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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의 섬 : 나의 투쟁 4
칼 오베 크나우스고르 지음, 손화수 옮김 / 한길사 / 2019년 10월
평점 :
이 책이 어떤 책인지 알기 위해서, 우선 아래 대목을 먼저 읽어봤으면 좋겠다.
나는 캄캄한 밤에 차를 타고 집에 도착할 때의 그 특별한 느낌도 좋아한다. 마당에 깔려 있는 자갈돌 위를 걷는 발소리, 차문이 닫히는 날카로운 소리, 열쇠가 서로 부딪혀 만들어내는 달그락거리는 소리, 대문 앞 랜턴빛 속에서 눈에 익숙한 것들을 발견했을 때의 그 느낌. 눈동자처럼 보이는 운동화의 신발 끈 구멍과 이마처럼 보이는 신발의 앞부분, 벽 가장자리를 따라 나직하게 붙어 있는 하얀 전기 콘센트는 차가운 눈빛을 연상시켰고, 외면하듯 모퉁이를 향해 돌아서 있는 옷걸이는 응석 부리는 어린아이를 떠오르게 한다.
세상의 전부가 특별하면서도 지겨웠던 어린 날. 캄캄한 밤에 차를 타고 이동하는 것마저 특별했고 모든 감각이 활짝 열려있었던 그때. <유년의 섬>은 그런 유년기의 기억들을 차례차례 풀어놓는다. 세상의 주목을 받을만한 특별한 사건 같은 건 없다. 엄청난 악인도 선인도 없다. 마법을 부리거나 엄청난 능력을 가진 히어로도 없고, 지혜로운 인물이 등장해 어떠한 교훈을 전해주지도 않는다. 글이 엄청나게 유려하고 아름답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그냥,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린 시절부터 중학생이 되어 유년기의 섬을 떠나기까지, 평범한 어린아이의 이야기다. 선착장에서, 노르웨이의 숲에서 빈 병을 찾고 불을 피우며 놀고, 어느날 좋아하는 여자아이가 생기고, 아버지에게 혼나는 것을 세상에서 가장 두려워하는 아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좋은 이유는, 노르웨이의 칼 오베에서 대한민국의 내가 보이기 때문이다. 그가 초등학교 입학식의 설레임을 이야기할 때는 나 역시 부모님의 손을 잡고 걸었던 8살의 나를 떠올렸다. 그가 어떤 여자아이를 좋아하고 일부러 그 주변을 서성거릴 때, 나 역시 초등학교 때 좋아하던 남자아이를 떠올렸다. 노르웨이라는 낯선 나라에서 펼쳐지는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유년기라는 것은, 그 시기에 생각하는 것은 지구의 위도와 경도와는 관계가 없었다.
유년기는 이렇게 압축된 순간들이 영원히 계속되는 시기다. 어떤 순간은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나를 높이 들어올리기도 했다. 제설차가 갓길에 쌓아둔 눈 더미 위에서 토네와 함께 미끄러져 내리기를 반복했던 그날 저녁에도 나는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주체할 수 없는 행복감을 이기지 못해 나는 집에 돌아오는 길에 두 팔을 활짝 벌리고 눈길에 드러누워 한참이나 축축하고 고요한 어둠 속에 몸을 맡겼다.
나에게도 이런 기억이 있다. 9살 즈음의 어느 겨울날, 함박눈이 정말 펑펑와서 9살짜리 어린아이의 무릎 넘게 쌓인 날이 있었다. 주말의 아침 일찍 동네의 중학교 옆골목에 가서 큰 눈사람을 만들고 목도리를 둘러주었다. 그 이후로 눈이 그만큼 온적도 없어서, 그만큼 큰 눈사람을 만들어 본 적도 없어 영화 인사이드아웃의 핵심 기억마냥 지금까지 자리잡아 있다. 앨범에 남겨져 있는 눈사람과 내 사진을 통해서. 보통의 사람들이 사진과 부모의 말을 통해 그 시기의 희미한 기억을 망각의 우물에서 끌어올린다면, 칼 오베는 글을 통해 유년기의 자신을 끌어올린다.
그리고 그 글들에는 정말 반짝반짝 빛나는 순간도 있고, 눈살을 찌푸리고 읽게 될 만큼 괴롭고 싫은 감정도 있다. 그 감정 역시 유년기의 칼 오베가 겪은 모든 것이기에 받아들이려고 노력하게 된다.
그날처럼 어머니가 불쌍해 보인 적은 없었다. 우리는 신년을 맞으며 환호하는 이웃집 사람들을 뒤로하고 따스한 거실로 들어왔다. 어머니가 최선을 다했는데도 결과가 만족스럽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에 더 마음이 아팠다.
일기장에도, 아무도 보지 않을 게 분명한 비밀 계정에도 쓰지 못할 것 같은 이야기들이 있다. 스스로도 너무 부끄러운 감정이라서, 후회되는 과거라서 가끔 떠올리기도 어려운 이야기들. 칼 오베는 <유년의 섬>에서 그런 감정들까지 전부 솔직하게 이야기한다. 유년기의 자신이 어떤 순간에 무엇을 느꼈는지. 그 부분에서 나는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애써 감추고 있었던 나의 추한 부분들을 너무나도 솔직하게 표현하는 칼 오베 덕분이다.
지금 손에 쥔 것들은 잘 모르고 있다는 얘기가 있다. 유년기가 꼭 그렇다.
지나가는 사람중 아무나 붙잡고 유년기의 기억을 말해보라고 하면, 그 기억을 말하는 사람의 표정은 분명히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을 것이다. 괴로운 순간도 분명히 있었겠지만 어른이 다 된 지금 생각하게 보면 천진난만하고 모든 것이 특별했던 그때.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은 후에 떠오르는 장면들은 초등학교 옆 담장에 노란 개나리꽃이 담벼락이 무너질 정도로 풍성하게 피던 봄과 일부러 사람이 별로 다니지 않는 아파트 뒷길을 몇바퀴고 돌아다녔던 친구와 나, 좋아하던 남자애에게 이름을 밝히지 않은 편지를 쓰던 어린시절의 나였다.
시대와 나라와 언어, 그 모든 것을 뛰어넘고 그때의 나를 다시 떠올리게 해주는 소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