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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 함께 정처 없음
노재희 지음 / 작가정신 / 2023년 11월
평점 :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너의 고독 속으로 달아나라』의 노재희 작가의 첫 번째 산문집 《나무와 함께 정처 없음》으로 저자를 처음 만났다.
그런데 그녀의 산문집을 읽은 지금, 나는 저자와 한결 가까워진 느낌이다. 어린 시절부터 주인공의 삶보다는 관찰자의 입장에, 엄마와 오빠를 하염없이 기다리던 아이는 외로움을 덜어내기 위해 읽고 쓰는 삶을 살기 시작했더란다. 덜컥 신춘문예에 당선되고, 광고 회사를 다니지 않은 이유, 여자들의 흡연에 대한 그녀의 시각, 게으르다는 형용사에 대한 담론, 얀 마텔의 『파이 이야기』를 비롯한 토마스 만 등 다양한 책 이야기들이 그녀의 세계관을 조금은 상상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아픈 시어머니를 무작정 모시고 와서 점점 기력이 쇠하여가는 시어머니를 보며 자책하기도 한다. 불과 두 달의 시간이었지만, 끝을 알 수 없는 고통이야말로 견딜 방법이 없는 종류의 고통이었다고 고백하는 저자. 이처럼 인생은 우리의 뜻대로, 계획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담담히 전한다.
기억을 잃으면 과거만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미래도 잃어버리게 된다. 그동안 쌓아온 경험과 정서적 기억이 현재의 판단에 영향을 주므로 기억을 잃어버린 사람의 미래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과거에 경험하며 배운 많은 것들을 잊어버린 나는 예전과 다른 판단을 할 수도 있었겠지만 과거의 경험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서도 잘못된 판단을 한 적도 많았으니까. 그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나무와 함께 정처 없음 中 p.72
특히 저자는 서른 초반의 나이로 갑작스레 입원하고 남편 여름 씨를 제외한 그 누구도 기억하지 못하는 상황을 겪기까지 한다. 나무 키우기를 좋아하는 남편과 정처 없이 시골로 내려가 블루베리 나무를 키우는 소소한 일상을 써낸 표제작 『나무와 함께 정처 없음』. 나무가 땅에 뿌리를 내려 살아가는 것처럼 우리가 뿌리내리고 살아가는 이 세계에 대해서. 누군가의 보호 없이 우리는 과연 살아갈 수 있는 것일까? 생각에 잠기기도 한다.
실수나 실패만큼 두려웠던 것은 내가 알지 못하는 세계의 불확실성이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내게 익숙한 세계에서도 불확실성은 늘 있었다. 내가 아직 모르는 것이 있고 내가 아는 것에도 한계가 있고 나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일들을 스스로 전부 통제할 수도 없으므로, 아무리 미리 알아보고 준비하고 계획해도 언제든 상상하지 못했던 빈틈과 허술한 구멍으로 무서운 일들이 나의 세계로 비집고 들어올 수 있었다. 불확실성이야말로 내가 가장 견디기 싫은 것이었다.
나무와 함께 정처 없음 中 p.221
실수나 실패를 통하지 않고 삶을 꾸려나가고 싶었던 저자가 잠깐이었지만 죽음이라는 아찔한 시간을 보내고 인생을 바라보는 시각이 바뀐 듯 보인다. 지금껏 한 번도 해본 적 없던 에세이에 처음 도전한 결과물 《나무와 함께 정처 없음》을 우리가 읽고 있다는 것만 보아도 말이다. 어쩌면 한 번도 해본 적 없던 일에 도전하는 것이 우리의 삶의 방식이 아닐까. 성장통을 겪으며 서서히 나의 세계의 크기를 키워가는.
그녀는 여전히 읽고 쓴다. 그리고 말한다. '누군가 쓴 것을 내가 읽는다. 내가 쓴 것을 당신이 읽는다. 심심해서 외로워서 궁금해서 슬퍼서 읽을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만난다.' 읽고 쓰는 과정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누군가를 만나고 있음을.
낙엽이 떨어지는 깊어가는 가을밤 읽기 좋은 산문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