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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멈추는 찻집 - 휴고와 조각난 영혼들
TJ 클룬 지음, 이은선 옮김 / 든 / 2023년 11월
평점 :
베스트셀러 《벼랑 위의 집》으로 많은 사랑을 받은 TJ 클룬은 신작 소설 《시간이 멈추는 찻집》에서 죽음과 상실에 대해 판타지 요소로 유머러스하게 풀어낸 어른 동화책 같다.
잘나가는 로펌 대표 월리스 프라이스가 법무사를 인정사정없이 해고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얼마 후, 사무실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한 월리스는 애도하러 와서 그의 죽음을 슬퍼하기는커녕 '천하의 둘도 없는 진상'이라 비아냥 거리는 동료들, 진정으로 슬퍼하는 이 하나 없는 초라한 장례식을 마주하게 된다. 씁쓸하던 차에 유령이 된 자신을 데리러 온 사신 메이를 쫓아 '카론의 나루터' 찻집에 이르는데...
시간이 멈추는 찻집에는 휴고라는 사공 흑인 청년, 그의 할아버지 넬슨, 그의 강아지 아폴론, 그리고 사신 메이가 있다. 처음에는 월리스도 다른 망자들처럼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자신의 '죽음' 상심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과정을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상실 수업』 을 인용해 소설에 녹여냈다.
10여 년 읽었던 『상실 수업』 은 사랑하는 이를 잃은 상실의 고통을 견디는 남겨진 이들의 치유에 초점이었는데,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으로 각색한 TJ클룬이 왜 천재 작가인지 납득이 가는 대목이기도 했다.
처음으로 차를 같이 마신 사람은
모르는 사람이다.
두 번 차를 같이 마신 사람은
귀한 손님이 된다.
세 번 차를 같이 마신 사람은
가족이 된다.
시간이 멈추는 찻집 中 p.70
망자가 사후 세계로 넘어가는 중간 정거장 '시간이 멈추는 찻집'. 제목과 간략한 에피소드만 보았을 때, 드라마 「도깨비」가 떠올랐다. 아마도 저승으로 떠나기 전 이동욱이 따라주는 차 한 잔의 시간이 기억에 남아있어서인듯. 또한 월리스가 자신의 초라한 장례식장을 바라보는 장면에서는 『크리스마스 캐럴」이 연상되기도 했지만, 시간이 멈추는 찻집에서는 주인공의 죽음은 꿈이 아닌 현실로 이어진다. 친구 하나 없이 일만 해 온 진상 월러스가 죽음을 맞이한 후, 시간이 멈춘 찻집에서 새로운 이들을 만나 변화되는 과정은 뭉클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우리는 살아 있다는 게
삶의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알려주기 위해 존재해요.
삶에는 여러 부분이 있고,
죽은 뒤에도 계속 이어져요.
시간이 멈추는 찻집 中 p.276
특히 시간이 멈추는 찻집의 사신과 사공은 카르마로 인한 억겁의 세월의 벌을 받는 이들이 아니라, 스스로 타인을 위해 마음을 쓰는 사람이 되기로 선택했다는 점이 기존의 판타지물과 차이가 있다. 어쩌면 동서양의 차이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소설은 이승이든 저승이든 중요한 건 '사람'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며 이타심과 희생 그리고 연대의 희망에 대한 스토리 라인이 매끄럽게 이어진다. 게다가 퀴어 소설이라는 점도 파격적이다.
혼자 못 서 있겠다 싶은 날에는 옆에서 도와줄 거야.
시간이 멈추는 찻집 中 p.552
우리는 유한한 삶을 살아가면서도 '죽음'에 대해 막연하게 생각한다. '죽음'은 최종 마침표가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위한 마침표라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는 《시간이 멈추는 찻집》. '웰 다잉'의 중요성이 대두되는 요즈음, 판타지 소설로 조금 가볍게 접해보는 것도 좋은 것 같다.
살아있을 때 더 많이 베풀고, 사랑하고, 살아있음을 만끽하며 후회 없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 나는 지금 무엇을 해야 할지, 티타임을 가지며 책장을 넘겨보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