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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4번지 파란 무덤
조선희 지음 / 네오픽션 / 2013년 8월
평점 :

[내 멋대로] 의미를 담은 문장을 통해 들여다 본 판타지, 『404번지 파란 무덤』
어떤 일 때문에 힘들어 울고 있을 때, 배우처럼 끝내주게 잘 생긴 남자가 나타난다.
진심으로 위로를 해 주고, 내 고민거리를 남김없이 가져간다.
만약 이런 상황이라면, 여자들 100이면 100 안 넘어갈 수 있을까?
환상과 부질없는 희망만 남겨놓고 가는 허깨비라...
1.
"내가 뭔지는 내 이름으로 알 수 있지. 공윤후. 어디에도 없는 것인 '공', 있지만 없는 날인 '윤', 얼마나 이어질지 알 수 없는 시간인 '후'. 나랑 같이 갈래? …단, 모든 위로는 잠시 다녀가지만 그걸 평생 유효하게 쓰는 건 어디까지나 김씨에게 달렸다는 것을 명심해." (25쪽)
그러니까 주인공의 이름대로, 작품을 다 읽었는데도 끝까지 주인공의 정체를 잘 모르겠다.
'모든 위로는 잠시 다녀간다'라. 위로의 성질에 대해 표현한 문장 중에서 이만한게 또 있을까 싶다. 비록 잠시뿐이었지만 그동안 내가 받아온 위로들이 허무하고 허탈하기만 한, 아무것도 아닌 것이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위로는 잠깐 머물다 가지만 대신에 매번 다른 것을 남겨놓고 가는 게 아닐까.
2.
'어린 시절 병구도 한때 마술에 열광했다. 그리고 어른이 된 지금은 마술에서 점 하나를 뺀 미술에 혹해 있었다. 마술과 미술은 점 하나 차이였다. 노랫말의 님과 남처럼. 남이었던 그녀가 님으로 둔갑했으니 말이다.' (54쪽)
남을 님으로바꾸는 것은 정말 점 하나 차이에 불과할까. 무수히 많은 점을 찍고 그 점들을 이어 선으로 만들어도 모자랄 판에.
3.
'이제 나는 안다. 삶은 무의식적 안정을 제공하던 자궁에서 소란스러운 바깥으로, 죽음은 간신히 적응한 일상에서 다시금 가물거리는 기억을 안고 떠도는 그림자의 세계로 우리를 돌려보내는 것임을. 그 경계를 넘나드는 것은 단지 허깨비처럼 바스대는 청각뿐임을 나는 머잖아 알게 될 것이다.' (217쪽)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것은 오직 청각뿐이라고? 하긴 조용하고 안락한 자궁에서 막 바깥으로 나왔을 때는 세상이 그렇게 시끄럽고 정신사나울 수가 없더니, 살다보니 시끄러운 소리가 점점 작아져간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맞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이제 일상 속 시끄러움에 적응하여 무의식적 안정을 누리며 살아볼만 해졌는데 다시 소리를 죽이고 조용하던 그때로 돌아가란다.
4.
"그 구절이 오래된 사물이나 오래된 이름, 특히 우리의 이름으로 행해지면 복잡해지지. 오래된 물건들이 왜 가끔 문제를 일으키는지 알아? 갈 곳 없는 마음이 남아 있기 때문이야. 오래된 사물과 오래된 이름에 자신의 마음을 던져놓고 스스로 홀리는 거지. 우리와 우리의 이름이 거기에 마술을 걸 수 있도록 말이야." (315쪽)
갈 곳 없는 마음은 언제나 슬프다. 허공을 떠도는 마음만큼 외로운 게 또 있을까? 결코 가볍지 않지만 쉽게 어딘가에 내려앉지 못한다. 가닿아 앉고 싶은 마음은 크지만 앉을 자리를 찾지 못하는 것 혹은 이미 주인이 있는 자리를 바라는 것 때문이다.
오래된 물건들이 문제를 일으키는 건 일종의 반항심인 모양이다. 갈 곳 없는 슬픈 마음에 스스로 홀려, 투정이라도 부리면 찾아질까 싶어서.
5.
'우리와 사람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시간을 헤아리며 살지만 결코 다른 시간을 사는 게 아니라 같은 시간을 함께 산다. 우리라고 시간을 뒤집어 과거로 되돌아가거나 미래로 앞서 나갈 수 없다. 우리도 사람처럼 오직 주어진 현재의 시간을 견뎌내야 한다. 다만 사람은 가고 우리는 남으니 그것이 늘 아쉬울 뿐이다. '(377쪽)
도깨비라고 하니 어렸을 때에는 자주 들었던 말인데, 크면서 들을 일이 없어진 것 같다. 그래서 이렇게 생소하게 느껴지는 걸지도. 같은 시간을 함께 살지만 훨씬 긴 세월을 살아야 하는 것이 도깨비의 숙명이기에, 사람의 마음이 도깨비에 투영되었을 때 감정은 더욱 극도화되는 것 같다.
내가 살아가는 것은 오직 현재뿐이다. 과거나 미래는 어떻게 보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과거는 이미 지나버렸기에 끝이 났고, 미래는 올지 안올지,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올지 그 어떤 것도 예측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냥 지금 내 앞에, 옆에, 뒤에, 위에, 아래에 주어진 현재를 잘 견뎌내고 살아가면 그것이 미래를 떠올리게 하고, 또는 내가 아는 그 '과거'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판타지는 자주 읽지 않는다. '현실감이 떨어져서'라고나 할까. 그래서 최대한 현실하고의 연결고리를 찾으며 읽기는 한다. 물론 반지의 제왕이나 해리포터같은 소설이면 또 모른다. 그 작품들은 아예 또다른 세계 자체를 구축해놓고 독자로 하여금 그 세계를 현실로 느끼게끔 하니까.
읽으면서 내게도 이 작품 속 주인공인 공윤후가 한번 나타나주었으면 싶었다. 아무튼 공윤후는 내 앞에 나타나지 않으니까, 그런 꿈같은 여러 일들은 일어나지 않겠지. 나타나지 않는 판타지에 기대지 말고 그냥 현재나 잘 견뎌야 겠다(견뎌낸다는 어감이 마음에 안든다만). 이 작품은 한 단계 더 나아간 생각을 하게 만들지 못한다는 점에서 아쉬웠다. 읽고나서, 그냥 그뿐이었다. 책 읽은지 일주일도 넘어서 기꺼이 리뷰를 끝마치고, 머릿속에는 공윤후대신 며칠 전 종영한 드라마 <주군의 태양>에서 주군 소지섭만 떠오른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