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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룸 ㅣ 소설, 잇다 3
이선희.천희란 지음 / 작가정신 / 2023년 9월
평점 :
이선희 작가와 천희란 작가를 이어주는 작가 정신의 시리즈 소설 잇다의 세 번째 도서 《백룸》에는 『계산서』, 『여인 명령』, 『백룸』 의 단편 소설이 수록되어 있다.
《백룸》의 처음을 여는 이선희의 『계산서』는 다소 충격적인 결론이다. 절름발이 여성이 밤에 새 넥타이를 하고 나가는 남편을 보며 의심을 품고 '남편도 자신처럼 다리 하나가 병신이 되기를 바라다가 수지가 맞지 않는다며 남편의 목숨을 받아야겠다'라고 다짐한다. 계산서가 청산될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짧지만 서늘한 이야기로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라는 옛말이 떠오르는 작품이었다.
나는 다리가 하나인데 만일 내 남편은 다리가 둘이 되면 필경 우리 사이에 균형은 허물어지고 말 것이다. 균형을 잃은 것은 언제든지 완전한 것이 아니다.
《백룸》 중 이선희 『계산서』 p.20
나는 내 남편도 나와 같이 다리 하나가 병신 되기를 바랐다. 남편의 다리 하나 -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다리 하나쯤으로는 엄청나게 부족하다. 내가 받아야 할 것은 그의 목숨 그것뿐이라고 생각한다. 생명을 받아야 겨우 수지가 맞을 것 같다. 이것은 내 계산서뿐만 아니라 모든 아내 된 자의 계산서일 것이다.
《백룸》 중 이선희 『계산서』 p.39
두 번째 작품 『여인 명령』은 아름다운 여인의 기구한 운명을 그려내며 《백룸》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한다. 그러나 표제작이 아닌지라 『백룸』 에 대한 호기심이 더 커졌다.
《백룸》의 표제작 천희란 작가의 『백룸』 은 더 파격적이다. 여성을 사랑하는 게임 스트리트 레즈비언 여성이 등장한다. 반복되는 백룸을 마주하는 게임 속 레즈비언 주인공이 마치 자기와 같다고 느낀다. 열세 살 차이 나는 변호사 연인에게 이별을 통보하는데...
백룸은 일종의 미궁이다. 현실의 이면이라고도 할 수 있고, 숨겨진 장소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공포 영화에 흔히 등장하는 기괴하고 뒤틀린 현실의 외형을 갖지는 않는다. 백룸에서는 그저 평범하고 일상적인 공간이 무한히 펼쳐진다.
p.429
그러나 새로운 백룸에서 헤매는 경험이 누적되며 이전과는 다른 기묘한 감각을 느꼈다. 완전히 폐쇄적이면서도 무한대로 뻗어나가는 아이러니한 공간을 시각적으로 반복해 경험하는 일은 원인 모를 고립감과 무력감을 불러일으켰다.
p.432
시간은 흐를 것이다. 문제는 지나갈 것이다. 더 큰 난관에 봉착하더라도 언젠가는, 어떤 식으로든 해결될 것이 분명하다. 내가 상처받더라도,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더라도. 맞서거나 도망치거나. 자발적으로든 강제적으로든. 출구는 있다. 다만 그 출구로 나선 결과가 탈출이 아닌 새로운 미궁으로 이어질 뿐이다. 그 어떤 누구도, 자신이 누구였는지 기억하는 채로는 미궁을 견딜 수 없게 될 뿐이다.
p.456
'백룸'은 무한히 반복되는 이 공간에 갇힌다는 내용의 도시괴담으로, 출구를 찾기 힘들다는 특징이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부분은, 백룸은 출구가 없는 것 같이 느껴지지만, 출구를 찾기 힘들 뿐. 우리가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가느냐에 따라 EXIT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시대가 다른 이선희 작가와 천희란 작가의 세 작품은 가부장적인 제도에 갇혀 남편의 외도를 의심하며 남편이 죽기를 바라며 기다리는 여인을 시작으로, 감옥에 간 정인을 두고 결혼했다가 남편에게 이미 아내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이혼하고 옛 연인을 다시 만나는 숙채, 마지막으로 레즈비언 연인에게 이별 통보 후 또 다른 위기에 봉착하자 결국 연인에게 연락한다. 여성들이 점점 가부장제에서 벗어나 남성에게 의지하지 않고 자신들의 삶을 찾아가는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삶의 방식이 다를지라도 '도망쳐도 결국 마주한 것은 백룸이라는 절규'처럼 자신의 굴레를 벗어난다는 게 결코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설령 새로운 미궁으로 빠질지언정 출구는 있다며 어떤 식으로든 해결될 것이라고 다독인다.
미궁에 빠져있다고 생각된다면 《백룸》을 한번 펼쳐봐도 좋을 것 같다.