한 특별한 사건 같은 건 없다. 엄청난 악인도 선인도 없다. 마법을 부리거나 엄청난 능력을 가진 히어로도 없고, 지혜로운 인물이 등장해 어떠한 교훈을 전해주지도 않는다. 글이 엄청나게 유려하고 아름답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그냥,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린 시절부터 중학생이 되어 유년기의 섬을 떠나기까지, 평범한 어린아이의 이야기다. 선착장에서, 노르웨이의 숲에서 빈 병을 찾고 불을 피우며 놀고, 어느날 좋아하는 여자아이가 생기고, 아버지에게 혼나는 것을 세상에서 가장 두려워하는 아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좋은 이유는, 노르웨이의 칼 오베에서 대한민국의 내가 보이기 때문이다. 그가 초등학교 입학식의 설레임을 이야기할 때는 나 역시 부모님의 손을 잡고 걸었던 8살의 나를 떠올렸다. 그가 어떤 여자아이를 좋아하고 일부러 그 주변을 서성거릴 때, 나 역시 초등학교 때 좋아하던 남자아이를 떠올렸다. 노르웨이라는 낯선 나라에서 펼쳐지는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유년기라는 것은, 그 시기에 생각하는 것은 지구의 위도와 경도와는 관계가 없었다.

유년기는 이렇게 압축된 순간들이 영원히 계속되는 시기다. 어떤 순간은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나를 높이 들어올리기도 했다. 제설차가 갓길에 쌓아둔 눈 더미 위에서 토네와 함께 미끄러져 내리기를 반복했던 그날 저녁에도 나는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주체할 수 없는 행복감을 이기지 못해 나는 집에 돌아오는 길에 두 팔을 활짝 벌리고 눈길에 드러누워 한참이나 축축하고 고요한 어둠 속에 몸을 맡겼다.

<유년의 섬>, p386

나에게도 이런 기억이 있다. 9살 즈음의 어느 겨울날, 함박눈이 정말 펑펑와서 9살짜리 어린아이의 무릎 넘게 쌓인 날이 있었다. 주말의 아침 일찍 동네의 중학교 옆골목에 가서 큰 눈사람을 만들고 목도리를 둘러주었다. 그 이후로 눈이 그만큼 온적도 없어서, 그만큼 큰 눈사람을 만들어 본 적도 없어 영화 인사이드아웃의 핵심 기억마냥 지금까지 자리잡아 있다. 앨범에 남겨져 있는 눈사람과 내 사진을 통해서. 보통의 사람들이 사진과 부모의 말을 통해 그 시기의 희미한 기억을 망각의 우물에서 끌어올린다면, 칼 오베는 글을 통해 유년기의 자신을 끌어올린다.

그리고 그 글들에는 정말 반짝반짝 빛나는 순간도 있고, 눈살을 찌푸리고 읽게 될 만큼 괴롭고 싫은 감정도 있다. 그 감정 역시 유년기의 칼 오베가 겪은 모든 것이기에 받아들이려고 노력하게 된다.

그날처럼 어머니가 불쌍해 보인 적은 없었다. 우리는 신년을 맞으며 환호하는 이웃집 사람들을 뒤로하고 따스한 거실로 들어왔다. 어머니가 최선을 다했는데도 결과가 만족스럽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에 더 마음이 아팠다.

<유년의 섬>, p489

일기장에도, 아무도 보지 않을 게 분명한 비밀 계정에도 쓰지 못할 것 같은 이야기들이 있다. 스스로도 너무 부끄러운 감정이라서, 후회되는 과거라서 가끔 떠올리기도 어려운 이야기들. 칼 오베는 <유년의 섬>에서 그런 감정들까지 전부 솔직하게 이야기한다. 유년기의 자신이 어떤 순간에 무엇을 느꼈는지. 그 부분에서 나는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애써 감추고 있었던 나의 추한 부분들을 너무나도 솔직하게 표현하는 칼 오베 덕분이다.

지금 손에 쥔 것들은 잘 모르고 있다는 얘기가 있다. 유년기가 꼭 그렇다.

지나가는 사람중 아무나 붙잡고 유년기의 기억을 말해보라고 하면, 그 기억을 말하는 사람의 표정은 분명히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을 것이다. 괴로운 순간도 분명히 있었겠지만 어른이 다 된 지금 생각하게 보면 천진난만하고 모든 것이 특별했던 그때.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은 후에 떠오르는 장면들은 초등학교 옆 담장에 노란 개나리꽃이 담벼락이 무너질 정도로 풍성하게 피던 봄과 일부러 사람이 별로 다니지 않는 아파트 뒷길을 몇바퀴고 돌아다녔던 친구와 나, 좋아하던 남자애에게 이름을 밝히지 않은 편지를 쓰던 어린시절의 나였다.

시대와 나라와 언어, 그 모든 것을 뛰어넘고 그때의 나를 다시 떠올리게 해주는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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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생일대의 거래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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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부모가 되어 본 적이 없어서, 솔직히 말하면 잘은 모르겠다.

앞으로 내가 자식을 낳을지도, 인생에서 그만큼 사랑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건지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내가 이 세상에 존재했다는 사실 자체를 포기하고 살리고 싶을 만큼 가치있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다.

모든 부모는 가끔 집 앞에 차를 세워놓고 5분쯤 그 안에 가만히 앉아 있을 거다. 그저 숨을 쉬고, 온갖 책임이 기다리고 있는 집 안으로 다시 들어갈 용기를 그러모으면서. 스멀스멀 고개를 드는, 좋은 부모가 되어야 한다는 숨막히는 부담감을 달래며. 모든 부모는 가끔 열쇠를 들고 열쇠 구멍에 넣지 않은 채 계단에 15초쯤 서 있을 거다.

<일생일대의 거래>, p34

이 책의 도입부는 요즘 읽은 책 중에 가장 충격적이었다. 첫 페이지를 읽고 이런 표지를 한 책이면서 내용은 스릴러인건가? 생각했다. (물론 스릴러가 아니다!) 한가로운 토요일 아침, 일어나자마자 이 책을 펼친 이후 마지막 페이지를 넘길 때까지 단 한번도 쉬지 않았다. 그리 두껍지 않은 책이기 때문에 책을 읽는 시간 자체는 길지 않았지만 그 후의 여운이 오래오래 남았다.

책을 다 읽고 엄마와 함께 아침을 먹으며 부모에 대해 생각했다. 부모라는 것이 무엇이기에, 엄마한테 나는 대체 무슨 존재길래 <일생일대의 거래> 속 주인공과 같은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자식에게 부끄럽지 않은 부모가 되기 위해 이 세상에서 나의 존재 자체가 지워진대도 받아들일 수 있는, 그 근원은 대체 무엇일까?

죽음에 대해 생각해본다. 죽는 것 자체는 무섭지 않다고 자주 말한다. 대신, 잊혀지기가 너무 무섭다고 말한다. 그래서 나에게 소중한 사람들이 나를 소중히 여겨줬으면 하고 생각한다.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모두가 그렇지 않을까. 그래서 소중한 누군가를 사랑하고, 그 사람과의 사이에서 누구보다 소중한 사람을 안게 되고, 그 사람들이 내가 죽어서도 나를 그리워해주길 바라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죽음이라는 것은 다름아닌, 이 세상의 누구도 나와 함께한 순간을 기억하지 못할때 맞이하게 된다고 생각한다. 내가 세상에 어떠한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이 있어서 인터넷에 내 얼굴과 목소리와 표정을 기록할 수 있기를. 그래서 나의 죽음 후에도 나로 인해서 세상이 조금 달라졌구나, 생각하는 사람이 있기를 바라게 된다.

네가 열네 살이었을 때 떠난 마지막 페리 여행에서는 내가 헬싱외르의 지하에 있는 바에서 네게 포커 치는 법을 가리쳤고, 돈을 잃고 있는 사람들을 분간하는 방법을 알려주었지. 독한 증류수 슈납스를 앞에 두고 힘없이 앉아 있는 사람이라고. 게임을 이해하지 못하는 그 사람들을 이용하는 법도 가르쳐주었지. 너는 6백 크로나를 땄다. 나는 계속하고 싶었지만 너는 애원하는 눈빛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6백 크로나면 충분해요, 아빠."

너는 페리를 타러 가는 길에 보석 가게에 들어가서 그 돈으로 귀걸이를 샀다. 나는 1년이 지난 다음에서야 네가 마음을 얻고 싶은 여자아이에게 주려고 귀걸이를 산 게 아니라는 걸 알아차렸다. 네 엄마에게 주려고 산거였지.

너는 두 번 다시 포커를 치지 않았다.

나는 자식 농사에 실패했다. 너를 강하게 키우려고 했는데. 너는 다정한 아이로 자랐으니.

그런 의미에서 이 세상에 살아온 흔적 자체와 누군가의 목숨을 맞바꾸는 이 '일생일대의 거래'는 말그대로 일생일대의 거래가 아닐 수가 없다. 더군다나 이 주인공은 사회에서 꽤나 많은 것을 이뤄낸 사람이다. 가족에게 사랑을 받고 사랑을 주는 데에는 실패했지만. 그런 사람이 자신이 이 세상에 남긴 발자취를 전부 지워가며 잘 알지도 못하는 어린 여자아이를 위해 희생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했는가? 그건... 자신이 아들에게 해주지 못한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잘 성장한 다정한 아들에 대한 부채감 때문일 것이다.

그 아들이 자신에 대해 전부 잊어버린다는 것. 이 세상에서 내가 그의 아버지였음을 포기하는 것은 그 어떤 재물과 명예보다 큰 포기가 아니였을까. 그 심정에 대해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소설 속 회색 스웨터를 입은 여자가 아들을 보여준 게 아닐까.

한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또는 한 생명을 희생하기 위해서 무엇을 포기하는 건지. 그것이 얼마나 큰 포기인지.

이 글을 마무리 지으며, 부모님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한다.

그들이 나를 사랑하는 만큼, 아니 그 반만큼이라도 그들이 사랑받는다고 느끼게 해주어야겠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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