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4번지 파란 무덤
조선희 지음 / 네오픽션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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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멋대로] 의미를 담은 문장을 통해 들여다 본 판타지, 『404번지 파란 무덤』


어떤 일 때문에 힘들어 울고 있을 때, 배우처럼 끝내주게 잘 생긴 남자가 나타난다.

진심으로 위로를 해 주고, 내 고민거리를 남김없이 가져간다.

만약 이런 상황이라면, 여자들 100이면 100 안 넘어갈 수 있을까?

환상과 부질없는 희망만 남겨놓고 가는 허깨비라...





1.

 "내가 뭔지는 내 이름으로 알 수 있지. 공윤후. 어디에도 없는 것인 '공', 있지만 없는 날인 '윤', 얼마나 이어질지 알 수 없는 시간인 '후'. 나랑 같이 갈래? 단, 모든 위로는 잠시 다녀가지만 그걸 평생 유효하게 쓰는 건 어디까지나 김씨에게 달렸다는 것을 명심해." (25쪽)


 그러니까 주인공의 이름대로, 작품을 다 읽었는데도 끝까지 주인공의 정체를 잘 모르겠다.

 '모든 위로는 잠시 다녀간다'라. 위로의 성질에 대해 표현한 문장 중에서 이만한게 또 있을까 싶다. 비록 잠시뿐이었지만 그동안 내가 받아온 위로들이 허무하고 허탈하기만 한, 아무것도 아닌 것이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위로는 잠깐 머물다 가지만 대신에 매번 다른 것을 남겨놓고 가는 게 아닐까. 

 

 

 

2. 

  '어린 시절 병구도 한때 마술에 열광했다. 그리고 어른이 된 지금은 마술에서 점 하나를 뺀 미술에 혹해 있었다. 마술과 미술은 점 하나 차이였다. 노랫말의 님과 남처럼. 남이었던 그녀가 님으로 둔갑했으니 말이다.'  (54쪽)

 

 남을 님으로바꾸는 것은 정말 점 하나 차이에 불과할까. 무수히 많은 점을 찍고 그 점들을 이어 선으로 만들어도 모자랄 판에.

 


 

3.

 '이제 나는 안다. 삶은 무의식적 안정을 제공하던 자궁에서 소란스러운 바깥으로, 죽음은 간신히 적응한 일상에서 다시금 가물거리는 기억을 안고 떠도는 그림자의 세계로 우리를 돌려보내는 것임을. 그 경계를 넘나드는 것은 단지 허깨비처럼 바스대는 청각뿐임을 나는 머잖아 알게 될 것이다.' (217쪽)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것은 오직 청각뿐이라고? 하긴 조용하고 안락한 자궁에서 막 바깥으로 나왔을 때는 세상이 그렇게 시끄럽고 정신사나울 수가 없더니, 살다보니 시끄러운 소리가 점점 작아져간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맞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이제 일상 속 시끄러움에 적응하여 무의식적 안정을 누리며 살아볼만 해졌는데 다시 소리를 죽이고 조용하던 그때로 돌아가란다.  


 


4.

 "그 구절이 오래된 사물이나 오래된 이름, 특히 우리의 이름으로 행해지면 복잡해지지. 오래된 물건들이 왜 가끔 문제를 일으키는지 알아? 갈 곳 없는 마음이 남아 있기 때문이야. 오래된 사물과 오래된 이름에 자신의 마음을 던져놓고 스스로 홀리는 거지. 우리와 우리의 이름이 거기에 마술을 걸 수 있도록 말이야." (315쪽)


 갈 곳 없는 마음은 언제나 슬프다. 허공을 떠도는 마음만큼 외로운 게 또 있을까? 결코 가볍지 않지만 쉽게 어딘가에 내려앉지 못한다. 가닿아 앉고 싶은 마음은 크지만 앉을 자리를 찾지 못하는 것 혹은 이미 주인이 있는 자리를 바라는 것 때문이다.

 오래된 물건들이 문제를 일으키는 건 일종의 반항심인 모양이다. 갈 곳 없는 슬픈 마음에 스스로 홀려, 투정이라도 부리면 찾아질까 싶어서.




5.

 '우리와 사람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시간을 헤아리며 살지만 결코 다른 시간을 사는 게 아니라 같은 시간을 함께 산다. 우리라고 시간을 뒤집어 과거로 되돌아가거나 미래로 앞서 나갈 수 없다. 우리도 사람처럼 오직 주어진 현재의 시간을 견뎌내야 한다. 다만 사람은 가고 우리는 남으니 그것이 늘 아쉬울 뿐이다. '(377쪽)


 도깨비라고 하니 어렸을 때에는 자주 들었던 말인데, 크면서 들을 일이 없어진 것 같다. 그래서 이렇게 생소하게 느껴지는 걸지도. 같은 시간을 함께 살지만 훨씬 긴 세월을 살아야 하는 것이 도깨비의 숙명이기에, 사람의 마음이 도깨비에 투영되었을 때  감정은 더욱 극도화되는 것 같다.   


 내가 살아가는 것은 오직 현재뿐이다. 과거나 미래는 어떻게 보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과거는 이미 지나버렸기에 끝이 났고, 미래는 올지 안올지,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올지 그 어떤 것도 예측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냥 지금 내 앞에, 옆에, 뒤에, 위에, 아래에 주어진 현재를 잘 견뎌내고 살아가면 그것이 미래를 떠올리게 하고, 또는 내가 아는 그 '과거'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판타지는 자주 읽지 않는다. '현실감이 떨어져서'라고나 할까. 그래서 최대한 현실하고의 연결고리를 찾으며 읽기는 한다. 물론 반지의 제왕이나 해리포터같은 소설이면 또 모른다. 그 작품들은 아예 또다른 세계 자체를 구축해놓고 독자로 하여금 그 세계를 현실로 느끼게끔 하니까.


 읽으면서 내게도 이 작품 속 주인공인 공윤후가 한번 나타나주었으면 싶었다. 아무튼 공윤후는 내 앞에 나타나지 않으니까, 그런 꿈같은 여러 일들은 일어나지 않겠지. 나타나지 않는 판타지에 기대지 말고 그냥 현재나 잘 견뎌야 겠다(견뎌낸다는 어감이 마음에 안든다만). 이 작품은 한 단계 더 나아간 생각을 하게 만들지 못한다는 점에서 아쉬웠다. 읽고나서, 그냥 그뿐이었다. 책 읽은지 일주일도 넘어서 기꺼이 리뷰를 끝마치고, 머릿속에는 공윤후대신 며칠 전 종영한 드라마 <주군의 태양>에서 주군 소지섭만 떠오른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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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자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 34
선자은 지음 / 자음과모음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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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문을 외우자 돌이킬 수 없는 계약이 시작되었다!


 계약자에게 제시할 내용은 처음부터 이 녀석으로 정해져 있었다.


 이 애를 없애 주세요!







  아주 자극적인 띠지 카피 문구가 눈에 띤다. 나름 청소년문학인데 대놓고 없애 달라니. 당혹스럽기도 했다. 뭐 '없애다'라는 표현이 꼭 죽인다는 뜻만 있는 것은 아니니 넘어가기로 했다. 만약 내가 청소년이었다면 딱 좋아할만한 스타일의 소설 장르였다.



 이 작품은 둘도 없는 베스트 프렌드인 소희와 알음이 귀신에게 소원을 빌기 위해 폐가에 들어가는 것에서 시작된다. 짝사랑하는 남자와 잘되길 바라는 마음에  폐가에 들어가 귀신과 계약을 맺을 생각하는 소희를 알음은 어리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어이없고 어려운 부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알음은 소희의 부탁을 들어준다. 소희는 소중한 친구이기 때문에 '그깟 의식. 같이 서 있기만 하는 건데 내가 못 도와줄까.' 라고 생각하는 알음음 참 속이 넓은 아이였다.



 이야기는 소희와 알음이 친구 관계라는 팽팽한 줄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하게끔 만든다. 실은 모두 알음을 둘러싼 세계가 그 줄을 잡아 당기고 있는 것인데, 이를테면 알음을 둘러싼 그 세계는 다음과 같은 인물들로 이뤄져 있다. 다른 사람에게 관대하고 친절하다 못해 오지랖이 넓어 가족에게는 자연스레 이기적인 사람이 되어버린 아빠, 너무 착하기만 해서 아빠의 잘못을 매번 용서하고 받아주며 아빠의 결정을 따르는 엄마, 이기적인 아빠가 데려온 어린 남자아이, 소희의 짝사랑 상대이자 알음이 갖고 싶어하는 신율, 알음이 동경하는 같은 반 일진 나비.



 소희와의 폐가 의식 이후 알음에게는 밤마다 끈적하고 징그러운, 때로는 거미같고 때로는 데이브릭 피규어같고, 때로는 사람의 형상을 한 계약자가 나타난다. 알음은 계약자때문에 괴로워하지만 조건없이 소원을 들어준다는 계약자의 조언을 받아들여 행동을 한다. 사실 알음이 원했던 것은 단 하나, 아빠가 데려온 어린 남자 아이를 없애는 데에 있었다. 같은 집에 살게 된 것이 영 못마땅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린 남자 아이만을 향했던 알음의 원망과 나쁜 마음가짐은 의식하지 못한 새에 많은 사람에게까지 흘러나갔다. 늘 마음이 여유롭고 사람들의 잘못에 너그러웠던, 초등학생 때에는 반에서 착한 아이를 뽑는 투표에서 1등을 하기도 했던 홍알음은 주위의 많은 사람들에게 가시를 세우기 시작했다. 단짝인 소희의 모든 점이 아니꼽게 보이고, 할머니와 아빠에게도 상처를 주는 날카로운 말만 골라서 한다. 어느 순간부터 착했던 알음은 아주 잔인하고 섬뜩하고 무서운 아이로 변하기 시작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충동적으로 못된 생각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이내 사라지고 그 생각에 죄책감을 갖게 되는 것이 보통이다. 알음의 변화가 무섭고도 걱정되었던 것은, 알음에게서 일말의 죄책감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알음은 점점 뻔뻔해져 가는 것 같기도 했다. 


 


   이 작품의 인물 구도가 참 재미있었다고 생각했었는데, 저마다 엉뚱해 보이는 것들이 모두 맞물린다는 점 때문이었다. 복잡한 가정 문제와 단짝 친구와의 권태기 문제, 사랑과 우정 사이의 삼각 관계, 왕따 문제, 새로운 것에 대한 동경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것들은 알음의 안에서 미친듯 소용돌이 쳤다. 좋지 않은 욕망은 내면에서 끊임없이 커져만 갔다.



 꼬여만 가는 모든 일의 원흉, 계약자가 알음에게 한 조언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었다. 

 - 보려는 대로 보이는 것이다

 - 가지고 싶을 것을 가져라

 - 거짓말은 나쁘지 않다

 - 내 것이 될 수 없다면 남의 것도 될 수 없다

 - 사라진 것을 찾지 마라

 - 혼자가 되어야 원하는 것을 얻는다

 


 뭐 같이 어리석음 대회라도 나가자는 것일까. 어른인 나는 저 말들을 모두 반대로 행할 때 삶이 훨씬 수월하고 편안하다는 것을 아는데, 알음이는 그걸 몰랐을까. 나도 저 나이대에는 정말 그랬을까. 


 알음이는 단지 아직 어렸고, 인간 관계에 있어 배우지 못한 것들, 겪지 못한 것들이 많았을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생각해보니 나도 그렇게 겪고 아파하며 그 시절을 지나왔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 생각이 아니고 그랬던 기억을 확인했다.



 계약자의 정체따위는 점차 궁금하지 않게 된다. 계약자보다는 알음의, 자신의 내면을 살피느라 정신이 없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그 누구도 도와주지 않고, 무의식적으로라도 도움이 되어주지 못한다. 모든 것은 알음의 몫이었다. 자신의 몫을 받아들이고 이해하고 지켜내는 일은 얼마나 힘든 일인가, 그러면서도 얼마나 값진 일인가. 도움의 손길 하나 없는 매정한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기는 하나, 그만큼 솔직한 시선을 지닌 소설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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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 섬옥수
이나미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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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섬옥수[纖纖玉手] : 가녀리고 가녀린 옥같은 손이라는 말로, 가냘프고 고운 여자의 손



 우리가 평소 알고 있는 '섬섬옥수'라는 말의 뜻은 위와 같이 아주 가늘고 여린, 아름다운 여자의 손을 일컫는 말이다. 그러나 이 책 제목으로 쓰인 섬섬옥수는 표기법이 무언가 이상하다. 평소 알고있던 뜻이 아닌 모양이다.



 섬, 섬옥수[纖獄囚] 

 앞의 섬은 제주도의 부속 도서중 하나인 땅끝섬을 뜻한다. 뒤의 섬옥수는 가늘 섬, 옥(감옥) 옥, 가둘 수의 한자로 구성된 합성어이다. 탈옥수는 익히 들었지만 섬옥수라니, 생소하기 그지없다. '섬, 섬옥수'라... 섬이라는 섬세한 옥에 갇혔다는 뜻일까? 








 섬이라는 공간이 갖는 폐쇄성과 고립감은 무기력을 동반한다. 섬이라는 것이 사방이 바다에 막힌 지역을 뜻하기는 하나 그 면적에 따라서 같은 섬이라 할지라도 저마다 느낌이 다르지 않나 싶다. 당장에 제주도 본섬과 땅끝섬을 비교해봐도 분위기의 차이를 바로 느낄 수 있다. 면적이 좁은 곳일수록, 뭍과의 차이가 커진다. 고립이나 폐쇄의 정도도 훨씬 커지고, 그에 따라 사람들의 삶을 대하는 태도도 달라지기 마련이다. 



 섬을 다룬 작품들이 여럿 있긴 하지만 이 작품은 보다 더 섬세하다. 섬을 바라보는 시각이 일방향적이지 않다. 그저 섬사람들의 자기네 삶 이야기에 그치지 않는다는 말이다. 작가가 이 작품에서 그리고 있는 땅끝섬은 그저 작은 섬 하나만을 나타내지 않는다. 그곳에는 인류가 담겨있고 더 나아가 섬은 자연 생태를 끌어안는다.


 

 섬 원주민, 관광사업을 위해 들어온 반쪽자리 섬 생활민, 낙오된 인생의 밑바닥에서 찾아 들어온 타지인, 뭍 출신인 외지인, 평생을 양심과 도덕의 경계를 넘지않고 최소한의 생계만을 위해 일해 온 잠녀(해녀)들, 해상 천연 보호구역의 자연을 즐기러 온 관광객들에 이르기까지. 너무나 많은 사람들의 시선으로 땅끝섬을 바라보고 가슴으로 느껴 그 감정이 고스란히 독자인 내게 전달되는 듯하다. 실은 사람뿐만이 아니다. 이 섬에서 살아가는 개들의 생존방식과 서글픈 삶또한 무척이나 자세하게 그려져있다. (글 초반, 개 얘기는 끝없이 나오고 더불어 제주도 사투리는 쉽게 읽히지 않아 읽기에 어려움이 많았다.)  

 


 

 '늘 바닷가에서 오지 않는 어멍, 아방을 기다리며 가슴앓이했던 사춘기를 보내고 나서 막순은 

어렴풋하게 삶과 죽음이 꿈과 생시처럼 혹은 밤과 아침처럼 붙어 다니는 것이라 

두려울 것도 반가울 것도 없는 담담한 무엇처럼 여겨졌다.' (118쪽)




 '비로소 블루코너 해역을 빠져나왔는지 배가 평온하다. 

이제 그녀는 삶의 멀미를 멈추고 싶다. 진정으로. 

십여 미터의 수심이 평탄하게 지속되다가 느닷없이 푹 꺼지는 허방처럼, 

매복한 거대한 벼랑이 인생이라고 없겠는가. 

평생 거센 풍파와 격랑의 바다를 온몸으로 겪으며 죽을 때까지 떠나지 않겠다는 고래상군 할망들처럼 

그녀는 건강한 생명력을 갖고 다시 태어나고 싶다.' (251쪽)



 
 섬에 살아본 적이 없어 섬사람들을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굳이 섬사람과 뭍사람을 구분해가며 무시하거나 배척하는 행위도 실은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천혜의 자연 유산은 뒤로하고 관광객 유치에만 혈안이 된 모습도 안쓰럽고, 작은 동네에서 왜그렇게 싸우고 편가르며 감투 하나 쓰려고 안달인지 궁금하다.

 그러나 결국에는 그곳에서의 생활도 뭍에서의 생활과 크게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비록 규모는 현격히 작을지 모르나, 권력이 있고 위계 서열이 생기며 항상 강한자와 약한자 사이의 대립구도가 형성된다는 것, 섬사람들이라 해도 물욕이 생기는 것은 마찬가지라는 것, 생과 죽음이 있고 그 사이에 사랑이 존재하며, 배신역시 공존하는 공간이라는 것.

 다만 그 모든 관계의 사이가 너무도 좁아 감정이라는 것이 훨씬 격하게 발현된다. 미친듯 답답하고, 한없이 쓸쓸하고 고독하며, 해소할 길 없이 억울하고 화가 난다. 그러나 아주 작은 파동으로 조금씩 회복되고 정화되는 것 같기도 하다. 







 긴 결혼 생활에도 아이를 갖지 못해 당연한 수순처럼 남편과의 불화를 겪은 자애. 절망 가득한 삶에서 끝을 생각하고 섬에 들어가 희망 비슷한 것을 가지고 나온다. 어쩌면 쓸 데 없는 집착을 버리고, 체념과 단념을 들고 나온 것이 자애에게는 또다른 류의 희망이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이 작품의 말미에서 자애는 한층 밝아진 모습으로 이번에는 혼자가 아닌 남편과 함께 여행길에 오른다. 





 '어쩜 우린 둘 다 인생의 가장자리에서 참 고달픈 인생을 살아내는, 살아가고 있는 것 같아. 

한때는 당신이 내 편인 줄 믿었고 나도 당연히 당신 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어. 

아름다운 것을 보고도 아름다운 줄 모르니 당신과 나 모두 청맹과니야. 

모두 당신 탓으로 돌리진 않아. 두 청맹과니의 지혜롭지 못한 처신으로 돌려야겠지. 

골짜기에 눈이 켜켜이 쌓이고, 봄꽃이 아름다이 피고, 녹음이 짙어진들…… 

그것이 아름다운 줄 보지 못하는 청맹과니들은 내내 투덜거리겠지. 대체 삶이 왜 이러냐고…….' (44쪽)





 '본섬으로 향하는 관문인 모슬포 항이 손에 잡힐 듯 가깝다. 

그러나 땅끝섬 사람들 마음속에는 고립감이 뿌리 깊어 스스로를 유폐시키며 마음의 감옥에 갇혀 산다. 

섬이라는 단절되고 폐쇄된 공간에서 거친 바다와 싸우고 또 순응하면서 체득된 오랜 정서 탓인지도 모른다. ' (263쪽)


   



 그래, 어쩌면 섬이란, 삶이란 일종의 감옥일까. 누군가는 그 곳에서 끝없는 고립감에 어찌할 줄 모른채 병들어가고, 누군가는 그 곳에서 나쁜 짓만 배워 오고, 누군가는 포기와 단념, 순응을 배워오며, 누군가는 자연 정화되듯 그렇게 교화된다.



 인간의 탐욕과 이기심에 아름다운 자연 경관은 지워지고 잿빛의 두꺼운 벽에 둘러싸여가는 작은 땅끝섬. 인류는 과연 그 감옥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잃은 것 이상의 희망을 짊어지고 나올 수 있을까.



『섬,섬옥수』, 고립된 공간, 인류와 자연생태의 축소판.

 읽을 때는 참 어려웠는데, 읽고나니 마음에 드는 책. 책을 읽고 할 얘기를 쏟아내자면 밤이 새도록 그치지 않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할지 모를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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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이모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 33
사가와 미츠하루 지음, 장은선 옮김 / 자음과모음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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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작품을 읽으며 느낀 첫 감상은 요시모토 바나나의 소설과 비슷한 분위기가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뭐랄까, 감정선이 닮아있다. 이 작품이 청소년 문학도서라는 점에서 조금 더 쉽게 읽히기는 하지만 특유의 소소함과 담담함, 그러면서도 깊은 담백함이 비슷하달까?

 

 

 

 추상적인 부분만 닮은 것은 아니다. 요시모토 바나나의 소설 『안녕 시모키타자와』에서는 주인공(요시에)의 아버지가 불륜을 저지르던 상대와 함께 죽음을 맞이하게 되고, 죽음이라는 사건을 통해서 요시에와 어머니는 세상에서 가장 믿었던 사람의 배신을 급작스레 맞이한다. 그 어떤 준비 과정도 거치지 못한 채. 배신의 정확한 이유도 알지 못하고, 변명도 제대로 듣지 못한 상태로 말이다.

 

 이 책, 『우리 이모』 역시 그렇다. 요스케는 은행에 다니는 아버지와 집안에서 내조 잘하는 순응적인 어머니밑에서 꽤나 유복하게, 남 부러울 것 없이 자란다. 그러나 순탄하기만 했던 삶이 아버지의 불륜으로 인해 하루아침에 모래성처럼 허물어져 버린다. 바람을 피우고, 그 상대방 여자를 위해 집을 사주느라 은행에서 돈을 횡령한 아버지. 아버지의 불륜과 횡령이 밝혀져 기소를 당한다는 사건을 통해서 요스케와 어머니는 믿었던 사람의 믿을 수 없는 배신을, 더불어 세상의 여러 수모와 경제적 고난을 떠안게 된다. 아빠의 불륜이라. 깊게 상상해 본 적은 없지만 나의 고통과 함께 엄마의 깨질 듯한 마음까지 감당해야 한다니 여간 슬프고 짜증나고 힘든일이 아니지 않을까 싶다.

 

 

 

 

 

 이 책에서 제일 흥미로운 점은 요스케의 심경의 변화와 정신적 성장을 살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요스케가 경제적 사정으로 인하여 엄마와 떨어져 난생 처음보는 이모와 함께 살면서 시작된다. 화목한 가정환경에서 명문중학교에 진입한 요스케의 머릿속에는 온통 엘리트 코스를 밟아나가는 것뿐이었다. 요스케는 공부도 잘하고, 여학생들에게 고백받을 정도로 인기도 있는 뭐 하나 빠질 데 없는 아이였다. 그만큼 남보다는 '나' 위주의 삶이었고, 나이도 어리니 때로는 거만하고 건방져 보일 수도 있는 타입의 아이였다.(물론 신중해서 겉으로 티내는 재수없는 타입은 아니고, 속으로 내뱉는 말을 통해 간간히 느낄 정도였지만.)

 

 그러나 엄마와 외모만 빼닮고 성격은 전혀 딴판인 이모를 만나게 되면서 요스케는 성장해 간다. 물론 이모만이 그 이유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주위 환경이 요스케를 변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내몰았지만, 부모님이라는 울타리에서 떨어져나와 케이코이모의 삶의 울타리에 편입된 일이 요스케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성장할 수 있게 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이모가 맡은 아동보호시설 '호보사' 에서 '타쿠야'를 비롯한 각자의 사정을 떠안은 친구들과의 만남도 덤으로,

 

 

 '이모는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개척하려고 노력했다.

반면 엄마의 인생 최고의 주제는 '얼마나 안전하고 부유하게 살 것인가'였다.

결국 자매는 양쪽 다 남편에게 배신당했고, 사십대가 된 지금도 죽어라 일을 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였다.

그러나 자신이 불러온 불행에 맞서는 것과, 고난을 피하려 발버둥치다가 결국 불행해진 것과는 하늘과 땅만큼 다르다.' (95쪽)

 

 이모의 삶에 경의를 표하다 못해 건방지게 엄마의 삶을 위와 같이 말하기는 하지만, 뭐 바로 반성하니 다행이다.

 

 

 

 요시코의 엄마 레이코와 이모 케이코의 삶은 비슷한 듯 달랐다. 그래서 난 이 작품에서 '우리 이모'라는 것이 결국 케이코 한 사람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 레이코도 누군가에게 결국 이모였고, 앞으로 케이코 이모가 요시코에게 그랬듯이 누군가에게 적지않은 영향일 미칠 터였다. 결국 인생에서 끊임없는 방황기에 접어드는 한 사람의 삶에 있어서 영향을 미치는 것은 길 위에서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일 것이다. 한 사람이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은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 일이다. 사람에게 받은 상처를 새롭게 만난 소중한 사람으로 달래는 것인데, 그마저도 타이밍이 잘 맞아주지 않으면 곤란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이모』는 일본에서 꽤나 호응이 좋아 속편에 이어 얼마 전 3편까지 출간되었다고 한다. 시리즈라는 사실을 알게되니 괜히 더 모르는 다음 내용도 궁금해진다. 이 책속에서 주옥같은 문장들을 건져내진 못했지만 사람들의 조금 쓰린 삶을 들여다 본다는 것, 누군가가 아주 미묘한 양씩 성장해 가는 걸 지켜본다는 점이 나름 매력있었다.  

  

 

 

 *자음과모음 서포터즈 북프렌즈4기 강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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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쓴 글이 부끄러워 오늘도 쓴다 - 거리의 인문학자 최준영 에세이
최준영 지음 / 이지북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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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리의 인문학자, 거지 교수로 불리는 최준영 인문학 대중 강연가가 새로 낸 책이다. 최준영은 매일 페이스북에 420자 칼럼을 연재하여 많은 팬을 보유하고 있는데, 이 책 『어제 쓴 글이 부끄러워 오늘도 쓴다』는 페이스북에 연재한 글 중 몇 가지를 뽑아 엮어낸 것이다.

 

 

 

 1. 최준영 작가가 거리의 인문학자, 거지 교수로 불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최준영은 인문학 강좌 1순위 초청 강연가지만, 학벌이나 졸업장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다니던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야학에서 공부를 배워 검정고시에 합격했다. 이후 대학교에 들어가지만 그마저도 도중에 그만 두었다. 그래서 강연 때면 자신이 '사'자 와는 거리가 멀다 말한다. 박사, 석사, 심지어는 학사 자격까지 없다 얘기하지만 학벌이 낮은 그가 학벌 사회에서 인문학 강연가로 활동한다고 해서 그를 비난할 자격을 지닌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될까. 실제로 오로지 학벌 때문에, 최준영을 비난하거나 그에게 야유를 보내는 이들도 꽤 많다고 들었다. 묻고 싶다. 당신네들의 삶은 과연 이 자를 비난할 자격이 있는가. 남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우선 나에게는 그럴 자격이 일절 없다.

 

   최준영은 가장 낮은 곳에서 인문학을 몸으로 실천한다. 야학에서, 교도소에서, 미혼모 시설에서, 노숙인 분들이 계신 곳에서, 최준영은 자신을 필요로 하면 그 곳이 어디든 마다하지 않고 달려간다. 최준영은 입만 산 강연가도 아니고, 글발만 내세우며 작가인 척 하는 사람이 아닌 직접 실천하는 인문학자였기에 나는 그를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 씨를 행복하게 해준 건 사람의 온기였습니다. 흔히 인문학을 사람을 알아가기 위한 학문이라고 말합니다. 삶의 의미를 알아가는 것이라고도 하고, 더 구체적으로는 삶의 궁극적인 의미를 성찰하는 학문이라고도 말하지요. 그러나 김 씨를 만난 뒤 인문학에 대한 제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거창하게 설명할 필요가 없어요. 김 씨처럼 사람으로 인해 사람이 행복할 수 있음을 확인하는 것, 사랑을 통해 사람의 온기를 느낄 수 있는 것, 그것 이상의 인문학은 없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지요.

 김 씨 덕분에 노숙인에 대한 정의도 달리하게 되었습니다. 노숙인이란 그저 집이 없어 거리의 삶을 사는 사람, 돈이나 경제력이 없는 사람, 빚에 쫓기는 사람, 가족과 헤어진 사람, 직장이 없는 사람쯤으로 생각해왔지만, 김 씨의 사연을 들은 후 노숙인은 돈이나 잠자리, 직장보다 더 소중하고 중요한 것, 즉 사람이 없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34쪽)

 

 

 노숙인을 대하는 그의 마음과 태도는 정말이지 각별하다. 받는 것 없이 매번 퍼주기만 하면서도, 자신은 노숙인에게 항상 인문학 성찰의 기회를 제공받아 고맙다고 말한다. 책을 읽으며, 강연을 들으며 최준영 그는 정말이지 착하다 못해 바보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나도 모르게 그 유쾌하고 호탕하면서도 따뜻한 마음씨에 빠진 모양이었다. 내가 절대 하지 못할 일을 하는 그를 어찌 바보같다 할 수 있을까. 나는 최준영의 책을 지하철에서 내내 읽었다. 주변에 사람이 그렇게 많은 곳인데도 불구하고, 울컥 울컥한 순간이 어찌나 많던지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 눈에 힘을 주고는 했다.  

 

 

 

 

(작가님 강연회에도 다녀왔다. 목소리가 어찌나 좋으신지, 계속 듣고 싶은 목소리였다. 팟캐스트 '저렴한 강의'도 시작하셨다고.)

 

 

 

 2. '어제 쓴 글이 부끄러워 오늘도 쓴다' ? 

 

 

 책의 제목이 참 뜨끔하다. 작가는 '어제 쓴 글이 부끄러워 오늘도 쓴다'라고 말한다. 나는 살면서 부끄러운 일이 있었으면 어떻게든 회피하려 하고 기억에서 지워내려 하는데, 최준영 작가는 바로 다음날 그 앞에 맞선다. 참 용감하다는 생각이 든다.

 

 실은 최준영 작가에게 미안한 말이지만, 그가 글을 잘 쓴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페이스북에 올리는 칼럼이니 더욱 날것의 그것처럼 느껴지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그 점을 감안할지라도 썩 매끄러운 글이다 혹은 참신한 글이다 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문장의 호응 관계가 맞지 않는 경우도 여럿 있고... 그렇지만 작가의 글을 좋게 읽을 수 있었던 이유는 역시 '진심' 때문이다. 가식없는 글, 진심이 가득 담긴 글은 그것만으로도 사람을 감동시킨다. 게다가 알지 않는가, 그의 활동을. 몸을 낮추고 해온 일들을 모두 부정하고 거짓이라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작가의 글이 진심과 진실로 가득차 있다는 점 역시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작가도 말한다. '진심이 아름다움을 만든다'고(63쪽).

 

 

 "어제 쓴 글이 부끄러워 오늘도 쓴다. 올릴 땐 매양 잘 썼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그 다음날 보면 쥐구멍을 찾고 싶은 거다. 삭제해 버릴 수도 없는 게 이미 '좋아요'나 '댓글'을 달아준 분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 부끄러운 글을 밑으로 내리는 방법을 고민했고, 그게 바로 매일같이 글을 쓰는 이유가 된 셈이다."  (프롤로그 중)

 

 

 

 지하철에서 작가님의 책을 읽고 감동받거나 울컥하거나 그러고 있었으면서도, 생계의 어려움으로 손을 내미는 노숙인의 손은 거부했다.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러면서 내 머릿속은 복잡했다. 아, 나는 여전히 변하지 않고 있구나. 백날 책을 읽고 인문학 강의를 들으면 뭐하니 너. 난 아직 잘 모르겠고, 아직 많이 부족하다. 그래서 부끄러움이라도 제대로 밝혀 보려고, 그러면 언젠가 나도 무언가 달라지지 않을까 해서 부끄러움을 드러낸다. 그리고 나도 매일 글을 써볼까, 생각한다. 글쓰기를 좋아하면서도 매일 쓰는 것이 여간 쉬운 일이 아님을 안다. 매일 부끄러움을 상기시키고, 매일 무언가 끄적이다 보면 나도 '인문학 실천'까지는 못하더라도 '인문학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사람을 보듬고 쓰다듬어 포용할 줄 아는 사람이 제일 멋진 사람임을 깨달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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